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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헌터사-133화 (133/200)

# 133

삼각 회의 -1-

되돌아온 불사계.

본성은 썩어 빠졌다는 걸 알지만 흰금 궁전에 있을 때보다는 마음이 편하다. 김현은 노곤함에 젖어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자, 한 잔씩 하라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으나 블러드 공작이 놓아주질 않는다. 자신과 일행만 참석한 작은 연회를 열고는 포도주를 권했다.

그래, 포도주.

피가 아니다. 잘 익은 포도주다. 가볍게 향을 음미하자 달짝지근한 부드러움이 코를 간지럽혔다.

맞은편에 앉은 일행은 묻고 싶은 게 많은 표정. 갑자기 경비병 악마들에게 잡혀갔던 것도 그랬고 블러드 공작이 난입하여 자기들을 구한 것도 의문스러웠나 보다.

블러드 공작이 손을 비빈다.

"시작할까?"

"그 전에 먼저 할 일이 있어."

"뭔데?"

"미네엘을 불러줘."

블러드 공작이 눈을 가늘게 뜬다. 잠시 저울질을 하나 싶더니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다.

"좋아, 그러지. 그래도 내 권리를 무시하진 말라고."

예전에는 기휘라더니 지금은 권리란다.

그만큼 김현의 가치를 높이 평가한다는 뜻이겠지.

살짝 머리를 끄덕이자 블러드 공작이 소파에다가 깊이 몸을 묻는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면서 화사한 얼굴의 여자 흡혈귀가 들어왔다.

"공작 전하, 부르셨습니까?"

"어, 너 여기 와서 꿇어."

"예?"

당혹한 음성을 내는 미네엘.

문득 미네엘의 눈이 블러드 공작 옆에 눕듯 앉아 있는 김현을 향한다.

벌어지는 두 눈.

놀랍겠지.

전 차원계를 통틀어 단 하나 존재하는 유령과 흡혈귀의 혼종. 그런 존재를 릴리스에게 던졌는데 이렇게 멀쩡히 돌아왔으니.

김현은 시린 눈으로 미네엘을 보았다. 무감정한 그 눈이 백태 낀 것처럼 번들거려서 자신도 모르게 소름이 끼쳤다.

미네엘이 멀뚱거리며 서 있기만 하자 블러드 공작이 낮은 목소리로 묻는다.

"안 들려?"

"죄, 죄송합니다! 불민한 소녀가 실수를 했습니다! 용서하여 주십시오!"

이제야 사태를 파악했나 보다.

김현은 블러드 공작에게 있어 친히 작은 집을 내릴 정도로 관심을 주는 대상. 그런 자를 릴리스에게 팔아넘겼다? 몰랐다면 모를까 단단히 경을 칠 일이다.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서운한 마음이 든다. 수천 년의 세월 동안 자신이 블러드 공작을 위해 헌신한 것이 있는데 어디서 굴러먹었는지도 모를 개뼈다귀 같은 변방 차원 미개인 때문에 이런 수모를 당해야 하나?

미네엘의 내심을 꿰뚫어 본 블러드 공작이 코웃음을 쳤다. 그래도 짐작만으로 일을 처리할 수는 없는 법. 김현을 돌아보며 묻는다.

"미네엘은 왜 불러달라고 한 거지?"

"저 년이 내 정보를 릴리스에게 팔아넘겼거든. 그래서 소소한 복수를 하려고."

"흠, 그래? 하긴 릴리스가 갑자기 널 잡아간 게 이상하긴 했지. 증거는?"

"내 기억. 그리고 저 년의 기억."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어떤 정신 계열 성혼으로 조작하든, 흡혈귀를 묶는 피의 지배를 속이기는 극히 힘드니까.

미네엘이 머리를 숙인 채 아랫입술을 짓씹는다. 블러드 공작이 툭, 하고 질문을 던졌다.

"미네엘, 할 말 있냐?"

"있습니다!"

