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8
유명계의 침공 –2-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흑편공이 내민 모르쇠였다.
영음만 들으면 진실이 담겨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김애경은 짧게 조소했다.
"비겁하군. 졸렬하기도 하고."
[뭐라고?]
"유령 새끼들이 다 그렇죠, 뭐."
서경태가 까만 장검을 빙글빙글 돌리며 앞으로 나왔다.
7성 등급의 보물, 멸광검.
유령들이 서경태를 보며 조소했다.
[어처구니가 없군.]
[이제 갓 혼공지경에 오른 애송이들이 거들먹거리는 꼬락서니라니……]
[너희들도 제법 실력 있는 자들이로구나.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려라. 위대한 육존께 충성을 맹세한다면 구원은 잊고 너희를 영원한 지혜의 길로 인도하리라.]
[썩어빠질 육체 따위 벗어던지고 불멸을 손에 넣음이 어떠냐?]
이 와중에도 회유할 마음이 드나 보다.
서경태가 기운차게 왼손 중지를 들어올렸다.
"덤벼!"
잠시 침묵.
흑검공이 어둑한 눈을 빛내며 뇌까렸다.
[굳이 소멸을 택하겠다면 도와줄 수밖에……]
유령들이 길게 옆으로 늘어선다.
무려 열둘의 7성 등급 유령.
그들이 뿜어내는 기세가 공간 전체를 싸늘하게 달군다. 각성자들이 기세에 짓눌려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 가운데 뭇 유령들이 기이한 비명을 지르며 열두 유령을 응원했다.
서로를 한 번씩 보는 일행.
숫자로 따지면 압도적으로 불리하고, 7성 각성자가 된지 얼마 안 되었다는 단점이 있지만 이길 자신이 있었다.
훈련했으니까.
적응 기간 동안, 다섯은 김현이 설치한 시간 조정의 방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면서 가상현실 훈련을 통해 열두 유령과 싸웠다.
때로는 흑검공 패거리와, 때로는 백염공 패거리와, 또 어떨 때는 그 둘을 함께 묶어서.
김현이 아는 모든 미래 정보와 무법성에서 수집한 정보를 섞어 재현한 참이다. 진짜 상대와 비교해도 얼마 떨어지지 않을 터.
[끝이다!]
흑검공이 성급한 영음을 토하며 공간을 가로지른다.
사람 같던 형상은 사라졌다. 불길한 검 한 자루만 죽음의 선을 그렸다.
앞으로 나서는 것은 김애경.
서리왕 성혼이 극도로 발현된다. 얼음 방패가 흑검공을 막았다. 동급의 성혼이니 어렵지 않은 일. 그 틈을 타 그림자 뒤에서 묵색 창이 불쑥 솟았다.
"흥!"
위험한 일격이지만 뒤를 돌아보지도 않는다.
오로지 서리왕 성혼만 발현하여 막아내는 김애경.
묵색 창이 번들거리며 서릿발 같은 광채를 토했다. 일점으로 쏘아져 방어를 뚫으려 했으나 불가능. 시기적절하게 공격 부위에 황금색 방어막이 생겨났으며, 김애경이 슬쩍 몸을 틀어 일점 공격을 흘려보낸 탓이다.
절묘한, 최소한의 힘만으로 막아내는 방어술.
김애경이 오른손으로 덥썩 흑검공을 붙잡았다. 태초화가 타오르고 있었다. 날카로운 힘이 태초화를 가르고 김애경의 손바닥에 상처를 낸다. 뼈가 보일 정도로 심각한 상처였으나, 정작 제대로 피해를 입은 것은 따로 있었다.
꽝!
낮은 폭음.
[크아아악!]
찢어지는 비명.
흑색의 검이 몸부림을 친다. 그 주변에서 투명한 폭발이 연거푸 일어나고 있었다. 김애경이 이 짧은 순간에 극대파멸력을 터뜨린 것.
[흑검!]
[피하게!]
