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헌터사-159화 (159/200)

# 159

또 다른 지구 –1-

고민을 했다.

무엇을 만들어야 인상적일까, 하고.

거대한 성? 하늘을 꿰뚫는 마천루?

너무 식상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외계종들의 거점 중에 이미 있었다. 그러니 그걸 만들어 봐야 짝퉁 소리 듣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래도……'

온전한 자신으로서 첫 번째 하는 일 아닌가. 복제 인간인 건 아무래도 좋지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 싶었다.

"글쎄?"

김애경에게 물어보자 어깨를 으쓱인다.

"잘 생각해 보면 좋은 거 있지 않겠어? 너도 기억은 다 받았다며."

"그래도 내 기억 속 건축물이라고 해봐야 기갑계 우주요새나 전함, 외계종 거점 정도라서."

"그럼 그런 거 가져오면 되지."

"실용성이 없어."

"난 모르겠다. 어느 누구가 떠맡긴 일이 하도 많아서."

김애경이 컴퓨터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인상을 썼다. 열람해야 할 전자 문서가 엄청나게 많았다. 케말이 돕고, 새롭게 충원된 비서들이 도와줘도 그랬다.

"정말 내 생각 듣고 있으면 네가 여기 앉을래? 나 잠시 쉬면서 생각 좀 해볼게."

"고생해."

"쳇."

얼른 꽁무니를 뺐다. 전자두뇌가 삽입된 지금이라면 순식간에 서류 처리가 가능하겠으나, 21세기의 분쟁을 가치 판단해 가며 정략적인 판단을 내리기는 김현에게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다른 사람들도 다 바빴다. 이세희는 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는 중이고 나머지는 사냥을 하거나 성혼 농장을 설치하며 돌아다녔다.

그나마 스마트폰으로 메시지를 보내자 한 마디씩 답변이 돌아온다.

[어…… 대형 병원은 어떨까요?]

[형 이번에 만든 로봇 있잖아. 그거 크게 키워서 만들면 어때? 나중에는 그거 타고 싸우는 거지! 파일럿은 형이 하고, 나는 기관사나 화기 통제수 정도만 맡겨줘도 좋아!]

서경태의 회신에 피식 웃었다.

거대 로봇은 무슨.

그걸 타고 싸우다가 고위 외계종이나 각성자에게 걸리면 아까운 자원만 날린다. 탑승형 장갑은 멸망왕 정도 크기가 적당했다.

[거점이면 역시 데스 스타죠, 데스 스타!]

[딱히 생각나는 게 없는데 시민들한테 물어보면 어때요? 아예 공고 붙여서 공모해도 좋고요. 뭐 좋은 게 나올지도 몰라요.]

에일리의 지적에 귀가 활짝 열렸다.

그래, 창의력이 부족하면 다른 사람의 생각을 빌리면 그만이지.

즉각 상금을 걸고 공모전을 실행했다.

별의 별 아이디어가 다 나온다.

단순한 건물부터 궤도 엘리베이터, 차원 전함, 공중섬, 우주 기차, 투명 요새 등등.

하지만 김현의 얼굴은 시큰둥했다. 외계에선 흔히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김현은 이런 것이 아닌 전혀 색다른 무언가를 만들고 싶었다.

"천국을 만들면 어떨까요?"

서류를 정리하던 사브리나가 지나가듯 말했다.

"천국?"

별 것 아닌 듯한데 퍼뜩 뒤통수를 스치는 영감이 있었다.

김현이 되묻자 사브리나가 다소곳이 고개를 숙인다.

"제 동생들이 그러더라고요. 바티칸에 천국이 있다던데 그거 진짜냐고요."

"아하, 그 이야기야?"

바티칸 시국에도 외계종의 거점이 있다.

천상계, 빛의 동산.

성서에 나오는 에덴 동산을 연상시키는 곳이다. 야트막한 동산에 푸르른 풀과 온갖 과실이 풍족하게 열리고, 기이하게 생긴 천상계의 성수들이 자유롭게 노닐었다.

실상은 푸르뎅뎅한 괴물 소굴이지만, 정신적으로 방비하지 않고 들어가면 그렇게 보인다.

"천국 아냐. 거기도 결국은 외계종 소굴이지. 나중에 가게 될 일 있으면 반드시 정신 방어 장비 가지고 가도록 해."

"아…… 동생들이 가보고 싶어 하던데 안 됐네요."

"그러게. 걔들은 아직 각성자도 아니니까 안 들어가는 게 좋아. 방어 장비만으로는 한계가 있어."

"아쉽네요. 그럼 사령관님, 모가디슈에 천국을 만들면 안 될까요?"

"천국을?"

"네. 외계종이 만든 가짜 천국이 아니라 진짜 천국을요."

살짝 눈살을 찌푸리는 김현.

아닌 게 아니라 천국도 공모에서 나오긴 했다. 천상계의 동산에서 영향을 받아서도 그렇고, 힘든 현실에서 벗어나 천국에 가고 싶은 욕구 때문이기도 했다.

'천국, 천국이라.'

