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7
뉴욕 사태 –3-
왕왕 있는 일이다.
무형계 외계종은 생체 신경계에 간섭하거나 전자 기기를 해킹할 수 있다. 이들을 상대할 때는 전자 기기를 쓰지 않거나 특수 처리된 전자 기기를 쓰는 것이 상식.
오늘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시민들이 그런 전자 기기를 쓸 리가 없으니까.
"인터넷으로 도망쳤다고요?"
김현의 말에 카를로스가 기함을 했다.
"그럼 못 잡는 거 아닙니까?"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그렇죠."
뭔가 방법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카를로스.
조심스럽게 부탁을 한다.
"방법이 있다면 사령관님께서 마무리해주시지 않겠습니까? 인터넷으로 도망쳤다니, 재난 영화에서나 보던 일이 현실이 될까 두렵습니다."
흔히 나오지 않은가. 전산망이 해킹 당해서 핵미사일이 발사되는 장면이.
투명 거룡은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었다. 그 경우 인구가 줄고, 자기들이 빨아먹을 성혼 생산 속도도 둔화될 테니 어지간해서는 하지 않으려고 하겠지만.
"그러지요. 어차피 거기까진 하려고 했습니다."
흔쾌히 수락했다.
"대신 저건 제 겁니다."
엄지만 들어 시퍼렇게 변한 인조 태양을 가리켰다.
당연한 것 아닌가. 무료 봉사를 할 생각은 없었다. 인터넷 내부에서 투명 거룡 분체를 추적하는 것은 김현에게도 골치 아픈 일이기 때문이다.
카를로스가 갈등하는 것이 눈에 보인다. 미국의 각성자들이 안간힘을 써서 막아냈으니 아쉬울 법도 하다. 외계종 후원자와의 계약 문제도 있고.
다른 각성자들도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위기가 지나갔으니 본전 생각이 나나 보다.
김현의 편을 들고 나선 것은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었다.
"그렇게 하죠."
"테일러 양?"
"어차피 우리끼린 잡지도 못했어요. 김 사령관께서 조금만 늦게 도착했어도 다 죽은 목숨이었을 걸요. 그리고 다들 김 사령관 성격 알잖아요? 나 몰라라 하고 가 버리면 어떻게 해요?"
"설마하니 그럴 리가……"
"그 설마가 사람 잡는답니다. Mr. 브라운, Mr. 스미스, 어떻게 생각하세요?"
"큼!"
"흥!"
둘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돌렸다.
무언의 긍정.
"1주일이면 다시 조금 전처럼 커진다는데 그때 또 대처할 수 있겠어요? 이번에는 아예 인터넷 통해서 공격하면? 컴퓨터 바이러스로 변한 7성 괴물을 상대할 방법은 없어요. 그러느니 깔끔하게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는 게 낫죠."
정연한 논리를 펴는 리아.
누구도 반박하지 못했다. 헛기침만 하거나 먼 산을 보고만 있었다.
"잠시. 제가 결정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결국 카를로스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건다.
슬쩍 기계 장치의 신 성혼으로 엿보니 미국의 대통령이었다. 전미 각성자 협회장답게 직통 전화 번호를 가지고 있나 보다.
대통령이 결과 보고를 받고는 방방 뛰었다. 인터넷에 외계종이 숨어들었다는데 대하여 신경질적인 반응까지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의 핵무기는 회선이 외부와 단절되어 있지만 무슨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해킹당할지 모르는 일이니까.
결국 김현에게 투명 거룡의 전리품과 처리를 모두 떠넘기기로 결정이 되었다.
닉이 바닥에다가 가래침을 퉤하고 뱉었다.
"빌어 쳐 먹을 세상……"
이제는 완연히 악마로 종족 변환을 하여, 양쪽 관자놀이에 뿔이 나고 눈은 녹색으로 변했으며 입으로는 유황 연기를 뿜어내는 상태.
