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4
삼각 회의 -2-
"이 악마!"
얌전히 있던 에일리가 벌떡 일어난다.
가만히 손을 뻗어 제지하는 김애경.
무려 8성 등급 악마다. 여기 있는 이들이야 간단한 눈짓 하나로 세뇌시켜 끝장낼 수 있다.
아닌 게 아니라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린다. 의식하지 않고 흘리는 염기가 매혹하려 드는 것. 릴리스의 염기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은 블러드 공작과 김현, 둘이 전부였다.
"귀여운 아가구나."
릴리스는 김애경을 보고는 말했다. 다른 동료들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영육 개변한 인간 정도는 많고도 많으니.
블러드 공작이 혀를 찼다.
"네 멋대로 들어오는 버릇은 여전하네? 시녀가 기다리라고 안 했어?"
"잠깐 즐거운 시간을 보냈더니 주인님께서 기다리실 거라고 엉엉 우는 게 안쓰러워서 그냥 들어왔지요. 저번처럼 내 친우에게 실례하고 싶지는 않았으니."
"어휴, 하여간 악마계 놈들은 자기 좋을 대로 생각한다니까."
"앉아도 되겠어요?"
"이미 앉아놓고 무슨 소리야."
릴리스는 블러드 공작의 소파를 비집고 같이 앉았다.
왜 굳이 그러냐고?
바로 앞이 김현이었기 때문이다. 다리를 한 차례 꼬면서 유혹적인 웃음을 보낸다.
그러나 김현에게는 역겨울 뿐.
한 송이 꽃잎은 그렇다고 치자. 우뚝 솟은 저 기둥은 대체 뭐란 말인가?
"옷 좀 입지."
"아름다운 이여, 그대의 말이라면 기꺼이 듣겠다."
릴리스가 손을 튕기자 훤히 노출되어 있던 국부에 검은 망사가 덮인다.
그게 더 야했다.
어깨는 드러내고 팔은 가렸으며, 마찬가지로 골반은 노출한 채 다리는 감춘 유려한 곡선의 드레스. 거기에 국부만 망사를 얹어 놓았다고 생각해 보라.
누군가 침을 삼켰다. 한철군이나 한스인 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에일리, 그녀 또한 릴리스의 매혹에 점차 빠져드는 것.
"할 말은 끝난 것 같은데, 난 그만 가지."
굳이 상대해 줄 이유가 없다. 일어나려고 하자 릴리스가 손을 뻗어 교태스럽게 붙잡는 시늉을 한다.
"그러지 마라, 아름다운 이여. 그대에게 할 말이 있어 온 것이니라."
"뭔데?"
"여의 낭군이 되어 흰금 궁전을 같이 통치하지 않겠느냐? 여에게는 그대가 필요하다."
그나마 격은 올라갔네. 애첩에서 낭군이라니. 악마계의 직위로 따지면 대공이고.
"불가."
생각하지도 않고 거절.
릴리스가 흥미롭다는 눈빛을 보냈다.
"어째서냐?"
"그냥. 네가 싫어서."
"여가 싫다니…… 너무나 잔인한 말이다. 그대처럼 아름다운 이가 어찌 그토록 잔인한 말을 쓰느냐? 부디 재고해주었으면 좋겠다."
릴리스가 처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다. 그 모습이 워낙에 애처로워 한 줄기 눈물이 똑 떨어지는 듯했다.
김현은 요지부동. 반면 크게 분개하며 일어나는 이가 있었다.
"형! 너무 한다. 진짜!"
서경태였다.
이미 눈이 다 돌아갔다. 릴리스에게 홀려서는 눈을 희번뜩거리며 소리쳤다.
"여왕님께 지금 무슨 말버릇이야? 얼른 무릎 꿇고 사과해! 저렇게 아름다운 분께 미안하지도 않아?"
아이고……
완전히 맛이 갔구나.
