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헌터사-145화 (145/200)

# 145

엘페리아의 성주

김현의 눈이 번뜩였다.

이 목소리.

익숙하다. 지금까지 세계수를 불태우면서 만났던 엘프 여왕들과 거의 판박이였다. 엘프 여왕들은 자신들을 자매라고 했지만, 지금 와서는 김현 일행이 진실에 접근했던 것.

동일 인물.

정확히 말하면 복사체.

현존하는 엘페리아의 모든 세계수는 단 하나의 엘프 여왕에게서 비롯되었다. 그 존재가 뒤늦게 김현 일행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강림한 것이다.

'7성.'

세계수가 7성 성혼을 생산하는 만큼 관리자도 7성이었다. 김현은 존재감을 조금 죽여 6성 정도로 줄이고 일행을 둘러보았다.

"여기 총독이 옵니다. 7성 등급이에요."

"그럼 충분히 잡겠는데? 넌 규격 외 7성이라며."

"혼자 오지는 않을 테니 그게 문제지. 어떻게 할까? 3시간만 지나면 약속한 시간이야. 곧 차원문이 열려."

"더 증원 올 가능성은 없어요?"

"있지만 제가 차단할 수 있어요."

김현은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며 대답했다.

새롭게 얻은 공허의 힘은 차원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차원문을 뚫는 것은 공허를 많이 다뤄야 하니 꺼려지지만, 뚫리는 차원문을 봉쇄하기란 쉽다.

"그럼 해보죠."

"7성 유령만 김현 님이 잡으세요. 나머진 저희가 알아서 할게요."

"형, 우릴 믿어 봐!"

김현이 생각하기에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엘페리아의 총독은 자기에게 딸린 엘페리아 출신 유령들을 데리고 올 거고, 이들은 유령계 최정예라고 할 수 없을 테니.

누가 전향자 출신에게 높은 자리와 강력한 권능을 주겠나? 쉽게 말해서 2등 전력이다.

'총독이라고 부르기도 뭣하지.'

22세기에서 총독이라고 부르려면 8성은 되어야 했으니까. 유명계 식대로 성주(星主)라고 부르는 게 낫겠다.

하늘이 꿈틀거린다.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구름을 흩으며 칙칙한 빛이 쏟아진다.

그것은 거대한 차원문.

유령들이 너울너울 춤을 추며 내려온다. 어떤 거대한 존재를 영접하듯 원을 그리며 장송곡을 부른다. 기이한 음색이 공기를 따라 가득 전파된다.

세계가 변한다. 점차 색채가 사라진다. 오로지 희고 검은 선만이 공간을 가로지른다.

온전히 유명계의 세상으로 변하는 것.

그 가운데 거룩한 존재가 강림했다.

선연한 회색. 먹을 갈아 울긋불긋 그려낸 듯한 형체. 어찌 보면 사람 같은,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입은 존재가 두 팔을 벌려 세계를 감싸 안았다.

[크다……]

이세희의 상념.

생전에 거신 성향 각성자이기도 해서일까? 성주의 영체는 크기가 컸다. 거의 세계수와 맞먹는 정도. 경배하며 돌아다니는 유령들이 시체에 달라붙은 초파리 같아 보인다.

희끄무레한 안광이 일행에게 향했다.

[너희들이냐? 내 나무들을 건드린 것이?]

[그렇다만?]

[건방진! 내 양분이 되어라!]

우우웅……

공간이 진동한다.

아니, 세계가 통곡하고 있었다.

허공에 흰빛이 알곡처럼 맺혔다. 그것이 회전하며 크기를 불린다. 거의 주먹 하나 정도로 커져서는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우박 폭풍.

순수한 영력으로 이루어진.

도시 하나쯤은 간단히 파괴할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생명체라면 개개의 우박이 터뜨리는 충격에만 휩쓸려도 단번에 혼백과 육체가 분리될 터.

[선생님.]

[네.]

별을 지키는(守星) 성혼이 발현한다. 황금빛 보호막이 일행을 뒤덮었다. 1겹, 2겹으로도 모자라 순식간에 10겹이나 중첩되었다.

