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3
재생 –3-
[헛소리!]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릴리스였다.
김현을 보고는 보란 듯이 코웃음을 쳤다.
[여의 아름다운 이가 이 따위 육체만 다듬은 허깨비일 리가 없지 않느냐! 블러드 공작. 아름다운 이가 어째서 아름다운 이인지 모르는지는 않을 터. 보기만 해도 영혼의 광채가 황홀하게 번져야 하거늘, 이런 자를 아름다운 이와 착각하다니, 농담이 지나치다.]
블러드 공작이 살짝 얼굴을 찌푸린다. 몇 번이나 더 김현을 들여다보더니 자신 없다는 투로 말했다.
[비슷한 혈향이 나는데……]
혈향!
옛 김현의 육체는 성혼을 추출 당하고 핏물 조금을 남겼다. 그걸 현재의 김현이 흡수해서 냄새를 맡은 모양이다.
이때 김애경과 일행들도 도착했다.
김애경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김현을 보았다. 키가 부쩍 커지고 몸이 분 탓에 바로 알아보진 못했다. 그래도 위아래로 훑어보고, 엣 모습이 남은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더듬거리며 묻는다.
"현아? 현이 맞아?"
"누나, 나야. 조금 많이 바뀌긴 했지만."
"이 자식!"
김애경이 등짝을 후려쳤다.
간지럽다.
불사체가 보호하던 이전만큼은 아니어도, 8성 등급을 돌파한 수준의 육체를 가지고 있으니 당연한 노릇.
피터가 입을 벌렸다.
"우와, Mr. 김은 엄청나게 바뀌었네요."
"그래? 노력 좀 했지."
"터미네이터 보는 것 같아요!"
"뭐? 하하하."
일행은 김현의 변화를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기색이었다.
하기야 그들과 함께하면서 승급할 때마다 극적인 변화를 보였던 김현이다. 키가 크고, 덩치가 큰 정도로는 별다른 감흥을 이끌어내기가 어려웠다.
반면 릴리스와 블러드 공작의 경우는 달랐다. 아까부터 눈을 가늘게 뜨고 김현을 노려보고 있었다.
급기야 릴리스가 서큐버스의 손가락을 들어 김현을 찔렀다.
[넌 뭐지? 뭐기에 아름다운 이의 냄새를 풍기는 것이지?]
"뭐야, 왜 그래?"
가만히 있는 김현을 대신해 나서는 김애경.
처음부터 릴리스를 마뜩찮아 했던 참이다. 자기 동생을 장난감 다루듯이 하니 더 보기 싫어졌나 보다.
못 박힌 듯 김현만 주시하는 릴리스.
반면 블러드 공작은 냉정한 눈빛만 김현에게 던졌다.
[분명히 선지자가 아차원에 들어갔는데 나온 것은 선지자의 냄새만 풍기는 애송이라…… 이봐, 하나 묻지.]
"뭘?"
[넌 누구냐?]
이미 전후사정을 어느 정도는 눈치 챈 것 같다.
잠시 망설였다.
나는 누구인가, 싶어서.
이내 가슴을 펴고 대답했다.
"나는 김현이다."
언령을 담아 내뱉은 선언.
세계가 공명하듯 아스라이 떨린다.
[흠.]
[흥.]
블러드 공작은 짧게 고민에 잠겼으나, 릴리스는 가당치도 않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어디서 헛소리를? 아가야, 어디서 아름다운 이의 이름을 들었는지 모르겠다만 그 이름은 네가 네 마음대로 흘리고 다녀도 좋은 이름이 아니란다.]
"나는 김현이 맞아."
[그렇다면 아름다운 이에게서 느껴지는 영혼의 업은 어디로 갔느냐? 그, 세계를 짊어진 듯한 무게는? 또한 아름다운 이는 공허와 죽음의 혼종이었다. 네놈처럼 인간에 기계와 곤충을 잔뜩 얹어놓은 역겨운 모습이 아니라.]
영혼의 업? 무게?
금세 무슨 뜻인지 깨달았다.