서경태는 한 술 더 떠서 허리에 차고 다니는 단검을 꺼내기까지 했다. 전신에서 검은 어둠이 일렁인다. 수틀리면 여기서 한 판 치르겠다는 태도.
그래, 이것이 릴리스의 주변에서 보이는 흔한 반응이지.
다른 동료들도 상황은 비슷했다. 이세희가 아까부터 성혼을 부여하고 있어도 그랬다. 실은 이세희 본인도 눈에 핏발을 세운 채 솟구치는 욕념을 제어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슬쩍, 손을 휘둘렀다.
"오호."
릴리스의 짧은 감탄사.
순수한 물리력만을 발휘했다. 그것만으로도 섬광처럼 빠르게 서경태의 특정 부위를 떼어냈다.
일순, 서경태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잠시 후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끄아아아악!"
유난히 메아리가 긴, 충격과 공포로 얼룩진 비명.
침을 게게이 흘리던 한스와 한철군이 눈을 번쩍 떴다. 본능적으로 두 다리를 움츠리고 김현의 눈치를 본다. 피터 역시 두 손으로 자기 사타구니를 가렸다.
바닥에 피투성이의 남성기와 불알 두 쪽이 나뒹굴고 있었기 때문.
서경태?
그 옆에서 사이좋게 비명을 질러대고 있다.
블러드 공작이 짧게 감흥을 토했다.
"역시 과감해."
생으로 성기를 뜯어 버렸는데 세뇌고 뭐고 통할 턱이 없다.
"선생님, 치료해주세요."
"네, 네."
이세희도 파래진 얼굴로 서경태를 치료해주었다. 절단면이 깨끗한 탓에 간단히 치료가 끝났다.
서경태가 울먹거렸다.
"형, 너무 해요."
"정신 차리라고 한 거야. 또 유혹되는 것 같으면 나한테 맡겨. 이번에는 더 아프게 뜯어줄게."
"으으으……"
서경태가 부들부들 떨다가 아예 몸을 돌려 소파에 얼굴을 묻었다. 귀까지 막고는 뭐라고 중얼거린다.
"나는 장님이다, 나는 장님이다……"
잠깐 고자가 된 게 충격적이긴 했던 모양이지?
보다 못해 일행을 모두 내보냈다. 다들 수척하게 말라서는 비틀거리며 걸어 나간다. 문이 닫히고, 이제 저택의 응접실에는 오직 세 명만 남았다.
"아름다운 이여, 그대에게는 한결 감탄하게 된다."
"그냥 서로 안 봤으면 하는데."
"그대가 여를 배척하니 가슴이 아프다. 여에게 실망한 것이냐?"
"애초에 기대한 게 없는데 실망했을 리가."
"그리 말하지 말아다오. 여는 아름다운 이의 마음을 얻고자 하는 소망뿐이다."
완전히 관심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 김현은 릴리스의 세력과 영향력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릴리스의 수에 끌려갔다간 모든 것을 다 빨아 먹힐 판이다. 그래서 본인의 마음과 감정을 솔직하게 내비쳤다.
너 혐오스럽다고. 죽이고 싶다고.
블러드 공작은 제 3자가 되어 둘의 공방을 보고만 있었다. 완력을 동원하다면 개입하겠으나 그 전에는 둘이서 잘 해보라는 태도.
릴리스가 길게 한숨을 쉰다.
"아름다운 이가 나를 밀어내니 실로 심장이 찢어질 것 같구나."
"심장이 없는 주제에 심장 운운하기는."
"아름다운 이여, 어찌해야 여에 대한 분노를 풀겠느냐? 그대의 감정을 풀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겠다."
"글쎄……"
"노예가 되라면 되겠다. 여를 그대의 침전 노예가 아니라 좌석 노예로 써도 좋다. 얼마든지 감내하겠다."
좌석 노예.
악마계에서는 노예 중에서도 가장 비참한 신세의 노예.
말로만 구슬리는 것이 아니다. 릴리스는 실제로 자기 이마에 손을 가져가 뿔을 하나 뽑았다. 그걸 두 손으로 받쳐 들고는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고 김현에게 바친다.
