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헌터사-146화 (146/200)

# 146

침공 전야

"3월 1일이 확실해?"

"정보를 모두 믿으면."

"안 믿는 게 좋을 것 같아."

"동의."

유령들은 태생적으로 음침하고 음험하다. 유령들과 싸울 때는 머리싸움이 기본이었다. 김현도 그걸 실패해서 몇 번 낭패를 봤었지.

김현은 태블릿 PC에 적힌 침공 계획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한국 시간으로 3월 1일 자정 시작이다.

목표는 모가디슈.

차원문을 뚫고 강림하여, 단번에 아차원 공간으로 진입하여 백혈탑을 노린다. 여기에 참가하는 전력이 상당했다.

7성만 무려 여섯. 6성부터는 정확히 6배씩 늘어난다.

"이게 진짜 다 들어온다고?"

김애경은 회의적인 얼굴.

"가능하지. 유명계가 모은 자원을 감안하면."

김현 일행이 엘페리아에서 모은 7성 성혼만 200개가 넘는다. 나머지 다섯 세계에서는 그 정도까진 아니었지만, 여기서 역으로 유추하면 유명계가 단기적으로 모은 7성 성혼이 1000개를 훨씬 넘을 거라는 뜻이 된다.

'계산이 안 맞아.'

그래서 김현은 더욱 초조함을 느꼈다.

추출한 성혼을 모두 지구에 쓰진 않겠지만, 이걸 몽땅 쏟아 붓고 동원하는 게 고작 7성 유령 6마리라고?

꿀꺽.

불현듯 드는 불길한 예감에 마른 침을 삼켰다.

'내가 놈들이라면……'

박준 일행과 다른 각성자들이 김현에게 정보를 퍼주는 걸 몰랐을까?

그럴 리 없다. 정신 계열 성혼으로 슬쩍 훔쳐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니. 그런데도 내색하지 않는 건 일종의 반간(反間)으로 활용하려는 의도이지 싶다.

이때, 김현 자신이라면 몇 가지 사항을 속였을 것이다.

공격 시점이라던가, 공격 규모라던가……

'설마?'

처음 생각한 것처럼 8성 유령이 건너오는 것 아닐까?

만약에 그렇다면 필패. 김현 혼자서는 8성 유령을 당해내는 것이 불가능하다. 아무리 공허의 힘을 끌어내도 마찬가지다.

이걸 김애경에게 논의하자 김애경의 얼굴도 심각해진다.

"가능성이 있어."

"그렇지?"

"나 같아도 그렇게 하겠다. 생각해 봐. 3월 1일이라고 했는데 딱 하루만 더 빨리 공격해 오면? 모가디슈가 아니라 뉴욕에서 차원문이 열리면? 뉴욕에도 우리 거점이 있잖아."

"아, 그러네."

"어쩌면 내일 당장 공격이 시작될지도 몰라."

"아냐, 그건 아닐 거야."

"왜?"

"차원의 벽을 강제로 뚫으면 이상 현상이 발생하거든. 저번에 6성 각성자를 세 명 만들었던 거랑은 차원이 달라."

"그게 얼마나 지속되는데?"

"최소한 사흘. 그러니까 어떤 최악의 경우라도 우리한테 사흘이라는 시간이 있는 셈이지."

"어디 차원문이 열릴지는 모르고?"

"응. 그것까진 몰라. 사실 어디든 상관없지. 유령 놈들은 결국 백혈탑을 공격할 거야."

백혈탑이야말로 김현의 중추 거점이다. 다른 모든 곳을 잃어도 상관없지만 백혈탑을 잃으면 정말로 뼈아프다.

"백혈탑으로 직접 침투는 불가능한 거지?"

"그건 불가능…… 음……"

문득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모든 외계종의 거점은 강력한 방어막으로 보호 받는다. 이 방어막은 행성마다 갖는 차원의 벽에 비견될 정도로 강하다.

이 말을 뒤집어 말하면, 차원의 벽을 뚫을 수 있다면 이 방어막을 뚫는 것도 가능하다는 뜻.

"백혈탑 내부로 직접 침범할지도 모르겠어."

"헉, 진짜? 그러면 큰일이잖아!"

"아냐. 몰랐으면 몰라도 미리 알았으니 대처할 수 있어."

이제야 유령들의 계획을 알 것 같다.

