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헌터사-162화 (162/200)

# 162

노예 매매 –2-

아니다.

그건 아니다.

미국의 정부는 그럴 이유가 없다. 안보에 티끌만큼만 관련이 되어도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곳이 아닌가. 아무리 불법 체류자라도 외계종에게 노예로 넘기는 건 상상하기 어려웠다.

있다면 하나.

고위 정부 관계자 중 외계종의 끄나풀이 있다면 가능하겠지.

그런 경우를 김현은 역사서에서 많이 보았다. 종족 변환하여 탈각하면 결국에는 외계종을 위해 일하게 되고, 온갖 방법으로 회유당하여 넘어가는 경우도 많았으니까.

"말도 안 돼요!"

그 얘기를 하자 에일리가 펄쩍 뛰었다.

"Mr. 김이 우리 미국을 별로 안 좋아하는 건 알겠지만 할 말은 해야겠어요. 우리나라라고 정의의 사도는 아니지만, 국민을 파는 짓은 절대 하지 않아요!"

"전 정부가 그랬을 거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정부 내에 어느 누군가가 그랬을 수는 있지요."

"아……"

"미국 정부가 자국민 보호에 과하게 반응하는 건 다 아는 사실입니다. 정부가 나서서 노예 매매를 했을 가능성은 없죠."

"Mr. 김 말이 맞아. 한두 명 정도 가담했겠지. 스파이들은 어디서나 활개 치잖아."

피터까지 냉정하게 짚고 넘어가자 에일리가 얼굴을 붉혔다.

"드, 듣고 보니 그러네요."

"제 생각에는 고위 각성자일 확률이 높아요. 최소한 6성급이면서 정부에도 끈을 대고 있는 사람. 그리고 불사계 성향이고, 흡혈귀 종족 변환 각성자일 가능성이 높죠."

그런 사람이 얼마나 될까?

여기 있던 이들 모두 머릿속에 한 사람을 떠올렸다.

이세희가 김현을 돌아본다.

"김현 님, 설마……"

"네. 카를로스 협회장이 가장 유력합니다."

"설마요!"

"말도 안 돼!"

"그 사람이 배신자라니, 그럴 리가 없어요!"

"전미 협회장 되고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데……"

김현과 미국과의 사이가 벌어지고 급기야 떠나 버렸던 그 시기.

카를로스는 흔들리는 미국 인심을 잡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알렉산더나 닉, 리아와 같은 화려함은 없었어도 특유의 포용력으로 전미 각성자 협회를 잘 이끌고 나간 것이다.

"종족 변환된 이상 그 사람은 전과는 다른 사람이에요. 그걸 명심해 두세요."

"그래도……"

"그나마 여러분은 영육 개변하고도 성격이 많이 변하지 않아서 다행이죠. 원래는 사람이 엄청나게 변합니다."

칼로 내리치듯 단호한 목소리에 모두 얼굴이 침중하게 변했다.

김애경이 짝하고 손뼉을 쳤다.

"아직은 모르는 거지? 그렇지?"

"응. 조사부터 해야지."

"좋아. 조사하고, 정말 노예 매매와 관련 있으면 그때 책임을 묻자."

"저기, FBI에 알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

피터가 택도 없는 소리를 했다.

"FBI가 제대로 수사할 수 있겠어? 요즘은 FBI건 CIA건 각성자들이 대세인데, 그 작자들이 훼방이나 안 놓으면 다행이겠다."

"그, 그러네요."

"정공법으로 가려면 시간 엄청나게 걸려요. 노예 매매 현장을 바로 급습하는 것으로 하죠."

"어떻게?"

"캐러밴들 따라가면 되지. 얘기 들어보니까 계속 접촉하는 것 같던데?"

"지금쯤은 그만두지 않았을까?"

"그럴 리가 없어. 각성자들이 흔히 하는 실수가 자기 성혼을 과신하는 거거든. 은폐 장막 믿고 지금도 캐러밴들 유혹하고 있을 거야. 일단 현장만 잡으면 끝이야."

여기 있는 인원 모두가 다 움직일 필요는 없다.