"해 봐."

"저 자는 하찮은 변방 차원 미개인에 불과합니다! 지금 공작 전하께서 저 자에게 내리는 은총은 너무 과합니다! 부디 공작 전하를 위해 헌신한 저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그럴 가치가 있어서 그러는 건데? 그리고 네년, 설마 내가 고작 성혈 따위 하급 잡것이 날 배신하는 걸 그냥 두고만 보고 있을 줄 알았어?"

"배, 배신이 아닙니다! 공작 전하! 전 공작 전하의 위엄을 명천에 높이 휘날리기 위해서……"

"쯧. 속이 다 보인다. 거짓말은 그만 하지?"

블러드 공작이 실망했다는 듯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인간일 때의 넌 안 그랬는데…… 시간은 많은 것을 변화시키는구나. 영원을 얻지 못한 혈족은 모두가 그렇지. 나도 그렇고."

"저, 전하……"

"이봐, 복수를 하고 싶다고? 하고 싶으면 해. 그럼 이렇게 하지."

무슨 수를 쓰려고?

블러드 공작을 쳐다보자 히죽,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짓는다.

이어서 손가락을 튕기는 블러드 공작.

피 한 방울이 튀어나왔다. 핏방울이 공간을 격하여 김현에게 날아온다. 심장에 파고들더니 어떤 힘을 김현에게 부여했다.

"공작 전하!"

가슴을 쥐어뜯으며 애달픈 외침을 토하는 미네엘.

김현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강렬한 힘이 심장 어림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공허의 심장이 그걸 지우려다가 해가 되지 않음을 깨닫고 한쪽 공간을 허락한다. 그로 인해 눈에 보이지 않는 핏빛의 실이 김현과 미네엘 사이에 이어졌다.

피의 지배.

블러드 공작은 미네엘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김현에게 완전히 이전해 버린 것이다.

"공작 전하, 어찌, 어찌 이러실 수가……"

미네엘이 비통에 차 블러드 공작을 올려다본다.

일그러진 얼굴, 눈물 대신 핏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블러드 공작은 코웃음만 쳤다.

"릴리스와 붙어먹었을 때부터 각오했어야지. 추방으로 끝낸 걸 감사히 여겨라. 원래는 피 주머니 처형을 받았어야 할 일이야. 너도 알잖아?"

"하오나 공작 전하!"

"자, 저 년은 이제부터 네 노예야. 네가 하라면 기꺼이 목덜미를 내놓을 거고 죽으라면 죽겠지. 안 그래도 부릴 부하가 없어 고민이라며? 유용하게 쓰도록 해."

블러드 공작이 빙글빙글 웃었다. 미네엘이 그걸 보고는 체념하여 제 자리에 엎어지고 만다.

김현은 그런 미네엘을 냉엄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숨죽이며 대화를 듣던 피터가 자기 뒤통수를 긁적였다.

"어…… 잘 된 거 맞죠? 저 흡혈귀한테 여기 맡기면 되겠네요."

"음, 그렇긴 하지요."

불사계 지부장으로 고용하면 되겠다는 순진한 생각을 한 모양.

일행 대부분이 그랬다. 김애경 정도만 얼음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김현이 어떻게 대처할지 짐작했다는 듯이.

가만히 왼손을 늘어뜨린다.

"블러드 공작."

"응?"

"궁금하지 않아? 나에 대해서."

여태 심드렁하던 블러드 공작의 눈이 반짝였다.

"아, 그럼. 궁금하지. 도대체 뭐야? 이젠 유령도 아니고 흡혈귀도 아닌 것 같은데."

"천천히 알려주지. 어디, 간단히 실험이나 해볼까?"

"그렇게 해."

늘어진 왼손이 꾸무럭거리며 한 차례 빛났다.

빛?

아니, 그것은 어둠이었다.

어쩌면 잠깐 사라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떤 모호한 변화. 말로 설명하기 힘든.

