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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헌터사-152화 (152/200)

# 152

재생 –2-

남자가 주위를 둘러본다.

우연처럼 손에 시선이 가 닿자, 여러 정보가 우스스 떠오른다.

<능력>

[이름] ?? [성별] 무성 [나이] 0

[진영] ?? [종족] 강화 인간 [상태] 정상

[근력] 85 [체력] 85 [민첩] 85 [감각] 85

[혼력] 75 [의지] 65 [통찰] 70 [위엄] 75

[성향] 기갑, 충왕

[성혼] 기계 장치의 신(기갑, 8★), 궁극의 진화체(충왕, 8★)

[보물] 없음

아직은 완전하지 않은 상태.

이름과 진영 항목을 본 김현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재차 어떤 물음이 심연으로부터 올라온다.

'나는 누구지?'

정체성의 의문.

"크윽."

남자가 머리를 감싸고 몸을 웅크렸다.

가벼운 두통.

그러나 혼란은 컸다. 초인적인 육체를 가진 남자가 두통과 어지럼증을 느낄 정도이니 말 다했다.

'나는 김현인가?'

'아니면 아론인가?'

그것도 아니면 완전히 새로운 제 3의 개체인가?

남자의 경험으로는 단언하기 어렵다. 비록 전자두뇌의 저장 공간에 방대한 기억과 감정이 남아 있지만 그것의 주체는 남자가 아니었으니까.

22세기, 인류 저항군에 가입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의 기억이 불현듯 떠오른다.

[저는 인간일까요?]

곤충의 유전자가 섞이고, 그나마 남아 있던 인간적인 부분을 기계로 대체한 김현이 가졌던 의문.

당시의 저항군 사령관은 이렇게 대답했다.

[넌 인간이다. 지구인이지.]

[제 모습을 보고도 하시는 말씀입니까?]

[육체의 형태, 영혼의 변형은 중요하지 않아. 나 또한 영육 개변을 통해 8성을 이뤘으니까. 중요한 건 정신이다.]

[정신이라고요?]

[그래.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정체성이겠지. 자신이 어디에 속해 있는지 파악하는 정신. 그리고 주체. 아론 로드리게스, 넌 지금 어디에 속해 있지?]

[인류 저항군입니다.]

[그거면 충분하다. 네가 지구에서 비롯되었고, 지구를 수호하고자 헌신하는 한 너는 지구인이다.]

기원과 소속감.

오래된 문답이 남자를 일깨웠다.

가볍게 양 주먹을 쥔다.

'나는……'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선언.

"지구인이다."

가슴이 뻥 뚫렸다.

그래. 내가 아론인지 김현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래도 단언할 수 있는 건 내가 지구인이라는 사실이지.

그렇게 생각하며 허리를 폈다.

이제 상황이 파악되기 시작한다.

원판? 복사판? 하여간 두어 달 전까지 존재했던 김현은 공허를 떨치기 위해 한 차례 도박을 벌였다.

성혼 추출.

그 결과 옛 김현은 존재 자체를 상실했다. 한낱 빙의귀로 영락하고 만 것.

이 빙의귀는 김현이라고 볼 수 없다. 영혼의 근간을 모두 잃고 난 잔재, 떨거지, 찌꺼기라고 불러야 할 것이 빙의귀니까.

빙의귀에서 비롯된 남자도 마찬가지. 기억과 감정, 성혼과 공허에서 비롯된 힘을 모두 물려받았어도 마찬가지다. 완전히 엣 김현과 동일한 존재라고 할 수는 없다.

'그건 그 김현도 마찬가지지.'

남자의 생각.

옛 김현도 원래는 아론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었지. 우연히 김현의 육체를 얻어 김현 행세를 했을 뿐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남자는 김현의 복사판, 즉 클론.

그러나 뭐 어때?

애초부터 원판이 아니었는데.

아론은?

22세기에서 이미 죽었다고 봐야지. 그 기억만 전승되었을 뿐이다. 자신이 복사판이라고 해서 자괴감을 갖고 땅만 긁으며 절망할 필요는 없다.