악마들에게 있어 뿔은 영혼의 일부.
태초부터 존재한 신성한 맹약이자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어둠의 계약이었다.
"이야, 세게 나오네."
블러드 공작이 휘파람을 분다.
하지만 김현은 요지부동이었다.
"나보고 이스타 2세가 되라고?"
이스타 2세.
릴리스가 오랜 세월 공을 들여 타락시킨 용왕 중 하나다.
이스타 2세는 강력한 화룡이었고 악마들을 특히 증오했다. 악마계의 오랜 적이었고, 견디다 못한 악마계가 릴리스의 신병을 인도하는 것으로 휴전하게 된다.
이후 이스타 2세는 릴리스를 끌고 다니며 갖은 모욕을 주었다. 하지만 릴리스는 열과 성을 바쳐 이스타 2세에게 봉사했고, 결국 이스타 2세도 릴리스에게 마음을 열었다.
이 전부가 릴리스의 심모원려.
이스타 2세의 아름다움과 강력함을 탐낸 릴리스가 판을 벌였던 것. 지금은 관계가 역전되어 릴리스의 하렘에서 릴리스의 관심만 구걸하며 생애를 낭비하는 중이다.
릴리스가 새치름한 표정을 짓는다.
"이스타 2세는 확실히 아름답고 강한 이였느니라. 하지만 용의 긍지를 잃은 지금은 불 뿜는 관상용 도마뱀에 불과하다. 아름다운 이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어쨌든 난 네 주인이 될 생각이 없어."
김현은 발로 릴리스를 밀어냈다. 굴욕감을 느낄 만도 한데 릴리스는 오히려 황홀하다는 듯 몸을 뒤튼다. 심지어 김현의 발을 핥으려고 들어서 급히 발을 뺐다.
"남편도 주인도 싫다면 여가 어찌해야 하겠느냐? 그대도 내 궁전에 왔던 것을 보면 여가 필요할 터, 설마하니 모든 교류를 끊자는 것은 아니겠지?"
안달이 난 릴리스가 먼저 묻는다.
거의 됐다.
김현은 오른손 집게손가락을 길게 펴서는 좌우로 흔들었다.
"처음인 것."
"처음?"
"그래, 너한테 내가 처음인 관계가 있다면 그런 건 한 번 고민을 해보지. 네가 지금까지 몇 번이나 다른 애첩들과 맺었던 관계는 모두 거부하겠어."
릴리스가 주인으로 섬겼던 자가 이스타 2세 밖에 없을까?
택도 없는 이야기. 당장 악마계의 다른 악마 중에도 그런 악마가 꽤 있었다. 그들 모두 릴리스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 애첩으로 굴러 떨어지진 않았더라도 릴리스의 말을 무시할 수는 없다는 뜻.
"처음인 것?"
릴리스가 혼란에 차 중얼거린다.
"도구? 내가 속옷이 되어 아름다운 이의 아름다운 곳을 감싸줄까? 아냐, 그건 3만 년 전에 해봤어. 아아, 그 자는 그곳이 참 깊었는데…… 수호령? 그것도 해봤고, 양녀가 되어 패륜을 범하는 것도 식상하지……"
전 차원계 제일가는 변태답다. 온갖 행위란 행위는 다 즐겨본 모양.
가만 놔두면 답이 안 나올 것 같아 진짜 요구를 말했다.
"천천히 생각하고, 이번 일에 대한 보상을 요구한다."
"보상? 좋다, 아름다운 이여. 어떻게든 감당하겠다. 그렇지, 내 흰금 궁전의 총독이 되면 어떠냐? 모든 권리를 넘기겠다."
"싫어. 그런 수작 부릴 거면 집어치워."
"아니, 아니다. 그대가 원하는 것을 말해라. 내가 무엇을 하면 되겠느냐?"
쩔쩔매는 릴리스를 보고 있노라면 묘한 감흥이 솟는다.
