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9
차원 전장
"누가 이길까?"
주위를 돌아보다가 김현의 옆으로 온 김애경이 처음 꺼낸 말이었다.
김현은 깊이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단숨에 대답했다.
"팔레스타인이 이겨."
"무함마드 때문에?"
"맞아."
"미국에서 지원도 많이 갔다고 하던데……"
"그래봐야 5성이지."
협상 과정에서 많은 진통이 있었다.
가장 쟁점이 된 사항은 차원 전장에 참여할 각성자를 구분 짓는 문제. 동맹국의 참전을 허용할 것이냐, 용병의 참전을 허용할 것이냐, 등등으로 한참 밀고 당기기를 했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무제한 참전으로 결론이 났다. 팔레스타인은 최대한 참여 범위를 한정지으려 했으나 김현이 방관하여 실패. 그러나 그게 전화위복이 되었다.
"저도 참전할 걸 그랬습니다. 이번 차원 전장은 무함마드 왕자의 독무대가 되겠어요."
옆에 앉아 김현과 한담을 나누던 차오웨이가 말했다. 김현은 말없이 한 번 웃어주었다.
무함마드, 그리고 차오웨이.
김현의 도움으로 6성 탈각을 끝마쳤다. 지금은 적응 훈련까지 끝내어 슬슬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성공했으면 좋았을 걸……'
6성 탈각에 도전한 각성자는 도합 10명. 김현과 협력 관계에 있던 이들 모두가 도전했다.
이 중 3명이 실패. 그나마 김현이 빠르게 대처하여 죽지는 않았다. 비록 성혼을 상실하기는 했으나.
"베이징 일은 잘 되어 갑니까?"
"후, 쉽지는 않더라고요."
"혼자 힘으로는 힘들지요."
"혹시 또 거래를 할 수 있을까요? 저와 예전부터 함께하는 의제가 있는데, 슬슬 때가 된 것 같아서 말입니다."
"가능하지요. 구체적인 조건은 협의를 해봅시다."
차오웨이는 김현이 그랬듯 노골적으로 마각을 드러냈다. 중국의 주석은 돌연사 했고 그 외 유력자들은 모조리 유폐 당했다.
하지만 중국은 넓고 사람이 많다. 자연히 각성자도 많았다. 주석이 예전부터 비호하던 신공당이라는 계파가 차오웨이에게 대항하고 있었다. 5성 각성자들이 수십 명도 넘게 소속되어 있어 상대하기 쉽지 않은 모양.
김현이야 미국 각성자들을 단신으로 제압했지만 차오웨이는 김현이 아니니까.
"아, 시작하나 봅니다."
지금 김현 일행이 있는 곳은 해상의 폐 플랫폼.
하늘 위에 거대한 안개 공간이 떠 있다. 바로 김현이 만든 차원 전장이다. 생명체만 없다 뿐이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똑같이 구현해 놓았다.
출입구는 세 곳.
서쪽과 동쪽, 북쪽에 있었다. 서쪽은 가자 지구로, 동쪽은 예루살렘으로, 북쪽은 팔레스타인의 수도인 라말라로 통한다.
몇 시간 전부터 안개 공간을 통해 군대와 각성자들이 입장 중이었다. 가자 지구에서 입장이 끝났는지 붉은 섬광이 번뜩이고 있었다. 이어서 라말라에서도 붉은 빛이 올라오고,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서도 빛의 기둥이 선다.
"으흠,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대통령."
역사에 기록될 첫 차원 전쟁이라 그럴까?
상당히 많은 정상들이 참석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전쟁을 구경거리화 시켰다는 비판도 일었으나 이런 것에는 신경 쓰지 않는 대표적인 사람이 미국 대통령이었다. 아까부터 도착하여 여기저기 구경하고 다녔다.
친근하게 악수를 건네자 미국 대통령이 조금은 안도하는 표정을 짓는다. 김현과의 선이 아직은 유지되고 있다고 생각한 듯.