3월 1일보다 빠르게 차원의 벽을 뚫는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생각하는 기만.

그 다음부터가 문제.

세계 곳곳에 차원문이 열리며 유령들이 쏟아진다.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는 사람들. 유령들은 이들에게 관심이 없다. 대신 김현의 거점을 장악하고 아차원 공간을 통해 강제로 백혈탑에 진입한다.

여기서 김현이 진땀을 빼는 사이 정말로 치명적인 공격이 가해진다.

8성 유령, 아마도 백라왕.

백혈탑의 진짜 주인인 백혈존의 직계. 한때 김현을 탐내 함정을 팠던 그 유령.

백라왕 정도라면 백혈탑의 권리를 강제로 뺏어갈 수도 있다. 언령 등 온갖 제약이 가해지겠으나 그건 사전에 성혼을 제물로 치른 의식으로 상쇄하면 그만.

백혈탑을 빼앗긴다면? 김현에겐 치명타. 모든 기반을 잃을 테고, 자칫 여기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무시무시하네."

김애경이 아찔하다는 듯 머리를 저었다.

"나 같으면 8성 2마리를 보낼 텐데."

"응? 무슨 말이야?"

"그렇잖아. 밖에서 1마리가 시선을 끌면 그것보다 더 확실할 수가 없거든. 우리 일행은 물론이고 동맹들도 다 불러야 돼. 그 사이 유령들이 백혈탑을 접수하면 완전히 끝이지."

"재수 없는 소리하지 마."

김애경이 눈을 흘긴다.

가만히 앉아 계산을 해본다.

유명계가 이번 일로 수집한 성혼들. 이걸로 과연 얼마나 많은 일을 해낼까 싶어서.

'애매한데……'

차원의 벽 돌파, 백혈탑 침입, 8성 유령 강림.

여기까진 충분히 가능하다. 유명계가 정말로 지구에 모든 자원을 집중시키고 있다면. 다만 8성 유령은 1마리가 될지 2마리가 될지 빠듯했다.

'복속 차원을 더 두드려야겠다.'

세계 하나만 엘페리아 수준으로 불살라도 확실히 2마리가 강림하지 못한다. 그렇게 되면 지금부터 준비해도 해볼 만 했다.

"난 드윌레에 갔다 올게."

"드윌레? 거긴 왜?"

"숨어 다니기 좋잖아. 거기라도 박살을 내놔야 할 것 같아."

"같이 가자."

"안 돼. 누나랑 다른 사람들은 할 일이 있어."

"아, 그거?"

"그래. 그거."

둘의 시선이 약속이나 한듯 한쪽 벽으로 향한다. 그곳에는 김현의 혼력 파장으로만 열리는 차원 금고가 설치되어 있었다.

차원 금고 안에 들어 있는 물건은 딱 여섯 개.

[서리왕(7★, 거신)] [태초화(7★, 시원)] [수성(7★, 천상)]

[별 그림자(7★, 암흑)] [우주의 빛(7★, 광명)] [겁해(7★, 해성)]

일행이 흡수해야 할 성혼이었다.

다만 5성 때와는 다르게 흡수한다고 무조건 등급이 오르지는 않는다. 확률이 존재했고 꽤 낮았다. 그걸 대비해 온갖 보조 보물을 준비해 놓은 다음이었다. 장작 역할을 할 7성 성혼도 같이 넣어놨고. 물론 다시 시도할 성혼도 무법성에서 구입한 다음.

"알았어. 우린 7성 승급 시도할게."

"방어 전략도 짜줘. 어차피 7성 올라가고 적응 시간 필요하거든."

"하, 진짜 바쁘다. 모가디슈 시장 자리는 다른 사람 주면 안 돼?"

"내가 믿을 게 누나 말고 또 누가 있다고. 항상 고마워."

"에휴, 알았어. 참, 동맹들한테는 아직 7성 성혼 안 줄 생각이야?"

"이번 일 끝나고. 어차피 그 사람들 아직 능력치가 부족해서 안 돼. 다 권력 다툼 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이던데, 무법성 열쇠를 구해다 팔든지 해야겠어."

언제나 그렇듯 능력치가 뒷받침이 되어야 한다. 김현 일행은 복속 차원에서 싸우고, 무법성에서도 고위 떠돌이를 잡으며 실전을 겪었지만 그들은 어느덧 안주하기 시작한 것.