사실 천국을 연출하는 건 쉽다. 푸르른 신록으로 뒤덮인 장소를 만들고 동식물을 풀어놓으면 되니까. 여기에 자동 회복 기능과 옅은 고양감 효과만 넣으면 끝.

하지만 이래서야 천상계의 동산 거점과 다를 게 없다. 건강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선에서 해결하려면 흔히 말하는 마이너 카피가 되겠지.

김현의 눈이 좌우로 움직이며 고심하는 듯하자, 사브리나가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죄송합니다. 괜한 말씀을 드린 것 같습니다."

"아냐. 느낌이 와. 천국, 천국이라 이거지……"

이상하게도 뭔가를 잡아챌 것 같은 느낌에 김현은 계속 천국이라는 단어를 입속에서 굴려보았다.

목이 간질간질했다.

자그마한, 아주 자그마한 계기만 있으면 잡아챌 것 같은데……

"그래서, 동생들은 어떤 천국이 좋을 것 같대?"

"네?"

"말 그대로야. 동생들이 또 뭐 말한 건 없어? 그냥 천국이면 된대?"

"아……"

사브리나가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김현이 뭔가 떠올린 듯해서 조금이라도 단서를 더 주려는 것이다.

"맞아. 언제든지 오갈 수 있는 천국이었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언제든지 오갈 수 있는 천국?"

"네. 원래 천국은 죽어야 가는 곳이잖아요. 바티칸에 있는 곳도 가기 힘들고."

"그건 그렇지."

"구둣발 한 번 마주쳐서 갈 수 있는 천국이면 좋겠다고 했어요. 노래도 부르던데요?"

구둣발 마주쳐서 간다고?

어떤 소설에서 본 것 같긴 한데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아론의 기억이 아니라 그 이전, 원판 김현의 지식이었으니.

'구둣발……'

한 장면이 연상된다.

크게 제자리 뜀뛰기를 하여 휙 솟구치는 소녀의 모습이. 그리하여 머리 위로 보이는 커다란 행성으로 날아간다.

행성?

순간, 누군가 머리를 후려친 듯한 충격이 엄습했다.

그래, 행성!

별을 만드는 거다. 기갑계의 살풍경한 기계 별이 아니다. 지구, 맞아, 지구를 만들자. 모가디슈의 하늘 위에 지구를 축소한 모형 지구를 만들어 뛰어놓자.

머리만 들면 보이는 지구. 사람들은 그걸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더구나 길게 뜀뛰기를 해서 모형 지구로 날아갈 수 있다면?

이걸로 끝내면 안 되지. 지구를 똑같이 재현하자. 지구 곳곳에 있는 거점을 여기랑 연결시키자. 모형 지구만 통과하면 지구 어디든 갈 수 있게 만드는 거다.

김현은 빙그레 웃었다.

"고맙다, 사브리나."

"네? 아, 네. 도움이 되었다니 기쁩니다."

"또 보고할 내용 있어?"

"아닙니다. 더는 없습니다."

"그래, 고생해."

사브리나가 인사를 꾸벅 하고는 나갔다.

그 뒤를 보며 상념에 잠긴다.

사브리나도 슬슬 7성 승급을 시켜야 하는데 능력치가 아직 모자라서 아쉽다.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지.'

지금도 무법성에 열심히 나가며 사냥 중이니까.

슥슥 설계도를 그려나갔다.

하나의 별을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안에 생태계를 담으려고 하면 더더욱 그렇다.

'다 지구처럼 할 필요는 없지.'

기이하게, 몽환적으로.

내부는 외계종 동식물로 채울 생각이다. 사람에게는 무해하고, 자기들끼리도 잡아먹지 않게끔 충분히 영양을 공급하면서.

크기는 어느 정도가 좋을까?

백혈탑을 되짚어보자. 백혈탑은 높이가 50킬로미터였고 가로세로 길이는 1킬로미터에 달했다. 그렇다면 부피가 50세제곱킬로미터가 된다.

이걸 구형으로 치환하면 반지름이 대략 10킬로미터에서 11킬로미터 정도면 비슷한 부피.

'12킬로미터로 하자.'

이러면 부피가 크게 증가하여 백혈탑에 비해 40% 이상 늘어난다. 조금 부담스럽긴 했지만 아무래도 좋다. 부피가 크다고 무조건 자원이 많이 드는 건 아니니까. 중요한 것은 기능이었다.

'돈이 많이 들겠어.'

정확히 말하면 성혼이.

지금 김현은 6성 탈각과 7성 승급을 진행하며 성혼을 무지막지하게 벌어들이고 있다. 그것으로도 모자랄 것 같다. 저번 유명계 침공 당시에 털어 넣은 게 워낙 많기 때문이다.

설계도를 슥슥 완성한 후 나직한 한숨을 뱉었다. 들어가는 성혼의 양 때문이다. 예전에 백흔귀에게 뜯어냈던 명금 백만 관으로는 인공 지구가 아니라 대륙 귀퉁이 하나 만드는 게 고작이겠다.

"어디서 성혼 나올 구석 없나."

나직한 푸념.

다른 각성자들이 들으면 어이없어 할 것이다. 매일 앉아서 버는 성혼이 엄청나게 많은데 너무 욕심 많은 것 아니냐며. 하지만 김현에겐 절실했다.