혹시나 하고 던졌던 충고가 소용이 없었던 모양. 김현은 요주의 인물로 알렉산더와 함께 닉을 기억해 두었다. 두 세계가 침공할 때 둘은 반드시 첨병 노릇을 할 테니.
[잠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리아가 은밀하게 정신 감응을 보낸다.
차고 있는 무전기를 해킹하여 외부 접속을 차단한 후, 골전도를 통해 답변했다.
[무슨 일이지?]
[간단해요. 6성 탈각, 사령관께 의뢰하고 싶은데요.]
[왜 나한테?]
[대안이 없으니까요.]
[흠……]
리아를 일별하고는 하늘로 날아올랐다.
거절인 줄 알았는지 다급한 정신 감응이 날아왔다.
[사령관님?]
[생각해 보지. 가능성이 낮은 건 알고 있겠지?]
[70% 정도라고……]
[틀렸어. 30%야.]
[네?]
[영육 개변할 때 성공률이 70%지. 환골탈태는 아무리 높이 잡아도 50%야. 내 누나는 조건이 좋아서 그것보다는 높았는데 그쪽은…… 아무리 잘 잡아도 20% 정도겠는데.]
[실패하면 죽나요?]
[죽진 않아. 성혼을 잃을 뿐이지. 내가 거기까진 맞춰줄 수 있어.]
사실 원 역사에서는 많이들 죽었다. 분자 단위까지 몸을 해체했다가 재구성하는 것이니 쉬울 리가 없지.
잠시 침묵이 이어지다가 어렵게 답변해 온다.
[그래도 하고 싶어요.]
[뭐, 좋아.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지. 어차피 조만간에 탈각 방법을 공개할 거여서.]
[방법을 공개한다고요? 거짓말!]
[거짓말은. 그쪽도 한 번 생각해 봐. 외계종들이 탈각을 미끼로 자꾸 각성자들을 끌어가잖아. 카를로스 그 자도 종족 변환한 이상 인류팔이…… 외계종 간첩이 되는 건 시간문제야.]
[그……]
[그래도 내게 직접 의뢰하는 게 더 낫겠지. 안전 문제도 있으니까. 하여튼 기다려 봐. 조만간에 공표할 생각이야.]
[알겠어요. 고마워요.]
[태도가 많이 유해졌는데?]
몇 달 안 본 사이 오만하던 태도가 제법 겸손해졌다. 예전의 그 인물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
'성벽에서 벗어난 걸까?'
지금쯤이면 시체 성애자가 되어 몇 건은 살인을 저질렀어야 했는데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최초의 세계 침식 때 얻은 PTSD가 발전하여 생기는 성벽. 그게 쉽게 사라질 리가 없는데……
리아가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 글쎄요.]
[아무튼 잘 해 보라고.]
속으로는 칼을 갈고 있을지도 모르지. 김현이 워낙 압도적이니 발톱을 감추고 있을 뿐.
뭐, 좋다. 극대파멸력을 다루는 고위 각성자가 하나 더 늘면 인류에겐 이득이지. 어차피 가깝게 지낼 생각도 없었다. 미국만 잘 방어해줘도 충분했다.
이때쯤 베이징과 베를린도 안정을 되찾았다. 동료들은 전자 기기를 가지고 가지 않아서, 인근의 스피커를 통해 물어보았다.
[누나, 거기 일은 다 끝났어?]
"깜짝이야! 야, 깜빡이는 켜고 들어와!"
[거기에 깜빡이가 어디 있다고 그래.]
"네 성혼으로 좀 찾아보던가. 응, 여기 일은 다 끝났어.]
[그래도 주변 수색 잘 해 봐. 열광성은 군체 괴물이라서 분체가 어디 도망쳤을지 몰라. 단세포 생물처럼 하나만 남아도 자가 증식하는 괴물이야.]
"야단났네. 아까 뭉텅이로 퍼져서 도망치던데."