"참 기발한 생각입니다. 역시 슈퍼 김 답다고 할까요? 민간인은 피해를 입지 않으니 좋고, 전쟁은 전쟁대로 치르니 좋습니다."
"전쟁이 아예 없는 게 가장 좋은 거죠."
"하하, Miz. 김. 그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니 드리는 말씀이지요. 슈퍼 김도 그래서 이런 장소를 마련한 것 아닙니까?"
"인류 전체가 한 마음으로 노력하면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흐음, 남매라고 해도 생각이 다른가 봅니다."
"쌍둥이도 다른 여자랑 사랑에 빠지는데 남매라고 별 수 있겠습니까?"
"슈퍼 김 말씀에 동의합니다. 아, 개전 선언 하나 봅니다."
차원 전장과 현실은 본래 통신이 통하질 않는다. 하지만 이번 차원 전장을 위해 별도의 통신기를 고안한 참이다. 덕분에 차원 전장 바깥에서도 내부 상황을 자세히 알 수 있었다.
TV를 통해 팔레스타인의 대통령이 연설을 하는 장면이 나왔다. 그에 맞서듯 이스라엘 대통령도 연설을 시작했다.
미국 대통령이 짧게 말했다.
"저는 이스라엘을 지지합니다. 여기 있는 다른 분들은 어떻습니까?"
"글쎄요. 전 굳이 지지하는 곳이 없습니다. 결과가 나오면 잡음 없이 승복하기만 바랄 뿐이지요."
"역시 슈퍼 김 답습니다. 엄정 중립을 지키십니다."
"미국의 입장은 그것인가 보지요? 저희 중화인민공화국은 팔레스타인을 지지합니다."
"저희 사우디아라비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음……"
생각지도 못한 지지 선언에 미국 대통령이 얕은 신음을 흘린다.
아무 직위도 없는 자가 이랬으면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그러나 옆에 앉은 둘은 중국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요인 아닌가. 한 명은 차오웨이고, 다른 한 명은 왕세자 등극이 유력한 무함마드의 최측근이니.
다른 6성 등급 각성자들도 비슷한 의견을 내놓았다. 미국 대통령의 이마에 미미하게 주름이 새겨진다. 이들이 왜 이러나 싶어서.
'팔레스타인이 아니라, 무함마드를 지지하는 거겠지.'
다들 김현과 거래를 해서 그런지 함께 간다는 의식이 있으니까. 동료 미만 동지 이상의 관계라고 보면 되겠다.
차원 전장의 시간은 현실과 동일하게 흘러간다. 처음에는 서로 각자의 영역에서 눈치만 살폈다. 많은 것이 달려 있는 만큼 신중하게 나가는 것.
대치는 한 각성자가 홀로 뛰쳐나가는 바람에 깨어졌다.
무함마드.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자가 정면으로 이스라엘 진지에 도착해서 공격을 퍼붓기 시작한 것.
"이, 이건!"
육안으로 봐서는 내부 상황을 알 수 없다. 그게 가능한 것은 김현 정도가 전부. 그래도 여기 있는 사람이면 내부에 정보원을 모두 파견해 둔 상태였다.
미국 대통령이 깜짝 놀라서는 벌떡 일어난다. 이내 주위에 양해를 구하고 뒤로 빠졌다. 그러면서 차오웨이를 비롯한 김현 주변 각성자들에게 의미심장한 눈길을 던지는 걸 잊지 않았다.
"이제 알았나 보네."
"시기를 재고는 있었을 거야. 지금이 그때라는 건 몰랐겠지만."
"진짜 시간 싸움인 것 같아. 그건 그렇고 무함마드도 손속이 너무 과한 거 아니야?"
"사우디아라비아가 원래 이스라엘을 싫어하니까."
