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헌터사-154화 (154/200)

# 154

목표, 재건

복제 인간.

8성 각성자.

세상은 시끄러웠다. 하지만 모가디슈의 시장 관저는 세파에서 한 걸음 비껴 있었다. 대신 핵심 인물들이 모여 머리를 맞댔다.

"손해가 크네."

사브리나와 케말 등 주요 인사에게 보고를 받은 다음 김현이 내뱉은 첫 마디였다. 그런 김현을 사브리나가 어색한 눈으로 힐끔힐끔 훔쳐보았다.

"왜?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

"아, 아닙니다."

사브리나가 무의식적으로 부동자세를 취했다.

속으로는 복잡할 것이다. 지금의 김현을 옛 김현과 동일시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 테니.

뭐, 그 정도 혼란은 감안해야겠지.

김현은 천천히 현재 상황을 정리했다.

"지구의 거점은 모두 날아갔고, 백혈탑도 붕괴했고…… 남은 건 모가디슈 하나구나."

힐끗 창 바깥으로 시선을 던진다.

모가디슈 한쪽에 조그마한 안개 공간이 형성되어 있다. 김현이 재생된 그곳. 지금은 출입 권한을 설정해 놓아 그 안에서 모가디슈의 경비대와 치안대가 훈련하는 중이었다.

"불사계와 악마계의 거점도 잃었지."

"출혈이 크긴 크네요."

"무법성의 거점은 살아 있어서 다행이에요."

"차원문은 잘 가동되더라고요. 대신 좀 약해진 것 같아요."

"백혈탑처럼 대규모는 아니니까 어쩔 수 없죠."

가장 급한 것은 역시 성혼 농장.

하루 1천 개씩 5성 성혼을 생산하던 것이 김현의 최고 기반이었으니까. 그걸 하루라도 빨리 복구해야 한다.

"농장 복구하는 김에 7성짜리 만들면 어때요?"

"아, 그건 안 됩니다."

"왜요?"

"인공 농장은 5성이 한계에요. 7성 만들려면 우리도 엘페리아나 드윌레처럼 해야 합니다."

"으웩."

"어, 그럼 7성, 아니 6성부터는 인신 공양해야 한다는 거야?"

"응. 난 그럴 생각 없어. 만약에 그런 농장이 생기면 앞장서서 파괴할 거야."

"윽, 당연하죠. 그런 줄 알았으면 7성 농장 만들자고 하지도 않았어요."

의견을 꺼냈던 이세희가 눈살을 찌푸린다. 처참했던 엘페리아와 드윌레 등 유명계의 복속 차원이 생각난 탓에.

끼이익.

한창 회의 중인데 문이 열렸다. 그리고 부쩍 큰 하은이가 고개를 배꼼 내밀었다.

"하은아, 엄마 바쁜데."

김애경이 눈치를 주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김현에게 달려와 다리를 끌어안는다.

"삼촌, 삼촌이 삼촌 맞지?"

"그럼. 삼촌이 하은이 삼촌이지 누구겠어?"

"사람들이 삼촌이 우리 삼촌 아니래."

"누가? 못된 사람들이네. 삼촌이 혼내 줄까?"

"응! 혼내 줘!"

입맛이 쓰다. 사실 이래서 복제 인간 관련해서는 밝히고 싶지 않았다. 블러드 공작과 릴리스가 자기들 좋을 대로 떠들고 간 까닭에 어쩔 수 없었지만.

김애경과 하은이는 금방 김현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부모님은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공식적으로는 김현을 인정했으나 어색하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각성자들이 7성 승급 원하는데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하긴. 방어전에 참석한 분들한테는 기회를 주기로 했어. 지금부터 준비해야지."

"바빠지겠네……"

"박준 씨랑 그 친구분들도 6성 탈각 시작하기로 했어."

"참, 너 엘페리아에서 만났던 각성자들 기억 나?"

"다 기억하지."

"그 사람들 중에 몇 명이 유명계로 완전히 떠났대."

정확히 말하면 김현과의 협력을 거부했던 이들.

유명계 침공 직전, 김현은 그들의 신변을 확보하여 모종의 공간에 격리했다. 침공 개시 후 기습당하는 걸 경계해서였다. 침공이 끝난 이후 풀어주었는데 그들 중 몇 명이 유명계로 가 버린 모양이다.

"잘 됐네."

"응? 그게 왜 잘 된 거야?"

"유명계 계약자들 다 확인해 봐. 누나는 바쁘니까…… 경태야, 네가 수고 좀 해주라."

"뭘 확인하면 되요?"

"계약자는 기본적으로 해당 세계와 연결되는 영혼의 끈이 있어. 그냥 대놓고 물어 봐. 그 끈이 지금도 연결되어 있는지, 아니면 끊어졌는지."

"끊어진 거면 혹시, 유명계가 지구에서 완전히 철수했다고 보면 되나요?"

"맞아. 우리가 이긴 거지."

낮은 탄성이 회의실을 한 번 휘돌고 지나갔다.

