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헌터사-161화 (161/200)

# 161

노예 매매 –1-

"그건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알긴. 무법성에서도 지구인 노예가 있어서 알았지."

"젠장……"

"과테말라 캐러밴 출신이라더라. 잠깐 만나볼래?"

"좋아."

이번에 김애경이 구해온 지구인 노예는 총 다섯 명이다.

한 가족.

늙수레한 남자와 여자, 그리고 어린아이 셋이었다.

남자와 여자는 겉보기에는 쉰이 훨씬 넘어 보이는데 실은 마흔 살도 안 되었다. 아이들은 되레 발육이 늦었다. 10살, 8살, 6살인데 본래 나이에서 두세 살씩 어려 보였던 것.

노예들은 겁먹은 얼굴로 김현을 보았다. 덩치가 산만할 뿐더러,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류의 적이니 뭐니 하면서 떠들어댔던 독재자를 대면했으니 그럴 만도 하지.

"반갑습니다. 기갑계 및 충왕계 각성자 김현이라고 합니다."

"아, 안녕하세요."

"여, 영광이에요."

다들 바짝 얼어 있다. 김현은 의식적으로 부드러운 미소를 보이며 앉을 것을 권했다.

"앉으세요. 너무 무서워하지 마시고요. 다 같은 사람 아닙니까."

"같은 사람……"

꼬마 하나가 김현을 살짝 훔쳐본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인공 의안을 보더니 고개를 푹 숙인다. 지금 김현에게서 가장 이질적인 곳이라면 바로 그 부위일 테니.

개의치 않았다. 가장 친근한 김애경이나 하은이도 가끔 김현을 보며 놀랄 때가 있었으니까. 되레 더욱 친절한 미소를 지어준다.

"안녕? 꼬마야, 사탕 먹을래?"

"사탕이요?"

"그래. 이번에 개발한 신제품인데 먹을 만 할 거다."

김현이 만든 건 아니고 난민 출신의 한 각성자가 만들었다.

원래도 사탕 공장 노동자 출신이라던가. 어깨 너머로 배운 지식과 변형 계열 성혼이 결합되어 신기한 사탕이 만들어졌다.

주머니에서 사탕 몇 개를 꺼냈다. 껍질을 벗기자 영롱한 보석 같은 것이 둥실둥실 떠오른다. 이 신기한 모습에 꼬마가 홀린 듯한 눈으로 사탕을 보았다.

꼬르륵.

동시에 꼬마의 배에서 천둥 같은 소리가 울렸다. 사탕을 내민 꼬마만 아니라 세 명 전부.

"마이클!"

여자가 꾸짓듯 짧게 소리를 쳤지만 김현은 가볍게 손을 저어 막았다.

"이런, 식사를 못하셨나 봅니다. 다들 같이 식사부터 하시죠."

"어, 그러실 필요까진……"

"아닙니다. 인류를 지키는 각성자로서 여러분이 외계종에게 끌려간 것에 일말의 책임을 느끼고 있습니다. 제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덜어내고 싶습니다. 너무 부담 갖지 마세요."

김현의 거처는 인공 지구에 있다. 정확히 말하면 남극에. 사람들을 데리고 날아올라 거처로 들어갔다.

다들 주눅이 든 기색. 강권하여 사탕 하나씩을 물려주었다. 꼬마들이 잽싸게 사탕을 입에 넣고는 두 눈을 반짝였다.

"와아!"

신기하겠지.

기이한 힘이 전신으로 퍼지며 지친 육체를 회복시키고, 무엇보다 몸이 가벼워지며 두둥실 떠올랐으니.

"어어? 마이클!"

남자가 잡으려고 하자 김현은 손을 흔들었다.

"염려하지 마세요. 사탕 효능입니다. 5분 저러다 말아요. 몸에 아무런 피해도 없습니다."

안심하라고 자신도 직접 먹어 보였다.