영체로 이뤄진 고위 외계종은 영혼을 직접 본다. 22세기, 그 한 많은 시대의 업을 모두 짊어진 것이 옛 김현이었다. 시공 회귀까지 해가며 별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으니 범상할 영혼일 리가 없다. 여기에 공허와 죽음까지 더해진다면 더더욱.
지금의 김현은 어떨까?
어쨌든 갓 태어난 영혼이며 육체다. 능력치 창에도 나이가 0살로 나오는 걸 보면 확실하다.
육체에 얽매이는 인간이라면 모르겠으나, 영혼을 직접 보는 종족이라면 두 김현을 명확히 구분하겠지.
어떻게 할까?
사실대로 말을 해? 아니면 적당히 우겨 봐?
김현이 이런 고민을 할 때 터져 나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래서, 뭐?"
김애경의 외침.
릴리스가 표정 없이 쳐다보자 눈을 부라린다. 그리고 앞으로 몇 발짝 나섰다. 아예 릴리스의 앞을 가로막고는 전신으로 기세를 피워 올린다.
"내 동생이야. 네가 의심하면 어쩔 건데? 그 잘난 동맹으로 압박이라도 해보게? 흰 소리 할 거면 꺼져. 유령들 공격에도 구경이나 하던 주제에 동맹은 무슨."
[여가 수하를 파견하지 않은 것은 아름다운 이의 요청이었다.]
"그래서? 네가 무슨 권리로 내 동생을 두고 가짜니 헛소리니 운운하는 거지? 네가 우리 엄마 아빠라도 돼?]
흰금 궁전에서 릴리스에게 잡혔을 때부터 릴리스를 싫어하던 김애경이다. 그 감정이 쌓이고 쌓이다가 이번에 폭발해 버린 것.
"그만 둬."
김현은 손을 뻗어 김애경의 손을 잡았다.
"왜?"
"릴리스 말이 완전히 틀린 건 아니야. 난 김현이지만, 또 김현이 아니기도 하거든."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사실 처음부터 조금 걱정스럽긴 했다.
가족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고민스러워서.
22세기의 아론이라면 무시했겠으나 김현은 가족들을 진심으로 받아 들인지 오래 되었다. 자연히 지금의 김현도 그 감정을 이어받았지.
'정면 돌파 한다.'
김애경을 비롯한 가족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따스해진다.
그들에게 가고 싶다.
함께 하고 싶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을 내친다면 어쩔 수 없는 일. 자신은 김현인 동시에 김현이 아니니까.
"누나. 내가 이번에 희생한 게 꽤 커."
고백하듯 읊조리는 말.
일행의 얼굴이 한순간에 경직된다.
이세희가 가장 가관이었다. 울 듯한 표정을 짓고는 김현을 본다. 언젠가 6성 탈각을 권하러 왔을 때 들은 게 있었기 때문.
'이미 죽었다고 했었어……'
육체도 영혼도 모두.
김애경을 설득하느라 조금 돌려 말했다 뿐이지, 생명체로서의 자신은 끝났다던가.
김애경이 안간힘을 써서 입술을 움직였다. 삐걱삐걱 움직이는 모양새가 사람이 아니라 목각 인형이 어설프게 입을 놀리는 것 같았다.
"뭐, 뭘 희생했는데?"
듣기도 두렵다.
최초에는 왼팔, 다음에는 사지, 세 번째로는 생명.
여기서 또 뭐가 남았다는 걸까?
김현이 한 차례 쓰게 웃었다. 가슴을 쳐오는 옛 김현의 감상을 느끼며 오른쪽 엄지만 내밀어 자신을 가리킨다.
김애경이 눈을 깜빡였다.
잠깐, 이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한 것.
이내 알아차리고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너, 너……"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김애경.
김현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많이도 모여 있다.
김애경과 이세희, 서경태, 피터, 에일리 같은 핵심 동료는 물론 사브리나, 한스, 한철군, 케말 같은 인물들. 그리고 신필종과 박준, 무함마드 같은 동맹 각성자들도 있고 모가디슈의 이름 모를 시민들도 많이 모여 있다. 서큐버스와 흡혈귀에 연결된 릴리스, 블러드 공작은 언급하면 입만 아프고.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을 겨우 움직였다.