까만 무기들이 다급하게 날아든다.
김애경의 얼굴에 짙은 냉소가 어렸다.
김현이 흔히 지어보이는, 바로 그 웃음을 닮은 표정.
난도질당하기 직전 두 팔을 펼친다. 그리고 김애경의 전신이 투명하게 변했다가 화려한 폭발을 일으켰다.
콰콰쾅!
[끄윽!]
[컥!]
전 차원계를 통틀어 가장 위력적이라고 하는 극대파멸력.
이것은 다루기 어려운 만큼 극도로 파멸적이다. 하물며 4성 때부터 다루었고 7성에 도달한 지금의 김애경이라면 더 그렇다.
흑검공 패거리 전원이 타격을 입고 날아간다. 쫓아가서 연타를 먹였으면 더 좋았겠으나 바로 이 때 백염공 패거리의 반격이 날아왔다.
삐이익!
날카롭게 울리는 이명.
흑인왕 휘하 유령들이 구현 계열 성혼으로 유명하다면 백라왕 휘하는 정신 계열 성혼으로 유명하다. 일행의 뇌가 울리며 환상이 의식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이 정도는 가상현실 훈련에서 겪은 다음. 황금색 빗물이 우박처럼 내렸다. 모든 환상이 산산이 깨지고 이명도 작아지다가 소멸된다.
[크억!]
그 사이 울리는 비명.
서경태가 백염공의 목 뒤에 검을 찔러놓고 있었다. 백염공이 발악하며 정신 공격을 날렸으나 서경태가 분신을 만들자 엉뚱하게도 분신만 때리고 만다.
더구나 피터가 전력으로 우주의 빛을 쏟아냈다. 우주의 빛은 서경태건 백염공이건 가리지 않고 공격했다. 이때에도 서경태를 타격하는 공격은 모조리 분신에게 흡수되고 있었다.
결국 백염공은 그 자리에서 소멸. 서경태가 7성 성혼을 챙기고는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
[노옴!]
[죽어!]
돌아오는 서경태에게 원거리 공격이 쏟아진다.
시커먼 번개가 세상을 수천 차례나 가르고, 뼈처럼 흰 바람이 해일처럼 밀려온다.
말 그대로 압도적인 힘.
이세희의 수성 성혼만으로는 견뎌내기 힘들 법한.
이때를 상정한 훈련 역시 있었다.
에일리가 앞으로 나서서 두 팔을 벌렸다. 벌린 팔 사이에서 물거품이 부글거리며 일어난다. 물거품은 금세 파도가 되고, 격랑이 되고, 미친 해일이 되어 정면을 휩쓸었다.
정면 대결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소용돌이의 힘을 이용한다. 원심력으로 상대의 공격을 끌어들이고, 크게 몇 바퀴 회전시킨 다음 돌려보내는 것.
여기에는 이세희의 보조가 뒤따랐다. 아무리 에일리가 뛰어난 각성자라고 해도 혼자서는 한계가 있으니.
결국 수천 갈래의 공격이 모조리 돌아가고 말았다. 비록 유령들을 맞추지는 못했으나 내심 각성자들을 얕보던 유령들로서는 충격적인 결과.
[크윽!]
[꺽!]
그러나 진짜는 그 안에 숨어 있었다.
들끓는 겁해 안에 숨어 쏘아진 두 갈래의 공격.
김애경의 멸망포와 서경태의 은신.
멸망포는 흑편공을 완벽히 소멸시켰다. 서경태는 백발공에게 검을 꽂았다. 피터 역시 후속타를 멋지게 성공시켜서, 순식간에 두 유령이 성혼 한 줌으로 변하고 만다.
[이, 이 하등 생물들이……]
분노하여 시퍼런 안광을 흘리는 유령들.
김애경은 가볍게 어깨를 풀었다.
서경태가 손목을 주무르는 것이 보인다. 벌써 둘이나 소멸시켰으니 득의해 할 법도 하지만 얼굴이 얼음장 같았다.