피식 웃는 남자.

의지를 곧추 세우자 눈에서 정광이 뿜어지며 어깨가 자랑스럽게 젖혀진다.

'그들은 그들, 나는 나.'

그러나 모두 부정할 생각 또한 없다.

새롭게 정립된 남자의 자아가 보기에도 김현의 삶은 치열했으며 존경스러운 영웅의 것이었으니.

'이어 받는다.'

김현의 이름을, 숙명을, 모든 것을 다.

똑같은 이름을 쓰기로 했다. 똑같이 나아가기로 했다.

그러자 상태창에 변화가 생긴다.

[이름] 김현 [진영] 지구

[의지] 70

이름과 진영이 정해지고, 의지도 5가 늘었다.

조금은 마음에 안 들었다.

'22세기 아론은 모든 능력치가 80이었는데.'

육체적으로는 강할망정 정신적으로는 아직 부족하다는 뜻.

더 노력해야겠지. 정신 능력치도 중요하니까.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간다. 우뚝 서 있는 멸망왕 옆에, 김현이 준비해 둔 무구 3점이 눈에 들어왔다.

복수의 검, 처형자, 멸절갑.

22세기에 쓰던 무구를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아니, 실은 더욱 강화시켰다.

하나하나 장비했다.

멸절갑은 전신을 감싸는 강화복이다. 안 그래도 강력한 신체 능력을 크게 강화시키고 전자 기기로 보조한다. 혼력을 저장하고 성혼을 증폭하는 기능도 있었다.

복수의 검은 강력한 대검이다. 파괴력이 무시무시하나 가장 대단한 것은 역시 내구도. 9성 성혼마저 비껴 칠 정도로 단단했다. 사실 22세기의 아론은 복수의 검을 방어에 가장 많이 썼다.

처형자는 대구경 권총이었다. 어지간한 대포나 미사일보다 강력했다. 저격도 가능하여, 22세기에서는 외계종들 사이에서 공포의 대상으로 통했다.

철컥, 철컥.

'오랜만이야.'

김현은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아론과 자신이 다른 인물이라고 자각하고는 있으나, 기억과 감정을 이어 받은 탓에 묘한 감흥을 느끼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멸절갑을 전신에 걸치고 복수의 검을 등에 멨다. 처형자를 왼쪽 허리춤에 꽂자 그리운 느낌이 울컥, 가슴을 쳤다.

"재미있네."

자신의 추억은 아니다.

하지만 김현은 가슴을 펴고 이 감정을 받아들였다. 그만큼 절절했던 옛 김현의 의지를 알기에, 그 강고한 의지에 공감했기에 거부하지 않고 온 몸으로 긍정했다.

후우욱.

한 차례 길게 몸을 휘도는 혼력.

조금은 생경했던 혼력이 조금 익숙해졌다 생각하며 정지해 있는 멸망왕 앞에 가서 섰다.

아아, 멸망왕.

인류 저항군 최후의 역작.

기갑계의 원판 장갑보다 오히려 강력했다. 아론이 탑승하면 수십 수백 기의 장갑 기사도 간단히 쓸어버리곤 했다. 김현은 손을 뻗어 멸망왕을 어루만졌다.

차가운 표면.

도색이 끝나 까맣게 물든 멸망왕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 같다.

'그냥 멸망왕이라고 하면 안 되겠는 걸?'

굳이 따지자면 MK II.

김현이 그간 쌓은 지식과 경험을 통해 새롭게 강화했으니까. 종합적인 성능에서 20% 정도 향상이 있었으니 새로운 이름을 붙여도 무방하다.

하지만 멸망왕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쓰기로 했다. 김현이라는 이름을 전승 받은 것처럼, 22세기의 이름을 승계 받은 것이다.

가슴을 꾹 눌렀다.

기이잉.

금속음과 함께 멸망왕의 가슴 부위가 열린다. 그 안으로 들어가 조종석에 서서 멸망왕의 팔과 다리에 자신의 팔과 다리를 집어넣었다. 접촉 단말이 멸절갑과 연결되며 목 뒤에서 따끔한 감촉이 느껴진다.

