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6
팔레스타인 전쟁 -2-
"어떻게, 어떻게……"
한 여성 각성자가 입을 막는다. 나오는 울음을 참지 못해 꺼이꺼이 괴상한 신음을 흘린다.
"이 악마!"
누군가 날 선 목소리로 소리쳤다.
김현의 웃음이 짙어진다.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다. 김현을 만화 속 바른 생활 영웅들과 동일시하는 것. 어째서 김현을 욕해도 뒤탈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쉬익!
낮은 바람 소리와 함께 검은 선이 그어졌다. 검은 선은 정확히 여성 각성자의 머리를 사선으로 쪼갰다. 붉은 선이 그어지고 잠시 후, 머리가 두 조각나고 위의 조각이 미끄러져 떨어진다.
"꺄아악!"
"안 돼, 탈리!"
"어떻게 이런 짓을!"
성질 급한 각성자가 주먹을 날린다. 모래바람이 칼날처럼 일어나 김현을 난자하려 했다.
제법 강맹하지만 그래 봐야 4성.
가볍게 손만 휘둘렀다. 꺼먼 선이 모래바람을 관통하고 각성자의 심장을 후려친다.
모래바람이 잦아들었다. 각성자가 우두커니 서서 자기 가슴을 내려다본다. 사람 머리통이 들어갈 정도 크기의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이 상태에서 무엇을 할까.
울컥 피를 뿜으며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론! 아아악!"
"죽여, 죽여야 해!"
"악마다!"
"관둬, 멍청이들아!"
각성자들이 덤벼들려는 것을 턱이 유난히 네모진 각성자가 나서서 막는다.
"덤벼서 뭐하게? 개죽음이야, 개죽음!"
"그, 그래도……"
"참아. 지금은."
김현이 최초 쓰러뜨린 둘, 그리고 이 각성자가 6성 등급 각성자였다. 그래서인지 조금은 이성을 되찾은 것 같다.
눈치를 보아하니 다른 각성자들은 6성 각성자가 섞여 있었다는 사실도 몰랐던 것 같지만.
턱이 네모진 각성자가 정중히 인사를 했다.
"이스라엘의 요나한 코헨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그래, 사람을 처음 봤으면 인사부터 해야지. 유명 및 불사 계열 각성자 김현이다."
"예, 오신다는 말씀은 들었습니다. 혹시 팔레스타인에서 사령관님을 초청한 겁니까? 팔레스타인이 그 정도의 영향력이 있다고는 보기 어려운데요……"
"팔레스타인과는 관련 없다. 너희가 워낙에 난장을 피워서 온 거지. 민간인 학살이 뭐냐, 민간인 학살이? 최소한의 선은 지켜야 할 거 아냐."
"지당하십니다!"
팔레스타인 측 각성자 하나가 끼어들었다.
김현이 시선을 주자 쓰고 있던 터번을 벗어서는 공손히 인사를 한다. 이내 목소리를 높여 이스라엘을 욕하기 시작했다.
"저자들이야말로 악마의 자식들입니다. 며칠 사이에 죽은 민간인만 천 명을 넘어요! 여길 보십시오, 하루아침에 부모 잃은 아이들, 자식을 잃은 사람들이 넘쳐 납니다. 저런 자들이 신의 백성을 자칭하고 있으니 이거야말로……"
"조용. 내가 언제 당신 보고 말해도 된다고 했지?"
각성자가 합죽이가 되어서는 눈만 굴렸다.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김현이 자기편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나 묻지."
이스라엘 측 각성자들에게 질문했다.
"군사 작전이니 군인들을 죽이거나 시설을 습격하는 건 그렇다고 치자고. 그런데 왜 민간인들까지 죽인 거야?"
답은 이미 알고 있다. 굳이 물어본 것은 소위 명분을 쌓기 위함이었다.
이스라엘 각성자들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아니라고 발뺌하는 것은 불가능. 김현이 도착하기 직전까지 신나게 아이도 죽이고 노인도 죽이던 참이었으니까. 조금만 늦었더라면 기자들에게도 손을 댔을 것이다.
"신의 영광을 지상에 전파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 어떻게 신의 영광을 전파하는 것과 연관이 되지?"
"이교도들이 감히 신성한 대지를 점거하였으니 몰아내는 게 당연한 거 아닙니까? 신학적 지식이 없으니 그런 소리를 하는 거요!"
한 각성자가 참지 못하겠다는 듯 씩씩대며 소리쳤다.
김현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쉽게 말해서 이교도니까 죽였다는 거네. 이교도를 죽이는 것은 죄가 되지 않으니까?"
"이제야 말이 통하는군."
"그 말이 맞소."
이스라엘 각성자들 모두 고개를 끄덕인다. 요나한도 마찬가지였다.
짧게 조소하는 김현.
"그럼 내게도 너희들은 이교도니까 모조리 쳐 죽여도 죄가 되지 않겠네?"
"그, 그건……"
"틀렸소! 이교도를 처단할 권리는 오로지 선택받은 민족인 우리 유대인에게만 있으니까!"
"헛소리는."
저놈의 선민의식은 진짜.
