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1
재생 –1-
공허.
창세 이전의 것. 혹은 멸망 이후에 오는 것.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불러낼 수 없다. 들여다보는 것도 불가능하다. 흰금 궁전의 탑에서 김현이 공허의 형상과 마주했던 것은 말 그대로 기적에 가까웠다.
그런 만큼 결합이 질기다. 김현이 가끔씩 공허의 힘을 불러내면서, 이번에 백라왕과 흑인왕을 처리하면서 그 결합은 더욱 공고해졌다.
분리는 불가능하다.
김현의 영혼과 육체, 모두가 공허에 침식당했으니.
모든 지식을 다 뒤져 봐도 마찬가지. 이럴 때 쓸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영육 개변이나 종족 변환으로도 안 되는 거지."
짧게 한탄하는 김현.
공허를 지우고 새로운 종족으로 거듭난다?
불가능.
그래봐야 공허는 뒤따라온다.
육체를 완전히 기계로 바꾸고 뇌를 전자두뇌로 바꾼다고 해도 영혼에 공허가 묻어 있으니까. 육체를 버리고 천사나 악마의 영체를 취해도 마찬가지. 이번에는 공허의 육체가 뛰쳐나와 공허와 천상, 혹은 지옥의 혼종으로 바꿔놓을 것이다.
'하나 밖에 없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
7성의 성혼을 모두 버리고 1성 성혼조차 없는 일반인에서 다시 시작한다면 어떨까. 그때도 과연 공허가 들러붙을까?
안타깝게도, 그렇다.
시작하려면 완벽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22세기에서 그러했듯 시간을 되돌린다면 공허를 피해갈 수 있다.
불가능한 일. 블러드 공작도 시공 회귀를 재현하지 못해 애를 먹는 중이다. 백혈탑을 잃은 상태에서는 시도조차 하기 힘들었다.
'방법은 있어.'
고통스럽고, 지난하며, 성공 확률이 낮긴 하지만 있긴 있다.
그 전에 해야 할 일 하나.
김현은 구석에 놔둔 모루와 망치를 향해 다가갔다. 예전에 백흔혼을 통해 구입했고, 한철군이 한참 썼던 물건이다.
"후우우."
길게 심호흡 한 번.
옆에는 온갖 종류의 금속이 쌓여 있다.
별철, 하늘쇠, 지옥쇠, 용왕금, 혼돈은, 정령 구리, 심해 진은, 태양석, 암흑석……
금속만이 아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수지, 섬유, 물감, 기계 부품 따위가 널려 있다. 한 눈에 보기에도 지구에서는 나지 않는, 외계의 재료들.
'오랜만이네.'
묘한 감흥이 느껴진다.
김현은 허공에다가 홀로그램을 하나 띄웠다. 그리고 어떤 설계도를 슥슥 그려나갔다.
굉장히 복잡한, 종이로 그렸으면 평면 설계도를 수천 장은 겹쳐 쌓았어도 모자랄 설계도.
막힘이 없다. 미로처럼 복잡하고 궁전처럼 웅장해도 그렇다. 한 번 손을 슥 휘두르면 공간 한쪽이 꽉 채워지고 또 휙 저으면 반대편 공간이 채워졌다.
그리하여 완성된 설계도.
하나의 거인이었다.
아니, 로봇이라고 해야 할까? 온갖 중무장을 전신에 두른 채 위압적인 기세로 김현을 쏘아보고 있었다.
"오랜만이다, 멸망왕."
멸망왕!
저항군의 모든 자원을 모아 제작했던, 지구만 아니라 기갑계와 다른 차원계 전부를 통틀어서도 수위에 꼽혔던 탑승형 장갑.
블러드 공작과 릴리스의 지원 덕에 멸망왕에 필요한 재료를 모두 구비했다. 물론, 단순한 지원은 아니었고 8성 성혼을 판 대가로 얻은 것이긴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김현이 멸망왕 설계도 옆에 새로운 설계도를 그렸다.
키 1미터 90센티미터.
단단한 근육질.
어깨가 떡 벌어지고 몸이 굉장히 두툼하다.
