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헌터사-141화 (141/200)

# 141

무법성 –2-

한국어라니!

김현 일행 말고도 외계 원정을 다니는 이들이 있었나?

놀랍다면 놀라운 일이다. 원 역사에서도 김애경의 첫 외계 원정은 김애경 본인이 6성 각성자가 된 다음에나 이뤄졌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더 그렇다.

천천히 몸을 뒤로 돌렸다.

익숙한 얼굴이 지구인 무리 가운데 서 있었다.

"박준 씨?"

유령 사냥꾼 박준.

원 역사에서 얻은 별명을, 희한하게도 이번 역사에서도 똑같이 얻은 다음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각성자 중 하나.

빅 4라고 했지.

신필종, 박준, 정윤식, 주태일, 이렇게.

모두 김현의 훈련소 출신이다. 주태일은 하은이를 빌미로 접근하다가 추방당했지만 어떻게든 바득바득 올라왔다. 지금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각성자로 성장했다고.

돌고 도는 역사가 참 얄궂다. 빅 3가 빅 4로 바뀌었다는 사실도 특이하고.

"아,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번에 팔레스타인에서 큰일을 치르셨다고요."

박준이 정중히 손을 내민다.

이 사람은 항상 이랬지. 원 역사에서의 오명은 접어두고 손을 맞잡아 악수를 했다.

"예. 신필종 씨도 오셔서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그 분이야 뭐……"

조금은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박준.

신필종은 권력의 향방에 민감하다. 김현에게 얼굴 도장 찍을 일 있으면 누구보다도 빨리 달려왔다. 정부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틈틈이 사회봉사를 해서 대중의 지지도 받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놀랍네요. 저는 외계 차원에는 저희만 있을 줄 알았거든요. 언제부터 원정을 다닌 겁니까?"

"아! 실은 저희도 처음입니다."

"그러고 보니……"

그제야 박준 주변의 사람들에게 시선을 주는 김현.

박준까지 합쳐 총 여섯 명.

삼삼삼녀로 이루어져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한 명씩 인사를 해온다.

"반가워요. 유명계 성향 각성자 하네다 요코라고 해요."

"예전에 차오 회장님과 함께 뵌 적이 있는데 기억하십니까? 첸슈잉이라고 합니다."

"와, TV에서만 보던 분을 보니까 신기해요! 응우옌 꿘 꽝이라고 합니다!"

"체첵이에요. 한국어로 꽃이라는 뜻이니까 꽃이라고 불러주세요."

"아니스입니다. 반가워요."

공교롭게도 여섯 명 모두 유명계 각성자였다. 거기서 김현은 한 가지 사실을 눈치챘다.

이들이 무법성에 와 있는 것은 유명계에서 손을 썼기 때문이라는 점.

굳이 돌려 떠볼 것 없이 직구를 던졌다.

"후원자들이 외계 원정을 후원한 모양이죠?"

"역시 사령관님이십니다. 예, 거부할 수 없는 조건을 걸어서 수락했지요."

"거부할 수 없는 조건이라면?"

"6성 각성자로 만들어주겠다고 했습니다."

"박준 씨?"

듣고 있던 요코가 슬쩍 박준의 소매를 잡는다.

굳이 거기까지 말할 필요가 있느냐는 태도.

박준은 살짝 머리를 흔들었다. 김현의 정신 계열 성혼에 대해서는 유명하니까. 말하지 않아도 알려질 정보라면 차라리 능동적으로 건네줘서 호감이라도 쌓는 게 낫다.

"6성 각성자가 된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아시죠?"

"압니다."

"유명계 통해서 되면 한 가지 길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변하고 싶습니까?"

이번 팔레스타인 전쟁을 통해 유명계의 탈각 방법에 대해서는 널리 알려졌다.

유령으로의 종족 변환.

박준의 얼굴이 잠깐 흐려진다. 다른 각성자들도 마찬가지.

이내 의지를 다잡으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제게도 지켜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음……"

원 역사에서 박준은 괴물들에게 아내와 세 아이를 모두 잃었다. 지금은 어떤 처지에 놓여 있을까?

알고 싶지 않다. 신필종과 달리 김애경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였던 박준이 최후의 순간에 김애경을 배신하여 심장에 직접 칼날을 꽂았다는 걸 생각하면 더더욱.

"하긴 사람마다 사정이 다르니까요. 이해합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뭘요, 다 비슷한 처지인걸요. 그런데 다들 국적이 다르신 거 보면, 다른 각성자들도 무법성으로 모이겠네요?"

"아마도 그럴 것 같습니다."

"음…… 그래도 옛 정이 있으니 한 가지 충고 하나 해도 될까요?"

"예, 기꺼이."

"지금 유명계는 저와 전쟁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박준 씨가 유명계의 제안대로 움직이면 저와 싸우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아!"

"헉!"

각성자들이 다채로운 반응을 보였다.

위협적이지 않게, 그저 덤덤한 태도로 질문을 던졌다.

