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헌터사-142화 (142/200)

# 142

세계수의 종언 –1-

멸망한 세계의 말로.

"뭔가 이상해요."

이세희가 하늘을 올려다보고, 흙을 한 움큼 쥐어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칙칙한 황야.

산에서 나무 조금 제거하고, 콘크리트를 치덕치덕 바른 것 같다고 보면 되겠다. 다만 하늘 높이 올라가서 보면 이런 광경이 지평선 너머까지 펼쳐진다는 게 특이했다.

사실 지구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지형이다. 하지만 이 세계에는 뭔가 다른 것이 있었다.

"조금 춥지 않아요?

"그러게."

"기온이 낮진 않은 것 같은데…… 봐요, 지금 35도에요."

"35도? 설마!"

지금 일행은 모두 백혈탑의 성혼 공방에서 만든 보물 보호복을 입고 있다. 이것만 입어도 우주에서든 심해에서든 생존이 가능하다.

김현은 슬쩍 손을 내밀어 허공을 흩어보았다. 죽은 육체건만 솜털이 올올이 곤두선다. 그리고 예리한 감각에 기이한 힘이 감지되었다.

"실제로 추운 건 아니고, 혼력 때문에 그래요."

"혼력이요?"

"네. 세계 전체에 유명 속성 혼력이 가득 차 있습니다."

유령의 힘을 피부에 와 닿으니 춥게 느껴진다는 뜻.

동료들이 그제야 납득 간다는 얼굴을 한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유명계 갔을 때랑 비슷하네요."

"세상이 까맣지가 않아서 몰랐어요."

"일단 도시부터 찾죠. 어떤 상태가 되어 있을지는 짐작이 갑니다만."

아마도 지옥.

세계의 주민들이 유령들에게 착취당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아니, 착취가 아니라 수확이라고 해야 할까? 일행은 하늘 위에서 주위를 살폈다.

"저기 뭐가 있는데요?"

"나무? 나무 맞아요?"

"맞네요. 나무에요."

3시 방향, 커다란 구조물이 보인다.

거대한 나무, 고목이었다.

척 보기에도 하늘에 닿을 만큼 거대하다. 이건 나무가 아니라 드높은 산을 보는 듯했다. 그러나 완전히 말라 비틀어져서 크기에 비해 왜소해 보인다. 나뭇잎 한 장 매달리지 않은 채 외로이 서 있었다.

그걸 보니 전생의 지식 하나가 떠오른다.

"세계수……"

"세계수? 세계수가 뭐야?"

"숲 엘프의 요람이자 도시야."

"엘프? 엘프가 있어?"

"응. 여기는 엘프의 세상인가 봐."

갈 곳은 정해졌다. 천 자락을 펼쳐 아래로 내려간다. 그리고 SUV의 형태로 만들어 세계수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형, 엘프면 보통 숲에서 살지 않아?"

"엘프마다 달라. 세계수가 있는 걸 보면 숲 엘프니까, 여기 엘프들은 숲에 사는 게 맞지만."

"왜 숲이 안 보이지? 여긴 숲이 아니라 사막 같아."

"숲 맞아."

김현은 손을 뻗어 검은 촉수처럼 변형시켰다. 그걸로 바닥을 훑어 흙을 집은 다음 서경태에게 건네주었다.

서경태가 흙을 자세히 보더니 아, 하고 탄성을 질렀다.

"이거 잿가루네요! 나무 탄 거 같은데요?"

"맞아. 얼마 안 된 것 같다."

"누가 불이라도 질렀을까요?"

"그건 모르지."

유명계의 힘은 죽은 상태를 고정시키니까. 오늘 불사르고 수백 년이 지나도 이 상태 그대로일 것이다.

김현은 바닥을 깊이 파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잿가루가 쌓인 상태가 이상했다. 꼭 지층처럼 겹겹이 쌓여 있던 것.

'설마……'

문득 든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기이이이.

바람 소리가 괴상하다. 언뜻, 앞에서 뭔가 너울거리는 듯한 환상이 들었다.

피터가 무심한 눈으로 그걸 보더니 손짓을 한다. 허공에서 빛이 번쩍이며 노란 광선이 마구 내리꽂혔다. 쾅쾅쾅 하고 폭음이 연거푸 울린다.

"유령들이네요."

"응. 여기 살던 나무들 유령 같아."

"어, 그래요? 사람 같이 생겼는데……"

"드라이어드. 나무의 정령들 있잖아. 그 정령들이 변질된 것 같아."

"아……"

세세한 건 다르지만 큰 맥락은 지구의 전승과 비슷하다. 피터도 드라이어드에 대해 아는지 머리를 주억거린다.

별안간 에일리가 픽 웃었다.

"너, 제법 세졌다?"

"응? 뭐가?"

"처음에는 괴물들 보면 벌벌 떨기 바빴잖아. 완전 너드 새끼였는데."

"내, 내가 언제!"

"그랬거든?"

피터와 에일리가 투닥거렸다. 10대 후반, 20대 초반 다운 싱그러운 모습을 보니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하긴 피터도 많이 좋아졌지. 지금도 상황을 빠르게 파악하고 광선부터 날리는 걸 보면.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에일리가 말한 것처럼 꽤 찌질했는데.