게다가 지극히 짧은 시간 동안 이뤄졌다. 어? 싶은 순간 이미 원래 상태로 돌아가 있었다. 여기 있는 이들이 모두 6성 등급 이상이라 감지한 거지 그게 아니었다면 무슨 일이 있었나 싶었을 것이다.

"아……"

들리는 것은 미네엘의 탄성.

가슴을 내려다본다.

아무 상처 없는 피부, 온전하기만 한 의복.

그런데 그 위로 혈정이 절제되어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심장을 닮은 액체. 울컥울컥 뛰다가 천천히 뛰는 속도가 느려진다. 아니, 형체가 조금씩 투명해지며 존재 자체가 지워지는 중이었다.

"안 돼……"

미네엘이 필사적으로 손을 내밀지만 무소용.

화사한 손은 허공만 휘저을 뿐이다. 분명히 혈정이 위치한 곳을 잡으려고 하는데 잡히는 게 없었다.

그곳에 존재하는 것이라고는 단 하나.

허무!

혈정이 나타난 순간 모든 것이 결정된 다음이었다. 결국 혈정이 완전히 소멸되고 만다. 미네엘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쉬시시시……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온다.

미네엘이 동작을 정지했다. 그리고 손끝부터, 허무의 공간을 더듬던 그 손이 재로 변해 흩어지기 시작한다.

채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완전히 재로 변한 미네엘.

바람이 재를 싣고 어디론가 떠나갔다. 언제 그런 존재가 있었냐 싶게 재 한 움큼, 피 한 방울조차 남지 않았다.

불사계 모든 고위 존재의 최후.

이세희가 침을 삼킨다. 에일리도 몸서리를 쳤다. 한스나 한철군은 겁을 집어먹고 벌벌 떨고 있었다.

그러나 블러드 공작은 태연자약했다.

"신기한 힘이군. 어디선가 접해 본 적이 있는데…… 응? 너 손이 왜 그래?"

김현의 왼손.

기이하게 일렁인다. 조금 전의 일격을 보는 듯하다. 빛과 어둠이 혼재하고, 흐려졌다가 뚜렷해지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현아……"

그걸 본 김애경이 신음을 흘린다.

눈앞에 분명히 실재하는 김현.

그런데 이상하다.

등급이 올라가서 그런 걸까? 이 자리에 없는 것 같다. 존재감 자체를 읽을 수가 없다.

눈으로 보면서도, 귀로 들으면서도 이런 착각이 드니 이상한 일.

김현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휴, 제어하기 힘드네."

소실되던 손이 원래 모습을 되찾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현을 보는 일행은 불안감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흡사 지금이라도 당장 영구히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아서.

블러드 공작이 눈을 가늘게 뜬다. 잔향이 남아 진동하는 왼손을 보더니 어울리지 않게 진지한 얼굴을 했다.

"공허, 맞지?"

"맞아."

"하! 정답이군. 그리고 최악이야. 쯧!"

"공허가 뭔데 그래?"

김애경이 최초로 블러드 공작에게 직접 질문을 던졌다. 블러드 공작이 날카롭게 김애경을 흘겨보더니 선심 쓰듯 대답해 주었다.

"태초 이전의 혼돈이라고 하면 이해가 빠를까?"

"혼돈?"

"너희 세계에도 비슷한 신화는 많지 않아? 태초에 혼돈이 있었다느니 뭐니 하는 것 말이야. 그것이 공허다. 현재의 무수(無數) 차원계가 형성되기 전, 유수(有數) 차원을 구성하던 힘이자 물질, 기원이라고 할까."

"무슨 말이지 모르겠어요. 자세히 설명해주시면 안 돼요?"

"하찮은 인간아. 네 눈에는 내가 네 보모로 보이냐? 알고 싶으면 네가 알아봐라."

블러드 공작의 일침에 피터가 자라처럼 목을 움츠렸다.