아, 8성 등급의 강력한 악마도 내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구나, 하는.
이것이야말로 함정.
시간을 두고 쌓이는 오만이 독이 된다. 릴리스에게 여유로운 마음을 갖는 순간 끝. 김현은 그 사실을 아주 잘 알았다.
"상점 하나, 세금 면제, 상행위 권리."
딱 세 가지.
릴리스가 기이한 눈빛을 보낸다.
"그것으로 되겠느냐? 부족하다. 흰금 궁전에 대한 권리가 싫다면 악마계가 지구의 독립을 보장하도록 여의 영향력을 발휘하겠다."
"됐어. 세 가지면 충분해."
"사실상 두 가지다만…… 흰금 궁전에서는 누구나 자유롭게 상행위를 하게 되어 있다."
"알아. 대신 네가 한 마디 말만 해줬으면 좋겠어. 지구의 각성자 김현은 네게 직접 권리를 받았다고."
"과연, 무슨 말인지 알겠다."
흰금 궁전에서 상행위는 자유롭다. 성혼이든 정수는 마음껏 사고 팔 수 있다.
문제는 시비를 걸어오는 악마 관리들.
참새가 방앗간을 못 지나가듯 악마가 이방인들을 뜯어먹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하다. 릴리스가 한 마디 해주면 아무 걱정 없이 사업을 할 수 있겠지.
"아니지, 아니야. 그래도 이건 아니다. 여가 몇 가지 선물을 주겠다. 보상으로는 부족하지만, 그래야 여의 마음이 편할 것 같다."
"아, 됐어. 더 주면 끝이야. 흰금 궁전 말고 황금마옥 찾아가든지 할 테니까 그렇게 알아."
"아름다운 이여……"
실랑이가 이어졌다.
한쪽은 보상을 더 해주지 못해 안달, 다른 한쪽은 단호박 먹은 듯 단호하게 연거푸 거부.
블러드 공작만 재미있다고 둘의 실랑이를 보고 있었다.
결국은 모두 김현의 뜻대로 되었다.
한 가지 더.
블러드 공작이 선심을 썼다.
"나도 세금은 면제하지."
"고맙다."
"후후, 대신 앞으로 협력해야 할 일이 많을 것 같은데? 최소한 1주기에 1번은 방문해줬으면 좋겠다. 이번 일로 죽음에 대해 많이 알아봐야겠어."
"뭐, 좋다."
죽음의 힘은 김현도 블러드 공작이나 다른 불사계의 지배자들에게 배울 게 많다. 그러면서 영향력을 높이면 지지 선언 정도는 이끌어내겠지.
릴리스도 눈을 반짝였다.
"아름다운 이여, 여러 가지 의논할 게 많으니 여의 궁전에도 1주기에 1번은 오지 않겠느냐?"
"좋아. 단, 이상한 수작은 부리지 마. 내 동료들이나 특히, 지구에."
"지구라…… 알았다. 몇 가지가 진행되던 것 같은데 모두 취소하지."
가슴이 서늘해졌다.
진행하던 게 있었다고?
조금만 늦었으면 지구에 큰일이 벌어질 뻔했다. 이 시점에서 악마들이 세우는 계획은 안 봐도 뻔하니까.
어쨌든 이번 원정에서 얻은 건 컸다.
불사계에 이어 악마계에서도 확실한 거점을 마련했으니.
또 있지.
무법성.
릴리스의 한 마디 덕분에 마왕 성혼을 저렴한 가격에 구할 수 있었다. 내친 김에 재차 흰금 궁전으로 진입하여 예리츠와 거래를 끝마쳤다. 이제 언제든 지구에서 무법성으로 가도 좋다.
"힘들었다……"
"피곤해……"
녹초가 된 일행.
며칠 만에 집에 돌아와 피곤한 몸을 누인다.
오래 쉴 수는 없었다.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국제 정세가 숨 가쁘게 돌아갔다.
시작은 세계의 화약고, 중동부터.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전격적으로 침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