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0
또 다른 지구 –2-
"캐티! 캐시! 놀자!"
짤랑짤랑한 어린아이 목소리가 아침 공기를 갈랐다.
1층에서 외치는 데도 25층 꼭대기 층까지 아주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다. 캐티는 부스스한 얼굴로 창 밖에 대고 소리쳤다.
"조금만 기다려!"
"너희들, 늦어!"
"네가 빠른 거야!"
부리나케 얼굴에 물만 묻히고 옷을 걸치는 캐티.
캐시도 하품을 하면서 옷을 주섬주섬 입고 있었다.
이마에 더듬이가 돋은, 눈도 곤충을 닮은 소녀가 다가와 둘의 매무새를 정리해준다.
"옷은 입고 나가야지."
"응, 응."
처음 저 모습이 되었을 때는 무서워서 피하기도 했었다.
이젠 아니다.
겉모습이 어떻게 변하든 언니는 언니니까. 소중한 가족이니까.
띵.
벽면에 부착된 버튼을 누르자 밖에서 맑은 종소리가 났다. 연년생 동생인 캐시의 손을 붙잡고 달려 나간다.
"조심해!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고!"
"알았어, 언니!"
"안녕! 저녁에 봐!"
"조심해서 다녀와!"
사브리나는 길게 손을 흔들었다.
이런 생활이 꿈만 같다.
해적과 정부군들 틈바구니에서 떠돌고, 괴물들에게 쫓기다 큰일을 당할 뻔한 게 엊그제 같은데 이리도 안온한 나날이라니.
물론 사브리나 자신은 외계종들을 사냥하며 위험한 순간을 보내고 있으나 예전과 비할 바는 아니다. 특히 동생들의 얼굴에 맺힌 자연스러운 웃음은 꿈도 꾸지 못했던 거였다.
'지킨다, 내가.'
은밀히 맹세하는 사브리나.
그 사이 엘리베이터가 1층에 닿았다.
열린 엘리베이터 문 앞에서, 머리를 곱게 땋은 동양인 여자아이가 허리에 손을 얹고 볼을 부풀렸다.
"늦어!"
"늦기는. 네가 빠른 거라니까."
"밤새 기다렸다구!"
"그건 네가 각성자라서 잠이 없어서 그렇지."
"나도 각성하고 싶다."
"너네 언니가 안 된다고 했다며."
"칫, 좋겠다. 네가 사령관님한테 잘 말씀드리면 안 돼? 우리 언니는 사령관님이라면 껌뻑 죽는데."
"삼촌도 너희는 늦게 각성하는 게 좋다고 하던데?"
"쳇! 너는 4살도 안 됐으면서 각성했으면서."
"그야 나는 하늘이 내린 대천재니까 그렇지!"
"우웩, 또 나왔다. 그 대천재 타령."
하은이는 이죽거리며 코를 높이 들었다.
조금 변형되긴 했지만 어디서 많이 본 표정이다. 예전에 김애경도 그렇더니, 하은이도 김현을 조금씩 따라하는 것.
"오늘은 어디 갈 거야?"
가만히 있던 캐시가 눈을 빛냈다.
하은이가 으스대며 손짓을 했다.
"갈까?"
"가자!"
아파트 밖으로 나와 나란히 늘어서는 셋.
지나가는 아파트 주민들이 귀엽다는 듯 꼬마들을 보고 웃음을 지었다.
그들을 본체 만체 하며 셋은 오른발을 들어서 발뒤꿈치로 왼쪽 발뒤꿈치를 가볍게 찼다. 그리고 제자리에서 크게 뜀뛰기.
쏴아아아.
바람 소리가 울렸다.
하늘에 떠 있던 거대한 푸른 별이 선명히 눈에 들어온 순간 중력이 역전되며 몸이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찰칵, 찰칵.
누군가 사진을 찍는다.
관광객일까? 입을 쩍 벌린 것이 참 볼 만하다. 하은이가 깔깔거리며 웃을 때, 모가디슈 곳곳에서 사람들이 바람에 휩쓸린 낙엽처럼 날아올랐다.
