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헌터사-149화 (149/200)

# 149

유명계의 침공 –3-

'결국 이렇게 되나.'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자.

7성 각성자가 8성 외계종을 이길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아무리 공허의 형상과 한 차례 마주했고 공허의 힘을 일부 끌어낼 수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규격 외의 성혼? 규격 외의 보물?

7성과 8성 사이의 간극에는 우리 은하와 안드로메다 은하 정도의 거리가 있었다.

휘이잉.

출입을 봉해 놓았으나,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두 존재가 백혈탑 안으로 들어왔다.

흡혈귀 한 마리, 서큐버스 한 마리.

백혈탑 내부가 불길하게 요동치는 것은 신경도 쓰지 않는 모양. 자기 부하가 여기서 죽어도 괜찮다는 태도다.

[아름다운 이여, 여의 도움을 받지 않겠느냐?]

[네년, 릴리스!]

[우리와 전쟁을 치를 셈이냐!]

백라왕과 흑인왕이 으르렁거리지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다. 릴리스가 두 팔을 뻗어 김현의 목을 감았다.

[어떠냐, 아름다운 이여. 그대가 한 마디만 하면, 단 한 마디만 하면 즉시 현신하여 아름다운 이의 적들을 쫓아내겠노라.]

김현이 응한다면 적은 자원의 소모만으로도 릴리스가 지구에 강림한다. 유령들의 공세로 차원의 벽에 이미 큰 구멍이 뚫렸고, 내부에서 여는 것과 외부에서 돌파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으니.

"거절한다."

[고집 부리지 마라, 아름다운 이여. 여가 그대를 탑에 가두었을 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작금의 위기를 벗어나기란 불가능함이니, 여와 블러드 공작의 도움을 구하라.]

블러드 공작은 말이 없다. 그저 흥미롭다는 듯 김현을 보고 있을 뿐. 김현이 무슨 짓을 벌일지 예측이라도 한 것처럼.

"다시 말하지, 거절한다."

[쯧……]

릴리스가 혀를 차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러나 그 존재감만큼은 자취처럼 남아 있다. 언제든 구원 요청을 하면 개입하겠다는 뜻.

블러드 공작도 함께 모습을 감췄다. 백라왕과 흑인왕이 분노하여 김현을 노려본다.

[네놈, 믿는 것이 있었구나!]

[그러나 네 뜻대로는 되지 않을 것이다!]

백라왕이 몸을 띄운다. 희뿌연 눈이 천장을 향한다. 허공에서 마법진이 자라나며 차원문이 있던 자리를 덮었다.

차원 봉쇄.

그들 입장에서는 괜찮은 선택이지만, 김현은 어차피 릴리스와 블러드 공작을 부를 생각이 없으니 헛짓이다.

당연한 일. 그 둘을 부르면 지구가 사실상 악마계와 불사계의 것으로 떨어진다. 그럴 거면 보호국 제안을 받아들였지 무엇 때문에 이런 고생을 한단 말인가.

[네가 무엇을 노렸든 이제 의미가 없다.]

흑인왕이 냉엄하게 단언했다.

[이곳은 이제 닫힌 감옥. 네놈의 운명이 정해졌음이라.]

"내 운명이 정해졌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달아날 구멍은 없다.]

"그렇지, 나에게도, 너희에게도."

[으흠?]

"모르겠어? 내가 지금부터 뭘 할지?"

이죽대며 비웃는 김현.

순간 두 유령의 몸이 한 차례 깜빡였다.

[네놈, 설마……]

[자폭할 셈이냐!]

자폭.

이 무슨 헛소리를.

김현이 준비한 제로 프로토콜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할 일도 많고, 김현이 있냐 없냐에 따라 인류의 생존 가능성이 어마어마하게 차이가 나는데 여기서 죽으면 어떻게 해?

하지만 김현은 웃었다.

"글쎄.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지. 너희들은 여기서 죽는다."

