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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헌터사-140화 (140/200)

# 140

무법성 –1-

유명계 외곽. 육존 휘하 왕들의 통제력이 제대로 미치지 못하는 어느 한 지역.

회색 하늘 위 찰흙 같은 질감의 구름 덩어리가 떠 있다. 그리고 그 안에는 그림자로 구성된 작은 궁전이 하나 존재한다.

한때 어둠의 종주라 불리던 유령이 지배하던 그곳. 얼마 전에 주인이 바뀌었다. 그래서 항상 부산스러웠지만, 요즘 들어 더욱 어수선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세금을 못 내겠다는 것이냐?]

음울한 영음이 궁전 전체를 진동시킨다.

칼날을 세워 만든 듯한 귀신이 넙죽 엎드렸다.

[종주…… 암왕이시어! 제발 사정을 봐주십시오. 저희도 먹고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만한 할당량이라면 저희 마을에서 생산하는 걸 몽땅 바쳐야 합니다!]

[그래, 그렇게 하라는 거다.]

[암왕이시어!]

[감히 본왕의 말에 토를 달다니, 너희 성혼을 뽑아 세금을 대신하라는 뜻이냐?]

[아, 아닙니다!]

시커먼 기운이 흐르자 칼날 귀신이 화들짝 놀라 손을 내저었다. 결국 몇 마디 더 꾸중을 듣고는 대전을 물러나왔다.

이후로도 비슷한 광경이 반복된다.

혈귀, 얼음 귀신, 흑귀……

하급 귀신들을 상대하는 것이 지겨운지 권좌에 앉은 유령, 암왕은 시커먼 연기를 연거푸 토해냈다. 그래도 지겨움을 참아가며 인근의 유령들을 일일이 만나 세금 낼 것을 독려하고 있었다.

[이러려고 영지를 받은 것이 아닌데……]

푸념하듯 터뜨린 한 마디.

김현은 그런 암왕을 몇 시간째 지켜보고 있었다.

'왜 세금을 이렇게 무리하게 걷는 거지?'

하급 유령들의 불만이 하늘을 찔렀다. 대전을 나서자마자 암왕을 욕하느라 바빴다. 심지어 서로를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나 있던 혈귀와 칼날 귀신도 입을 모아 암왕을 욕했다.

어둠의 종주 시절보다 세금이 거의 10배로 뛰었다나. 그 좋아하는 망자의 통곡도 사먹지 못하고 있다고. 하급 유령들은 세금이 는 이유를 암왕이 영지를 산 값을 치르느라 그런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김현이 보기에는 아니었다.

암왕은 자신의 상관, 흑인왕을 원망하고 있었다. 영지를 받을 때는 좋았는데 할당량이 지나쳤기 때문. 영지의 생산량으로는 충당이 안 되고 자신도 사재를 터는 중이었다.

'제압해?'

1등급 아래, 제압하려면 충분히 한다.

하지만 흑인왕과 연결되어 있다면 그게 문제. 흡혈귀와 같이 강력한 연결은 아니더라도 흑인왕에게 어떤 형태로든 연락이 가면 안 되니까.

암왕을 지켜보다가 공간 너머로 스르륵 사라졌다.

'유령은 많으니까.'

어둠의 종주가 지배하던 시절 그림자 궁전에는 유령이 얼마 없었다. 피리에서 소환된 유령들만으로 대처할 정도.

그런데 지금은 북적북적하다. 아마 둘의 성향 차이 때문이겠지. 한쪽에서는 음산한 노래를 부르고, 다른 한쪽에서는 기이한 의식을 벌여 외계 차원으로 넘어가기도 했다.

한 녀석이 떨어져 있기에 놈에게 다가갔다.

[힘들다……]

유령도 피로를 느끼는 모양. 우두커니 서서 영력을 갈무리하고 있었다.

손을 내밀어 유령의 영체를 툭 쳤다.

[힘들지?]

[어, 너무 힘들어. 이럴 때 망자의 통곡을 빨아줘야 하는데 암왕께서 금지령을 내리셔서 그럴 수도 없고, 힘들다.]

