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헌터사-147화 (147/200)

# 147

유명계의 침공 –1-

1005곳.

차원문이 열린 장소의 숫자였다.

모두 김현의 거점들이 있는 장소. 동맹 각성자들에게 받은 1000곳에 연차도, 킬리아 섬, 아이티, 시리아, 모가디슈, 이렇게 해서.

여기까진 예상했던 대목이다.

김현은 미리 만들어둔 차원 주시자의 눈을 통해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사, 살려주세요!"

"으아아아!"

거점들 대부분은 인적 드문 곳에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근방을 지나던 시민들이 비명을 질렀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유령들을 보고 급히 차를 돌린다.

다행히 유령들은 시민들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김현의 거점을 둘러싸고는 영체를 송곳처럼 변형시킨다. 그리고 마구 두드리며 아차원 공간을 찢기 시작했다.

"다행이다."

옆에서 김애경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김현은 휘하의 모든 병력을 백혈탑 방어 공간에 집중했다. 따라서 시민들을 보호할 여력은 없었다. 유령들이 시민들을 공격했다면 앞으로 행보에 작지 않은 돌부리가 됐겠지.

"아깝네요."

피터의 말.

김현이 보는 정보는 일행 전원에게 공유 중이다. 피터는 공격 받는 성혼 농장을 두고 말하고 있었다.

"저거 만드느라 고생 많이 하셨잖아요."

"어쩔 수 없지. 다시 만들면 돼."

성혼 농장의 모든 설비 또한 철수했다. 하나하나가 귀중한 성혼 설비니까.

안개 공간 말고는 특별한 방어 체계가 없다. 이윽고 성혼 농장에 작은 구멍이 생겼다. 바퀴벌레 한 마리 들어가기 힘들 정도의 구멍이지만 유령들에겐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유령들이 악다구니를 부리며 성혼 농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파괴.

[으하하하!]

[크핫!]

[우흐흐!]

오직 안개만이 존재하던 공간에 이질적인 힘이 번진다. 회색의 음침한 기운이 안개를 대신한다. 유채색이 세계가 점차 무채색으로 물든다. 단순한 파괴를 넘어 아예 자기들이 써먹게끔 변형시키는 것.

김현은 그걸 보고 입맛을 다셨다. 넘어온 유령들이 대개 3성 등급의 하급 유령이었기 때문이다.

'교활하기는.'

더구나 대부분의 성혼 농장에 구멍을 뚫었음에도 1백 개 정도에만 유령들이 들어왔다.

어차피 처음부터 이걸로 득을 볼 생각은 아니었으니.

쥐고 있던 단추를 꾹 눌렀다.

푝.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1005곳의 안개 공간에서 일제히 섬광이 번뜩였다.

천상의 빛 폭탄.

고전적인 함정이다. 가까운 거리로 적들을 끌어 들여서 폭탄을 기폭하는.

유령들이 비명도 없이 녹아 스러졌다. 이것으로 돌진했던 유령들은 제거했지만 그래봐야 새 발의 피. 전체 규모와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별로 재미가 없어 보이는데?]

뻘건 눈의 흡혈귀가 말한다.

6성, 흡혈귀들 말로는 성혈의 흡혈귀.

내용물은 다르다. 불사계에 있을 블러드 공작이 정신을 연결하여 재미있다는 듯 전황을 살펴보고 있었다.

옆에서 달짝지근한 소리가 퍼진다.

[여한테 도와달라고 하지 그려무나? 반편이 죽은 것들 따위, 아름다운 이가 이끌 군세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사정은 비슷했다.

릴리스는 6성 서큐버스 악마에게 자신을 연결했다. 릴리스의 비서랍시고 파견된 서큐버스는 릴리스와 연결되어 있든 연결되어 있지 않든 김현을 유혹하려고 들었다. 시도 때도 없이 달라붙어 죽은 육체를 어루만지기 일쑤였다.

오늘, 유명계의 침공을 기점으로 차원의 벽이 심각하게 얇아진 것이다. 지구 곳곳에서 6성 외계종 출현이 보고되고 있었다.