"나를 희생했지."
"뭐?"
"형, 그게 무슨 말이야?"
나를 희생했다?
자살이라도 했다는 말일까?
인간 각성자들은 김현의 말뜻을 얼른 파악하지 못했다. 반면 억겁에 가까운 세월을 살아온 악마와 흡혈귀는 역시 달랐다.
[성혼을 추출했군.]
핵심을 관통하는 블러드 공작의 한 마디.
김현은 무겁게 머리를 끄덕였다.
블러드 공작이 기가 막힌다는 눈으로 김현을 본다. 몇 번이나 머리를 흔들고, 몇 번은 또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끝내 한 가지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어떻게? 성혼을 추출하면 어떤 종족이든 완전한 죽음을 맞이한다. 그래, 소멸한다고 봐야겠지. 그건 공허와의 혼종이었던 선지자도 마찬가지야.]
"재생했지."
[재생! 허, 이제 알겠어!]
블러드 공작이 경탄하여 무릎을 쳤다.
[실로 대담해. 정말로 대담하기 짝이 없어. 새롭게 태어날 존재가 어떤 존재일지 알고 자신의 모든 것을 갈아서 넘겨준다는 거지?]
"잠깐만, 갈아서 넘겨줬다니? 알아듣게 말 좀 해 봐."
김애경이 끼어들었으나 블러드 공작은 처음부터 김애경에겐 전혀 관심조차 없었다.
[경탄스럽다. 감탄스러워. 내가 동맹으로 대우할 자격이 충분했던 남자야. 그 자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쉬워. 이럴 줄 알았으면 핏물 건배를 더 할 걸 그랬다.]
김현의 죽음을 확신하는 발언.
사람들의 얼굴이 굳어지는 가운데, 릴리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구나. 아름다운 이는 죽은 거구나…… 드디어 여의 반려를 찾았다 생각했거늘, 운명이 여에게서 반려를 빼앗고 말았구나……]
이어 크게 휘청거리는 서큐버스.
눈을 감았다가 떴을 때는 릴리스 특유의 눈빛이 사라진 다음이었다. 대신 요염한 서큐버스의 눈빛이 자리를 잡았다.
[흐응. 맛있어 보이는 육체네.]
입맛을 다시는 서큐버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날개를 펼쳐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다. 더는 김현에게 볼 일이 없다는 것처럼.
'아……'
묘한 상실감이 몰려왔다.
인연의 끈이, 맹약의 끈이 끊어지고 있었다.
릴리스는 김현을 동맹의 대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명분 또한 합당했다. 고위 악마가 보기에는 두 김현은 완전히 다른 인물이었으니까.
블러드 공작을 담은 흡혈귀가 근처 나무에 몸을 기댔다.
[조금 아쉬워. 이렇게 끝날 줄은 몰랐는데…… 그래도 그 동안 많은 것을 얻었으니 여기서 결별하도록 하지. 네 헌신에 경의를 표한다. 네 덕에 내 연구가 100만 년은 진전되었으니.]
푸드득!
흡혈귀가 박쥐가 되어 사라졌다. 블러드 공작과의 연결 역시 끊어졌다.
"후우우."
역시나 상실감이 몰려온다. 블러드 공작에게 받았던 권리와 맺었던 맹약이 모조리 원주인에게 돌아갔기 때문. 김현으로서 이룩했던 많은 것들이 사라졌다는 사실이 못내 쓰라렸다.
"야, 저게 다 무슨 소리야!"
김애경이 김현의 손을 움켜쥐었다. 어찌나 힘을 줬는지 강철보다 단단한 손이 허옇게 변했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
이쯤 되자 조금은 눈치 챈 것 같다. 김애경만이 아니라 동료들과 동맹 각성자들 역시 마찬가지. 사태 파악이 안 된 것은 모가디슈의 시민들 정도.
김애경의 눈을 주시하다가 말했다.
[말 그대로야.]
"그러니까 뭐가!"
김애경과 동료 각성자들만 듣도록 날린 전언.