유령은 김현을 친우로 생각했는지 친근하게 대답했다. 착각한 건 아니고, 김현의 정신 공격에 이미 넘어온 것이다.

[대체 왜 그러신대? 영지까지 받으셨으니 이제 즐기면서 사셔야지. 보니까 암왕께서도 망자의 통곡을 드신지 오래된 것 같은데.]

[에휴, 그러니까 견디는 거지. 암왕께서도 고생하고 계시니까. 이게 다 그 변방 차원의 썩어빠질 놈 때문이야.]

변방 차원? 썩어빠질 놈?

이건 유령들이 산자를 욕할 때 쓰는 말인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슬쩍 떠보았다.

[저번에 명천의 우물에서 분탕질치고 도망친 그 놈 말이야?]

[그래! 그 놈! 그 놈 때문에 유명계 전체가 난리잖아. 흑인왕과 백라왕, 회훈왕, 이렇게 세 분이서 음신의 입망 의식을 주관하고 셋이나 되는 음신을 파견했는데도 셋 다 죽었대. 놈이 어느새 혼공지경까지 올라갔다고 하니까 난 놈은 확실히 난 놈이야.]

[혼공지경? 세상에.]

이제 확실해졌다. 유명계는 김현을 목적으로 자원을 비축하고 있었다.

이미 틀어진 사이. 김현의 성장세를 보건대 잠재적인 위협이 될 거라고 파악한 것. 아마 자원을 모아서 단번에 차원의 벽을 돌파할 생각이겠지.

지금까지처럼 김현에게 끌려 다니지 않겠다는 의미. 유명계에 와보지 않았으면 방심하고 있다가 크게 당할 뻔 했다.

'놔두면 안 되지.'

김현 자신이 목표인 것도 문제. 자원을 모으고 있다는 것도 문제. 공격이 성공적으로 치러지면 지구를 보호하는 차원의 벽이 큰 타격을 입을 테니.

[결행일은 언제래? 이렇게 된 거,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몰라! 여섯 차원계에서 최대한 빨아먹고는 있는데 그걸로 부족해서 우리까지 이렇게 쥐어 짜이는 거잖아. 제길, 떠돌이 놈들도 도움이 안 되고……]

떠돌이!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맞아, 그들의 본거지인 무법성으로 가는 방법을 찾은 다음이지. 왜 거기 가서 정보 수집할 생각을 못했을까?

그림자 궁전을 돌며 정보를 더 모았다. 슬쩍 가한 정신 공격에 유령들이 알고 있는 걸 몽땅 토해냈다.

[왜 그런 작은 놈한테 신경 쓰냐고? 그야 간단하지. 이번에 발견된 변방 차원, 성혼 생산량이 역대급이거든.]

[벌써 5성 성혼이 생산된다는데 그런 차원이 어디 흔해? 우리가 거느린 차원들도 1주기에 5성 성혼을 1천 개 정도 생산하고 6성 성혼을 1백 개에서 2백 개 정도 생산하는 게 다야. 7성 성혼? 어휴, 수확의 때가 와야 거둘 수 있잖아.]

[아직 설익은 곳이 그 정도인데 1천 주기 정도 지나면 어떻겠어? 그러니 포기를 못하는 거지. 지금 우리가 거느린 차원 여섯을 다 합쳐도 그곳보다 떨어질 수도 있으니까.]

[성혼 생산하는 차원이 쉽게 발견되는 것도 아니고……]

죄다 하급 유령들이라 딱히 가치 있는 정보는 없었다. 여기서 만족하고 인근 지역을 추가로 확인했다.

그렇게 얻은 결론은 하나.

유명계가 군비 증강 중이라는 사실.

더는 여기 있을 필요가 없었다. 때마침 하루가 다 지나서 차원문을 타고 지구로 돌아왔다.

"잘 다녀왔어?"

"고생하셨어요."

동료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 김현이 혼자 유명계에 갔다 와서 조금 걱정했던 모양.

"아, 다들 와 있었어요? 잘 됐네요. 중요한 정보를 입수했어요."

"어? 뭔데?"

