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6
뉴욕 사태 –2-
흰 섬광이 방어막을 직격했다.
크게 출렁이는 방어막.
그러나 희한하게도 섬광은 구멍을 뚫어놓는 대신 방어막에 스며들었다. 쩍쩍 갈라진 논에 내린 비 같다고 할까. 방어막에 가 있던 금이 자연스럽게 옅어졌다.
탕, 탕, 탕!
연거푸 처형자를 발사.
그때마다 김현의 기계 눈이 열렸다가 닫히는 것을 반복했다. 기계 장치의 신이 발현되며 처형자를 통해 쏘는 혼력 광선의 속성을 미세하게 조절하고 있었다. 그 결과 방어막을 보강하는 광선이 쏘아진다.
이윽고 완전히 본래 모습을 찾는 방어막. 심지어 한 단계 더 나아가 우윳빛으로 변하여 견고하게 투명 거룡을 감싸 안는다.
[쿠오오오! 미개한 변방 차원 하급종 주제에 감히!]
광량한 포효가 뉴욕 전역을 강타한다.
결계가 없었으면 이것만으로도 뉴욕 시민 절반은 죽었겠지. 무형계의 외계종은 생명체의 신경계를 직접 자극하니까.
탁.
가볍게 엠파이어 스테이츠 빌딩 첨탑을 박찼다. 발바닥의 추진 장치를 능숙하게 이용하여 수십 미터 쯤 위로 올라갔다.
투명 거룡과 같은 눈높이.
분노로 몸을 떨던 놈이 별안간 침묵한다. 감정을 알 수 없는 눈빛. 한참이나 김현을 살피더니 몸 전체가 일순 흩어졌다가 재구성되었다.
[넌, 넌 뭐냐? 어떻게 이런 존재가 있을 수 있지?]
"뭐가?"
[어째서 읽어지지 않는 거냐!]
거의 절규하다시피 하는 투명 거룡.
당연한 일.
김현은 항상 자신의 정보를 감추고 다녔다. 그걸 꿰뚫어 보려면 최소한 8성 투시 계열이나 판독 계열 성혼은 있어야 할 것이다. 7성 등급인 투명 거룡으로서는 불가능했다.
[들립니까?]
투명 거룡과 대치하며, 한편으로는 지상의 각성자들과 교신을 시도했다.
각성자들이 귀 안에 장착한 무전기를 강제로 장악하여 일거에 보낸 한 마디. 개미처럼 보이는 각성자들이 하나같이 반응했다.
[누구세요?]
[당신 뭐야?]
[누구신지 모르겠지만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당하기 일보 직전이었어요!]
감사하는 사람도 있고 당황해하는 사람도 있다. 김현은 입술 한 번 달싹이지 않고 은밀하게 전파를 쏘아 보냈다.
[모가디슈의 김현입니다. 도우러 왔습니다.]
[아!]
[어, 어, 음……]
[지금부터 결계를 변형시키겠습니다. 협조해 주십시오.]
거의 일방적인 통고.
재차 처형자를 발사한다.
결계에 힘이 더해졌다. 원래도 길쭉한 구형이었는데 크기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압력을 높여 단숨에 투명 거룡을 짜부라뜨리려는 것.
[이놈, 이놈!]
투명 거룡이 비명을 지른다.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걸까. 흐릿한 아가리를 쩍 벌린다. 무형의 힘이 모이며 공간이 일그러졌다. 방어막마저 영향을 받아 소용돌이 형상으로 변모한다.
"그렇게는 안 되지."
가볍게 숨을 들이켰다.
전력으로 돌진.
가뿐히 음속을 뛰어넘는다.
김현의 전신에서 혼력이 분출되며 회색 혜성 같은 장관을 연출했다. 그것을 지상의 시민들이 입을 쩍 벌리고 올려다보았다.
방어막을 직격.
하지만 저항감 없이 지나친다. 거친 돌격과는 어울리지 않는 결과. 방어막과 혼력 속성을 일치시킨 까닭이었다.