'지금은 유명계에 집중하자.'

유명계야말로 가장 큰 위협이니까.

[끼에엑!]

[캬악!]

유령들이 질러대는 괴성이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다.

"나가 보죠."

조금 전 터진 폭탄은 김현이 기껏 만들었던 안개 공간까지 무너뜨렸다. 이제 백혈탑으로 침공하는 경로는 단 한 곳밖에 남지 않았다.

모가디슈.

백혈탑의 물리적 좌표가 위치한 그곳. 정확히 말하면 반쯤 아차원에 걸쳐 있지만 이곳을 통해 백혈탑을 보호하는 아차원으로 진입이 가능하다.

문을 열고 나갔다. 넓고 넓은, 반면에 높이는 고작 3미터에 불과한 기이한 공간이 펼쳐진다.

뭇 시선이 김현을 향했다.

모가디슈의 경비대와 치안대.

이 중 나름 정예한 이들만 끌어들였다. 나머지는 인근 도시로 모가디슈 시민들을 인솔하여 대피한 상태였다.

"두렵나?"

가장 먼저 던진 한 마디.

이때를 위해 정신 교육을 반복해서 실시했다. 피터와 에일리가 처음에 받았던 환상 교육은 기본. 김현이 모가디슈를 획득한 후 몇 달이나 지났고, 당시의 시민들은 어엿한 전사로 거듭났다.

"아닙니다!"

김현은 손을 거의 놓고 있다시피 했지만 사브리나와 자경단 출신 각성자들이 교육을 잘 한 모양이다. 쩌렁쩌렁한 외침이 아차원을 강타했다.

"잠시 후, 10분만 지나도 유명계의 유령들이 우리를 공격해 올 것이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본다.

수가 많지는 않다. 기껏해야 1만 명. 적어도 수십 만을 동원할유명계에 비교하면 너무나도 적은 수다.

대신 장비가 극도로 충실했다. 전신을 최하 4성 등급 무구로 도배를 했으니까. 아차원에 설치된 온갖 방어 설비도 김현의 군세를 보조한다.

"물러날 곳은 없다. 작년 10월을 기억하라. 지옥 불꽃을 기억하라. 우리가 물러난다면, 그래서 모가디슈가 함락당한다면 똑같은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뒤에 대고 손짓을 하는 김현.

납작한 차원의 하늘 전체가 일렁인다. 그리고 끔찍한 장면들이 교차되어 나타났다.

곰팡이가 된 엘프, 조각상이 된 드워프, 거름이 되어 썩어가는 수인들……

각성자들이 아랫입술을 꽉 깨문다.

김현은 이번에 유명계의 복속 차원을 공략하면서 얻은 정보를 허투루 쓰지 않았다. 기밀만 빼고는 모든 영상을 공개했다. 자연히 김현의 휘하 각성자들은 물론, 지구 전체의 유명계에 대한 적대감이 올라갔다.

"유령 놈들을 막아야 한다! 두려워하지 마라! 방어만 성공하면 우리의 승리다!"

"우아아아!"

"우아아!"

함성을 지르는 각성자들.

강화 계열 각성자들이 앞으로 나선다. 그 주변으로 변환 계열이나 신속 계열 각성자들이 줄을 선다. 미리 구성해둔 편제에 맞게 진형이 완료되었다.

김현의 세력만으로는 불가능한 숫자. 동맹 각성자들이 대거 지원해 온 까닭이다. 처음에는 단순한 거래 관계였으나 계속해서 관계가 깊어진 까닭.

쿠쿵!

하늘 저 편이 웅웅거렸다.

정면, 세계의 끝.

거대한 차원문이 설치되어 있다. 푸르게 회전하는 차원문이다. 그곳을 통해 현실 지구의 하늘이 엿보였다.

하늘 중심에서 뚫린 차원문을 통해 유령들이 쏟아지는 광경도.

[크케케켁!]

[키키킥!]