무함마드는 각성자와 일반 군인을 가리지 않았다. 본인의 뇌룡 성혼을 사용하여 모조리 쓸어버리고 있었다. 5성 각성자들이 뒤늦게 달려들었으나 수가 너무 적었다. 여럿이 뭉쳐 위협적으로 변하기 전 번개를 뿌려 몽땅 죽여 나갔다.
팔레스타인 측도 거기에 고무되었는지 돌격하기 시작한다. 가자 지구에서 혈전이 벌어졌다.
"끝났네."
김현의 감상.
이스라엘도 팔레스타인도 전력을 둘로 나눈 상태다. 가자 지구에서 끝이 나면 서안 지구의 전투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일단 개전하면 외부에서 지원군도 바라지 못한다. 지연작전도 불가. 무함마드에게 투시 계열 성혼은 없지만, 6성 각성자 특유의 육감으로 찾아내면 그만이니까.
"사령관님께서는 전장 안이 다 보이나 봅니다."
"예, 실시간으로 볼 수 있지요."
"다른 분들도 비슷하신 것 같고요."
"그냥 제가 공유하는 겁니다."
"그렇습니까……"
스마트폰을 꺼내 주요 포털 사이트를 확인했다. 거기서도 난리가 났다. 영상만 실시간으로 송출이 안 될 뿐 기사는 속속 올라오는 중이니까. 어느 나라 어느 포털 사이트를 가도 차원 전장 이야기로 시끌벅적했다.
'더 볼 필요는 없겠지?'
김현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일제히 시선이 쏟아진다.
"가게?"
"응. 전후 처리 준비해야지."
"사령관님, 너무 빠른 것 아닙니까?"
"아니죠. 제가 보기에 24시간 이내에 결판이 날 것 같아서요."
"크흠……"
"이스라엘 측에서도 준비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른 말 하시면 어떻게 되는지 아시죠?"
"아직 안 끝났습니다. 저는 본국의 저력을 믿습니다. 저희 이스라엘은 반드시 이번 전장을 승리로 이끌 겁니다! 신께서 이스라엘을 보우하실지니!"
"생각은 자유니까요. 그럼!"
그래도 이번 차원 전장의 패배 대가는 싸다. 이스라엘이 최근에 짓기 시작한 정착촌 25곳만 퇴거하면 끝이다. 원래는 팔레스타인이 모든 팔레스타인 영역에서 나가라고 하는 걸 김현이 개입해서 최소한으로 줄였기 때문이다.
어째서냐고? 이스라엘 측 요구도 가관이었으니까. 자기들이 이기면 팔레스타인 보고 국민 전원이 영토 밖으로 나갈 것을 요구했다. 어디가 이기든 난민이 수백만 이상 발생할 상황이니 조정이 불가피했다.
첫 차원 전장의 승리는 김현의 예견대로 팔레스타인에게 돌아갔다.
수훈 갑은 역시 무함마드 왕자.
전장 소요 시간은 약 38시간. 가자 지구를 평정한 후 소수 고위 각성자만 거느리고 이스라엘 군의 후미를 찌른 것이다. 이스라엘은 더 버티지 못하고 항복을 선언했다.
"이 모두가 알라의 보우하심 덕분입니다."
차원 전장이 끝난 후, 무함마드 왕자는 이슬람 교도 다운 인터뷰를 쏟아냈다.
"이 일을 계기로 이스라엘은 알라의 위엄을 그 얄팍한 뼈에 깊이 새겼을 겁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팔레스타인은 형제입니다. 팔레스타인이 모든 주권을 되찾을 때까지, 우리 사우디아라비아는 그 어떤 협력도 아끼지 않겠습니다."
둘러앉은 이스라엘 측 인사들의 표정이 꿀꿀했다. 미국 측 인사들도 마찬가지였다.
팔레스타인 대통령이 으스대며 말했다.
"약조대로, 최대한 빨리 정착촌을 비워주시기 바랍니다. 전장 승패 결정 후 24시간 내에 퇴거해야 하는 건 아시죠?"