김현은 유명계가 지구와의 연결을 끊었으리라고 확신했다. 어쩌면 차원의 벽을 생성하여 둘렀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야 전력을 보존하고 복속 차원을 복구하여 다음 성혼 쟁탈전에 참여할 수 있을 테니.

이건 시간이 지나면 명확해질 터.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

"8성에 도전하고 싶다고?"

"그래. 너무 이를까?"

"이르지. 조금만 시간을 줘. 재료도 없는 걸. 각오도 해두고."

"8성은 또 뭐 다른 게 있어?"

"당연하지. 6성에서 7성 되기는 조금 쉬웠잖아? 그런데 이건 6성 올라갈 때보다 더 어려워."

앉아 있던 이들이 일제히 헛바람을 들이킨다. 6성이 되면서 겪었던 고통이 생각났기 때문에.

김애경이 특히 그랬다. 주먹을 쥐는데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라서 주먹이 새하얗게 변했다. 무릎에 앉아 있던 하은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김애경을 올려다보았다.

"엄마는 괜찮아, 하은아."

"응. 응."

3성은 벽, 5성은 종의 한계, 7성은 필멸자의 운명이다. 8성은 가히 반신의 경지. 여기 도달하려면 무언가 특별한 것이 필요했다.

22세기에서는 오히려 이 때문에 8성 각성자들이 많이 탄생했다. 지구의 마지막 단말마라고 할까, 인류 최후의 몸부림이라고 할까. 그런 것 때문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았으니.

'영혼의 업……'

블러드 공작과 릴리스가 언급한 단어를 읊조렸다.

생각해 보면 현재의 김현이 쉽게 탄생한 것도 이 때문이지 싶다. 22세기의 마지막 희망과 시공 회귀로 쌓은 업이 모두 쏟아졌으니까. 앞으로는 어쩔지 모르겠지만.

"일단 무법성 돌면서 다른 사람들 탈각이랑 승급에 집중하자. 그 다음에나 8성에 도전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능력치도 조금 더 올리고요."

"네. 다들 능력치가 조금씩 모자라네요. 누나만 빼고."

"난 지금도 괜찮은데."

"설비 문제야. 설비 문제. 8성도 성공 가능성이 굉장히 낮거든. 한 5% 정도?"

"그거 밖에 안 돼?"

"이것도 굉장히 높은 거야. 어쨌든 성공률 최대한으로 올려놓고 시작하자. 최소한 절반은 되어야지."

"야, 그것도 낮다."

"실은 그렇지."

8성은 필멸자를 벗어나 불멸자가 되는 단계다. 도전에 성공하면 얻는 게 큰 만큼 실패 시 손해도 컸다.

완전한 소멸.

단순한 죽음이 아니다. 영혼까지 깨끗이 소멸한다.

설명을 듣고는 동료들 모두 숨을 죽였다. 4성은 죽도록 수련하다 보면 승급했고, 6성도 승급에 실패하면 성혼은 잃어도 죽진 않았는데 이건 대가가 너무 컸다.

"저, 전 그냥 승급 안 할래요."

피터가 눈을 굴리다가 말했다.

"뭐, 그것도 한 방법이지."

"Mr. 김. 한 명이라도 더 필요한 거 아니었어요?"

담담하다 못해 여유가 느껴지는 대답에 에일리가 눈살을 찌푸린다. 패기 없는 피터를 향해 눈도 한 번 부라렸다.

"8성 1명 1명이 중요한 건 사실이죠. 제 마음 같아서는 여기 있는 분들 모두 8성을 달성했으면 합니다. 하지만 그걸 제가 강제할 수는 없지요. 여러분의 자유 의지에 맡기겠습니다."

"흐응……"

"이제 거의 다 왔어요. 지구에 9성 1명, 8성 10명만 있어도 외계에서 함부로 못 건드립니다. 유명계는 벌써 떨어져 나갔고요."

"9성, 9성이 가능할까요?"

"글쎄요. 힘들긴 하죠. 제가 본 미래 지식에도 9성을 달성하는 방법은 없었고…… 그래도 여기 있는 분들이라면 가능할 거라고 봐요."

"김현 님이 해야죠. 지금까지 항상 지구 첫 번째로 승급하셨잖아요."

"이젠 힘들어요."

쌓은 업이 없으므로.

김현은 희미하게나마 그것을 깨닫고 있었다. 인공 수정체의 정보를 수정하여 일행을 둘러보자, 옛 김현이 자연스럽게 보던 정보들이 펼쳐진다.

수치화하지 못하여 색채로 보는 감각. 희고 뿌연 기운이 사람들에게 서려 있었다.

대부분이 얕다. 가장 두터운 것이 김애경인데, 그마저도 옛 김현과 비교하면 대해와 개천을 비교하는 수준이었다.

갑자기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이거 8성도 실패하는 거 아냐?'

22세기에서도 그랬다.

아론보다 더 강력하고 노련한 각성자들도 곧잘 승급에 실패하여 녹아 없어지곤 했다.