유령들이 폭발하듯 늘어난다. 다른 곳이 모두 막힌 까닭에 여길 통해 공간 이동해 오는 것 같다.

누군가 눈살을 찌푸렸다.

"많다……"

그러나 수의 이점은 방어 차원으로 들어오는 순간 상실된다.

차원문을 통해 해일처럼 밀려드는 유령들.

3미터의 높이가 유령들의 움직임을 3차원에서 2차원으로 떨어뜨렸다. 본래는 비행과 지저 이동이 자유스러운 유령들. 심지어 자기들끼리 겹쳐지기도 했던 유령들. 이제는 인간과 마찬가지로 땅바닥에 붙어 서로의 영체를 밀어대며 싸워야 했다.

[영혼을 내놓아라!]

5성 유령이 거칠게 선두에 부딪친다.

아니, 거칠다는 건 눈의 착각.

부딪치기 직전 수십 갈래로 흩어지며 정면의 강화 계열 각성자를 스치고 지나가려고 한다.

그것을 막은 건 김현이 설치한 자동화 방어 장치.

흰 빛이 유령을 직격했다. 그 덕에 유령의 영력이 일부 변환되며 물리적인 실체가 생긴다. 당혹한 감정이 영음으로 흘러나오고, 강화 계열 각성자가 들고 있던 도끼로 유령의 머리를 찍었다.

[케엑!]

시기적절하게 도끼가 빛을 뿜었다. 유령이 두 갈래로 갈라지더니 완전히 소멸해 버린다.

각성자가 도끼 자루를 쥔 손에다 침을 퉤 뱉었다.

"별 것도 아닌 놈이!"

비슷한 광경이 사방에서 펼쳐진다.

3성이나 4성, 5성 유령으로는 방어선을 뚫는 것이 불가능했다. 입체적인 기동이 불가능하기에 더 그렇다. 유령들은 대부분 어지러운 움직임으로 눈을 현혹시키고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는 전법을 구사하는데, 지형 특성 상 처음부터 막혔기 때문이다.

유령들이 해일처럼 꾸물거리며 덮쳐 와도 마찬가지였다. 7성 성혼 수백 개를 쏟아 부은 방어선은 실로 엄청났다. 각성자들의 체력을 효과적으로 재생시키고, 유령들을 강제로 현실에 고정하는 한 편 한꺼번에 덮쳐오지 못하게 막았다.

결국 유령들의 눈에 다급한 기색이 떠오른다.

[안 돼! 돌파할 수 없어!]

[너무 강해!]

[고깃덩어리들 주제에!]

지형의 장점은 확실히 컸다. 유령들이 딱히 제대로 된 전술을 구사하지 않는다는 점도 한 몫을 했고. 비록 높이는 낮으나 넓이는 넓은 세계이니 길게 학익진을 벌여 포위했으면 김현도 난감했을 것이다.

구오오오.

이때 뒤쪽에서 긴 울음이 터졌다.

현실 세계였다면 듣는 이들의 심장이 멈췄을 정도로 날카롭고 소름끼치는 소리.

각성자들이 숨을 죽였다.

벽처럼 몰려 있던 유령들이 주춤주춤 양쪽으로 갈라진다. 그렇게 커다란 길을 만들고, 그 통로를 통해 여섯 유령이 천천히 날아왔다.

모두가 까만 색.

생김새는 각양각색이다. 삐꺽한 꺽다리도 있고 뚱땡이도 있으며 호리호리한 몸매에 머리가 둘 있는 자도 있다. 다만 비슷한 점은 존재했다.

유독 시커먼 무기를 하나씩 들고 있다는 사실.

검, 창, 활, 도끼, 망치, 채찍.

유명계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면서 저들의 이름 또한 알게 되었다. 침공이 이뤄지면 대면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으니.

하나씩 이름을 불러본다.

"흑검공, 흑창공, 흑궁공, 흑부공, 흑퇴공, 흑편공."

저들의 본체는 각각의 무기다. 흑인왕이 칼날로 된 영체를 가진 것처럼, 저들은 무기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면 되겠다.

놈들이 웃는다.