쾅! 쾅! 쾅!

나무의 망령이 주기적으로 나타났다. 그때마다 광선이 날아간다. 소란이 일면서 망령의 숫자가 늘어났으나 일행을 어쩌진 못했다.

"웃!"

김현은 그 와중에 손을 뻗어 바닥을 구르는 성혼 하나를 집었다. 김애경이 성혼을 확인하고 입맛을 다신다.

"애걔, 3성이네."

"3성이 애걔 소리를 들을 정도는 아닌데."

"그렇기야 하지만, 우리 목적은 이게 아니잖아?"

"그건 그래."

사실 달리는 차에서 손을 뻗어 성혼을 집는 것도 번거롭다. 김현이 염동력을 다룬다면 모르겠으나 어디까지나 공허혈을 이용해 손을 변형시켜 잡는 거니까.

"피터. 이제 그만해라. 내가 할게."

"네, Mr. 김."

아까부터 섬광과 폭음이 거슬렸다. 김현이 본격적으로 성혼을 발현하기 시작한다. 공허의 힘까지 이끌어낼 필요도 없다. 시선을 통해 죽음의 힘을 쏘아 보내는 것만으로 나무 망령들이 휙휙 죽어 나갔다.

세계수는 보기보다 멀었다. 워낙에 거대한 크기 때문에 거리 감각을 상실한 것 같다. 차량의 구동 장치만 복제했지 전자 기기까지 복제한 게 아니어서 음악을 들을 수도 없으니 더 그렇게 느껴진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자 세계수가 어느덧 시야 전체를 장악했다. 서경태가 앞을 보더니 소리친다.

"세계수 봐요! 유령들이 엄청 많아요!"

거리가 가까워지니 보인다.

세계수 가지마다 유령들이 깔깔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희끄무레한 형체가 이 나뭇가지에 머물렀다가 저 나뭇가지로 옮겨간다. 그때마다 나뭇가지가 부르르 떠는 것이 흡사 통곡하는 어머니 같았다.

어떠한 감정이 느껴진다.

크나큰 절망, 고통, 비탄.

'살아 있구나……'

하기야 성혼을 생산하려면 완전히 유령으로 바뀌어서는 안 된다. 원형을 유지해야 성혼을 생산한다.

그래서 유령들은 세계수에서 성혼을 추출하면서도 완전히 죽지는 않게 보살피고 있었다.

보살핀다?

아니, 그 말은 맞지 않다. 그저 목숨만 붙여놓았다고 해야겠지. 그래야 세계수도 성혼을 생산하고, 숲 엘프를 탄생시켜 새로운 자원을 확보하게 할 테니.

'빌어먹을.'

입맛이 쓰다.

22세기의 사람들이 생각나서. 저 세계수도 결국은 같은 처지 아닌가. 세계수 안에 살고 있을 엘프들도 마찬가지겠지.

"현아."

김애경이 낮은 목소리로 김현을 부른다.

"응?"

"유명계 자원 줄 끊겠다는 거, 정확히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지."

"자원이라면 결국 성혼인데 그거 설마, 여기 살아 있는 세계수와 엘프를 다 죽이려는 건 아니지?"

이제야 김애경이 하고자 하는 말을 알겠다.

가라앉은 눈으로 김애경을 주시하는 김현.

다른 일행도 설마 하는 얼굴로 김현을 본다. 자원 줄을 말린다고 해서 시설이나 폭파하고 유령들이나 족칠 줄 알았지 애꿎은 엘프들을 공격할 줄은 몰랐으니까.

솔직히 말해서 김현도 썩 마땅치 않은 일이다.

"직접 가서 봐."

"뭘?"

"엘프들 상태를. 그 종족이랑 얘기도 해보고. 그러면 뭐가 진짜 엘프들을 위한 것인지 알게 될 거야."

"너……"

"내가 예전에 22세기를 봤다고 했지?"

"응. 기억 나."

"우리가 이기지 못하면 지구도 이렇게 변해. 다른 사람들도 똑똑히 확인해 두세요. 우리가 뭘 위해서 싸우고 있는지."

소풍 온 것 같던 분위기가 삽시간에 일별한다. 피터와 에일리는 황야로 변한 숲보다 더 충격적인 게 있느냐는 얼굴이지만 김애경이나 이세희는 침묵했다. 지금까지 김현과 지내면서 가끔씩 들은 게 있었으니까.

거리가 더 가까워지자 SUV에서 내려서 걷는다. 미리 준비해온 위장막도 두른 상태였다. 그런 그들을 얕은 동산이 가로막았다.

"이거 뿌리 맞죠?"

"맞아. 엄청 크다."

세계수의 뿌리라서 그럴까? 정말이지 작은 동산 크기였다. 그런 것이 사방으로 뻗어나가 있었다.

그걸 두드려 보는 서경태.

텅텅.

두드린 건 나무뿌리인데 희한하게도 수박 두드리는 듯한 소리가 났다.

"속이 비었어요! 안으로 들어갈 수도 있겠는데요?"

"그래도 되겠다."