이어서 새처럼 비행하는 그들.
아니, 새 같다고 하기엔 조금 부자연스럽다. 그저 허공에 둥둥 떠 있는 게 전부니까. 그러고만 있으면 100킬로미터쯤 떨어진 인공 행성으로 불어가는 바람이 저절로 데려가 준다.
하은이는 몸을 뒤집어 머리 위의 지구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예쁘다.'
볼 때마다 생각하지만, 정말로 예쁘다.
불과 100킬로미터 떨어진, 직경 24킬로미터의 인공 지구.
낮이고 밤이고 떠 있는 인공 행성은 볼 때마다 기이한 흥취를 일으켰다. 아차원에 고정된 까닭에 그림자가 드리워지지 않아 더 그랬다. 이것은 현실이되 이계이며, 제작자이자 주인인 김현의 권능을 만천하에 선포하고 있었다.
인공 지구는 자전하지 않는다. 항상 같은 면만을 보여주었다. 아프리카 대륙, 특히 모가디슈가 있는 쪽을.
탁, 탁.
착지 직전 바람이 잦아들어 가뿐히 착지했다. 인근에 늘어서 있던 마차에서 사람들이 손을 흔들었다.
"뉴욕 갑니다, 뉴욕!"
"서울은 여깁니다. 쌉니다, 싸요!"
"가자는 곳은 어디든 다 갑니다!"
마차는 마차인데 신기한 마차.
말이 아니라 생전 처음 보는 동물들이 끌고 있었다. 허공에 둥둥 뜬 가오리, 혹은 머리에 뿔이 난 독수리 등등. 기이한 것은 마차도 바퀴 대신 빛나는 보석을 달고 있다는 점.
하늘 마차라고 해야 할까.
사실 이건 김현도 생각하지 못했던 거다. 소환 계열이나 정신 계열 하위 각성자들이 모여들어 인공 지구의 외계종을 길들여 택시 비슷한 사업을 하기 시작한 것. 김현은 외계종을 학대하지 않고, 적당한 세금을 내는 조건으로 허가를 내주었다.
"아저씨! 서울이요!"
"아, 오늘은 서울 가시나 보죠?"
"네! 떡볶이 먹으러 갈 거예요!"
떡볶이.
옆에서 캐티와 캐시도 침을 흘렸다. 놀거리는 올랜도의 디즈니월드가 최고지만 간식거리는 서울이 익숙했다. 처음부터 좋아한 것은 아니고, 하은이와 어울려 놀다 보니 길들여졌다고 할까.
"타세요. 가겠습니다."
하은이가 왼쪽 팔을 내밀었다. 작은 팔찌를 차고 있었다. 마부가 자기 팔찌를 조작하고는 가볍게 마주치자 홀로그램으로 20달러가 결재되었다는 표시가 나왔다.
"너무 비싸요!"
귀여운 항의에 마부가 웃어 보인다.
"대당 가격이니 어쩔 수 없습니다."
"칫! 나도 비룡을 길들이고 말 거야!"
"그것도 좋지요. 타세요."
꼬마들이 우르르 마차에 오른다. 마부가 손을 휘젓자 가오리들이 두둥실 몸을 띄웠다. 마차가 그에 따라 하늘 위를 미끄러지며 빠르게 나아간다.
둥근 지평선이 보이는 세상. 그리고 머리 위를 보면 거대한 육지가 천장처럼 떠 있다. 관광객들이 주변에서 입을 벌리고 사진을 찍는 것이 재미있었다.
"아저씨, 빨리요! 따블!"
"어이쿠, 감사합니다. 이랴!"
따블은 또 어디서 배웠는지.
하늘 마차는 구름을 넘나들며 비행했다. 실제 지구를 정교하게 모사한 아라비아 해와 인도 대륙, 벵골 만, 인도차이나 반도가 순식간에 아래를 지난다. 그리하여 남중국해와 대만, 동중국해와 황해를 건너 서울이 있는 곳에 도달했다.
그곳에는 정교하게 묘사된 서울이 있다. 남산 타워와 63빌딩, 롯데 타워가 모두 그 자리에 위치한다.