단순히 체구가 크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말 그대로 두꺼웠다. 흔히 말하는 인간 흉기들보다 더 두꺼워서, 인간이 아니라 덩치 큰 드워프를 보는 듯하다.
이것은 22세기 아론의 육체를 그대로 본 딴 거였다. 아론은 태어날 때부터 충왕계에게 유전자 조작을 당한 상태였다. 그런 만큼 전투에 최적화된 육체를 타고 났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네.'
충왕계는 유전 공학에 있어서는 전 차원계를 통틀어 최고니까.
다만 이대로는 모자라다. 김현은 세심하게 설계도를 수정해 나갔다.
곤충 눈에 정교하게 깎은 인공 수정체를 삽입하고, 뇌도 일부 절개하여 전자두뇌를 설치한 것. 이외에도 신경계를 전자 신경으로 대체하고 관절을 보강한 다음 원래 인체에는 존재하지 않는 인공 근육을 몇 가닥 심었다.
그리하여 완성.
전생에 느꼈던 몇몇 아쉬운 점을 보강한 셈. 단순히 육체 능력만 따진다면 이제 김현을 대적할 자가 얼마 없다.
"힘들다, 힘들어."
불평을 쏟아내면서도 하복부에 주사기를 꽂아 필요한 체세포를 채취했다. 그리고 한쪽에 놔둔 투명 캡슐에 넣고 배양액을 주입한다.
부글부글.
거품이 끓기 시작했다.
그에 반응하여 공간에 차 있던 빛이 사라진다. 어둠이 내려앉고, 대신하여 아차원을 감싼 껍질에 빛줄기가 그어졌다.
빛줄기가 서로를 가로지르며 하나의 마법진을 그렸다. 마법진이 나타내는 표식은 시간. 막대한 재화를 투자하여 만든 이 마법진은, 당분간 이 아차원의 시간을 극도로 느리게 흘러가게 한다.
땅! 땅! 땅!
망치를 두드리기 시작하는 김현.
가장 먼저 틀부터 잡는다. 간단한 작업은 처음에, 섬세한 작업은 나중에 하려는 것. 거품 끓는 소리와 망치 두드리는 소리가 묘한 화음을 만들어냈다.
작업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약 1달.
느려진 시간 속에서 김현이 육체와 멸망왕, 그리고 새로운 무구들을 벼리는데 걸린 시간이었다.
'지친다.'
대신 진한 피로감이 김현을 엄습했다.
시간이 지독히 느리기에 공허의 침식이 늦춰져서 다행. 현실에서 같은 작업을 했다면 진작 공허에 먹혔겠지.
푸시시.
망치와 모루가 녹아 사라졌다. 김현의 양팔을 통해 공허에 노출된 상태라 내구도가 다한 것.
김현은 투명 캡슐을 쓰다듬었다.
벌거벗은 인간 남성이 안에 들어 있다.
이미 기계 삽입이 끝나 두 눈은 유리알 같고 경추 7번 극상 돌기 아래에는 접속 단자가 보인다. 가슴에 박힌 기계 동력 심장 보호용 철판이 이질적이고, 각 관절마다 동그란 추진 장치가 달려 있었다.
체모는 없다. 생식기도 없다. 생김새만 인간이지 사실상 인간을 벗어난 상태. 이것이 김현이 전생에서 받았던 인체 개조의 최종 형태였다.
"훌륭하네."
솔직한 감상.
오랜만에 가슴이 찌르르 울렸다.
정말 저 육체로 갈아탈 거냐고 묻는 것 같다.
최근에는 없었던 일. 성혼의 등급이 올라가면서 원판 김현의 감정은 흩어지고 아론의 자아가 모든 것을 장악했으니까. 그래서 몇 달 전부터는 존댓말도 거의 쓰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해가며 지구를 누볐다.
"사실 처음도 아냐. 아, 넌 모르겠구나."
원판 김현에게 속삭이듯이 말했다.