김현의 몸도 지상으로 10센티미터 정도 떠오르자 남자와 여자가 그제야 안심을 한다. 자기들도 사탕을 먹고는 잠깐의 공중 부양을 즐겼다.

그리고 점심.

으리으리하게 상이 차려졌다. 요즘 김현은 거의 식사를 거르거나 쿠키에 커피 한 잔으로 때우지만, 이야기도 들어볼 겸 작정하고 주방에 명령을 내린 것이다.

여기에는 동료들도 함께 했다. 김애경과 이세희, 서경태, 피터, 에일리는 물론 한철군과 한스도 들어왔다. 사브리나와 케말도 언제부터인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어느덧 5성이 된 한철군과 한스. 조만간 탈각을 준비 중이다.

"지, 진짜 먹어도 되요?"

꼬마들이 식탁 앞에서 부르르 떨었다.

온갖 산해진미가 놓여 있다.

벌건 속살을 수줍게 내보이는 스테이크, 어떻게 소스를 친 건지 향긋한 냄새가 나는 농어구이, 한국식 고추장 육회, 바삭바삭한 북경 오리, 치즈와 여러 토핑이 무더기로 올라간 피자, 두툼하게 썰어놓은 양고기 구이……

김현은 두 손을 들어 권했다.

"마음껏 먹어라, 사양하지 말고."

"자, 잘 먹겠습니다!"

구출된 가족은 걸신들린 듯 음식을 먹어치웠다. 한눈에 보기에도 며칠을 굶은 것 같았다. 김애경이 짧게 한숨을 쉰다.

"음식부터 줄 걸 그랬네. 얼른 데리고 나오느라 생각도 못했어."

"아냐, 잘 했어. 거기서 데리고 나오는 게 우선이지."

"피터가 이번에 큰일을 했어. 피터 혼자 이 분들이 잡혀 있는 걸 알았거든."

"잘 했어, 피터."

"뭘요."

피터가 으스대듯 양 어깨를 폈다.

구출된 가족의 식사는 얼마 가지 않아 끝이 났다. 위장이 졸아들기라도 한 건지 금세 다 차버린 까닭. 꼬마 하나가 아쉬운 얼굴로 음식을 보는 걸 달래주었다.

"남은 건 싸줄 테니 나중에 먹어라."

"정말요?"

"그래. 그건 그렇고 체인스 씨?"

"네!"

능력치 창에 비친 이름을 읽어내자 체인스가 바짝 긴장해서는 막 배치 받은 신병처럼 대답했다.

"어려운 거 아닙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들을 수 있겠습니까? 제가 듣기로는 과테말라 출신이라고 하시던데요."

"그것이……"

체인스가 긴장한 얼굴로 장내의 사람들을 한 번 둘러보았다.

모두가 기괴한 면면이다.

기계 부품을 이식한 이도 있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장군에 천사 같은 인물, 그리고 빛이나 어둠을 품은 이가 둘, 인어처럼 생긴 여자에 곤충처럼 생긴 여자도 있으니.

그래도 아직은 인간의 범주. 방송에서 자꾸 보아서 친숙한 얼굴이기도 하다. 더구나 그 지옥에서 빼내준 인물들 아닌가.

침을 한 번 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알고 계시겠지만 저희는 캐러밴 출신입니다."

캐러밴.

원래는 이동 상단을 뜻했으나 근자에는 중미 출신 이민자 행렬을 뜻하는 단어로 바뀌었다.

"저흰 멕시코는 어떻게 통과했습니다. 그런데 미국 국경에서 막혔지요."

미국과 중미, 남미의 상황은 여러모로 다르다.

최근의 성혼 위기를 미국은 독보적으로 잘 극복했으나, 중남미에서는 그게 아니었던 것. 소말리아만큼은 아니어도 많은 이들이 고통 받고 있었다.