한 번 따끔하게 현실을 일깨울 필요가 있었다.

김애경을 비롯한 동료들이 즉시 승급 절차에 들어갔다. 미리 만들어 놓은 거대 수조에 들어가 인공 용액에 몸을 담근다. 그 상태에서 7성 성혼을 삼키자 찬연한 빛이 쏟아져 나왔다.

"사브리나, 잘 부탁한다."

"예, 사령관님."

각성 절차가 끝날 때까지 일행의 경호는 사브리나가 맡았다. 지금은 완숙한 5성 각성자. 김현은 사브리나의 능력치를 확인하고는 물었다.

"너도 6성 도전할 생각 없니?"

"제, 제가 가능할까요?"

"충분히. 운이 없으면 실패하겠지만 최악의 경우라도 죽지는 않을 거다."

"성혼을 상실할 가능성은 있고요?"

"그래."

"빨리 결정해야 합니까?"

"가능하다면. 너도 알겠지만 조만간 유명계의 대규모 침공이 있을 예정이거든."

"그럼 하겠습니다."

"응? 아직은 시간 있어. 조금은 고민해 봐도 괜찮아."

"유령들과 사령관님의 사이는 저도 압니다. 그 침공을 이겨내지 못하면 저는 예전처럼 비참한 신세가 되겠지요. 제 동생들을 위해서라도 힘을 가지고 싶습니다."

김현은 사브리나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바위처럼 단단한 눈빛.

한철군보다 훨씬 늦게 합류했음에도 보석처럼 빛나는 의지가 그 안에 있었다.

"좋다. 지금은 내가 할 일이 있으니 사흘 후에 시작하도록 하지."

"예, 사령관님."

"너도 영육 개변으로 할 거지?"

"예. 그게 좋겠습니다."

인체 개조를 한 번 밀어볼까?

그런 생각을 했다가 그쳤다. 처음 일행이 영육 개변을 선택한 이래, 동맹 각성자도 모두 영육 개변을 골라서 그게 기본으로 되어 있으니까. 괜히 이질적인 것을 권유할 필요는 없다.

그대로 드윌레로 떠난 김현.

드윌레는 드워프의 세계였다. 세계 전체에 거대한 산맥이 우뚝 솟아 있고, 절벽마다 산을 통째로 깎아 만든 드워프들의 지하 도시가 존재한다.

아직도 원형이 남아, 전성기의 영화를 짐작하게 하는 곳.

그러나 지금은 지옥이다.

[으흐흐흐.]

[흐흑!]

[이히, 이히히!]

드워프들의 한 맺힌 울음이 토해진다.

엘페리아에서 엘프들이 유령 곰팡이와 융합된 것처럼, 드윌레에서는 드워프들이 바위 조각상에 봉인되었다.

단순히 봉인만 시킨 것도 아니다. 삐걱거리는 몸으로 서로의 몸을 깎고 있었다. 바위 조각상임에도 감각 단말이 있는 탓에 그때마다 강렬한 고통을 느낀다.

하지만 육체적인 고통은 결국에 무뎌지는 법.

그렇게 무뎌진 자들은 원래의 육체로 돌아가 강제로 접붙여진다. 이후 자식들이 성장하고, 바위 조각상에 봉인되는 모습을 보며 피눈물을 흘렸다.

[오호, 이번에는 성혼 질이 좋은데?]

[그래도 아까워. 몇 십 년은 더 뽑아먹을 수 있잖아.]

[명령이니까.]

[하긴.]

지금은 드워프들을 육체로 되돌려서 접붙이는 일에 한창이었다. 당연히 각성자들은 배제. 가끔 영혼이 너무 강하게 조각상에 들러붙은 드워프들을 처리하는 일에 투입하는 듯했다. 이면의 진실까지는 보여줄 수 없으니.

'역겨운 놈들.'

김현은 몰래 죽음의 힘을 펼쳤다.

유령들은 대항하지 못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김현의 공격을 인식조차 하지 못했다. 자기들끼리 웃고 떠들던 그대로, 햇볕에 닿는 초봄 눈처럼 스르륵 녹아 사라져 버린다.

드워프들도 대동소이했다. 마약보다 강렬한 정신 계열 성혼에 중독된 까닭에 헉헉대며 난교를 벌이다가 찰흙처럼 공간에 녹아들었다.