[모두 조심해요.]
초소형 정신 감응기를 통한 이세희의 경고.
지금까지는 유령들이 방심하고 있어서 쉽게 갔다. 이제는 다를 것이다. 유령들도 멍청이는 아니니까.
[준비 됐어요.]
피터의 전언.
에일리도 슬쩍 고개를 끄덕인다.
동시에 발을 내딛는 둘.
겁해와 우주의 빛이 어우러졌다.
2차전이 시작되었다.
***
김현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까만 구멍이 눈에 들어온다.
차원문.
원래는 백혈탑에 설치된 유명계 승천의 문이었으나 김현이 개조한 이래 일만 세계로 넘어갈 수 있는 차원문 생성기가 되었다.
'언제 올 거냐?'
속으로 물어본다.
처음에는 단순한 예측이었으나 지금은 확신이 되었다. 이것 말고 유명계가 김현을 확실하게 무너뜨릴 방법이 없으니.
슬쩍 밖을 내다본다.
일행은 잘 싸우고 있었다. 벌써 유령 셋이 살해당한 다음 아닌가. 비록 유령들이 정신을 차린 까닭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는 중이지만.
괜히 백라왕에 대해 언급한 걸까?
노림수가 있었다. 이 노림수는 김현의 복속 차원 공격이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다는 뼈아픈 통찰에서 비롯되었다.
아슬아슬했다.
8성 유령이 하나만 온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래서 유령들의 계획을 꿰뚫어 보았다는 듯 허세를 날린 것.
우웅……
불이 꺼지고 어둠에 잠긴 백혈탑 안.
갑자기 백혈탑 전체가 진동한다. 아울러 머리 위 저 높이 떠 있는 차원문이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차원문 가동을 정지하라.]
[정지 완료, 실패. 정지 완료, 실패. 정지 완료, 실패……]
김현의 영음에 제어 인공지능이 답한다.
[명령을 실행할 수 없습니다. 차원문이 제어되지 않습니다. 제로 프로토콜을 실행합니까?]
[아니, 됐어. 대신 배틀 프로토콜 실행해.]
[예, 알겠습니다.]
제로 프로토콜.
김현이 굳이 유령들에게 백라왕의 존재에 대해 언급한 이유.
가볍게 목을 좌우로 꺾었다.
이제부터는 진검 승부.
어디로 도망칠 수도 없다. 혼광 악어에게 그랬듯이, 유명계로 끌려갔을 때나 릴리스에게 그랬듯이 승급하여 위기를 넘기는 것도 불가능하다. 오로지 지금까지 준비한 패만으로 대처해야 한다.
고오오오.
분위기가 고조된다.
더 정확히 말하면 백혈탑 내부의 혼력이 들끓고 있었다. 그리하여 울리는 진동이 사방으로 번진다.
유령들이 몸을 떨었다.
김현에게 세뇌된 유령들. 이들도 어떤 감각을 느끼는 중이다. 그들로서는 상상하기도 힘든 거대한 존재가 이 넓고도 좁은 탑에 거체를 들이밀고 있다는 사실을.
넙죽 엎드리는 그들. 기이한 파장을 발하기 시작한다. 그들이 외쳐대는 무언의 함성이 김현의 뇌를 좀먹으려 발악했다.
[경고, 경고. 백혈탑의 운영 인력을 방출하거나 소멸시킬 것을 권합니다.]
[됐어.]
[경고, 경고. 백혈탑의 운영 인력이 전향할 위험이 있습니다. 탑주의 신변에 위협이 생길 가능성이 증가합니다.]
[놔두라니까.]
제로 프로토콜을 실행한다면 다 필요 없는 일.
김현은 마음속으로 칼을 갈았다.
관리 인공지능이 그제야 잠잠해진다.
그 사이 차원문의 회전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음침한 회색 물결이 광기를 머금으며 떨어진다. 유령들이 광기에 젖어서는 더욱 소리 높여 장송곡을 불렀다.