그러나 성주는 차가운 비웃음을 날렸다.

[잔재주를!]

휘이이이.

처량한 바람 소리.

그 결과는 무시무시하다.

인근 지역을 모조리 두들기던 영혼 우박들이 거꾸로 하늘 위에 날아오른 것. 그리하여 한데 뭉쳐서는 거대한 창이 된다. 창이 천천히 회전하더니 이내 맹렬한 소용돌이가 되어 쏘아졌다.

역시 7성 외계종.

광역 공격을 단일 공격으로 바꾸는 과정이 숨 쉬듯 매끄러웠다. 김현을 혀를 차고 왼손을 들어 올렸다.

쒸앙!

공간을 단축하는 영력의 소용돌이. 단번에 방어막이 으깨진다.

[저항하지 마세요.]

혼력을 주입하여 버틸 수는 있겠으나 그러면 이세희에게 주어지는 부담이 너무 크다. 이세희는 적당히 방어막을 몇 겹 더 치고 물러났다.

김현의 왼손에서 시커먼 기운이 뭉클뭉클 일어난다. 방패처럼 확산되어 김현의 전면을 가렸다. 그리고 영력의 소용돌이가 거기 거칠게 쑤셔 박혔다.

눈으로 보았을 때는 강렬한 폭음이 일 것 같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물을 끼얹은 모닥불처럼 한 차례 치이익 소릴 내고는 소용돌이가 사그라졌다.

[네놈……]

그제야 김현을 인식한 성주.

김현은 속으로 짧게 혀를 찼다. 조금 전 공격을 이세희만으로 버티고 방심을 유도했다면 좋았겠는데 그게 안 되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성주가 김현의 존재를 의심했을지도 모르고.

[너로구나! 변방 차원의 대항자라는 자가!]

[그래, 나다.]

[깔깔깔! 이런 행운이!]

성주가 제 배를 잡고 큰 소리로 웃었다. 잠시 후, 웃음이 그치고 성주가 요악하게 눈을 빛냈다.

[이딴 변방 차원에서 영세토록 썩어나갈 줄 알았는데 내게 이런 기회가 왔구나! 대항자여, 순순히 네 영력과 성혼을 바쳐라! 그러면 최소한 윤회할 기회를 빼앗지는 않으마!]

[자신 있어?]

[무슨?]

[너 혼자 날 당해낼 수 있겠어? 시간 있을 때 지원이라도 요청하지 그래?]

김현은 성주의 머리 위 하늘을 보며 담담히 말했다.

성주가 코웃음을 친다.

[무슨 헛소리를! 내 공로를 다른 놈들이랑 나누라고? 회목공에서 회목왕이 될 수도 있는 기회다! 놈! 너는 내 먹이다!]

[그러다 다친다.]

[깔깔깔! 혼공지경에 올랐다고 세상이 다 네 것 같아 보이는가 보구나! 얌전히 내 먹이가 되도록 해라!]

두 손을 모으는 성주.

거대하던 영체가 빠르게 축소된다. 하늘까지 닿을 거인의 형상에서 마천루의 크기로, 고층 건물 크기로, 저택 크기로, 이내 김현과 비슷한 키까지 작아졌다.

그때마다 선명해지는 영체. 위압감과 파괴력은 줄어들지만 정교함과 집중력은 강해진다.

[오랜만에 몸 좀 풀어볼까?]

성주가 휘익 날아 발차기를 날렸다.

즉각 반응하여 몸을 뺀다. 성주의 눈이 허옇게 빛났다. 땅을 박차고 따라온다. 유령 특유의 음침한 기운이 훅 김현의 피부를 자극한다.

일행에게서 충분히 거리를 벌린 시점. 짧게 주먹을 날렸다. 거뭇한 기운이 송곳처럼 쏘아진다. 성주가 몸을 흔들어 피해낸 후 폭풍 같은 연타를 퍼부었다.

순수한 무예.

날렵하면서 날카로운 공격이었다.

김현 또한 인류의 무예를 모두 집대성한 몸. 육박전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두 팔로 방어를 단단히 굳혀 모든 공격을 받아낸다.

쌔액!