[고맙소……]

그 와중에도 어떤 드워프 노인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짧은 한숨을 토하는 김현.

그래도 자기 일을 잊지는 않았다. 성혼을 수거한 후, 다음 도시를 향해 움직였다.

부수고, 죽이고, 도망치고……

워낙 은밀하게 움직이는 탓에 유령들은 김현을 쫓지 못했다. 조금만 수상해도 발을 빼는데 뭘 어쩔 수 있을까. 8성 유령이 직접 오지 않는 한 김현을 잡기는 어렵다.

'성주들은 안 오네.'

엘페리아의 성주가 일격에 죽은 탓일까? 유명계는 소극적으로 반응하고 있었다.

어쩌면 7성 이상의 고위 유령들이 따로 해야 할 일이 있는 건지도 모르고.

이 점이 마음에 걸려서 지구에서도 활발하게 움직였다.

"기꺼이 참전하겠습니다."

"도움을 받았으니 도와드려야지요. 흠, 그런데……"

"대가는 드리죠. 조만간 7성 성혼을 판매할 예정입니다. 거기서 우선권을 드리겠습니다."

"오호."

"이번에도 경매입니까?"

"글쎄요. 방법은 생각 중입니다. 어쨌든 참전하시는 보람은 있을 겁니다."

"기대하지요."

이렇게 끌어들인 6성 각성자가 7명.

여기에 1명이 추가되었다.

사브리나.

충왕계로의 영육 개변을 시도하여 당당히 성공한 것.

"어색해요."

사브리나가 자기 머리를 매만졌다.

곤충 더듬이가 삐죽 나와 있었다. 몸 곳곳에 외골격이 생겼고 등 뒤에는 투명한 곤충 날개가 돋았다. 몸이 전반적으로 가벼워져서 짧은 거리를 비행하는 건 가능하다고.

"잘 어울리네. 축하해."

"감사합니다."

"최대한 빨리 적응하도록 해. 시간이 많지 않아."

"명심하겠습니다."

백혈탑의 방어 태세도 재정비한다.

성혼 공장에서 찍어낸 무구를 경비대와 치안대에 보급했다. 방어 시설을 설치하는 한편, 백혈탑 주위에 성벽 역할을 할 아차원을 새롭게 설치한다.

이제부터 백혈탑에 출입하려면 반드시 아차원을 거쳐야 한다. 유명계와의 전투도 여기서 벌어지겠지.

"묘하네, 여기."

적응 훈련을 마치고 나온 김애경의 감상이었다.

"그렇지?"

"무슨 세계가 이리 납작해? 2차원 공간도 아니고."

"이런 곳이 유령들과 싸우기 좋거든."

김현은 의도적으로 아차원 공간을 납작하게 만들었다.

빈대떡과 비슷하다고 할까.

평면적으로는 넓은데 높이가 고작 3미터에 불과했다. 겉보기에는 하늘도 있고 땅도 있지만, 비행하여 올라가는 것도 땅을 파서 들어가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래? 뭐, 네가 알아서 잘 했겠지."

"유명계 각성자들은?"

"너도 참 어지간하다. 120명 중에 99명은 수락했어. 21명은 거부했고."

"거부는 용납 못해. 내가 알아서 할게."

"너……"

"신경 쓰지 마. 죽일 생각은 없어."

김애경이 복잡한 눈으로 김현을 보다가 한숨을 폭 쉰다. 유명계 각성자들을 격리해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를 한 다음이니까.

'이것만으로는 부족해.'

생각 같아선 각국에 원군을 요청하고 싶지만 믿을 수 없다는 게 문제. 돕겠다고 나선 각성자가 돌변하여 등에 칼을 찌르는 것이 더 무섭다.

자동화 방어 시설에 치중하는 한편, 백혈탑 내부도 손을 보았다. 모종의 함정을 설치하고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백혈탑 내부의 핵심 설비는 모조리 빼내 모가디슈 모처 아차원 공간에 숨겨 놓은 것.

실로 많은 자원이 들어갔다. 이번에 벌어들인 7성 성혼 대부분을 털어 넣었다고 보면 되겠다.

그리고 2월 26일.

지구의 하늘 전체가 우중충한 회색빛으로 물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