이와 비슷한 일을 장갑 기사 시절 겪은 적이 있었다. 숙련된 장갑 기사를 잃지 않으려, 기갑계의 기계들이 김현이 격추되어도 몇 번이나 건져다 새로운 육체에 심었던 것.
물론 오늘 할 일은 그것과 비교하면 훨씬 더 독한 짓이지만 어쨌든 큰 맥락에서는 비슷했다.
심장이 한 번 둔탁하게 울더니 더는 울지 않았다. 체념한듯 축 늘어진다. 자신에게 다가올 운명을 직감한 것처럼.
모든 준비는 완료. 이제 실행만 남았다.
김현은 투명 캡슐 앞의 새카만 캡슐로 들어갔다. 저절로 족쇄와 수갑이 나와 김현을 결박한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굵은 밧줄이 목을 감고 몸통도 옭아맸다.
미지근한 액체가 차오른다. 뾰족한 침이 경추 7번 극상 돌기 아래를 뚫고 척수와 접촉했다. 김현이 짧은 탄성을 지를 때, 헬멧이 내려와 김현의 머리를 감쌌다.
[실행합니까?]
들리는 것은 무정한 기계음.
잠깐 입술을 짓씹다가 단호하게 명령했다.
"실행!"
[성혼 추출, 실행합니다.]
그렇다.
성혼 추출.
모든 차원계 어떤 존재에게든 극악의 최후인 그것.
김현은 그 짓을 자신에게 벌이려 하고 있었다.
자살하는 거냐고?
그럴 리가. 아무리 고민해 봐도 공허를 떨쳐내려면 이 수밖에 없었다. 성혼은 영육과 강력히 결합되니, 이걸 추출하면 공허 역시 추출되고 만다.
기이잉.
까만 캡슐이 길게 울부짖었다.
빨아들이기 시작한다. 수갑에서, 족쇄에서, 밧줄에서, 헬멧에서, 그리고 뾰족한 침에서 뭔가를 쭈악쭈악 흡수한다.
처음에는 핏물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전신의 체액이 다 말라 버렸다. 이어서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김현을 엄습했다.
'크으윽!'
이 정도는 참을 수 있지,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었다.
고통이 진화한다. 몸을 으깨고 영혼을 부수기 시작한다. 존재의 일부를 강제로 덜어낸다. 기억은 흩어지고 감정이 마모된다. 광대하던 인식이 축소되고, 강철 같던 의지는 약해져 솜사탕만도 못하게 되었다.
아, 이래서 그들이 그렇게 고통스러워했던 거구나.
납득하다가도 비명을 지르게 된다. 피눈물이 흐르다가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미이라처럼 변한 김현이 꺽꺽대며 모든 것을 망각했다.
김현을 구성하는 것은 셋.
공허, 흡혈귀, 유령.
흡혈귀는 성혼을 추출당하면 핏물만 남기고 소멸한다. 유령은 존재의 존엄을 잃고 한낱 빙의귀가 된다.
공허는?
힘이 되었다. 창세의 때에 빅뱅을 일으켰던 것처럼 순수한 힘으로 변해 캡슐 안을 맴돈다.
울컥, 울컥.
캡슐에 연결된 관이 울컥거리며 그걸 흡수한다. 막대한 힘이었으나 잘 빨아들이고 있었다. 감당하기 힘든 분량은 차원의 틈새에 버리고, 나머지는 미리 연결해둔 창고에 차곡차곡 저장했다.
이윽고 성혼 추출 완료.
김현이 있던 자리에는 핏물만 한 무더기 남았다. 캡슐은 그걸 다 모아다가 지정된 곳에 저장했다. 그리고 끼긱거리며 영롱하게 빛나는 통로를 투명한 캡슐에 연결한다.
[으흐흐흐.]
낮은 귀곡성이 들렸다.
희뿌연, 아주 작은 유령 하나.
빙의귀 하나가 비실비실 기어 나왔다. 처음에는 그저 멍하니 허공에 떠 있기만 했다.
줄줄줄.
그러다 붉은 핏물이 통로를 타고 흐르자 거기에 자극 받아 따라간다.
김현. 더 정확히 말하면 성혼을 추출당하여 영락한 빙의귀.
