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헌터사-150화 (150/200)

# 150

얻은 것과 잃은 것

파국인가?

그렇지는 않다.

김현이 세운 제로 프로토콜은 유사 공허를 만드는 것에서 끝이 아니니까. 한 단계가 더 남아 있었다.

조금은 아쉽다.

이제 희생해야 할 것이 지금까지 김현이 모은 것 중에서도 가장 귀한 품목 아닌가.

그래도 가야지.

모든 이야기를 여기서 끝낼 생각이 아니라면.

"끝내자."

[제로 프로토콜 종료합니다.]

우지끈.

뭔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퉁, 퉁, 퉁, 퉁.

아울러 기이한 금속성이 사방에서 메아리친다.

뒤집히던 세계가 정지했다. 아울러 빛나는 선 같은 게 종횡무진 질주한다. 깨지는 알 껍질 너머에서 새어나오는 빛을 보듯, 외부에서 괴상한 색채가 마구 쏟아진다.

쾅! 쾅!

그리고 폭발.

세계가 부서지기 시작했다. 공허가 거기 영향을 받아 거세게 울부짖는다. 서둘러 김현을 삼키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언제 공허가 세계를 장악하고 있었냐는 듯 썰물처럼 사라져 버렸다.

제로 프로토콜의 끝은 간단하다.

백혈탑의 붕괴.

이 작은 아차원 자체가 백혈탑에 새긴 술식에서 비롯된다. 세계를 떠받치는 힘도 마찬가지. 백혈탑이 무너지면 세계 또한 무너지게 되어 있다.

깡! 까가강!

어항이 박살나는 것 같다. 유리 조각 같은 공간의 파편이 꽃잎처럼 흩날린다. 힘이 넘쳐흐르며 사방으로 튀었다가 순식간에 증발했다. 그리고 백혈탑이 고정되어 있던 방어 차원으로 튀어나온다.

뒤를 돌아보는 각성자들.

유령들, 동료들.

"이, 이건……"

"백혈탑이!"

"아, 안 돼!"

그들의 눈동자에 비친 광경.

백혈탑이 분해되고 있다. 쩍쩍 금이 가고, 커다란 덩어리가 떨어져 나와 가루가 되고, 힘이 폭주하다가 공간에 녹아 사라진다.

내부의 모든 설비가 분쇄되었다. 비록 성혼 공방과 훈련소 등 여러 설비를 다 모종의 장소에 옮겨놓긴 했으나, 1천 곳의 거점까지 생각하면 대부분의 기반이 소실된 것이다.

시선이 집중된다. 한창 맞붙어 싸우던 동료들과 유령들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치솟는 힘과 가루 때문에 안쪽을 볼 수 없었다.

그것도 잠깐.

먼지 사이로 까만 그림자 하나가 드리워진다.

이상하게도 투시 계열 성혼이 통하질 않는다. 먼지가 걷히고, 그림자가 앞에 나섰을 때라야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인간.

누더기가 된 후드티와 청바지를 걸친.

어째서인지 두 팔이 반투명한 검은 촉수처럼 변하여 흐느적거리고 있는.

[이 무슨!]

천둥 같은 비명이 터졌다.

[네놈, 네놈, 설마……]

한 유령이 부들부들 떨었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가에서 푸른 안광이 쉬지 않고 일렁이고 있었다.

"현아!"

김애경의 목소리.

김현은 느긋하게 왼손을 들어올렸다. 이미 인간의 형체를 잃은 손이지만 뭘 표현하는지는 명확하다.

"역시 Mr. 김!"

피터가 환호하며 외쳤다.

일행들 모두 웃음을 터뜨린다.

다들 한두 군데씩 상처를 입고, 피를 줄줄 흘리고는 있으나 아직 건재하다. 침공 전에 가상현실에서 훈련을 했던 것이 유효했던 모양.

유령들은?

셋은 보이지 않았으나 아홉은 안광을 뿜으며 이쪽을 노려보는 중이다. 그 중 흑궁공이 분노하여 소리쳤다.

[믿을 수 없다!]

붕괴한 백혈탑. 거기서 걸어 나온 김현.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김현이 백라왕과 흑인왕을 쓰러뜨렸다는 것. 유령들은 도저히 믿지 못하겠지.