김애경과 이세희는 모가디슈에 남고 나머지 넷만 움직이기로 했다. 사실 김현은 서경태만 데리고 가려고 했으나 피터와 에일리가 부득불 끼어든 것. 미국과 얽힌 문제이다 보니 걱정이 된 모양이었다.

그대로 미국과 멕시코 국경까지 이동했다.

피터와 에일리도 무법성에서 이동 수단을 구한 시점이다. 예전처럼 김현만 의존하는 게 아니니 김현도 꽤 편했다.

"마침 밤이네요."

하늘이 돕고 있었다.

미국 국경을 한 번 쭈욱 들러본다.

거대한 방벽이 서 있다. 콘크리트로 두툼하게 지었고, 거의 10미터에 가까워 넘는 게 거의 불가능했다. 꼭대기에 철조망이 있고 고압 전류까지 흐르는 바에야.

원래 같았으면 건설에 막대한 예산이 들 테니 의회 승인도 받기 어려웠을 물건이다. 하지만 성혼 기술로 인해 건설 단가를 획기적으로 낮출 수 있었다. 특히 중남미의 상황이 썩 좋지 않아 그 핑계로 건설에 성공했다.

"형, 뭐 보여?"

"잠깐만. 인공위성 접속 중이야."

눈이 아닌, 인공위성 카메라로 지상을 관찰한다.

수많은 교차 검증이 이뤄지고 있었다. 미국과 멕시코 인근의 모든 인공위성이 국경선을 주시했다.

그저 보는 게 아니라 기계 장치의 신 성혼을 품고 본 것.

자연히 이상한 곳을 발견했다.

"저기 같은데?"

"어디요?"

"따라와."

예전 같았으면 정신 계열 성혼으로 공유하면 그만이었지만 지금은 그게 안 된다.

김현은 동쪽을 향해 쭈욱 날아갔다. 나머지 셋은 에일리의 날개 고래에 타서는 김현을 쫓아왔다.

그렇게 도착한 곳.

아무것도 없다. 조용하다. 방벽 위에 설치된 서치라이트만 남쪽 멕시코를 비추며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뭐 있어요?"

"피터, 넌 보이지?"

"아, 그러네요. 이야, 제법 은밀한데요? 5성은 되어 보여요."

"5성 정도 되니까 수십 명을 한꺼번에 감추지. 아, 정확히 81명이다."

피터의 성혼인 우주의 빛은 탐지 계열 또한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김현이 보는 광경을 보는 것이 가능하다.

지상, 방벽 바로 앞.

81명이나 되는 인원이 우글거린다. 차량은 없이 도보 이동 중이다. 허름한 옷을 걸쳐 입은 난민들이 잔뜩 긴장하여 주위를 둘러보고 있다. 등에 멘 배낭과 손에 든 가방이 애처롭다.

반면 호위하듯 늘어선 남자들은 긴장을 풀어 놓았다. 하품을 쩍쩍 하고, 심지어 몇 명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 들킬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는 모습.

그럴 만도 했다. 투명한 5성 장막이 그들을 감싸고 있으니까. 5성 이상의 판독, 탐지, 투시 계열 각성자가 오지 않는 한은 이들이 코앞에서 지나가며 소리를 질러대도 인지하지 못한다.

"준비됐지?"

"어, 가자고."

그들이 나누는 대화가 바로 귀 옆에서 들렸다.

한 남자가 장벽에다가 손을 댔다. 그러자 장벽이 흐물흐물 녹아내리며 구멍이 뚫렸다. 난민들이 먼저 거길 통과하고, 무장한 남자들과 각성자들이 지나가자 언제 그랬냐 싶게 복구되었다.

"잘 되고 있는 거 맞아?"

서경태가 답답하다는 듯 물었다.

"어, 지금 막 트럭에 탔어."

"트럭?"

"브로커가 준비한 것 같은데? 아, 움직인다. 곧 끝나겠어."

체인스의 말로는 트럭으로 1시간 정도 움직이고 숙소에 들어갔다고 했다. 그곳에서 식사한 다음 바로 곯아떨어졌다고.