[하나라도 놓치면 안 돼. 중국 각성자들 도움도 받으면서 처리해. 놓치면 1, 2주만 지나도 아까 같은 상황이 또 발생한단 말이야. 이번에는 그나마 우리가 빨리 가기라도 했지, 나중에 다른 차원계에 있을 때 공격하면 어쩌겠어.]
"그거 큰일이네. 알았어. 차오웨이랑 얘기해볼게."
[그렇게 해.]
베를린에 간 이세희와도 동일한 대화를 나누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추적. 한 개체도 남기지 않는 거였다.
'나도 내 일을 해야지.'
모가디슈로 갈 것도 없다. 뉴욕 인근에 위치한 적당한 호텔로 접근했다.
뚜두둑, 뚜둑.
체격을 왜소하게 바꾸었다.
궁극의 진화체로 전신의 근육과 뼈를 조그맣게 줄인다. 기계 부품도 알맞게 변형되었다. 그러자 키 170센티미터에 어깨가 꽤 좁은, 비실한 동양인 한 명이 완성된다.
호텔로 들어가 생체 조직으로 급조한 여권을 내밀었다. 급조했다고는 해도 형태와 질감이 진짜와 똑같다. 호텔 직원이 여권을 보고는 컴퓨터 자판을 두드렸다.
"Mr. 리?"
"맞습니다."
"오늘부터 1박이시고요. 저희 호텔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호텔 전산을 해킹하여 예약 내역을 만들어 놓은 다음이다. 돈도 수십 바퀴 계좌를 돌려서 세탁한 다음 입금했다. 호텔 직원은 의심하지 않고 방 열쇠를 주었다.
'어디 보자……'
대부분의 호텔은 LAN 선 접속 단자 정도는 있다. 김현이 들른 호텔도 그랬다. 오래 되었는지 시설이 낙후되어 와이파이는 없었지만.
우득, 우두둑.
몸을 원래대로 돌린 후 손가락을 변형시켰다.
왼손 검지 첫 마디가 변형되어 LAN 선 단자로 변한다. 그것을 접속 단자에 찔러 넣었다.
철컥.
기분 좋은 쇳소리.
접속 단자는 책상 바로 옆에 설치되어 있었다. 의자에 앉고는 다리를 책상에다가 올렸다. 정신을 집중하여 기계 장치의 신으로 변모한다.
디지털 세상이 펼쳐졌다.
0과 1로 범벅이 된, 거대한 바다와도 같은 세계.
차분히 재구성했다.
결국은 인식의 문제.
김현이 쓰는 판독 계열 성혼이 상대의 정보를 수치로 표현하는 것과 같다. 이 세계를 바다로 생각하면 바다로 보이고, 도시로 생각하면 도시가 된다.
인간으로서 갖는 인지 능력의 한계 때문에 디지털 세상에 들어오게 되면 이렇게 바꾸어 생각하는 것이 좋았다. 기갑계 태생이라면 모르겠으나, 인간으로서 태어난 이상 0과 1을 무한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힘드니까.
'좋아……'
좁은 길이 보인다.
호텔 랜선이다.
그걸 통과하자 널찍한 국도가 나타났다. 국도는 인근의 거대한 탑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아마 저것이 근처 통신국이겠지. 저걸 지나치면 보다 중심 서버로 가게 된다.
인터넷이란 결국 하나의 그물(network).
중심이 되는 서버가 있기 마련이다. 그곳에서부터 추적을 시작할 생각이었다. 투명 거룡의 흔적이 반드시 남아 있을 테니.
'혼자서는 부족하지.'
자신을 나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복제한다.
옅은 회색빛 덩어리, 몸은 0과 1의 집합이지만 옅은 성혼을 품은 개체들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그물처럼 이어진 통로를 타고 뉴욕 시 인근의 서버를 목표로 주행했다.
아까 밖에서 살펴본 바로는 뉴욕 시를 벗어난 투명 거룡의 분체는 없었다. 따라서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할 것이다.