김현도 투시 능력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았다.

잠시 멈춰 감각을 확장.

세계수의 뿌리는 인근 지하마다 뻗어 있다. 특이한 점은 속이 텅텅 비었다는 것. 그래서 거대한 개미굴을 연상시킨다. 음침하고 축축한, 죽음의 기운이 넘실거리는.

'이래서야 뿌리 역할도 못 하겠네.'

유명계가 장악한 세상이니 사실 이게 자연스럽다.

어쨌든 뿌리를 통해 가면 세계수 중심까지 도달할 수 있다. 그게 중요했다. 유령들은 지하에서는 느껴지지 않으니 시선도 피하고.

"안으로 들어가자."

"위험하지 않겠어?"

"내가 다 보고 있으니까 괜찮아."

"하긴. 오랜만에 미궁 탐험이네. 내가 앞에 설게."

"좋아."

오랜만에 대형을 갖추었다.

선두에는 김애경과 에일리. 뒤에는 피터와 이세희. 중간에는 김현과 서경태.

저벅저벅.

뿌리 안은 축축했다. 거대한 동굴을 탐험하는 느낌이 들었다. 반면, 동굴에서는 맡기 힘든 진득한 냄새가 일행을 괴롭혔다.

"이거 곰팡이 냄새 맞지?"

"맞아. 유령 곰팡이라고 극독이야. 일반인 같으면 냄새만 맡아도 사망하겠다."

"으, 코끼리도 못 버티겠는데요?"

"그러니 유령들이 여기에 잘 안 들어오는 거지. 죽음의 기운이 너무 강해서 유령들이 좋아하는 영력도 흩어버리거든."

다만 저 멀리 세계수의 지하에서 미미한 생명력이 느껴지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저곳에 엘프들이 모여 있는 것 같은데 유령 곰팡이가 있는 곳에서 생존이 가능할까? 4성 등급 이상의 각성자라야 조금이라도 저항할 텐데……

묵묵히 나아간다. 가끔 변형된 망령들이 나타나 일행을 공격했지만 모조리 참살. 구슬픈 비명이 불쌍하긴 하나 당해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몇 시간 뒤, 드디어 세계수 지하에 도착한다.

거대한 공동.

산 하나가 들어가도 이상하지 않을 공동이다.

뚝, 뚝.

물방울이 곳곳에서 떨어진다. 그것을 보고 김현은 말을 잃었다.

이곳은 지옥이다.

"왜 그래?"

넋을 잃은 듯한 김현을 보고 김애경이 의아해하며 묻는다.

천장을 올려다보는 김현의 눈.

거기에 참담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뭐 보여요?"

일행 중 투시 계열이나 정신 계열 성혼을 가진 것은 김현 혼자.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현재 상황을 눈치 채지 못했다.

당연하다. 공동은 짙은 어둠에 휩싸여 있으니까.

단지 빛의 부재가 아닌, 깊은 절망과 고통이 생성해낸 기이한 어둠. 그 어둠은 강화 계열 각성자인 김애경과 에일리의 시력마저 가린다.

길게 심호흡을 하는 김현.

"준비하세요."

"응? 뭘?"

"내가 본 거 공유해줄게. 조금 충격적일 거야. 잔혹하기도 하고.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

"뭐가 어떻길래……"

김애경은 꿍얼거리면서도 침을 몇 번이나 삼켰다. 김현이 이토록 말하는 건 처음 보기 때문에.

이세희가 성혼을 몇 번이나 뿌려 일행을 감싼다. 정신적인 충격에서도 보호되니 좋은 선택. 서경태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고 피터와 에일리도 심호흡을 하고 주먹을 쥐는 등 나름 대비를 했다.

그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공허령을 통해 자신의 시야를 일행에게 쏴주는 김현.

너 나 할 것 없이 눈을 부릅뜬다.

"맙소사!"

"헉!"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런 짓을……"

"오마이갓!"

"쉿!"

천장을 보라.

어떤 형체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마치 포도송이와 같은 모양새.

그러나 조금은 다르다. 포도보다는 차라리 곰팡이를 연상시킨다. 곤죽으로 만들어서 반죽하고, 그것을 벽에다가 붙여놓았다고 할까.

기이한 것은 그것들이 뭉개졌을망정 얼굴도 있고 팔도 있으며 다리도 있다는 점.

뚝, 뚝.

또다시 물방울이 떨어진다.

물방울?

아니다.

이것은 눈물이다.

천장에 들러붙은 자들이 뭉개진 얼굴에서 눈물을 뚝뚝 흘린다.

피눈물. 혹은 절망과 고통이 응축되어 흐릿한 어둠을 뿌리는 물방울.

그것이 바닥에 고인다.

그리하여 한데 뭉쳐서는 어떤 보석을 탄생시킨다.

성혼.

별의 힘이, 가능성이 별에 거주하는 지성 종족의 영혼에서 응축하여 생성되는 우주 제일의 보물.

그러나 그 대가는 이토록 참혹하다.

인공적으로, 오로지 최대한의 효율을 추구할 때의 모습.

[죽……여……줘……]

절절한 외침이 가슴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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