[흠.]

유령들은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대신 흑인왕이 앞으로 나서고, 백라왕은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았다.

[자신 만만하군, 선지자. 어디 실력도 그런지 한 번 볼까?]

오른손을 내미는 흑인왕.

한 자루 검이 탄생한다.

산이 막으면 산을, 바다가 막으면 바다를, 도시가 막으면 도시도 반쪽으로 갈라버릴 강대한 성혼.

흑인왕도 내심 긴장하는 모양. 안 그러면 처음부터 자신의 대표 성혼을 꺼낼 리가 없다.

또 있다.

김현이 보는 세계가 화사한 도홧빛으로 물들었다.

그곳에서 일어나는 건 흰금 궁전의 풍경.

온갖 변태적이고 말초적인 쾌락이 김현에게 손을 흔든다. 엉덩이를 흔들며 유혹하고, 유방과 음부를 언뜻 드러내며 매혹적인 몸짓을 보냈다.

'뻔한 수작을.'

그러나 일반적인 환상을 대하는 것처럼 무시할 수는 없다. 여기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현실에서 그대로 구현되니까.

공허령을 끌어올렸다.

문이 열린다.

시커먼, 내부를 알 수 없는 문.

빛과 어둠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그것에서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흘러나온다. 음성은 흉측한 손이 되어 김현을, 김현의 영혼을 붙잡았다.

[……]

이것은 속삭임.

적막, 부르짖음, 열망, 무관심, 비애, 욕정, 구원, 타락.

공허를 꺼낼 때마다 마주하는 감각. 모조리 정면에 투사한다. 공허령 성혼이 광폭하게 세상을 휩쓸었다.

무너지는 세계. 깨지는 시야.

그리고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묵색 검.

공허혈이 폭증한다. 열린 문을 통해 공허를 한껏 토해낸다. 꺼멓고 찐득찐득한 기운이 물결이 되어 검을 후려쳤다.

퍼억!

둔탁한 소음.

이 순간, 백혈탑이 샛노랗게 빛나고 있었다.

유령의 힘은 억제된다. 김현에게는 강력한 보조 성혼이 집중된다. 신체 재생, 혼력 증폭, 방어 능력 상승, 파괴력 상승…… 그러나 흑인왕이 날린 검은 과연 무시무시했다.

모든 것을 돌파한다.

공허의 공세가 단번에 비단 갈리듯 찢어진다. 검이 확대된다. 김현의 육체를 사르고 영혼을 관통하기 직전, 김현은 전신을 공허의 형태로 바꾸었다.

[끄윽.]

답답한 신음.

묵색 검은 백혈탑 내부에 깊은 상흔을 남겨 놓았다. 그보다 더 심한 것은 김현의 상처였다. 기이하게 변한 김현의 복부에 구멍이 뻥 뚫리고 만 것.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김현은 영혼으로 직접 전달되는 속삭임을 무시하려 안간힘을 썼다. 겨우 공허의 힘을 통제하여 본래 육신으로 돌아온 후, 죽음의 기운을 이용하여 상처를 지웠다.

쭈앙! 쭈앙!

거기 필요한 시간은 자동 방어 설비가 벌어주었다.

성혼을 담은 광선이 흑인왕을 폭격한다. 조금 전 최고의 공격을 가한 까닭에 흑인왕도 일거에 방어 장치를 어쩌진 못했다. 신경질적으로 손을 휘저어서 검은 가시 같은 걸 쏘아 보내고 있었다.

[오호, 제법이군.]

일어선 김현을 보고 발하는 흑인왕의 감상.

경계하는 기색은 더 이상 없다. 현재 김현의 상태는 가히 최악이었으니까.

육신의 상처만 수복했다 뿐이지 공허가 전신을 좀먹는 중이다. 손끝이, 발끝이 검게 변했다가 본래대로 돌아오는 것을 반복한다. 그런가 하면 항상 따라다니던 공허의 흔적이 아예 문을 열고 김현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흑인왕. 무슨 수작을 부릴지 모른다.]