김현의 짐작이 맞았다.
뉴욕 시 한 빌딩의 서버에서 성혼의 흔적을 찾아내는 것에 성공했다.
'어디로 갔지?'
도망친 개체는 총 31개체.
그것들이 여기서 하나로 뭉쳤다. 스스로 증식하다가, 성혼이 공급되지 않아 성장의 한계를 느꼈는지 다른 쪽으로 빠져나갔다.
김현도 복제했던 정보 덩어리를 모두 불러 모았다. 하나가 되어서는 구체적인 형상을 상상한다.
현실의 자신이 가상 세계에서 완전히 구체화된 것.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인터넷 세상에서는 투명 거룡의 힘이 훨씬 강해진다. 동급이었다면 닫힌 서버에 몰아넣고 현실로 불러내는 게 승산이 있겠지. 하지만 등급의 차이는 지대한 법. 가상 세계에서든 어디에서든 이길 자신이 있었다.
그대로 질주.
기계 장치의 신이 온전히 발현된 탓에 데이터 량이 어마어마했다. 김현이 지나가는 통신망이 마비되며 약간의 소요가 일어났다.
"오, 쉿! 또 먹통이야!"
"헤이! 와이파이가 안 먹히는데?"
"어…… 잠시만요. 껐다 켜 볼게요. 이제 되나요?"
"된다!"
"역시 기계는 껐다 켜는 게 제일이지."
"때리는 게 아니고?"
"그건 하수들이나 하는 거야."
김현은 피식 웃었다.
통신망을 온통 장악한 탓에 그들이 하는 말이 스마트폰 마이크에 수집되어 들려온 것.
재미있는 일이라 생각하며 속도를 올린다.
김현이 보는 세계.
빛줄기처럼 표현된 고속도로가 저 멀리까지 이어져 있다. 웅장한 빛의 탑이 사방에 가시처럼 섰다.
길은 선, 탑은 서버.
달리는 도로가 계속해서 넓어진다. 그러더니 홱 꺾어서 어느 탑을 향해 질주했다.
김현은 그 탑을 확인했다.
'왜 저기로 가는 거지?'
결국 투명 거룡은 성혼을 찾아 간다. 이 방대한 통신망과 막대한 정보량은 아무리 컴퓨터 바이러스로 변한 투명 거룡이라고 해도 양분으로 삼지는 못하니까.
의문을 품은 채 흔적을 뒤쫓았다.
투명 거룡은 빛의 탑을 몇 군데 더 지나쳤다. 그때마다 탑의 크기가 점차 줄어든다. 도로도 그랬다. 처음에는 김현이 인식하기에 한강보다 넓던 도로가 택도 없이 줄어들었다.
16차선, 8차선, 4차선, 2차선 하는 식으로.
그렇게 도착한 곳에서 김현은 커다란 절벽을 발견했다.
막다른 곳.
더 이상 서버도 통신선도 없다. 외부와의 연결이 단절된 곳에서 투명 거룡의 자취가 사라진 것이다.
"잔재주를……"
이유는 간단했다.
투명 거룡이 인터넷으로 숨어들 때처럼, 역으로 인터넷 밖으로 나간 것이다.
도대체 이곳에 뭐가 있기에?
김현은 인공위성에 접속하여 현재 위치를 알아냈다.
[파워볼 뉴욕주 복권사무소.]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로또 복권.
매주 사람들의 욕망이 휘몰아치게 만드는 그것.
이때 별의 힘이 반응하여 미약한 성혼과 혼력이 태어난다.
거의 모든 힘을 잃고 영락한 투명 거룡이라면 잠시 은신하며 힘을 키우려 시도해 볼 만했다.
장소를 알았으니 됐다.
김현은 가상 세계의 분신을 회수한 후, 공간을 뛰어넘어 파워볼 본사의 내부 네트워크에 직접 접속했다.
그 직후, 자신이 실수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