"유명계가 대규모 침략을 준비 중이야."

그 말에 다들 헛바람을 들이킨다.

김애경이 눈을 가늘게 떴다.

"대규모 침략이라면, 어느 수준으로?"

"그걸 모르겠어. 그런데 지금 가보니까 6성 유령도 망자의 통곡 안 먹으면서 영력을 모으고 있더라. 이건 내 예상인데, 차원문을 뚫어서 고위 유령을 파견하지 않을까 싶어. 음…… 어쩌면 8성급이 강립할지도 몰라."

"8성!"

"아직 6성도 못 오잖아? 그런데 8성?"

"차원의 벽을 완전히 깨부수다시피 하는 거지."

"그러면 다른 세계만 좋은 일 하는 거 아니야? 유명계도 재주만 부리고 싶지는 않을 텐데."

"그러니까 차원문이지. 유명계와 지구 사이의 벽만 뚫는 거라고 생각하면 돼. 다른 세계와의 연결도 가능해지겠지만 바로 8성 넘어오고 그러진 못해. 선점해서 최대한 이득을 보겠다는 거지. 자기들 자존심도 복구하고."

"자존심…… 유령들 주제에 별 걸 다 한다."

"그러게."

사실 그 정도는 해야 김현을 어쩔 수가 있다. 그게 아니면 7성 유령 서넛을 파견해야 하는데, 지금까지 그런 식으로 대처하다가 김현에게 번번이 역전 당했으니 생각을 달리 했겠지.

"그래서 내일 무법성에 가볼 생각이야."

"무법성? 아, 떠돌이들 산다는 거기? 거긴 왜?"

"정보 좀 모으려고. 성혼도 팔고."

지금도 블러드 공작 영지와 흰금 궁전은 주기적으로 오가는 중이다. 김현은 팔레스타인 관련해서 바빴고 김애경과 이세희도 하는 일이 있어서 다른 셋이 주로 이 일을 맡았다. 그 와중에 한스가 4성으로 승급한 것이 축하할 일이라면 축하할 일.

"하긴 불사계와 악마계만 거래하는 건 조금 그렇더라. 정말 가지고 싶은 건 천상계랑 요정계에 있던데."

"그렇지? 무법성은 세금이 세서 그렇지 열여덟 세계의 산물이 모두 모이는 곳이야. 고위 떠돌이도 많고. 앞으로 우리가 활동하기에 좋지. 누나랑 다른 사람들도 7성 올라가야 하니까."

"7성? 7성도 6성처럼 힘들어?"

"힘들긴 하지…… 그래도 6성보다는 나아."

6성은 인간의 종족 한계를 벗어나야 했으니 난이도가 무시무시하다. 그렇게 해서 거듭난 육체라면 7성 성혼까지는 어렵지 않게 포용한다. 김현처럼 고생하여 승급하는 게 특이한 경우였다.

"능력치가 아직 모자란 것 같은데? 6성 전용 훈련소는 못 지어?"

"불가능해. 이제 실전밖에 방법이 없어. 6성 성혼 잘못 발현하면 아차원이 다 박살나니까."

"그렇구나……"

"하긴 우리 요즘 실전을 별로 안 겪긴 했죠."

초기에 침식 세계 복구하러 다닐 때는 매일 같이 괴물들과 싸우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요즘에는 괴물과 마지막으로 싸운 게 언제인지 기억도 잘 안 난다. 기껏해야 차오웨이와 무함마드 등의 영육 개변 재료가 될 외계종을 잡으러 돌아다닌 정도?

김현의 인도로 빠르게 등급을 올리면서도 약간의 불안감은 모두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김현의 제안에 빠르게 승낙한 것이다.

"다음 출발 날짜가 언제지?"

"내일이야. 흰금 궁전 차례고."

"좋아. 내일 바로 가자."

다음날, 차원문을 통과하여 무법성에 도착.

성이라고 하지만 흔히 생각하는 그런 성과는 다르다. 유명계와 악마계도 그랬지만, 무법성은 지구의 상식을 아득히 초월하는 기이한 세계였다.