무법성에 가서 7성 떠돌이들을 사냥할까?

그것도 여의치가 않다. 7성 떠돌이는 무법성에도 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나마 가능성이 높은 건 정보를 사서 추적한 후 사냥하는 것인데 그거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오죽하면 저번처럼 7성 떠돌이들이 지구에 침입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지경.

그러나 소식이 없었다. 투명 거룡과 암흑 군세, 열광성이 되레 사냥 당했다는 소문을 듣기라도 한 듯이.

'침공이라도 유도를 해?'

불현듯 드는 생각.

머리를 흔들어 쫓아 버렸다. 또 차원의 벽이 타격을 받으면 안 된다. 지금은 7성 외계종들이나 드나들지만, 그랬다가 8성 외계종이 마구 날아오는 수가 있다.

'천천히 하자, 천천히.'

어차피 장기 작업이다. 누구 하나 도와줄 사람도 없다. 어느 드라마 주인공이 즐겨 쓰던 대로 수작업으로 한 땀 한 땀 수놓듯이 제작해야 한다.

'할 수 있는 것부터.'

바로 일어나서 창고로 향했다.

"사령관님."

"안녕하십니까?"

"그래, 수고."

창고에 쌓인 성혼을 확인했다.

많다.

5성 성혼은 수만 개. 그 이하 등급은 헤아리기도 힘들었다. 성혼 농장과 수수료의 위력.

'성혼 농장은 아직 반도 못 채웠지?'

동료들이 만들고 다니는 속도가 옛날 김현만도 못했다. 김현이 거들기 시작하면 속도가 붙을 것이다.

그래도 다행이다. 여기 있는 걸 다 쓰면 거점의 중추, 핵을 만들 재료는 다 모을 것 같으니까.

[한스 사장님.]

[네, 사령관님. 지시하실 거라도?]

[무법성 가실 때 제가 불러드리는 재료들 사다 주세요.]

[알겠습니다.]

지금도 원정은 24시간 단위로 돌아간다. 그때까지, 김현은 성혼 농장을 추가로 설치하기로 했다.

정확히 24시간 후 필요한 재료가 갖춰졌다.

바로 제작 시작.

"엄마, 저기!"

진풍경이었다.

수많은 금속과 보석이 하늘 높이 떠 있다. 그 주변을 빛나는 성혼이 회전하며 돌아다녔다. 마치 은하수를 휘감은 듯한 모양새에 모가디슈 시민들이 입을 벌리고 구경했다.

중심에는 김현이 보인다. 김현은 상공에 체류한 채 이리저리 손짓했다. 그때마다 금속과 보석이 반응하여 뭉치며 어떤 형상을 만들었다.

작은 구.

핵 중의 핵이다. 김현이 구상한 인공 지구는 이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지구가 아니라 다른 것을 만들었어도 마찬가지였겠지.

사실 작다고만은 못한다. 직경이 10미터에 달하니까. 어디까지나 인공 지구에 비해서 작은 거였다.

"후우."

짧게 한숨을 쉬고 구를 활성화했다.

팟!

빛이 터진다.

구가 작은 태양으로 변했다. 눈을 찌르는, 뉴욕 시 상공에 만들어졌던 인공 태양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광량이다. 시민들이 놀라 눈을 감을 때, 언제 그랬냐는 듯 빛이 연하게 흐려졌다.

대신 희뿌연 안개가 주변에 꼈다. 모가디슈 시민들에게는 익숙한 아차원 공간.

"사령관님이 뭘 하시나 보다."

"뭐 하는데?"

"글쎄. 새로 건물을 짓는다고 하셨는데 그거 아닐까?"

김현은 작은 태양을 보다가 물러났다.

오늘은 여기까지.

몸을 날려 성혼 농장 부지로 향했다. 열 곳을 연달아 방문하여 성혼 농장을 만든다. 그리고 성혼을 모아다가 한스에게 전달했다. 한스는 그걸 무법성에 가져가서 팔고, 김현이 요구한 재료를 모아 가져온다.

그걸 매일매일 핵에다가 덧붙였다. 처음에는 작은 태양만 있던 것이 금속 덮개가 덮이고, 밤송이처럼 빛나는 가시가 돋았다. 다음날에는 가시 끝마다 인공 태양이 매달린다. 기하학적인 무늬를 품은 금속 덮개가 놓인 다음, 이번에는 입체 금속 뼈대가 건설되었다.

크기만 직경 24 킬로미터. 즉 이 뼈대야말로 인공 지구의 밑그림이었다.

"우와……"

"도대체 뭘 만드시는 거지?"

김현이 작업 중인 안개 공간은 다른 곳보다 확연히 옅었다. 그래서 외부에서 얼마든지 관찰할 수 있었다.

자연히 이 구조물은 모가디슈의 명물이 되었다.

매일 같이 시민들이 구경하고 지나갔다. 모가디슈에 상주해 있는 기자들은 물론 세계 각국에서 새로운 기자들과 관광객들도 몰려들었다.

김현이 원했던 일.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인공 지구가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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