[하긴 그렇지. 이만 끝을 내지.]

흑인왕이 재차 검을 불러낸다.

이번에는 크다. 아까는 팔뚝 길이였다면 이번에는 사람 하나 크기. 파괴력 또한 전의 공격과는 차원이 다르겠지.

헤실헤실 웃는 김현.

어쩜 이리도 예측에서 벗어나지 않을까?

모든 것이 김현이 계획한 대로였다. 백라왕의 행동도, 흑인왕의 공격까지도.

그렇다면 해야 할 일은 자명하다.

소리 높여 외쳤다.

"제로 프로토콜!"

우웅……

백혈탑 전체가 강하게 진동했다.

이 순간을 바랬다는 듯이, 왜 이렇게 늦게 불렀냐는 듯이.

두 유령도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백라왕이 비명 지르듯 외쳤다.

[흑인왕!]

[알고 있다!]

당장 묵색 거검을 날리는 흑인왕.

그러나 이것이 방아쇠였다.

김현에게 날아드는 거검 성혼이 백혈탑에 내장된 제로 프로토콜을 발동시킨다.

조금 전만 해도 김현의 주위를 맴돌며 유혹하던 공허의 문. 그것이 앞으로 나오며 거검 성혼을 흡수해버린 것. 그 순간 백혈탑이 거뭇하게 물들었다.

그리고 바닥에 그어지는 황금색 선, 선, 선. 이 선은 바닥만 아니라 천장에도, 벽에도, 공간에도 새겨졌다.

공허의 문이 거검 성혼을 꿀꺽 삼켰다.

이어지는 변화.

황금색 선이 허옇게 타 버렸다. 그리하여 마법진이 완성된다. 은하수가 지표면으로 강림한 듯한, 아름답고도 정교한 3차원 입체 마법진이다.

김현이 손을 벌렸다.

공허가 다가온다.

항상 그림자 속에 숨어 있던 공허. 이제는 심장 바로 옆에 자리를 잡았다. 잠깐만 멍하니 있어도 공허가 당장 뛰쳐나와 김현을 끌고 갈 것 같다.

무시.

대신 백혈탑에다가 공허를 투사했다. 이미 새겨져 있던 마법진이 거기 반응하여 제 목적을 이룬다.

세계가 일그러졌다.

세상이 어둠으로 물든다.

어둠?

아니다. 단순히 어둠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이상하다.

빛이 있다.

색채가 있다.

냄새가, 피부를 간지럽히는 무언가가 존재한다.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기이한 공간. 저 멀리, 아니 코앞에 있는 흑인왕이 당황하여 주위를 둘러본다. 머리 위, 아니 발밑에 있는 백라왕 역시 마찬가지다.

[네, 네놈! 무슨 짓을 벌인 거냐!]

잔잔하게 웃는 김현.

간단했다.

김현은 백혈탑 안에 하나의 새로운 세상을 만들었다. 언젠가 흰금 궁전의 탑에서 시도했던 것과 같다. 그때는 자신의 내면에 작은 세상을 만들었다면 이번에는 백혈탑 내부에 작은 세상을 만든 것.

흑인왕이 신음을 내뱉었다.

[공허……]

정확히 말하면 진짜 공허는 아니다.

어디까지나 유사 공허, 백혈탑의 마법진에 의해 구현된.

그러나 이것만으로도 치명적이다.

공허는 현생 차원계가 성립되기 이전의 것. 산자이든 죽은 자이든 접촉하는 것만으로 존재의 근거가 스러지고 소멸되려 하기 때문이다.

[같이 죽자는 거냐!]

비명을 지르는 백라왕.

대리석 질감의 피부가 빠르게 퇴색되고 있었다. 지금은 잡음이 낀 TV 화면처럼 치직거렸다.