접속 완료.

"멸망왕 기동."

[멸망왕, 기동합니다.]

인공지능이 김현의 전언에 반응했다. 기계음이 몇 번이나 울리고 멸망왕의 가슴이 닫혔다. 그리고 원천 심장이 기동하여 멸망왕 전체가 웅웅거렸다.

눈에 빛이 들어온다. 주먹이 몇 차례 쥐었다가 펴기를 반복한다. 육중한 거구가 살짝 앉았다가 일어나는 동작을 시행했다. 마지막으로, 표면에 가느다란 빛의 선이 그어지면서 완전 동기화가 이루어졌다.

눈을 깜빡이는 김현.

그때마다 멸망왕의 눈에서 빛이 꺼졌다가 켜졌다.

주위를 둘러본다.

멸망왕도 고개를 돌렸다.

어둑한 아차원 공간이 대낮처럼 환하게 김현의 대뇌에 그려졌다. 멸망왕의 시야를 통해 세상을 보는 것이다.

툭.

손가락을 튕겼다.

콰아앙!

막강한 힘이 공간을 후려친다. 거기서 발생하는 충격파가 사방을 찢어발기며 고막이 터질 듯한 소리가 났다. 김현은 그것을 확인하고는 흡족하게 미소 지었다.

"잘 됐네. 무기 확인한다."

[탑재 무기 가동합니다.]

어깨가 열리며 기관포가 비죽 포구를 내민다.

슈슈슈슝!

옛 멸망왕과는 다른 형태의 포탄.

아니, 포탄이 아니다. 이건 혼력을 농축해서 그대로 쏘아내는 거였다. 일종의 레이저와 비슷하다고 봐야겠지.

화력만 따지자면 예전처럼 특수 포탄에 성혼을 실어 쏘는 게 낫다. 문제는 특수 포탄을 보급받기가 어렵다는 점. 안 그래도 성혼 공방은 바빴으니, 자체 보급이 가능한 포탄을 쓰는 게 낫다.

이어서 주포도 장전. 주포는 멸망왕의 등에 숨어 있었다. 워낙 막대한 힘을 소모하는 까닭에 정지 상태에서 쏴야 하지만 화력 하나만큼은 압도적. 최대 화력으로 뿜으면 제주도도 소멸시킬 수 있다.

쉬잉. 쉬잉.

주먹과 팔꿈치, 무릎에 설치된 초진동 송곳도 제대로 작동했다. 걸리기만 하면 어떤 외계종이든 단번에 갈아버리겠지.

그러나 여기까지 무장은 모두 부무장이다. 진짜 무장은 따로 있었다.

쿵, 쿵, 쿵.

아차원 공간 한쪽으로 걸어가는 멸망왕.

한 자루의 거검과 뭉툭한 권총이 그 자리에 놓여 있다.

복수의 검과 처형자를 그대로 확대시킨 듯한 모양새. 이름도 똑같았다. 복수의 검을 오른손에, 처형자를 왼손에 들고는 자세를 취했다.

쾅쾅!

권총을 쏜다.

쿠아앙!

거검을 내리긋는다.

멸망왕의 덩치 때문에 조금 느려 보이지만 실은 엄청난 속도였다. 단순한 그 동작이 음속을 넘나들어서, 전력으로 내리쳤다간 하늘도 쪼갤 기세이니.

'좋았어.'

이것으로 전력 복구.

실로 오래 걸렸다.

많은 것을 희생했다.

그래도 성과는 있었으니, 여기 있는 2대 아론은 1대 아론보다 훨씬 더 강력했다. 정신 무장이 조금 약하기는 하나 그것은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

특히, 1대 아론에 비교하여 커다란 장점을 하나 가지고 있었다.

"멸망왕, 역소환."

[멸망왕, 역소환합니다.]

바로 이것.