[죽어라!]
투명 거룡도 그쯤은 예측했다. 모은 힘을 단번에 토해냈다.
바람이 분다.
전자 폭풍이다.
EMP인 동시에 모든 생명체의 신경계를 교란하고, 체내 이온을 뒤흔들어 일거에 절명시키는 강력한 숨결 공격.
본래 기갑계는 무형계에게 약한 면모가 있다. 김현이 7성 등급이었다면 이 일격으로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겠지.
그러나 김현은 8성이다.
"합!"
짧은 기합성.
복수의 검을 올려친다. 육중한 대검이 대기를 찢어발겼다. 아니, 대기만 아니라 공간마저 갈라져 버리며 세상이 으깨진다.
숨결이라고 다를까?
아무 소음도 없이 두 갈래로 갈라졌다. 원래 그러려고 했다는 것처럼 좌우로 비껴가서 김현의 뒤쪽만 헤집는다. 투명 거룡의 눈동자가 또렷하게 형상화된다.
[말도 안 돼!]
검이 좋아 보이기는 했으나, 어떻게 자신의 숨결을 이리 쉽게 가른단 말인가?
실은 궁극의 진화체 성혼 덕분이다. 모든 차원계를 통틀어 손꼽히는 강화 계열 성혼이니, 겉으로는 특별해 보이지 않더라도 어마어마한 위력을 내는 것.
"끝이다!"
[안 돼!]
바람이 휘몰아친다.
EMP가 터지고, 투명 칼날이 김현을 강타하고, 전기 신호가 신경계로 들어와 강제로 장악하려고 했다.
모조리 방어해낸다.
EMP? 혼력을 끌어올려 방어막을 만들면 그만이다. 투명 칼날도 내재된 전자를 흐트러뜨리면 같이 사라졌다. 전기 신호는 역으로 추적하여 잡아먹었다. 투명 거룡의 반투명하던 육체 곳곳에 구멍이 뻥뻥 뚫렸다.
어느새 처형자를 허리춤에 꽂은 다음이었다. 복수의 검을 두 손으로 쥐며 높이 들었다.
쌔액!
투명 거룡의 머리를 내리치자 흐릿한 바람 소리만 한 번 들린다.
감각이 있었다.
소리는 맥 빠질망정 두 손 가득 손맛이 느껴진 것.
[크크크.]
복수의 검에 실린 힘이 투명 거룡을 완벽히 관통했다.
흐릿해지는 투명 거룡.
거대한 눈동자가 김현을 주시한다. 분명히 치명타를 당한 건 투명 거룡인데, 기분 나쁜 웃음을 흘려대고 있었다.
[걸렸구나.]
파아앗!
재차 바람이 불어온다.
투명 거룡의 육체가 분해되며 김현을 압박하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투명 거룡은 군체 괴물. 크기로 치면 민들레 씨앗보다 작은 개체 수억 마리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것들 모두가 성혼을 품고 있으니 한꺼번에 압박하는 것이야말로 투명 거룡의 진짜 공격 방식이었다.
몸이 무거워진다. 전신이 압박당하며 가슴이 죄어왔다.
"훗."
예상했던 바.
김현은 전자 폭풍 속에서 표표히 서 있었다. 되레 처형자를 쏘아 외부 결계에 어떤 속성을 더했다.
축소.
안 그래도 작아졌던 결계가 더욱 작아진다. 압력이 더 강해진다. 이것은 김현만이 아니라 투명 거룡에게도 영향이 있었다.
[크윽, 네놈, 대체 무슨 짓을……]
"누가 이기는지 두고 보자고."
투명 거룡이 군체로 제 몸을 되돌린 것은 실책.
이 상태에서는 압력의 영향을 더욱 심하게 받는다. 김현이 버티고 있으면 더더욱 그렇다. 외부에서만 아니라, 김현에게 자기가 가하는 압력의 반작용도 감당해야 하니까.