"전 아무리 박준 씨라도 인정사정 볼 생각이 없는데, 정말 유명계의 제안대로 움직이실 생각입니까?"

"그, 그건……"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박준이 말을 더듬는다.

요코가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요. 사령관님께서 대단한 분인 건 확실하지만, 한 세계 자체가 사령관님 하나를 죽이려고 저흴 다 6성 각성자로 만들겠어요?"

"예전 일 생각해 보세요. 흑영탑에서요. 그때도 5성 유령 서른 마리를 동원한 적이 있어요. 각성자 수십 명 정도 탈각시키는 건 시도해 볼 만 합니다."

"으음……"

"그런데 저희가 설명 받은 계획은 조금 다른 거여서요."

"뭐였습니까?"

"그, 뭐라더라, 외방 차원? 그런 곳 가서 괴물들 잡으면 된다고 했어요. 가끔 의뢰하는 떠돌이도 사냥하고요."

아, 뭔지 알겠다.

유명계에는 식민지라고 부를 만한 복속 차원이 여섯 개가 있다. 그곳의 문제를 해결하라고 하려는 듯했다. 일종의 용병처럼 굴리는 것.

김애경이 김현을 돌아보았다.

"우리랑은 상관없는 것 같은데?"

"아냐, 그럴 리가 없어. 내 예감이 말하고 있다고."

"예감은 무슨……"

"어휴, 누나도 6성이나 됐으면서 육감을 신뢰하지 않으면 어떻게 해? 박준 씨, 이렇게 하시죠."

"뭘 말입니까?"

"유명계 제안에 따라 움직이시되, 혹시 중요한 정보가 있으면 저한테 귀띔 조금 해주세요."

그 말에 박준과 다른 이들의 얼굴이 어색해진다.

"저보고 첩자 노릇을 하라는 말입니까?"

"그런 셈이죠. 박준 씨도 유령 놈들 속이 시커멓다는 건 잘 알지 않습니까? 여기 계신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고요."

"그야 그렇습니다만……"

"인류를 위해서, 그리고 박준 씨 본인을 위해서 무엇이 이득일지 잘 생각해보세요. 대가는 섭섭치않게 챙겨 드리겠습니다. 정말 귀중한 정보라면, 제가 6성 탈각을 도와드릴 수도 있어요."

김현이 6성 탈각을 도와준다고?

각성자들의 눈이 순간적으로 빛났다. 그들도 유령이 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비록 조금 기이하게 형체가 바뀔지라도 영육 개변이 가장 나은 선택지였다.

"그거 진심이시죠?"

"물론입니다. 하네다 양. 단, 정말 그만한 가치가 있는 정보여야 합니다."

"좋아요. 일단은 유령들 말 따르다가 얻어들은 게 있으면 연락할게요. 아, 어디로 연락하면 되죠?"

"모가디슈로요."

"네, 기대하세요!"

각성자들이 인사를 하고는 어디론가 떠났다. 저마다 작은 유릿조각을 들고 있는 것이 그게 인도해주는 모양이다.

에일리가 그들에게 의심스럽다는 눈빛을 던졌다.

"Mr. 김. 저들이 유령들에게 Mr. 김의 제안을 알리지 않을까요? 그리 믿음직스러워 보이지는 않아요."

"그럴 가능성이 높죠. 이중간첩 행위를 하는 자도 있을 거고."

"네? 그럼 왜 굳이 제안을 하셨어요?"

"정보 얻으려고요. 사실 얻을 건 이미 얻었어요. 그리고 이중 간첩 하더라도 진짜 정보는 섞여 있을 거니까 그것만 추려내도 됩니다."

김현은 여전히 정신 계열 각성자. 서로 마주 앉는다면, 하다못해 전화만 해도 상대의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아내는 것은 가뿐하다.

그걸 대비해 유령들이 각성자들을 속이는 가능성도 있지만 그렇게 정보를 전달하는 행위마저 하나의 정보가 된다. 유령들이 음모를 꾸민다는 경고 역할을 하니까.

김애경이 머리를 끄덕였다.

"식민지에서 뭘 하는 것 같지?"

"응. 너 유명계 갔을 때도 세금 엄청 걷고 있었다며. 그럼 식민지를 그냥 놔뒀을 리가 없지."

"좋아. 유명계 식민지로 가자."

"어떻게?"

"어쩌긴."

김현은 각성자들이 사라진 쪽을 향해 턱짓을 했다. 각성자들은 저 멀찍이 떨어진 분절에서 나타났다가, 인근 분절로 이동하고, 다시 머리 위 먼 곳에서 발걸음을 옮겼다.

서경태가 눈을 반짝인다.

"형, 제가 따라갔다 올까요?"

"그럴래? 잠깐, 어디로 와야 되는지는 알아? 실이 저렇게 멀리까진 못 따라가."

"아차."

"그러지 말고 차원 여관 하나 잡자. 아까 보니까 많이 있던데. 거기서 경태 기다리는 게 어때?"