흑궁공이 활을 겨누었다. 검은 화살이 생성되더니 맹렬하게 쏘아진다. 김현은 그걸 슬쩍 보고는 왼손을 장난치듯이 한 번 휘둘렀다.

취익!

물이 증발하는 소리와 함께 검은 화살이 소멸했다.

격정하듯 영체를 떠는 흑궁공.

단발의 위력이라면 흑인왕 휘하 혼공 유령 중에서도 가장 강한 흑궁공이다. 그런 자신의 공격이 이리 쉽게 막힐 줄은 상상도 못했겠지.

김현은 싸늘하게 한 번 웃었다.

"보챌 것 없다. 너희도 너희 주군 곁으로 보내주마."

천천히 발걸음을 내디딘다.

각성자들이 부리나케 김현에게 길을 터주었다. 그들 사이로 지나가는 김현의 주변으로, 흐릿한 빛과 권세를 뽐내며 따라붙는 별들이 있었다.

"저, 저거 봐!"

"성혼인가 본데?"

"뭔가, 뭔가 이상해."

"크다……"

거의 사람 머리통 크기.

지나갈 때마다 주위 공간에 음침한 유령의 힘이 퍼진다. 거기 닿은 각성자들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놀라운데.]

백혈탑의 붕괴에 휘말리지 않은 것일까?

각성자들 사이에서 블러드 공작과 연결된 흡혈귀가 모습을 드러내고는 말을 걸었다.

[정말로 백라왕과 흑인왕을 쓰러뜨릴 줄이야…… 하지만 그만큼 파멸이 가까워졌어. 네가 어떻게 이 난국을 타개할지 궁금한 걸?]

영원을 손에 넣기 위해 김현에게 협력하는 블러드 공작.

두 눈이 심연에 물들어 있었다.

완전히 죽음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공허와 어느 정도는 접촉을 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린 다음이다. 따라서 김현이 공허를 다루는 수법에 대해 초미의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하아……]

반면 길게 한숨을 내쉬는 릴리스.

[아름다운 이여, 이제는 여조차 손댈 수 없게 되었구나. 심란하다. 여가 사랑하는 이를 이대로 떠나보내야 함이.]

릴리스는 김현이 공허에 먹힐 거라고 벌써 단정을 한 모양이다. 잔뜩 눈살을 찌푸리고는 서성거리고 있었다.

"8성 성혼!"

마침내 다른 각성자들도 김현의 뒤를 떠도는 성혼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당연한 일. 여기 있는 각성자가 몇이나 되는데 판독 계열 성혼을 가진 자 한 명 없을까. 처음 봤을 때부터 눈치를 챘다. 다만 믿어지지 않아 입만 벌리고 있었지.

"8성 성혼이라고?"

"으헉, 7성도 아니고 8성?"

"그게 가능해?"

술렁임이 길게 방어 차원을 휩쓴다.

유령들이 타는 듯한 눈으로 김현을 노려보았다.

이미 글렀다.

침공은 실패했고 백라왕과 흑인왕은 죽었다.

지친 기색이 완연한 김현. 어쩌면 여기서 김현을 쓰러뜨리는 것도 가능할지 모른다. 김현이 들고 있는 8성 성혼을 회수할 수는 있다는 뜻.

그러나……

실패한다면?

그때는 유명계의 존망마저 위태로워진다. 이번 침공을 위해 털어 넣은 것이 너무 크고, 36 개체 밖에 없는 왕급 유령 중 둘이 소멸했기 때문에.

유령들의 시선이 앞에 있는 다섯을 훑었다. 시선을 느낀 것인지 다섯 각성자가 몸을 바로 세우며 전의를 새삼 다진다.

김현이 없을 때에도 오히려 밀렸던 그들이다. 아무리 지친 상태라고 하나 김현이 합류한다면 승률이 극도로 떨어진다.

[후퇴한다.]

씹듯이 내뱉는 영음.

[진심인가!]

다른 유령이 반발했으나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짧은 순간 무수한 영음이 오간 끝에, 방어 차원을 채운 유령들의 머리 위로 짧은 명령이 떨어졌다.

[후퇴!]

유령들이 아우성을 치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김현이 먼지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순간부터 잔뜩 얼어 있었기 때문.