공간이 무수하게 분절되어 있다. 각각의 분절이 깨진 거울 조각처럼 사방을 부유했다. 한 곳에서 웃던 천사가 날개를 펼쳐 날아오르자 발밑의 분절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내고, 잠을 자던 용이 하품을 하자 여러 분절에서 동시에 비친다.

시간은 정상적으로 흐를지 몰라도 공간은 제멋대로 흩어진 세계. 심지어 여러 장소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도 가능했으니……

그래서 무법성.

김현은 일행에게 주의할 점을 알려주었다.

"여기서는 길 잃기가 쉬워요. 분절 넘어가면 정신 감응도 안 통하니까 이거 묶고 다니죠."

그러면서 투명한 실 같은 걸 꺼낸다.

요정계 특산, 깜빡이는 실.

무게가 거의 없고, 공간을 멋대로 드나들며 어지간해서는 끊어지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었다.

이세희가 그걸 보고는 깔깔 웃는다.

"옛날 생각나네요. 처음 침식 세계 들어갈 때는 밧줄 묶고 들어갔는데."

"안 그랬으면 이리저리 흩어져서 이동되니까요."

성혼을 어느 정도 갖춘 다음에는 그런 거 없이 알아서 서로를 감지해서 다가가면 그만이었지만.

깜빡이는 실을 전원의 허리에 묶었다. 그러자 실이 스르륵 투명해지며 자취를 감춘다. 그 상태에서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푸석한 감촉과 함께 눈앞이 화 하니 밝아진다.

그리하여 나타난 곳은 어느 긴 거리. 온갖 외계종들이 웅성거리며 걷고 있었다. 개중 호랑이 머리를 한 거인이 김현을 보고는 콧김을 뿜었다.

"뭐야, 인간인가? 걸리적거리게."

하필 지나는 길에 김현이 나타난 것. 거인은 이놈의 무법성 어쩌고 투덜거리며 한 발짝 비켜 지나갔다.

"우와!"

"흰금 궁전이랑 조금 비슷하네요?"

"여러 차원계의 종족이 모인다는 것을 보면 확실히 그렇죠. 여긴 지성 종족만 모이지 않는다는 게 다릅니다만."

꾸어어!

김현의 말을 뒷받침하듯 공간 저 편에서 긴 울음이 토해졌다.

길쭉한 용이 한 마리 허공을 유영하며 날아오고 있었다. 메기 같은 긴 수염이 바람에 흩날린다. 멀리서 봤을 때는 컸는데 가까워지자 이상하게도 작아진다. 결국에는 조금 큰 독수리 크기가 되어서 일행의 머리 위를 스쳤다.

피터가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방금 그거 풍현룡 아니에요?"

지구에도 가끔 출몰하는 5성 등급 용왕계 외계종.

원래는 상당히 거대하다. 머리에서 꼬리까지 길이만 100미터에 이르니까.

"공간 왜곡이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곳이야. 이런 변환은 흔해."

"우리도 작아지고 막 그래요?"

"아니. 거의 비슷한 크기로 맞춰지더라. 저기 거신계 외계종들도 그렇잖아."

아까 봤던 호랑이 머리 거인까지 갈 필요도 없다. 바로 눈앞에서 서리거인들이 무리를 지어 걷고 있었다. 기껏해야 키 3미터. 본래 키 10미터를 넘는다는 걸 생각하면 참 신기한 일이다.

"저 거인들한텐 우리가 커진 것처럼 보일 걸."

"아, 진짜요?"

"응. 이 세계 자체가 그래. 공간만큼은 모든 세계를 통틀어서 가장 변화무쌍한 곳이지."

그래서 떠돌이들이 모이게 되었다. 이곳에 있을 때만큼은 크기와 관계없이 대화와 거래가 가능해지니까.

그건 그렇고 어디로 가야 하나?

김현도 무법성은 초행. 유명계 정보를 알아보려면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다. 차오 박사의 일지도 혼돈계 외계종과의 접촉에 집중되어 있었고.

"아니, 김 사령관님 아닙니까?"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 발생한 것은 바로 이때.

누군가 김현을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다.

한국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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