모형 지구, 모형 도시.
여기 서면 자신이 거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하늘 마차가 떠나고, 셋은 서로를 한 번씩 마주보았다.
"가자!"
팔짱 끼고 신발 마주치고 뜀뛰기.
오늘 이 꼬마들은, 서울의 떡볶이 맛집을 몽땅 섭렵할 예정이었다.
***
'잘 놀고 있네.'
김현은 습관처럼 인공위성으로 하은이의 상태를 확인했다.
주하은, 한국 나이로는 여섯 살이고 만 나이로는 네 살.
친구인 캐티와 캐시는 각각 여덟 살 일곱 살이었다. 차이가 많이 나지만 체구는 의외로 비슷하다. 각성자인 주하은이 부쩍부쩍 자라는 탓.
아마 12살쯤 되면 이미 성장이 다 끝나지 않을까. 거신계 성혼도 있으니 키 180, 크면 190쯤으로.
'나중에는 하은이가 인류 최강 소리를 들을지도 모르겠네.'
바빠서 못 챙기는 사이 하은이는 크게 사고를 쳤다.
훈련소에 들락날락하더니 4성을 이룬 것.
여기에 자신의 성혼을 몽땅 통합하기까지 했다. 따라서 하은이가 보유한 성혼은 이렇게 변했다.
[성혼] 명왕(4★, 유명), 용왕(4★, 용왕), 신왕(4★, 거신).
어린아이라고 얕보면 안 된다. 가진 것이 모두 4성 등급이고 능력치도 4성 막바지에 이르러 있으니. 슬슬 5성 승급도 가능한 때이지만, 미래를 우려한 김애경 때문에 승급을 늦추고 있었다.
캐티와 캐시를 붙여준 것도 같은 맥락. 친구 없이 성혼만 쫓아다니다가 사이코패스라도 될까 무서워 그런 거였다.
'그건 그렇고, 도대체 업이 뭐지?'
인공 지구를 완성한 이래 김현이 붙잡고 있는 화두.
지구의 7성 각성자는 현재 15명이다.
김현 일행에서 넷, 동맹 각성자 중 다섯, 그리고 종족 변환한 이들 중에서 여섯.
아직은 전력의 우위를 점하고 있다. 종족 변환 각성자가 전부 다른 성향인 걸 생각하면 더 그렇다. 하지만 이 추세라면 언젠가 역전당할 수 있다는 점이 문제.
8성 각성자가 필요했다.
힘의 균형이 무너지기 전에.
'업, 업이라……'
단순히 지구의 여러 종교와 가르침에서 얘기하는 카르마는 아닌 것 같다. 성혼과 관련하여 돌아가는 무엇인 것 같은데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블러드 공작과 릴리스와의 동맹이 유지되었다면 그 둘에게 물어보겠으나 이미 끝난 뒤. 가서 물어봤자 좋은 소리는 못 들을 것이다.
어쩌면 그 둘이 지구를 침공할 준비를 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김현과 지내면서 많은 것을 캐냈고, 마침 첨병 역할을 할 각성자도 있으니까.
닉과 카를로스.
지금은 둘 다 7성 각성자가 된 것이다.
'옛날의 나는 어마어마한 업을 지고 있다고 했지.'
멸망한 세계, 멸종한 종족의 비원을 한꺼번에 짊어졌으니까.
이쯤 되자 궁금증이 생긴다.
22세기 지구의 생존자인 자신이 그 정도 업을 졌다면, 마찬가지로 멸망하여 고통의 세월을 보내는 종족의 생존자들은 얼마나 많은 업을 졌을까 싶어서.
만약에, 만약에 말이다……
그 업을 옮겨올 방도가 있다면?
정말로 동료들 모두를 8성으로 올리는 것도 가능하겠다.
'엘페리아, 드윌레……'
김현이 아는 유명계의 복속 차원들.
지금은 차원의 벽이 강해져 쉽게 넘기 힘들다.
아무래도 좋다. 궁하면 통하는 법이고, 김현은 저번에 투명 거룡과 싸우면서 깨달은 게 있으니까.
분신을 보내자.