원 역사만큼은 아니지만 하루에도 수많은 이재민이 발생했다. 이들이 모두 난민이 되어 미국 국경으로 향했다. 멕시코에서 7성 각성자는 있지만 이들을 받으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저 통과시킬 뿐.

하지만 미국이라고 받고 싶을 리가 없지. 게다가 현 미국 대통령은 이런 이민자들에게 강경한 태도를 보이는 것으로 유명했다. 결국 두툼한 장벽을 짓고 일체의 입국 시도를 불허했다.

"그러다가 만났지요."

한 브로커를.

상당한 돈을 대가로 미국 내에 입국시켜주겠다고 했다. 비록 불법 체류자이긴 하지만 일거리와 머물 곳도 알선해주겠다고.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피터와 에일리의 얼굴이 조금씩 굳었다. 불쌍한 사람이란 건 알겠는데, 이런 불법 체류자 문제는 미국에서 심각한 논쟁거리였기 때문이다.

"그 브로커에게 속은 겁니까?"

"예. 놈은 우리 캐러밴 전체를 속였습니다. 밤에 방벽을 넘은 다음, 놈의 은신처에서 식사를 했는데 이상하게도 몹시 졸렸습니다. 그리고 눈을 떠 보니 괴상한 곳이었지요."

"케빈."

여자가 체인스의 손을 잡았다. 꼬마들도 얼굴이 어두워진다. 가족 모두가 벌벌 떨고 있었다.

"처음에는 평범한 시골 마을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아니었어요. 거기에는, 거기에는……"

체인스의 얼굴이 푸들푸들 떨린다.

주시하는 김현.

공허령처럼 편리한 정신 계열 성혼은 이제 없다. 대신 기계 장치의 신으로서 아주 미세한 전기적 신호까지 읽어내어 심리 상태를 진실에 가깝게 읽어낼 수 있었다.

체인스의 눈을 보니 떠오르는 단어가 있다.

"흡혈귀?"

"으헉!"

"여, 여보!"

"아빠!"

공포가 지나쳤던 것일까.

체인스가 거품을 물고 기절했다. 부인과 아이들이 놀라 체인스에게 달려들었다.

가볍게 검지를 튕겼다. 미약한 혼력이 체인스의 심장을 관통했다. 피해를 주는 대신 전기 신호로 전신 신경계를 자극하여 강제 각성 상태에 들어갔다.

"우흡!"

숨을 크게 들이키는 체인스.

멍하니 김현을 보더니 눈동자에 빛이 돌아왔다.

"마, 맞습니다. 흡혈귀였어요! 흡혈귀!"

"그만. 이제 됐어. 시골 마을 같았다고 했지?"

"예, 예!"

시골 마을에 흡혈귀.

그런 조합은 딱 하나밖에 없다.

김현은 나직이 이를 갈았다.

"블러드 공작……"

"블러드 공작이라고 진짜?"

"그럴 확률이 높지."

"아니, 아무리 그래도 한때 동맹이었는데 그렇게 뒤통수를 친다고?"

"그쪽에선 배신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을 걸. 나를 봤으니 더 탐이 나겠지."

"뭐가?"

"성혼이. 지구에서 생산되는 성혼의 질이 장난 아니라는 걸 알았을 거 아냐? 8성 각성자도 있는 곳이니 어떻게든 갖고 싶을 걸."

체인스가 눈을 끔뻑거렸다.

"예? 공작이요?"

"그런 게 있습니다. 체인스 씨, 혹시 그 브로커에 대해 기억나는 건 없습니까? 사소한 거라도 좋습니다. 혹시 각성자는 아니었습니까?"

"맞습니다! 각성자였어요!"

체인스가 손뼉을 한 번 쳤다. 그리고 당시 브로커에 대해 아는 내용을 줄줄이 읊기 시작했다.

이름은 찰스 가이즈. 어차피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이런 일이 본명을 쓸 자가 없으니까.