글쎄, 이 빙의귀를 이제 김현이라고 할 수 있을까? 모든 기억과 감정을 다 잃고 말았는데?
두고 볼 일이다.
핏물과 빙의귀가 투명한 캡슐로 들어왔다. 핏물은 김현의 육체에 흡수되고, 빙의귀는 캡슐 안을 한 번 돌더니 그제야 영혼 없는 육체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킁킁, 냄새 맡듯 영체를 들썩이다가 육체에 쏘옥 들어간다.
[우웅. 우웅.]
[캭! 캭!]
아무리 육체의 성능이 좋아도 영혼이 수준 미달이면 제 능력을 발휘할 수 없다.
캡슐에 든 육체가 눈을 완전히 떴다. 그러나 그 눈에는 지성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멀뚱멀뚱 앞을 보다가 힘겹게 두 손을 들어 올린다.
"끄으으윽, 그르륵."
내는 소리라고 해봐야 짐승 같은 신음이 전부.
실패한 것일까?
공허를 떨쳐낸 대신에, 힘센 육체만 가진 짐승이 되어 완전히 영락한 것일까?
그런 의문이 들 무렵 캡슐 위쪽이 환하게 빛났다.
"그아악!"
즉각 거부 반응을 보이는 육체.
[기억 주입 시작합니다.]
언젠가부터 경추 7번 극상 돌기 아래 접속 단자에 굵은 선이 꽂혀 있었다. 그곳을 통해 정보들이 무한히 쏟아지기 시작했다.
육체가 점차 조용해진다.
범상한 인간 같았으면 쏟아지는 정보에 머리가 깨질 것 같은 고통을 느꼈을 것이다. 이 육체는 달랐다. 활성화된 뇌세포의 수에서도 차이가 나고, 전자두뇌도 보조를 해주니까.
기억, 그리고 감정.
두 눈에 비로소 어떤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것은 지성, 혹은 이성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었다. 또한 아차원 공간을 창조한 자를 닮이 있기도 했다.
[혼력 주입 시작합니다.]
캡슐에 힘이 주입된다.
공허가 소멸하면서 남긴 힘. 이미 수십 차례 이상 정제된 다음이다. 극도로 순수한 혼력이 캡슐 안으로 쏟아지자, 육체가 숨 막힌다는 듯 허우적거린다.
그럴 것이다. 밀도 높은 혼력은 심해에 들어간 듯 강력한 압박을 가하니까.
인공지능은 주입되는 혼력의 양을 정교하게 제어했다.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심박 수와 호흡, 체온을 확인하면서 줄이고 늘리면 되는 일이었으니.
시간이 오래 걸렸다.
거의 한 달.
성과는 있었다. 육체는 거대한 힘을 품었고, 또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으니.
'나는 누구……'
마침내 최종 단계에 돌입.
[성혼 주입 시작합니다.]
별이 내려온다.
순백의 힘이 별빛을 열렬히 환영했다. 투명하여 순수하기만 하던 힘이, 두 가지 색채로 물들어간다.
하나는 차갑고 각진 회색으로.
또 하나는 생명력 넘치는 초록으로.
모든 것이 갖추어졌다.
굳건한 육체, 막강한 성혼, 방대한 기억……
그리고 연약하긴 하지만 씨앗 역할은 충분히 할 빙의귀 한 마리도.
얽히고설킨다.
이것들이 하나가 되어 장중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탄생의 노래.
재생의 순간.
강력한 성혼은 그 자체만으로도 영성을 가진다. 육체를 얻으면 새로운 종족의 시조가 되기도 한다. 하물며 모든 조건이 다 갖춰진 바에야.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화음이 잦아들고 투명한 캡슐 내부에서 일던 폭풍도 그쳤다.
쩌적, 쿵.
캡슐 표면에 금이 가더니 파편이 되어 우스스 떨어진다.
그 안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키 190의 거구. 유달리 우락부락한 체구.
완전히 달라진 체형이지만 얼굴만큼은 눈에 익다.
평범하지만 남자답게 선이 굵은 외모.
김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