영혼의 목소리, 즉 영음이 아니다. 기갑계에서 쓰는 초음파 진동이다. 공기 전도를 통해 특정 인원에게 도달하면 골전도로 바뀌어 달팽이관을 울렸다.
[원래 공허에 침식되면 공허만 따로 떼어내는 건 불가능해. 결국에는 공허에 잡아먹히게 되지. 그리고 1주일 전의 나는 육안으로 식별될 정도로 공허에 침식되어 있었어. 기억하지?]
"그래서?"
[그래서 난 내 성혼을 추출했어. 그래야 공허를 제거할 수 있거든.]
"미쳤어!"
김애경이 비명을 질렀다.
이세희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물었다.
"성혼을 추출하면 죽는 거 아니에요?"
[대부분은 그렇죠. 하지만 저는 조금 달랐습니다.]
"달랐다뇨?"
[당시 제 육체는 흡혈귀였고, 영혼은 유령이었으니까요. 성혼을 추출해도 완전히 소멸하지는 않습니다. 남는 게 있지요.]
담담한 목소리로 하나하나 설명했다.
자신의 체세포로 육체를 배양한 일, 유전자 단위에서의 조작, 기계 부품의 삽입, 성혼 추출, 핏물과 빙의귀 주입, 이후 재생에 이르기까지……
옛 김현이 어떤 감정으로, 어떤 각오로 이 일을 진행했는지 생생히 기억하는 김현이다. 초음파를 통해 전달되는 목소리가 부르르 떨렸다.
"왜 그랬어, 왜!"
김애경이 김현을 때리며 통곡했다.
"네가 그렇게 희생해야 할 이유는 없잖아! 누가 알아준다고!"
싱긋 웃었다.
이렇게 반응하니 고맙다. 김애경이 지금 김현을 동생으로 인정한다는 뜻이니.
"누나, 그게 내 사명이야."
"사명은 무슨 얼어 죽을! 누구도 네게 그딴 사명을 준 적 없어!"
"아냐, 있어."
22세기에 세뇌가 풀리고 초주검이 되어 인류 저항군에 합류했을 때 맹세했었다. 이 목숨이 다하는 한이 있더라도 인류의 생존을 위해 모든 헌신을 다하겠노라고.
피터가 분위기 파악 못 하고 핵심을 찔렀다.
"그럼, 지금 Mr. 김은 진짜 Mr. 김의 클론이라는 얘기에요?"
김애경이 고개를 홱 쳐들고 피터를 노려본다.
번들번들, 광기마저 엿보이는 눈.
피터가 어맛 뜨거라 하고 어깨를 움츠렸다.
"아, 아니, 그러니까 그냥 궁금해서요."
"사실이 그런 걸 뭐 어때. 엄밀히 말하면 난 복사판이지. 1990년 9월 1일에 태어난 김현의 복제인간. 이제 태어난지 1주일 정도 됐겠네."
"김현, 너……"
초음파 전언을 쓰지 않고 대놓고 말해 버렸다.
한 차례 술렁임이 거칠게 사방을 휩쓸고 지나갔다.
모두 놀란 기색이다. 사브리나 같은 경우엔 눈꺼풀이 찢어질 정도로 눈을 부릅떴고, 몇몇 시민은 다리에서 힘이 풀려 아예 주저앉는 이도 있었다.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주먹을 쥐고 허공에다가 한 차례 뿌렸다.
쿠르르릉!
천둥이 쳤다.
무형의 파동이 겹겹이 대기를 관통했다. 일순 하늘이 갈라지는 듯한 착각마저 든다. 흰 구름이 갈기갈기 찢어져 상처 입은 하늘만 민낯을 드러냈다.
7성 각성자로서는 보여주기 힘든 묘기.
사위가 조용해진다.
조금 전과는 다른 의미로 놀라 바라보는 이들 앞에서, 김현은 낮은 목소리로 선언했다.
"상관없잖아? 나는 김현의 복제 인간으로서 그 의지와 성혼을 이어받았어. 기갑계 및 충왕계 성향 8성 각성자로서, 나는 김현을 대신하여 지구와 인류를 위해 헌신할 거야."
8성 각성자!
또 한 번의 충격이 세상을 강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