흑인왕은 두 손을 모으고 안간힘을 쓰는 중. 예의 거검을 다시 불러내려나 보다. 하지만 힘들었다. 아무리 유사 공허라고는 해도, 이것이 가득 차 있는 곳에서는 현생의 성혼을 발현하기가 힘드니까.

"아니."

여유롭게 부정하는 김현.

손을 든다.

공허혈에 의해 손이 완전한 공허로 변환되었다. 길게 길어져 한 자루 검의 형상을 갖춘다.

[네놈……]

흔들리는 흑인왕의 눈동자.

그도 그럴 것이 김현이 변형한 팔은 흑인왕의 검과 똑같이 생겼으니까.

천천히 걸어간다. 먼 것처럼, 가까운 것처럼 느껴지던 거리 감각이 왜곡된다. 김현이 손을 들어 올렸을 때 흑인왕은 김현의 바로 코앞에 있었다.

"내 영역으로 기어들어온 너희가 잘못이다."

똥개도 자기 집에선 한 수 먹고 들어가는 법. 각성자 사이에선 오죽할까? 더구나 규격 외의 성혼, 열여덟 세계 어디에서도 쓸 수 없는 공허를 사용하는 김현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검이 떨어졌다.

흑인왕이 거검을 든다. 지친 검투사처럼 간신히 두 팔을 내밀었다. 뭉툭한 거검이 김현의 왼손을 가로막았다.

뚜깡!

유사 공허로 가득 찬 세상. 여기에 더해 배틀 프로토콜의 영향으로 두 유령을 적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성 성혼은 역시 8성 성혼이었다. 세계의 지원을 받는 일격을 어떻게든 막아낸다. 이내 살짝 기울여 흘리려고 한다.

그 전에 먼저 오른손을 휘둘렀다.

까만 채찍처럼 변한 상태. 공허가 흑인왕을 꿰뚫었다.

[크르륵.]

가래 끓는 듯한 영음이 터졌다.

[흑인왕!]

덤으로 절규 하나도 함께.

김현은 오른손을 빼냈다. 절망과 고통에 찬 영음이 줄기줄기 뿌려진다. 그것을 면전에서 들으니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내색하지 않으며 왼손을 크게 휘저었다.

서걱.

그런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흑인왕의 머리가 잘렸다.

이 정도로 유령은 죽지 않는다. 김현은 왼손을 수직으로 세워 내리쳤다. 흑인왕이 두 조각이 난다. 손을 넣고 헤집었다. 거기까지 하자 비로소 흑인왕의 전신이 흩어지며 가루가 된다.

남은 것은 8성 성혼 아홉 개.

흑인왕의 완전한 소멸.

[흑인왕!]

제차 터지는 외침.

정신 공격이 덮여온다.

환영과 함께 감정이 들끓었다. 외로움, 절망, 공포, 증오, 분노 같은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김현의 머리를 뜨겁게 한다.

하지만 약하다.

유사 공허는, 유사 공허로 가득 찬 이 세계는 백라왕의 모든 행동에 대하여 제약을 걸었기 때문이다.

결국 백라왕 또한 김현의 왼손 아래 소멸되고 말았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두 손을 내려다보는 김현.

"푸흐흐."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7성 각성자로서 8성 외계종 둘을 이겼기 때문이겠지. 이거야말로 역사에, 비단 인류 역사 만이 아닌 전 차원계 역사에 남을 위업 아닌가.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

기이이잉.

세계가 붕괴하기 시작한다.

뒤틀린 골조가 지르는 비명이 김현의 뼈와 공명했다. 설상가상으로 두 손에서 공허가 슬금슬금 번졌다.

잠깐 김현의 뜻에 어울려준 공허가 이제는 김현을 잡아먹으려 드는 것.

푸확!

세상이 뒤집혔다.

아가리 벌리듯 폭발적으로 확장되는 세계.

공허가 김현을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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