"그래요. 슬슬 쉬고 싶어요."

이질적인 무법성의 공간에 피로감을 느끼는 모양이다. 마침 인근 분절에 차원 여관이 보였다. 그쪽으로 몇 개의 분절을 건너뛰어 도착한 다음, 서경태가 근방 지리를 머리에 각인하고는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차원 여관에 짐을 풀고, 차원 이동 지점도 설정하고 서경태를 기다린다.

서경태는 몇 시간이나 지나서야 돌아왔다.

"후아! 피곤하네요."

"힘들었지? 고생했어."

이세희가 서경태의 어깨를 주물렀다. 피터가 1층 식당에서 황금 맥주를 받아다가 정체 모를 육포와 함께 가져온다. 서경태가 맥주를 받아들고는 단숨에 들이켰다.

"우와! 이거 엄청 맛있는데요?"

"무슨 맛인데?"

"모르겠어요. 엄청 시원해요. 뼛속까지 고드름이 차는 느낌?"

"입맛에 맞는다니 다행이네. 그건 그렇고, 어때?"

"많아요. 거의 백 명 가까이 모인 것 같아요."

"그렇게 많이? 햐, 5성 각성자가 많기는 많구나."

"네. 그리고 6명씩 묶어서 식민지로 보내는 것 같아요. 꽤 으슥한 곳에 차원문이 있더라고요."

"지키는 유령은 없고?"

"그럴 리가요. 꽤 강해 보이는 유령들이 지키고 있었어요. 6마리씩인데 그 중 하나는 가늠이 안 되는 게 7성 이상 같아요."

"뭐라고 부르는지는 못 들었어?"

"하나는 들었는데, 뭐랬더라…… 아! 회혼신이라고 지칭하는 걸 들었어요."

회혼신, 즉 7성.

하긴 8성 유령을 이 외딴 무법성까지 보낼 리가 없지.

김현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조금 이따가 시작하죠. 6개 차원문 모두를 우리가 점거합니다."

"점거해도 우리가 쓸 수는 없지 않아?"

"아니, 쓸 수 있어. 관리하기 힘들겠지만 살짝 들어가서 차원 좌표만 마련하고 나올 거야."

"몰래 들어갈 수는 없어요? 형이 유령들 시선 교란해주면 제가 들어가는 건 가능해 보이던데……"

서경태의 제안에 잠시 침묵했다.

듣고 보니 그렇다. 차원문을 아예 파괴하는 것도 생각해 보았으나 기각. 차원의 벽이 거의 없다시피 한 무법성에서는 차원문을 재건하는 게 어렵지 않으니까. 괜히 유령들에게 경각심만 일깨울 필요는 없다.

"위험하지 않겠어?"

"언제는 위험하지 않은 때가 있나요. 맡겨만 주세요."

"알았어. 내가 차원문 반응 기기 만들어 줄 테니까 그거 가져가서 적당한 곳에 설치하고 와."

"네, 형."

이번은 김현의 도움이 필수였다. 그렇지 않으면 서경태가 7성 유령을 넘어갈 방법이 없으니.

다른 이들은 무법성을 돌며 정보를 모았다. 무법성의 외계종은 뜻밖에도 호의적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적당한 성혼을 건네주어야 호의적으로 돌변했다. 묻지도 않은 것까지 시시콜콜 알려주는 것이다.

서경태와 함께 미리 봐둔 차원문 여섯 곳을 돌았다. 유령들이 경계하고 있으나 김현의 정신 공격 앞에는 장사가 없었다. 아무것도 없다고 착각하는 사이 거뭇한 선이 휙 그어졌다.

[음?]

[왜 그러십니까?]

[아니, 아니다.]

유령, 회혼신은 부정의 영음을 내보냈다.

착각이겠지.

무법성에 누가 있어 자신의 7성 탐지 계열 성혼을 뚫고 옆을 지나친단 말인가?

망자의 통곡을 너무 오래 마시지 못했다. 그래서 오는 금단 현상이 분명했다.

[놈, 걸리기만 하면 죽는다.]

[성혼을 추출해서 빙의귀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걸로 되겠어? 빙의귀로 만들어서 쥐새끼 무리에다가 던져 놓는 거다. 놈이 쥐새끼에 빙의해서 쥐새끼들을 다 먹어치우고 나면, 이번에는 쥐벼룩 무리에 빙의시키는 거지.]

[크카카카! 그거 가관이겠습니다!]

쯧쯧.

김현은 속으로 혀를 찼다. 유령들이 지칭하는 놈이라는 게 누구인지 깨달은 까닭에.

거뭇한 그림자가 차원문에서 튀어나왔다. 서경태가 손을 살짝 흔들고는 인근 분절로 스며든다. 김현도 유령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공허령을 유지하며 서경태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여섯 차원의 정보를 모조리 확보.

다음으로 취할 행동은 뻔하다.

복속 차원 직접 타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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