재차 손을 날린다. 역시 잘 보이지도 않는 죽음이 튀어 나갔다. 침을 튀기며 말하던 각성자의 머리가 쪼개졌다. 미리 대비하고 있었는지 보호막이 몇 겹이나 씌워졌으나 간단히 관통해 버렸다.
"너무 강해……"
이스라엘 각성자들의 얼굴이 창백해진다. 슬슬 김현의 무력을 실감하는 것 같다.
요나한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을 한다.
'같은 6성인데 어떻게 이리 차이가 나지?'
같은 6성은 무슨.
너는 외부의 강제 종족 변환으로 6성이 된 얼치기 각성자이고, 나는 온갖 역경을 딛고 홀로 올라선 최강의 7성 각성자란다.
김현은 속으로 그렇게 뇌까렸다.
"김 사령관! 괴물과 괴물의 혼종이 되더니, 본인도 괴물이 되어 버린 겁니까!"
한 강퍅해 보이는 여자 각성자가 빽 소리를 지른다.
"괴물이라니?"
"그게 아니면, 이렇게 쉽게 사람을 죽인단 말입니까! 인간의 마음을 되찾으세요!"
"뭔 개소리야. 당신들도 이교도라며 여기 사람들을 학살하던 주제에 내가 학살하니까 싫어? 그리고 난 괴물 맞아. 당신들도 나도, 훌륭한 괴물이지. 살인자이고, 악마야. 그것부터 인정해. 저기 꼬마가 당신을 무슨 눈으로 보고 있는지."
가슴에서 피를 흘리는 아비 곁에 앉은 소녀.
완전히 혼이 나가서는 이쪽을 보고 있다.
내비치는 감정이라고는 단 하나.
두려움.
이세희가 혀를 차고는 김현의 곁을 떠나 소녀에게 다가간다. 살포시 안아주자 소녀가 비로소 눈물을 흘리며 무너졌다.
"내 요구는 딱 하나야."
소녀를 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각성자는 각성자끼리 싸워. 아니면 군인들이나 죽이던가. 민간인은 건드리지 마. 특히 이런 형태로, 전쟁 범죄는 절대 저지르지 말란 말이야. 그렇지 않고 민간인들을 학살하는 자는 내가 모조리 죽여 버리겠어."
"당신이 무슨 권리로?"
"말 잘했다. 그러는 당신들은 무슨 권리로 이 사람들을 학살한 건데? 신께서 선택한 백성? 나는 신께서 선택한 도살자다! 내게 세계 제일의 무력을 허락하신 신께 받은 권리로 네놈들을 학살해주지! 이스라엘이건 팔레스타인이건 어디건 다 상관없어! 민간인 학살자는 무조건 죽인다!"
김현의 몸에서 폭발적인 위세가 터져 나왔다.
하늘이 암흑으로 물든다.
대기가 울부짖고, 불길한 까마귀 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진다.
죽음을 딛고, 공허가 문지방을 넘으려 하고 있었다……
'너무 흥분했네.'
김현은 본인의 마음을 적당히 단도리 했다. 이 짧은 순간 위세를 보인 것만으로도 주변 각성자들이 졸도할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등급 낮은 몇몇은 피를 토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도 민간인들이 온전한 것이 신기할 따름.
요나한이 이를 힘껏 악물었다.
"전쟁에서 민간인 피해는 피할 수 없습니다."
"피할 수 없기는. 각성자들끼리 싸우면 되잖아."
"각성자들끼리요?"
"그래. 싸우고 싶으면 너희끼리 치고받아. 민간인들이 들어올 수 없는 특수한 공간에서. 콜로세움 같은 걸 만들어도 좋겠네."
이쯤 되면 슬슬 김현의 의도를 알 만하다.
이스라엘 각성자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지금 저희보고 광대놀음을 하라는 겁니까?"
"스포츠가 광대놀음이야? 이야, 수백 년 전에나 했을 말인데, 그거. 운동 광대, 노래 광대, 연기 광대만 줄줄이 나오는 TV는 어떻게 보나, 과거에서 오신 분?"
"이익!"
이죽거림에 화가 났는지 각성자들이 이를 갈았다.
그러나 거기까지. 차마 공격은 못 하고 있었다. 조금 전에 보였던 김현의 위세가 너무나 인상 깊었기 때문.
"안타깝지만 저희가 그런 중요한 결정을 내릴 위치에 있지 못합니다."
"그래서?"
"돌아가서 상부에 보고하겠습니다."
"그렇게 해."
정말로 그냥 가려고?
김현이 그렇게 눈으로 묻자, 요나한이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빼 든다.
"그 전에 잠시, 어떻습니까?"
"뭘?"
"사령관님께서 말씀하신 각성자 대 각성자 전투, 여기서 한 번 벌여보지요."
"재미있네. 그래서 내가 이기면 어떻게 되는 거지?"
"두 말 하지 않고 물러나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각성자들은 몰라도, 최소한 여기 있는 각성자들은 팔레스타인의 이교도들을 청소하는 일이 없을 겁니다."
"요나한!"