당시에 정체 모를 장막 같은 걸 둘러서 캐러밴을 보호했다고 한다. 미국 군인들이 눈을 멀뚱멀뚱 뜨고 그냥 보내줬다고. 찰스 말로는 은신 게열 장막이라나 뭐라나.

"동료는 없었고요?"

"웬걸요. 꽤 많았습니다. 각성자만 다섯에 총을 든 건장한 남자들도 열 명이 넘었습니다."

"규모가 크네요."

"들어보니까 캐러밴들 대부분은 자기들이 이주시켜줬다고 하더라고요. 그 자들을 믿는 게 아니었는데……"

"여보."

체인스의 얼굴이 어두워지자 부인이 옆에서 손을 잡아준다. 체인스도 부인에게 몸을 기대며 서로 체온을 나눴다.

들을 건 다 들었다.

김현은 즉석에서 체인스에게 제안을 했다.

"체인스 씨, 일이 이렇게 된 김에 모가디슈에서 살 생각은 없습니까?"

"모가디슈에서요?"

뚜렷하게 주저하는 기색.

그럴 만도 하다. 세계인의 인식 속에서 모가디슈는 지옥 불꽃에게 공격당하던, 인세의 지옥이자 막장인 곳이었으니.

"당장 결정하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당분간 회복해야 하니 그 동안 쉬고 계세요. 몸이 회복된 후 결정하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음…… 사령관님."

"케말, 여기 분들에게 쉴 곳을 내주도록."

"예, 사령관님."

체인스 가족이 인사를 하고는 물러나갔다.

쾅!

에일리가 눈을 귀신처럼 빛내며 탁자를 내리쳤다.

"Fuck! 미국인이라는 자가 사람을 외계종에게 팔아? 이 KKK단보다 못한 새끼!"

"그만 둬. 아직 미국인인지 아닌지는 모르잖아."

피터가 말렸지만 에일리의 성질에 기름만 퍼부운 격이었다.

"뭐? 야! 미국인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무슨 헛소리야! 각성자 다섯, 남자 열 명 이상이라고 했어. 그렇게 많은 작자들이 국경에서 활개치고 다니는데 미국인이 아닐 것 같아? 시발! 빌어먹을!"

에일리가 탁자를 몇 번이나 내리쳤다.

그나마 최소한의 이성은 잃지 않은 것 같다. 탁자에 금이 조금 가긴 했어도 박살나지 않는 걸 보면.

"이상하네요."

듣고 있던 이세희의 지적.

"숫자는 그렇다 쳐도, 어떻게 불사계로 넘어간 걸까요?"

"차원문을 이용했겠지, 누나."

"그러니까 그 차원문 말이야. 지금 지구에 차원문을 이용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돼?"

독자적인 차원문을 가진 세력은 얼마 없다. 김현 일행을 포함하여 5곳이 채 안 된다. 사실 이것만으로도 대단했지만.

"외계종 거점은 많으니까요."

"그리고 그 거점은 모두 감시 중이죠."

단서를 주는 듯한 말.

김현은 당장 전 세계의 인공위성 망에 접속했다.

그대로 각국 정부를 해킹하여 102곳 외계종 거점의 영상 기록을 확인했다. 체인스 가족이 납치당한 그 시점의 시간을 뒤져본 것.

'없다.'

정확히 말하면 조작되었다. 전혀 다른 날짜의 영상을 짜집기하여 이어붙였지만 김현을 속이기란 불가능.

딱 한 군데만.

미국 휴스턴.

더 정확히 말하면 그곳에 위치한 흡혈귀 저택의 영상 자료만.

앞뒤가 맞아떨어진다.

그러나 외계종 거점의 감시 영상은 각국에서도 특급 기밀로 치부하는 것이다. 이걸 조작하려면 과연 어떤 세력이 개입해야 할까?

'설마……'

끔찍한 상상이 불쑥 고개를 쳐들었다.

'미국 정부가 개입됐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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