솟구치는 발.

[합!]

생전의 버릇인지 성주가 기합 소리와 함께 발을 막는다. 그리고 두 팔을 교차하여 김현의 다리를 똑 부러뜨렸다.

[제법!]

이 또한 찰나의 예지를 통해 김현의 본 미래 중 하나.

부러진 다리에서 검은 칼날이 솟구쳤다. 아니, 부러진 칼날처럼 빠르게 날아간다. 성주가 그것을 감지하고 재빠르게 머리를 뒤로 젖혔다.

칼날은 성주의 턱을 쪼개고 허공으로 날아갔다. 그나마 빨리 대처해서 이 정도였지, 조금만 늦었어도 머리에 있는 보석을 박살냈을 것이다.

[너!]

성주가 이를 갈며 김현을 노려본다.

유령치고는 상당히 생동감 있는 표정.

전투 방식도 그렇고 감정 표현도 그렇고 유령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을 보는 것 같다.

[어울리지 않게 육박전은 그만하지? 유령이면 유령답게 싸워.]

점잖게 충고하자 성주가 코웃음을 치며 다시 달려온다.

기이잉……

이번에는 뭔가 조금 달랐다.

가느다란 진동이 세계를 흔들고 있었다. 그에 따라 미약한 바람이 불어와 성주를 휘어 감는다. 성주가 무형의 힘을 껴안고서 김현에게 달려들었다.

이것이 무엇인지 김현은 잘 안다.

세계수 성혼.

정확히 말하면 세계수 성혼이 가진 공능 중 일부였다. 비슷한 힘을 가진 이들의 조력을 얻어 자신의 능력을 강화한다. 성주는 사실상 이 세계의 주인이니 그 위력은 상상을 초월하겠지.

'그래 봤자.'

김현은 냉정하게 성주와 자신의 힘을 견주고 있었다.

성주는 자신이 세계의 주인임을, 엘페리아에서 무한한 힘을 공급받는다는 사실을 믿고 있는 모양인지만 사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김현은 규격 외니까.

공허와 죽음의 혼종이면서 최상급, 아니 초특급이라는 말로도 모자란 보물과 성혼을 보유하고 있으니까.

살짝 몸을 튼다.

팔을 들어 올린다.

주먹을 뒤로 당긴다.

모든 성혼이 극도로 발현된다. 김현의 몸이 어둠에, 공허에 잠기고 흐릿한 어떤 흔적이 번지다가 영혼을 잠식한다.

부러진 다리?

이미 다 재생된 다음이었다. 김현의 모든 힘이 최고조에 도달하여 들끓었다.

'이건 뭐지?'

성주의 생각.

고향 행성을 통째로 유명계에 봉납하고 수천 년을 살아온 이래 처음 보는 성혼.

그러나 7성이다. 동급이라면 세계의 지원을 받는 자신이라면 설사 질려고 해도 질 수가 없다. 그런 자신감으로 불멸의 영체를 굳히고, 영왕의 힘으로 자신을 감싸 돌진했다.

공간이 찢어진다.

왜곡된다.

빛도 소음도 없이, 모든 것을 초월한 채 한 줄기 힘이 되어 거칠게 김현을 들이받았다.

한때 세계의 단죄라고 불렸던 강력한 기술.

거기에 맞서 내미는 주먹이 가소로웠다.

'고작 그 따위……'

이때 성주는 보았다.

김현의 주먹에서 폭발적으로 어둠이 증식하는 것을.

어둠?

아니다.

이것은 공허.

어둠이라고도 빛이라고도 할 수 없는 무엇.

그저 완전한 무.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 한편으로는 어떤 가능성조차 내포한 모순적인 상태이자 질료이며 현상인 그것.

김현을 지나친 성주.

스르륵, 아래를 내려다본다.

이상하다.

불멸이 현실화시킨 영체가 온 데 간 데 없다.

있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희미한 의식 하나가 전부.

'뭐였지?'

의식 속에서 질문이 맴돈다.

그러나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질문이 의식 표면으로 떠오르기 무섭게, 영체가 완전히 소멸하면서 의식이 촛불 꺼지듯 깜빡 꺼진 탓이다.