어떻게 보면 이것도 망치와 모루다. 내부에서는 김현이, 외부에서는 결계가 나란히 짜부라뜨리는 중.
[내가 이렇게 당할 줄 아느냐?]
투명 거룡이 형상을 갖춘다.
거대한 용기병.
육박전에서는 제법 강하다고 알려진 형상이지만 육박전이야말로 김현의 장기. 구체화되길 기다렸다가 복수의 검을 딱 세 번 휘둘러 수천 조각으로 쪼개 놓았다.
[안 돼, 안 돼……]
투명 거룡이 몸부림친다. 수천 년의 세월을 살며 얻은 전투 경험을 모조리 투사.
하지만 상대가 오죽해야지.
등급의 차이가 나는 만큼 당해내기가 불가능했다. 외부 결계의 도움까지 있으니 더 그렇다. 사실 김현도 그 압박을 받고는 있지만, 이 정도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었으니.
마침내 투명 거룡이 완전히 흩어졌다. 김현은 혹시 씨앗이라도 묻었을까 봐 조심스럽게 결계 밖으로 벗어났다.
'끝났네.'
뉴욕 시 상공은 물론, 리버티 섬과 어퍼 만을 가득 채우고 있던 초대형 결계.
지금은 리버티 섬 부근으로만 축소되었다. 약화된 투명 거룡도 그 안에서만 날뛰고 있었다.
[어…… 저기요?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요?]
김현이 보충한 속성대로 결계를 유지하던 미국 각성자들이 무전기를 통해 묻는다.
[불태워야 합니다.]
[불이요?]
[네. 제가 알아서 하죠.]
재차 처형자를 쏘는 김현.
외부 결계가 더욱 축소된다. 이제는 리버티 섬보다 더 작아졌다. 제어하기 힘든지 미국 각성자들이 앓는 소리를 냈다. 별 수 없이 가까이 다가가 손을 내민다.
지잉, 지이잉.
손이 변형되며 기계 촉수로 변했다. 그것을 방어막에 찔러넣은 다음 직접 제어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결계의 속성을 바꿨다.
태양.
결계의 온도가 단번에 수천 도까지 올랐다. 이글거리는 열기가 김현의 몸을 달군다.
아무래도 좋다. 멸절갑은 결국에는 우주복이기도 하니까. 태양 중심에서도 생존이 가능한 것이 멸절갑이었다. 어설픈 인조 태양의 온도는 충분히 견딘다.
다만 걱정이 되는 건 뉴욕의 시민들. 이 정도 열기가 지속되면 사람이 살기 힘들다.
그래서 뒤틀었다.
구형 태양을 뫼비우스 모양, 즉 ∞ 형태로.
열기는 오로지 내부에서만 순환한다. 외부로 새어나가질 않는다. 그러나 엔트로피 법칙에 따라 에너지는 운명적으로 소모되는 법. 2주 정도 지나면 인조 태양은 완전히 소멸할 것이다.
그 안의 투명 거룡과 함께.
[끝났습니다.]
[흐아아앗!]
[만세! 이겼다!]
[우와아!]
함성이 터졌다.
우레와 같은 함성에 하늘 높이 떠 있는 김현의 귀가 따가울 지경이다. 무전기와의 연결을 해제하고는 천천히 지상을 향해 내려갔다.
인공 위성과의 연결은 아직도 유지 중이다.
일행은 잘 싸우고 있었다.
반대되는 성향의 동료를 배치한 것이 주효했다. 서경태는 암흑 군세를, 피터는 열광성을 압도하는 중이었다. 반대의 경우도 생길 수 있었으나 따라간 이들이 잘 도와주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각성자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으로 내려가자 눈에 익은 히스패닉 남자가 정중히 인사를 한다.
"오랜만입니다."
카를로스.
김현이 알렉산더와 닉, 리아를 모두 반대했던 것 때문에 전미 각성자 협회장이 됐던 인물.
못 본 사이 6성이 되어 있었다. 언뜻 드러나는 송곳니와 창백한 얼굴이 익숙했다.