아니, 흘리는 영음이 그렇게 느껴졌다.

[오랜만이군, 선지자여.]

"날 아나?"

[알지. 명천의 우물, 그곳에 우리 또한 참관하고 있었으니.]

"그래?"

[그렇다, 선지자여. 이제 길고 긴 도망자의 나날도 끝이 났다. 운명을 받아들여라. 거대한 원을 받아들여 숙명에 헌신하라. 그대는 할 만큼 했다.]

[흑인왕께서도 그대를 중히 쓰실 것이다.]

달래듯 회유하는 여섯 유령.

김현은 짧게 냉소를 터뜨렸다.

유명계가 자신을 회유하려고 한다?

복속 차원을 공격하기 전이었다면 모르겠으나 지금 와서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그러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

"얼척 없는 소리 말고 덤비기나 해라."

[호오, 선지자 혼자 우리 다섯을 감당하겠다고?]

"충분하지. 엘페리아의 성주도 내 손에 소멸했으니까."

[선지자여, 그런 얼치기와 우리를 동렬에 놓지 않는 것이 좋다. 그런 얼치기는 우리 중 최약자도 당해낼 수 없으니.]

"자의식 과잉 짓거리는 그만하고. 내가 보기에는 너희 중 최강자도 엘페리아의 성주보다 약해 보이는데?"

[감히!]

흑검공이 고함을 지른다. 엘페리아의 성주를 2등 유령이라 얕보는 자들다운 반응.

저벅.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각성자들이 눈치 좋게 양 옆으로 갈라진다. 자연히 여섯 유령과 김현의 대치 구도가 완성되었다.

검은 도끼가 부르르 떨린다. 인간으로 치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고 할까. 그 와중에도 옆에 선 검은 채찍이 그 끄트머리를 살랑거리고 있었다. 은밀하게 탐지 성혼을 발현하는 것이 보였다.

[교활하구나, 선지자여.]

뒤쪽에 숨겨둔 일행의 자취를 찾아낸 것 같다.

끼기기긱.

검은 활이 삐걱대며 올라갔다.

그리고 토해내는 검은 섬광.

쭈아앙!

물론 이세희의 방어막에 막혔다. 방어 장치가 작동하려 했으나 억눌렀다. 아무리 성혼을 쳐발랐어도 7성 성혼을 막기란 불가능했으니.

흑편공이 차가운 영음을 날렸다.

[왜, 뒤에 숨겨놓고 기습하면 될 것 같았나? 안타깝지만 우리가 준비해 온 건 이게 다가 아니다.]

동시에 저 앞쪽 차원문이 크게 한 번 일렁였다.

유령 여섯이 튀어나온다.

흰 수염, 흰 머리칼, 흰 눈, 흰 귀, 흰 코, 흰 입술이 특징적인 유령들.

백염공, 백발공, 백안공, 백이공, 백비공, 백순공.

백라왕의 휘하 7성 유령들이다.

순식간에 열둘로 늘어난 전력.

김현은 순간 아찔함을 맛보았다.

흑검공이 이죽거렸다.

[어떤 계략도, 어떤 의외성도 압도적인 힘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법. 어떠냐?]

사위가 차가워진다.

각성자들이 암담함에 젖은 눈으로 김현을 보고 있었다.

침착한 것은 오로지 김현과 그 일행 뿐.

"할 수 있겠어?"

"해야지."

"믿으세요."

"우리만 믿어, 형!"

"이길게요."

"걱정 말고 들어가 보세요."

김현은 한 차례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몸을 돌려 백혈탑 안으로 들어갔다.

[무슨……]

당황하여 김현의 뒷모습을 주시하는 유령들.

그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공격을 날렸다.

"백라왕에게 전해라. 빨리 오라고."

침묵.

무겁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던 유령들이, 일순 기세를 잃어버리고 깊이 침잠한다.

그만큼 정곡을 찔렸다는 뜻.

마지막으로 머리만 틀어 새하얀 미소를 지어주었다.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마라."

끼이익.

문이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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