회오리치듯 남은 영력.

얼룩지는 공간 사이에서 영롱한 성혼 아홉 개가 투득 떨어진다.

세계수, 불멸, 영왕 등등……

유령들이 일제히 술렁였다.

[맙소사, 성주님께서!]

[거짓말!]

[어떻게 하등 종족 주제에 성주님을!]

유령의 수는 많다.

6성이 6마리, 5성이 36마리, 4성이 216마리, 3성이 1296마리.

어지간히 유명계의 중추로 올라가고 싶었나 보다. 친위대까지 유명계에서 하는 대로 6의 숫자를 맞춘 것을 보면.

"죽어!"

피터가 손가락을 튕긴다. 그에 따라 우주의 빛 성혼이 발현되며 황금색 광선이 날아가고, 섬광이 터지고, 빛의 유성우가 세상을 수놓는다.

서경태도 가세. 6성으로 오르면서 통합된 성혼은 별 그림자 성혼이다. 서경태는 피터가 쏜 빛의 뒤에서 그림자가 되어 날아올랐다. 그리고 터지는 섬광에 어둑한 칼날을 실어 2차 타격을 가했다.

에일리는 뒤에서 보고만 있었다. 그러다 유령들이 반격을 가하자 비로소 성혼을 발현한다. 겁해(劫海). 이름처럼 무시무시한 바다가 펼쳐지며 온갖 재앙이 유령들을 강타했다.

그러나 이들의 공격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강력한 공격이 있었다.

쭈앙!

뻗어나간 일직선의 빛.

극대파멸력이다.

이미 소멸한 성주조차 무시할 수 없는 필멸의 공세. 빛에 직격당한 유령들이 그대로 세상에서 지워졌다.

승기는 일행의 것.

"후우우."

김현은 길게 심호흡을 하며 몸을 가다듬었다.

'공허의 힘이 강하기는 강해.'

문제는 제어하기가 힘들다는 점.

지금도 전신이 공허에 물들었다가 안정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의식도 깜빡거렸다. 분명히 황금색 광선이 유령에게 날아가는 장면을 보았는데, 다음 기억에서는 이미 유령이 직격당하여 비명을 질렀다.

[위대하신 회령왕이시어, 당신의 권속을 도우소서!]

한 6성 유령이 비명을 질렀다. 수적으로는 우세였으나 김현 일행을 어쩌지 못하니 지원을 요청하는 것.

하늘이 느릿하게 회전한다. 희뿌연 빛이 권역을 넓혀갔다.

거기다 대고 손을 뻗는 김현. 찌그러뜨린다는 감각으로 주먹을 콱 쥐었다.

뻐걱.

괴상한 소음과 함께, 벌어지던 차원문이 팍 닫혀 버린다.

그것을 망연히 올려다보는 유령들.

사실상 여기서 다 끝이 났다.

공허로 인한 불안정을 해소한 김현까지 합류하니 당해낼 수가 없었다. 도망치는 것도 불가능. 김현이 가장 먼저 죽음의 힘으로 제약을 걸어 일정 반경을 벗어나지 못하게 했으니까.

"이제 돌아가죠."

얻을 건 다 얻었다.

7성 성혼만 해도 무려 252개. 세계수가 몇 그루 남아 있긴 하지만 예전 수준으로 복구하려면 유명계로서도 시간이 걸리겠지.

'쉬웠어.'

다른 복속 차원도 공략한다.

여기서부터는 신중하게 움직였다. 유명계도 김현 일행의 움직임에 대해 알았을 테니.

박준 일행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유명계 각성자끼리의 커뮤니티에서 오가는 정보를 많이 물어왔다. 대부분은 하잘 것 없는 정보였으나 다른 정보와 조합하면 유명계의 동향에 대해 알 수 있었다.

무법성에서 꾸준히 성혼을 파는 것도 잊지 않았다. 동시에 떠돌이 사이에서도 정보를 모았다. 그렇게 모은 정보로 유명계의 계획을 역설계했다.

대대적인 침공.

시기는 2019년 3월 1일.

이제 1달도 안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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