불사계의 흡혈귀.
웬지 불길한 느낌이 스쳤으나 애써 무시했다.
"흥."
알렉산더도 보였다.
"영웅 나으리 납셨군."
저만치서 닉이 바닥에다가 침을 뱉었다.
그런가 하면 예리한 시선이 느껴졌다. 보나 마나 누구인지 알 것 같아서 그쪽을 보지도 않았다.
'이거 이상하네.'
한순간 훑듯이 각성자 전원을 확인한 상태.
기이하게도 6성 각성자들이 진 영혼의 업이 꽤 무거웠다. 등급은 낮은데 김현의 동료들보다 더 강하니 기이한 일.
'도대체 무슨 원리지?'
천천히 조사해 봐야겠다.
일단은 나중에. 지금은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피해는 없지요?"
"난리 중에 피해가 없었으면 말이 안 되지요. 그래도 직접적인 피해는 없어서 다행입니다. 사령관님의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뭘요. 저도 예전에 뉴욕 시민들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요. 이런 일이 있으면 협력해야지요. 저는 여전히 뉴욕 시민들의 친구입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사령관님께서 오셨으면 어떤 지옥이 펼쳐졌을지 짐작도 되지 않습니다."
진저리를 치는 카를로스. 한때 벌어졌던 사이를 좁힐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러나 김현은 이렇듯 잡담만 나누고 있을 생각이 없었다.
"혹시 제가 오기 전에 투명 거룡의 분체가 결계 밖으로 도망치진 않았습니까? 투명 거룡은 군체 괴물이라 분체 하나만 도망쳐도 위험합니다."
"어, 글쎄요……"
카를로스가 머리를 긁었다. 후방에서 결계에 힘만 더하던 입장이라 상황을 잘 몰랐기 때문.
"하아."
짧은 한숨 소리가 들리고, 묘령의 미녀가 김현을 향해 다가왔다.
리아 테일러.
알렉산더나 닉과는 다르게 5성에 머물러 있었다. 종족 변환을 하면 극대파멸력을 다룰 수 없을 테니 당연한 선택이다. 리아가 김현을 복잡한 눈으로 보다가 말했다.
"사령관께서 도착하시기 직전에 깨진 방어막 사이로 뭔가 나가는 느낌을 받았어요."
"아, 테일러 양께서 결계 중추를 맡았나 봅니다."
"네. 제가 등급은 낮아도 제어 능력은 제법 인정을 받아서요."
저번에 된통 당한 것이 약이 됐을까? 확실히 유해진 느낌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관계없는 일. 김현은 기계 장치의 신 성혼을 최대한으로 발현했다. 리아가 알려주는 위치를 특히 집중하여 살폈다.
흔적이 있다.
비록 힘 자체는 미약하지만, 워낙 높은 등급의 성혼을 품은 탓에 필연적으로 공간에 남는 흔적이.
"아!"
자연스레 탄식이 나온다.
"왜 그러세요?"
"군체 몇 마리가 도망친 게 확실합니다."
"그래봐야 몇 마리인데요……"
"시간만 주면 다시 저 정도까지 자랍니다. 오래 걸리지도 않아요. 약 2주일 정도?"
도망친 게 소수여서 이 정도다. 수백 개체였다면 1주일로도 충분했겠지.
"이럴 수가!"
"말도 안 돼!"
"사령관님, 방법이 없겠습니까?"
카를로스가 간절한 눈으로 김현을 본다. 자칫 잘못하면 도시 하나가 날아갈 판이니 당연한 일.
재차 정신을 집중한다.
투명 거룡 분체가 남긴 흔적 인근의 모든 전자 기기를 해킹했다.
CCTV, 차량의 블랙박스, 스마트폰……
돌연 김현의 눈이 번뜩 빛났다.
'이것 봐라?'
투명 거룡 분체들은 으슥한 곳에 숨어들었다.
인간 입장이 아니라 투명계 외계종 입장에서 으슥한 곳.
바로 인터넷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