마침내 차원문의 회전이 극에 달했다.
완전히 열린 차원문.
소용돌이가 아닌 빛나는 쟁반을 보는 듯하다. 백혈탑 전체가 쩌렁쩌렁 울음을 터뜨렸다.
한 존재가 내려온다.
벌거벗은 여인.
대리석 질감의 허연 피부와 그 위를 주행하는 까만 핏줄이 이질적인 그녀.
백라왕.
백라왕은 백태 낀 듯 생기 없는 눈을 들어 김현을 보았다.
[오랜만이구나, 선지자여.]
"그러게. 잘 지냈지?"
[푸흐흐.]
지구인의 표정을 빌려 김현을 비웃는 백라왕.
[이제 와서 자비를 구걸하려는 것이냐? 소용없다. 육존께서도 네 입망을 불허하시기로 하였다. 너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영원한 절망과 공허뿐이다.]
"어떻게 하려고?"
[네게서 모든 성혼을 추출할 것이다. 그러나 너는 기이한 종족으로 변화하였으니 죽지는 않겠지. 네놈을 명천의 우물에 박제하겠다.]
그게 무슨 처벌이 된다는 거지?
이어지는 웃음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명천의 우물은 우리 세계의 근원이자 종언. 그곳에서 네 죽음의 힘은 증폭되고 강대해져 폭주할 것이다. 그리하여 너는 거대한 멸망의 괴수로 변하겠으나, 동시에 명천의 우물에서 진정한 종말을 맞이하기까지 영원히 목마름과 배고픔에 시달리며 고통 받겠지! 그렇게 토하는 네 아이들을, 우리가 즐거이 포식하도록 하겠다!]
이제 무슨 소리인지 알겠다.
김현을 명천의 우물에 매달아 놓고 망자의 통곡을 뽑아내겠다는 소리다. 일단 박제된 이상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하고, 재료가 될 힘은 무한히 공급되니까.
"그게 쉬울까?"
되묻는 김현.
관리 인공지능이 경고를 발했다.
[배틀 프로토콜 준비 완료, 실행합니다.]
윙윙윙.
백혈탑이 변형되기 시작했다.
천장이 내려앉는다. 차원문이 강제로 철거되었다. 모든 힘의 공급이 끊기는 것은 물론 차원문의 술식을 이루던 보석, 희귀 금속, 힘의 결정체 같은 것이 조각조각 분리된다.
그것들이 아래로 내려오고, 옆으로 배치되며 새로운 술식을 이룬다.
기온이 올라갔다.
온화한 빛이 백혈탑 전체를 내리쬔다. 유령의 힘을 억제하는 성혼이 발현된다.
거대한 덫, 혹은 함정.
여기서 끝이 아니다. 자동 방어 설비가 수도 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돈으로 떡칠한, 7성 성혼보다는 약해도 6성 성혼보다는 강력한 공격을 퍼붓는 기계들.
이것이 배틀 프로토콜의 정체였다.
순식간에 본래 힘의 1/3 밖에 발휘할 수 없게 된 백라왕. 더구나 백혈탑이 완전히 닫힌 까닭에 유명계로 돌아갈 수도 없게 되었으니……
이것은 역의 경우도 성립한다. 유명계에서 새롭게 지원이 올 수도 없다는 뜻.
[이게 전부냐?]
당황해할 만도 하건만 백라왕은 여유로웠다.
[고작 이 정도 준비로 그리 위세를 떤 거냐?]
"고작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만. 넌 여기서 확실히 죽는다."
[그건 내가 해야 할 말이다. 그렇지 않나, 흑인왕?]
흑인왕?
눈살을 찌푸릴 때, 백라왕의 그림자가 불길하게 길어졌다.
그림자가 어떤 형상을 갖춘다.
전신에 까만 칼날이 돋은 꼽추 노인.
[십분 동감하네, 백라왕.]
처음부터 백라왕은 혼자가 아니었던 것.
김현의 눈이 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