유명계의 육존이 신과 같은 존재로서 아득히 높은 천상에서 군림한다면 휘하 36왕은 말 그대로 왕이었다. 일반 유령들에게는 각 군단의 총사령관이자 영토의 지배자인 왕들의 위세가 더욱 피부에 와 닿았다. 그들이 소멸했는데 사기를 유지할 리가 없다.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김현 또한 거세게 부르짖었다.

[돌격! 유령 놈들을 끝장내라!]

"와아아!"

여기 있는 이들은 모두 기본적인 군사적 소양을 갖춘 이들. 추격 과정에서 대부분의 전과가 쏟아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당장 기세를 높여 추격하기 시작했다.

드넓은 방어 차원. 그러나 출입구는 매우 좁다. 자연히 병목 현상이 벌어지면서 유령들이 한데 겹쳐졌다.

본래 같았으면 공간 겹침 따위 무시해야 한다. 방어 차원에서는 그게 불가능한 까닭에 유령들은 서로를 밀고 밀쳤다.

[비켜!]

[저리 꺼져!]

[으아아, 살려줘!]

이미 죽은 유령들이 소멸의 공포에 젖어 법석을 떠는 모습이란……

김현은 어느새 텅텅 빈 곳에 주저앉았다. 김애경을 비롯한 동료들이 피곤한 얼굴로 다가온다.

"현아, 괜찮아?"

"김현 님 팔이……"

그들의 시선이 두 팔에 고정되어 있었다.

김현은 오른손을 슬쩍 흔들었다.

"이거요? 예전에 그때랑 비슷합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때요?"

"네. 혼광 악어 잡았을 때요."

"아……"

그때도 혼돈에게 침식되어 인간의 외모를 잃었었지. 차오 박사의 99륜을 제작하여 혼돈을 제어하는 것에 성공했다.

그럼 지금은?

공허는 혼돈 너머에 있는 것. 아니, 이미 사라진 것. 따라서 제어 난이도는 하늘과 땅 차이다. 99륜 정도로 제어하려고 했다간 되레 잡아먹히고 만다. 지금도 침식을 최대한 늦추고 있으나 영 안정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팔뚝 아래만 공허에 먹혀 있더니, 이제는 팔뚝을 넘어 슬금슬금 어깨 근방까지 올라왔다.

"괜찮은 거 맞아?"

"괜찮다니까. 누나 그 말 하고 꼭 며칠 뒤에는 내가 좋아졌던 거, 기억 안 나?"

"그렇긴 한데……"

김애경이 못내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공허의 위험에 대해 여기저기서 경고를 받았고, 본인이 직접 보기에도 김현의 상태가 위태로워 보였으니까.

이때쯤 동맹 각성자들이 잔뜩 고무되어서 김현에게 다가왔다. 그들도 꽤 수확을 올린 듯 성혼 꾸러미를 들고 있었다.

"대승입니다, 사령관님!"

"어, 괜찮습니까?"

"전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많이들 잡은 모양이지요?"

"예, 하하하! 이렇게 쉬운 사냥은 정말 오랜만입니다."

"사령관님은 정말이지 엄청나십니다. 설마 했는데 8성 유령을 이기신 모양이죠?"

탐욕에 물든 눈이 김현의 주변을 도는 8성 성혼으로 향했다.

그럴 만도 하다. 그들이 얻은 것은 5성과 6성 성혼이 전부니까. 그것만으로도 가치가 엄청나지만 8성 성혼에 비교할 수는 없지.

동맹 각성자들이 8성 성혼에 정신이 팔렸으나 냉정한 얼굴을 한 이도 있었다.

차오웨이.

방어 차원 후방, 백혈탑이 있던 자리를 보며 묻는다.

"백혈탑은 어떻게 된 겁니까?"

"소모했습니다."

"네? 소모요?"

"8성 유령을 아무 희생 없이 잡을 수는 없지요."

"그런……"

당황스럽다는 눈빛을 보내는 동맹 각성자들.

그들이 알기로는 백혈탑이야말로 김현의 기반이 모두 모여 있는 곳 아닌가. 백혈탑을 상실한 김현이라니, 도저히 상상하기 어려웠다.