생각해 보면 8성에 도달하는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대부분 가슴 아픈 과거를 갖고 있던 이들. 특히 선조 대부터 외계종에게 놀아나 유전자 조작을 당하고, 가축 취급을 받아 가슴에 한을 품은 자들이 8성 승급 확률이 높았지.

당시에는 인류의 한계를 태생부터 벗어나서 가능성이 커졌다고 해석을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다 영혼의 업 때문인지 싶다.

'잠깐만. 그럼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실패한다는 소린데?'

소름이 끼쳤다.

한 번의 판단 실수로 동료들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을 뻔 했다는 사실 때문에.

"업을 쌓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

"그러게."

여기에 대해서는 김현도 아는 바가 없다. 애초에 영혼의 업이라는 개념을 안 것이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비슷한 개념 정도는 있었지만.

"업? 그게 뭐에요?"

"카르마? 들어본 것 같은데……"

그나마 이야기가 통하는 건 한국인들 정도. 피터나 에일리, 한스, 사브리나는 고개만 갸웃거리고 있었다.

보고 있자니 답답하다.

업을 쌓는다?

외계종들에게 가서 고문이라도 해달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외계종들을 잡아 족치면 쌓이려나?

모르겠다.

"지금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죠. 최우선 목적은 거점 복구입니다. 모두 7성이니까, 성혼 농장 정도는 간단히 만들 거예요."

"형, 백혈탑은?"

"글쎄. 그게 굳이 필요할까? 어차피 아차원 공간으로 대체할 수 있는데."

"사령관님. 실은 백혈탑이 사라진 뒤로 시민들이 동요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건 그렇더라. 나도 요즘 시민들이랑 면담하면서 느낀 건데 시민들이 백혈탑을 꽤 의존했던 것 같아. 식량 공급도 그렇고, 물자도 그렇고, 세계 각지로 여행하는 것도 가능했잖아."

"그랬지."

"심리적 기둥이라고 할까? 그런 게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다들 마음 붙일 곳이 없으니 더 그래."

딴에는 맞는 말이다. 김현이 건재하다면 모르겠으나 시민들이 보기엔 지금 김현은 옛 김현만큼 미덥지는 않겠지. 불신임 투표 말이 나오지 않은 것만 해도 용했다.

"알았어. 백혈탑에 비견될 만한 걸 만들어 볼게."

"데스 스타! 데스 스타 어때요?"

피터가 눈을 빛내며 끼어들었다.

저절로 쓴 웃음이 나온다.

"안 돼. 비효율적이야."

"멋있잖아요!"

"멋은 있지만 그게 다라서."

"그럼 스타 디스트로이어요!"

"됐어. 우주 전함이나 요새는 안 만들 거야. 그냥 큰 건축물이 나아."

크기만 커서는 의미가 없다. 당장 김현만 해도 전력을 기울이면 우주 전함이든 요새든 박살낼 수 있으니까. 그보다는 차원 결계나 강습을 대비한 억제 장치가 더 중요했다.

그나저나 뭘 만든다지?

전생에서 최후의 저항군 기지 정도는 만든 기억이 있다. 설계도도 마찬가지. 하지만 비밀 기지와 심리적 방벽 역할을 할 건축물이 달라야 함은 불문가지. 얼른 적당한 것을 떠올리기가 어려웠다.

서경태가 주먹을 쥐고 흔들었다.

"백혈탑보다 더 멋지게 만들어요, 형! 화염궁전보다 화려하고, 흡혈귀 저택보다 우아하게요!"

"너 나를 너무 과대평가 하는 거 아냐?"

"그 정도는 해야죠!"

다들 당연하다는 눈빛을 보낸다.

약간의 의구심도 함께.

복제 인간이라는 사실이 영향을 미친 것이다. 옛 김현이 똑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동료들은 터럭만큼도 의심하지 않고 따라왔겠지.

여러모로 처음부터 시작인 셈.

그래, 나는 옛 김현과 같으면서도 다른 존재이니 내 가치를 지금부터 입증해야겠지.

생각해 보면 이것은 김현으로서도 기회였다. 스스로의 능력과 전망을 증명할 수 있으니까.

적당히 회의를 마무리했다.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 필요한 재료도 모을 겸, 차원문을 기동하여 무법성으로 가려고 할 때였다. 한스가 허겁지겁 뛰어와 김현을 붙잡았다.

"뭡니까?"

"사, 사령관님! 큰일 났습니다!"

뭐에 놀랐는지 얼굴이 하얗기 그지없다.

습관처럼 정신 계열 성혼을 쓰려다 입맛을 다셨다. 재생한 김현에게는 정신 계열 성혼이 없으니까.

"왜 그러십니까?"

"큰일입니다, 큰일! 뉴욕에, 뉴욕에 괴물이 나타났답니다!"

"괴물이요? 그 정도야 미국 각성자들이 충분히……"

"7성이래요!"

7성.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등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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