"아는 게 있으면 조금 알려주지. 나도 공허에 대해 알고 싶어. 그게 너한테도 도움이 될 걸."

"안타깝게도 없어. 태초 이전의 힘이라 그만큼 강력하고, 대신 사용자를 파멸로 몰아넣는다는 것밖에……"

"파멸이라고?"

김애경이 빼액 소리를 질렀다.

블러드 공작이 짓궂은 미소를 짓는다.

"당연한 것 아냐? 물질과 힘이 분리되기 전의 어떤 것인데. 공허에 대해 연구한 자도 많았고 실제로 조금은 공허에 접촉해서 힘을 얻은 자도 있었어. 모두 그 끝이 좋지 않았지. 너처럼 조금이라도 힘의 편린을 얻은 자도 거의 없어."

"역시 그렇겠지."

김현도 짐작했던 대목.

김애경도 다른 이들도 얼굴이 참담해진다. 대놓고 불길한 예언을 하니 그럴 수밖에.

"난 괜찮아."

가만히 김애경의 손을 잡아주었다.

두 눈이 흔들리더니, 입술을 깨물며 김현의 손을 마주 잡아 온다.

"현아, 내가 지켜줄게."

"푸하하. 무슨 소리야, 낯간지럽게."

"내가 누나니까 널 지켜줘야지."

"됐어. 내 몸은 내가 알아서 지키니까 하은이나 잘 지켜. 알았지?"

"하아, 그래도 무슨 일 있으면 도와달라고 해."

"알았어."

"김현 님. 저도 김현 님 지켜드릴게요!"

"하하, 고맙습니다."

동료들이 김현에게 낯 뜨거운 한 마디씩을 던졌다. 싫다고 할 수도 없고, 김현은 그저 적당히 웃어 넘겼다.

지켜보던 블러드 공작이 다리를 꼬며 묻는다.

"방금 그게 다는 아닌 것 같은데?"

"아, 그렇지."

왼손을 드는 김현.

이번에는 왼손 전체가 번들번들 빛난다.

묵색의 빛.

탁하지 않고 맑다. 선명한 흑요석 같은 광채가 스멀스멀 자신의 존재를 피어올리고 있었다.

블러드 공작이 홀린 듯한 눈으로 그 빛을 바라본다.

"죽음……"

단순히 생명체의 죽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완벽한 종말.

문명이 생명을 다하고 스러지는 것처럼, 항성이 빛을 잃고 소멸하는 것처럼, 떠돌던 전승이 기록되지 못하고 잊히는 것처럼.

모든 운명의 끝, 그것이 김현의 손에 맺혀 있었다.

"어때, 도움이 될까?"

"당연하지!"

죽음을 정복하면 영원을 손에 넣는다. 이걸 위해 불사계와 유명계는 각자 육체 혹은 영혼을 희생하고 영겁의 세월을 걷는 것 아닌가.

물론, 저마다 세부적인 사정은 조금 다르긴 하지만.

김현은 당시의 상황을 세세히 들려주었다.

기억석은 사용하지 않았다. 김현이 진술한 어떤 존재 때문에.

"공허의 형상을 봤다고?"

"그래. 거기서 힘을 얻었지."

"쯧, 널 파멸시킬 힘이겠지. 어쨌든 알았다. 나한테 영음은 보내지 마라. 자칫 나도 그 형상인지 뭔지 볼까 무섭다."

"겁내기는."

"오래 사니까 느는 건 겁밖에 없어."

아무튼 블러드 공작은 김현의 상태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육체와 영혼의 괴리를 이용하여 빅뱅을 일으켰다는 과정에 대해 듣고 또 들었다.

그러느라 시간이 많이 지났다.

외부에서 손님이 왔는지 시녀가 몇 번 들어왔으나 블러드 공작이 귀찮다고 물리쳤다. 급기야 손님이 벌컥 문을 열고는 들이닥쳤다.

"오호, 여의 낭군이 여기 있구나."

릴리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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