"미리 시설을 옮겨놔서 다행이에요. 그죠?"

각성자들의 시선이 탐탁지 않았는지 피터가 소리를 높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손해는 많이 봤지만 얻은 것도 많습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죠."

"음……"

각성자들의 시선이 묘해진다.

현 인류의 문명 수준을 아득히 초월하는 건축물인 백혈탑. 그리고 지구 요소요소에 박힌 1천 개의 성혼 농장. 이 모든 거점을 하나로 묶는 아차원 공간.

이렇게 쌓아 올린 거성은 보기만 해도 기가 질렸다. 이것이야말로 김현의 세력을 이루는 근간이었다.

이 거성이 무너졌다……

얼핏, 어떤 욕망이 각성자들의 심장에서 싹을 틔웠다.

물론 김현을 어떻게 해 볼 생각은 없다. 예지 능력자로서 김현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도 삽시간에 거성을 쌓아 올릴 테니. 대신 그 과정에서 자기들의 도움이 필수이지 않을까. 오늘 참전한 공을 들어 발언력도 커질 테고.

"이제 유명계는 지구에 개입하기 힘들겠지?"

"아마도."

사실상 경쟁에서 탈락.

지구에 대한 야욕을 포기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야 자기들에게 남은 복속 차원이라도 지키겠지. 김현이 불태운 엘페리아를 복구하기도 해야 하고.

김현은 동맹 각성자들에게 정중히 허리를 숙여 보였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조만간 오늘 일에 대해 정산을 하도록 하지요."

"하하,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저희도 사령관님의 행보를 같이 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되겠지요."

동맹 각성자들의 탐욕스러운 눈이 다섯 동료를 향하고 있었다. 자기들도 7성 각성자가 되고 싶다는 뜻. 김현은 피로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거래할 생각이냐?]

[그래.]

[준비는 해두었다. 과연 어떻게 공허의 침식을 벗어날지 궁금한 걸?]

김현은 설핏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사실 공허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란 불가능하다. 백혈탑을 잃었건만, 김현은 아마도 백혈탑보다 더 중요한 무엇을 희생해야 하지 싶다.

"기대해도 좋아."

[호오, 그래?]

[약속은 지키마. 허나…… 여는 아름다운 이가 못내 걱정되는 구나.]

뒷일은 모두 김애경에게 떠넘겼다. 그런 다음 모가디슈의 모처, 백혈탑의 시설을 모두 옮긴 곳으로 향했다.

모든 준비가 끝난 상태. 마지막 부족했던 8성 성혼은 블러드 공작과 교환했다.

블러드 공작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도대체 왜 이 성혼들을 구해달라고 한 거지? 유명계나 불사계 성혼이 아니라?]

가만히 웃는 김현.

그런 김현의 앞에 8성 성혼 2개가 놓여 있었다.

[기계 장치의 신(8★, 기갑)]

[궁극의 진화체(8★, 충왕)]

전생의 아론도 언감생심이었던, 기갑계와 충왕계의 뭇 성혼 중에서도 정점에 위치한 성혼.

블러드 공작과 릴리스는 김현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기갑계나 충왕게 성향이 전혀 없는 김현으로서는 두 성혼을 흡수하여 8성으로 승급할 가능성이 완전히 0이었으니까.

"자리 좀 비켜주겠어?"

[그러지.]

[아름다운 이여, 지금이라도 마음을 돌려라. 비록 그대의 상태가 안 좋긴 하나, 여의 권능이라면 아름다운 이의 상태를 동결할 수 있다.]

그러다가 마음이 바뀌면 바로 버릴 거면서?

두 말 하지 않고 쫓아냈다. 릴리스가 울먹거리며 몇 번을 더 애원하다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밖으로 나간다.

애처로운 뒷모습. 당장이라도 껴안고 위로해주고 싶다.

겨우 억눌러 참았다.

한편으로는 궁금했다. 이번 도박이 성공으로 끝나면 공허가 김현에게서 떨어져 나갈 텐데 그때는 어떻게 반응할까 싶어서.

'모르겠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김현은 심호흡을 하며 지구에 마지막 남은 자신의 거점을 둘러보았다.

온갖 설비가 준비되어 있다.

손을 뻗었다.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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