김현의 주문에 인공지능이 반응했다. 멸망왕 전체가 안개처럼 아른거린다. 점차 옅어지면서 축소되고, 어느 인공 차원으로 스며들었다.

철컥.

동시에 김현의 오른쪽 손목에 채워지는 거무튀튀한 팔찌 하나.

변화는 멸망왕에서만 보이지 않았다. 두 손에 들고 있던 복수의 검과 처형자도 똑같은 변화를 보였다. 안개가 되어 흩어지면서, 왼쪽 손목에 묵직한 질감이 느껴진다.

그렇게 채워진 두 개의 팔찌.

김현이 밥먹듯이 쓰고, 공허의 형상과 마주하면서 알게 된 차원 구축의 비밀로 만든 보물이다.

22세기, 아론이 한탄했던 것이 하나 있다.

조금만 시간이 있었더라면, 그래서 멸망왕을 장착했으면 좋았을 걸 하고.

물론 그랬더라도 결과는 바뀌지 않았겠지만 김현은 그 사실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멸망왕 MK II를 만들면서 이런 기능을 추가했다.

아차원 공간 보관 및 소환 기능을.

새삼스럽진 않다. 여러 차원계에서 주로 쓰는 기술이니까. 이런 거대 장비를 운용하는 차원계가 얼마 없어 쓰지 않았을 뿐.

"끝났구나."

조용히 자신의 상태를 확인하는 김현.

이곳에서만 2달 넘게 시간을 보냈다. 현실에서도 1주일 정도 지났을 것이다.

슬슬 나가자.

문을 열고 발을 내딛었다.

밝은 햇빛이 눈을 찌르고, 근처를 지키던 각성자들의 시선이 집중된다.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다. 눈을 끔뻑끔뻑 하다가, 어느 순간 눈이 부시다는 듯 동공이 축소된다.

"설마, 사령관님?"

소말리아 어.

알아듣지 못했지만 대충 눈치로 때려 맞췄다. 이제야 생각나서 현인의 목걸이를 목에 거는 김현.

슬쩍 고개를 끄덕거리자 각성자들이 놀라 부산을 떤다.

"맙소사! 사령관님! 정말 강해지셨나 봅니다!"

"이봐, 시장님 모셔와!"

"아! 가야지, 가!"

햇살이 참 눈이 부시다.

김현은 한참을 우두커니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봄, 대한민국과는 전혀 다른, 흡사 여름 태양을 보는 듯한 소말리아의 봄빛.

뜨거움과 따스함의 사이, 맹렬함과 부드러움의 사이.

애매하게 이글거리는 태양이 피부를 달군다.

'이것이 태양……'

태어나서 처음 보는.

기억 속에 새겨진 태양과는 또 다른 맛이 있었다. 눈으로 직접 보고 피부로 직접 느끼는 햇살은 뭔가 달랐다. 미묘한 감동에 가슴 벅차 하며 천천히 걷는다.

바람이 불었다.

흙이 발바닥을 떠받쳤다.

이 사소한 사실 하나하나가 감동으로 다가온다.

시큰해지는 눈시울.

'태어나길 잘했어.'

다른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이것들이 신생아 김현에게는 모조리 첫 경험이었다.

그렇게 세상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때 저 멀리서 달려오는 이들이 있었다.

"현이가 어디 있어?"

"김현 님!"

첫째로, 동료들.

김애경과 이세희가 바람처럼 날아온다. 서경태가 더 빨랐다. 서경태가 김현의 앞에 선 다음에야 피터와 에일리도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서경태에 앞서 도착한 이들이 있었다.

[아름다운 이가 어디 있다는 것이지?]

코앞에 도달한 릴리스.

더 정확히 말하면 릴리스와 연결된 서큐버스. 서큐버스가 생경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본다. 바로 앞에 있는 김현은 보이지도 않는다는 모양새.

블러드 공작이 설마 하는 얼굴로 김현을 본다.

[설마, 선지자냐?]

그들의 관점에서 지금의 김현은 옛 김현과 너무 달랐던 것.

후덥지근한 바람이 한 차례 셋을 쓰다듬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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