목표는 정보 수집. 실패해도 좋다. 실패하면 실패한대로 대책을 궁구하면 된다.
즉각 제작에 철수.
10개체의 분신을 만들었다. 투명 거룡과 비슷하게 군체 종류이고 전자 생명체다. 혼력을 이용, 자가 증식이 가능하며 일정 시간이 지나면 자신을 소멸시키며 차원문을 열어 수집한 정보를 보낸다.
'이젠 뭘 하지?'
성혼 농장이나 만들자.
예전에는 성혼 농장을 1천 개만 만들어도 충분했다. 하지만 지금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구 전체의 성혼 분포가 높아지면서 성혼 생산력도 늘었으니 성혼 농장 수를 더 늘려도 감당하겠다는 판단을 했고.
'좋아, 2천 개까지만 올리자.'
안타깝게도 6성과 7성 성혼은 생산 불가.
그걸 하려면 인간을 갈아 넣어야 하니.
그 결정을 회의에서 알리자 당장 다른 동료들의 얼굴이 떨떠름해진다.
"형, 그냥 사냥이나 열심히 하는 게 낫지 않아요? 7성 성혼 1개가 5성 성혼보다 100배는 가치 있는데……"
"나 혼자 할 생각이야. 다른 사람들은 그냥 무법성에서 사냥하는 게 낫겠더라."
"그렇죠?"
"너도 합류하는 게 낫지 않아? 네가 사냥은 훨씬 잘 하니까."
"아냐. 보니까 농장 만드는 건 업이 별로 안 쌓여. 사냥이 조금 더 많이 쌓이니 그게 더 나아."
"대체 업이 뭐야?"
"조사 중이야. 아직 명확하지가 않아. 확실해지면 알려줄게."
"Mr. 김, 경험치 같은 거 아닐까요?"
"그건 확실히 아냐. 그렇게 생각해서는 종족 변환한 각성자들의 업이 더 무거운 걸 설명 못 해."
"에휴……"
누군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어쨌든 각자의 일로 복귀. 김현은 바쁘게 이곳저곳으로 뛰어다녔다.
성혼 농장 1천 개를 새로 만드는 것도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여기에 6성 탈각과 7성 승급을 하는 이들도 봐주어야 했다. 처음에는 정신만 나누어 원격 접속을 하다가, 아예 분신을 만들어 처리했다.
멸망왕을 그대로 축소하여 사람 크기의 기계 몸을 만들고 거기에 정신의 일부를 나누어 담은 것.
'멸신갑이라고 불러야지.'
사실 보잘 것 없다.
그저 작업을 대신하는 용도에 불과했다.
부릴 수 있는 성혼은 6성 정도이고 전투력은 더 떨어졌다. 5성 당시의 김현을 압도하는 것이 전부이고, 진지하게 싸우면 10번 싸워 9번은 지겠지.
그래도 이게 어디냐?
원격 조정하던 때보다 확실히 빨라졌다. 더 안정적이기도 했다. 김현은 이 멸신갑들을 RTS 게임 일꾼 다루듯이 써먹어야겠다고 다짐했다.
평온한 나날이 흘러갔다.
이 평화로움이 깨진 것은 채 1주일도 더 지나지 않은 시점.
무법성에 다녀온 김애경이 씨근덕거리며 김현의 집무실에 쳐들어왔을 때였다.
"누나,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하아, 하아. 씹어 먹을 새끼들……"
"욕만 하지 말고 대답만 해 봐."
"너도 기억하지? 예전에 우리가 불사계 갔을 때, 지구인들 혈액 팩 팔리는 거 봤었잖아."
느릿하게 머리를 끄덕이는 김현.
"당연히 기억하지."
"그런데 그놈들, 이제 노예도 거래하는 것 같더라."
"뭐?"
"노예 말이야, 노예! 놈들이 이젠 살아 있는 사람도 잡아다가 데려간다고!"
김애경이 울컥해서는 소리친다. 꽉 쥔 두 주먹이 부르르 울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동시에 김현도 이를 꽉 다물었다.
선연한 눈빛이 창칼처럼 얼룩져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