"그런 일을 말도 하지 않고 혼자……"
"미안하네, 동지들. 날 믿는다면 부디 내 뜻에 따라주게."
이스라엘 각성자들 사이에서는 제법 인망이 있나 보다. 각성자들이 불만스러워하면서도 순순히 물러났다.
사람들이 물러나고 조그마한 원이 생겼다.
서경태가 허리에 찬 검에 손을 가져가며 묻는다.
"형, 거들까요?"
"됐어. 뒤에서 구경이나 해."
"하긴 형이 질 리가 없죠."
서경태는 이스라엘 각성자들을 보며 짧게 비웃음을 날렸다. 뒤로 멀찌감치 물러나서 구경했다. 서경태의 생각으로는 김현이 질 가능성이 단 1%도 없으니까.
이세희도 비슷했다. 환자들을 구호하느라 정신이 없다. 그걸 보고 뒤늦게 서경태도 합류하여 부상자들을 실어 날랐다.
적당히 떨어져서 마주 본 김현과 이스라엘 각성자.
"규칙은 있습니까?"
"없지. 한쪽이 죽거나 항복하기 전까지 계속하는 것으로 하지."
"하하, 그거 좋네요. 그런데 항복 그거, 꼭 받아야 하는 겁니까?"
"아니, 자기 마음이지."
"역시 화통하십니다. 그건 그렇고 제가 이길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으시는 모양이지요? 졌을 때의 조건을 말씀하시지 않는 걸 보면."
"말해봐."
"간단합니다. 지면 여기서 떠나시고, 앞으로 죽을 때까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에 발을 들여놓지 마십시오. 아시겠습니까?"
"뭐, 그러지."
"언령으로 약속해 주십시오."
"6성 각성자에 대해 많이 아나 봐? 그건 거절하지. 그런 것에 내 힘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네가 6성 각성자여서 언령으로 맹세한다면 나도 그렇게 하겠다만."
순간, 요나한의 눈가에 희미한 조소가 스쳤다.
"후후, 알겠습니다. 손해 보시는 느낌이라고 하시니 그렇게 넘어가지요."
분명히 비세인데 승리를 확신하는 듯하다.
당연하지.
처음 김현이 죽였던 두 각성자, 실은 죽지 않았으니까.
무슨 소리냐고?
유명계 6성 각성자다. 어려운 영육 개변을 해줄 사람이나 고위 유령도 지구에 없다. 이들이 6성으로 승급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종족 변환이었다.
따라서 둘의 육체는 처음부터 죽어 있었다. 김현이 머리를 쪼갠 것은 그들의 영체에 아무 영향도 없다는 뜻.
글쎄, 과연 그럴까?
상기한 것처럼 생각한다면 그건 너무나 단순한 생각이며 김현에 대한 무지 때문이다. 김현이 가진 죽음의 힘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니까.
상황이 어떻게 돌아갈지는 지켜봐야겠지.
끼에에엑.
요나한이 빼든 까만 검이 귀곡성을 토해낸다. 김현은 그걸 듣고는 한마디를 했다.
"유명계냐?"
"맞습니다. 사령관님께서 유명계에서도 이름 높은 성혼을 가지고 계시지만 전 두렵지 않습니다. 제 성혼도 만만한 것이 아니거든요."
자신감을 가질 만하다. 지금 까만 검에 짐승의 이빨처럼 맺힌 기운은 저승의 칼날, 즉 명마도였으니까.
쌔액!
검은 칼날이 허공을 난도질한다. 왼손을 내밀어 쳐낸다. 죽음의 기운이 저승의 검을 간단히 막아섰다.
요나한의 눈에 놀란 빛이 서렸다. 이를 악물고는 명마도를 마구 뿌린다. 허공에 검은 칼날이 수백 개도 넘게 나타났다. 어지럽게 김현을 난도질하지만, 장난처럼 내미는 손길에 모조리 소멸되고 만다.
'한심한 수준이야.'
김현은 장갑 기사로서 온갖 무기술에 조예가 깊다. 그 능력을 바탕으로 반신불수의 몸으로도 신촌 병원에서 살아남았으니.
반면 이 자는 성혼을 믿고 힘껏 내지르는 것이 전부였다. 장점이 있다면 강력한 육체에서 나오는 힘과 속도 정도. 정교함이나 예리함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아볼 수가 없다.
사실은 이게 당연하다. 이미 죽은 육체, 심장이 뛰는 걸 가장하는 몸을 가지고 무슨 제대로 된 무술을 펼칠까.
"이만 끝내지."
김현이 왼손을 뻗었다. 유령처럼 움직인 손이 심장 어림에 닿는다.
푸욱.
가벼운 파열음.
요나한의 입에서 피가 뿜어졌다.
그러나 그 눈에는 절망 대신 득의 어린 웃음이 맺혀 있었다.
"걸렸구나, 이 악마 새끼! 죽어라!"
터져 나오는 묵빛 섬광.
명왕 성혼이 김현을 덮쳤다.
더욱이 저기 쓰러져 있던 두 시체에서 각각 백색과 회색 광채가 날아와 김현을 직격 했으니……
"형!"
서경태의 외침이 헛되이 허공을 갈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