"끄응, 오늘은 졌지만 언제까지 웃을 수는 없을 거요."
"흥, 이게 다 무함마드 왕자의 참전 때문이 아니요? 다음 전장에서는 우리가 이길 거요."
"으하하.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기대하고 있지요. 그때야말로 우리 영토를 모두 되찾을 테니."
"난민이 되거든 사우디아라비아에나 가보시지!"
이스라엘 측 인사들이 악담을 퍼붓는다. 팔레스타인 대통령은 그러거나 말거나 좋아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전쟁은 승리했고 피해도 최소한으로 줄였으니 그럴 만 했다.
미국 측 인사들은 그나마 얼굴이 나쁘진 않았다. 무함마드가 이스라엘 각성자들은 몽땅 죽였어도 미국 각성자들은 제압만 해서 그런 것 같다. 이들이 죽었으면 사우디아라비아와 미국의 관계가 급속히 냉각되었겠지.
정착촌 퇴거 시작.
"아니, 여길 버리고 어디로 가란 말이오!"
"이 새끼들아! 내가 이러려고 이교도 새끼들 틈에서 집 짓고 산 줄 알아? 이 무능한 새끼들!"
"꺼져!"
주민들이 반항을 하지만 그게 될 법한 소린가.
필연적으로 강제 진압이 이어졌다. 예전처럼 최루탄을 뿌리고 할 필요도 없다. 각성자가 나와서 수면 성혼을 발현하고 응급차에 태워 데려가면 그만이었다.
팔레스타인에 점처럼 뿌려진 25곳의 정착촌.
이스라엘의 기본 전략은 이들을 연결하여 땅따먹기를 하는 거였다. 그렇게 팔레스타인의 영토를 잠식해 들어간다.
이 중 상당히 큰 부위가 떨어져 나갔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정착촌을 연결하는 방어선을 폭파하며 춤추고 노래를 불렀다.
"평화가 온 걸까?"
"아니. 전쟁 양상이 바뀐 것뿐이야."
"외계종들이랑 싸우는 게 시급한데 이럴 때 전쟁이라니……"
"인류의 본성이지. 내가 본 미래에서도 자기들끼리 치고받고 그랬어. 거의 세계 대전 수준이었다니까?"
그렇게 전력을 깎아먹은 것도 컸지. 속속 등장하는 외계종들에 맞서지 못하고 전장의 꽃으로 져야 했으니. 잠재적인 미래 자원도 깎여 나갔고.
차원 전장이 얼마나 효과를 발휘할지는 미지수. 그래도 격화될 세계 대전의 온도를 조금이라도 낮출 수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사브리나가 눈앞을 지나가며 정중히 인사를 한다. 김현도 답례 삼아 손을 흔들었다. 사브리나가 한 차례 웃고는 근처 병원을 향해 뛰어갔다.
5성 승급에 성공한 처지. 이번 차원 전장에 참전도 했다. 무함마드 옆에서 공도 꽤 세웠고, 지금은 예전 폭격 당시 부상 입은 민간인들을 간호하며 자원봉사 중이라나.
'쉬고 싶다.'
육체는 생생하지만 정신적으로 심한 피로가 느껴진다.
쉴 새 없이 달려온 나날.
미국을 떠나 모가디슈에 정착할 때부터 불사계, 흰금 궁전, 7성으로의 승급에 전쟁까지……
'그래도 쉴 수는 없어.'
쉬는 건 죽어서 쉬어도 된다. 지금은 할 일이 너무 많았다.
가장 급한 것은 역시 차원의 벽.
붕괴하는 속도가 너무 빠르다. 오죽하면 자원을 많이 썼다고 해도 유명계에서 세 명이나 되는 6성 등급 각성자를 탄생시켰을까.
'가 보자.'
그 3명이 다가 아닐 거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각성자는 자신의 육감을 신뢰해야 하는 법. 즉각 차원문을 통과했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