에일리가 김현을 보았다.

"바로 들이칠 거죠?"

"아뇨. 거점 알아두고 계속 따라가죠. 휴스턴의 흡혈귀 저택을 이용하는 걸 잡아야 합니다. 그게 몸통이에요."

"이미 납치된 사람들은 어떻게 할 거예요?"

"구해야죠."

다들 침을 삼키면서도 머리를 끄덕였다.

이건 단순히 유명계의 복속 차원을 불사르던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본거지로 직접 쳐들어가는 거니까. 아마도 블러드 공작의 영지, 바로 그곳을.

'정면 돌파는 안 되겠지.'

불사계의 다른 8성 외계종이 지원을 오기라도 하면 끝. 철저하게 숨어다녀야 할 형편이었다.

1시간 뒤 트럭이 으슥한 곳에 있는 별장에 도착했다. 난민들이 짐을 풀고는 식사를 했다. 춥고 배고프던 때라 다들 걸신들린 듯 먹어치웠고, 자연히 약에 취해 곯아떨어졌다.

"야, 얘 좀 봐. 깔쌈한데?"

"괜찮네."

개중 각성자들이 어떤 소녀를 보며 낄낄거렸다.

"처녀는 아니겠지?"

"한 번 맛이나 보자."

그러면서 목덜미를 깨물어 한 번 쭈욱 빨아본다.

흡혈귀.

진작 눈치챘지만 볼 때마다 역겨운 광경이다. 김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역겨운 놈들……"

피터도 보고 있었는지 욕설을 내뱉었다.

피를 빤 남자가 입맛을 다셨다.

"이야, 처녀네. 창녀일 줄 알았더니."

"나이가 어리잖아."

"저쪽에서 나이 어린 게 뭐? 나이 어린 년들이 인기가 좋지."

"젠장. 갖고 놀긴 글렀네. 맛이나 볼까?"

"조금만 빨아. 너무 많이 빨면 우리의 공작 나으리께서 불호령을 내리겠다."

"빌어먹을. 그 새끼는 하여간 지가 왕인 줄 안다니까."

"왕보다 더하지 뭐. 그래도 그 덕에 우리도 콩고물 얻어먹는 거 아니냐. 6성이 코앞이라고."

문득 생각나는 게 있어 자세히 살펴보았다.

영혼의 업.

과연 무거웠다. 다들 5성 수준인데 옆에 있는 피터나 서경태, 에일리보다 더 무겁다.

'종족이 변환되면 업을 짊어진다……'

확실히 기억해두었다.

무장한 남자들이 별장으로 우르르 들어왔다. 아까와는 다른 트럭에 짐짝처럼 난민을 싣는다. 그들도 피를 빨린 소녀를 더듬으며 음담패설을 지껄이고 있었다.

"이거 하나쯤은 빼돌려도 되지 않아? 맛있어 보이는데."

"안 돼. 위에서 다 확인하고 있다고. 존 생각 안 나?"

"쩝, 그 새끼 재수 없긴 했어도 좋은 녀석이었는데……"

"야, 여기 좀 만져 봐. 완전 부드러워."

"새꺄, 먹지도 못할 거 만지기만 해서 뭐하게? 입맛만 버린다."

피터의 얼굴이 갈수록 안 좋아진다. 남자들의 추태가 지나쳤기 때문.

"녹화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저 새끼들 다 연방 교도소에 처넣어야죠."

"안 그래도 녹화 중이야. 목소리도 녹음하고 있고."

지금 별장에는 CCTV도 블랙박스도 없다.

하지만 스마트폰은 있었다. 일당의 스마트폰이 계속해서 정보를 보내주었다. 또 하늘 위의 인공위성을 통해 세밀하게 증거를 확보하는 중이었다.

난민이 모두 실리자 트럭이 출발했다. 시커멓게 칠한 트럭이다. 디젤 엔진일 텐데도 매우 정숙해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트럭이 주행 중이라는 사실도 알기 어렵겠다.

별장에 남은 남자들이 기지개를 폈다.

"한탕 또 뛰어야지?"

"으으, 피곤하다. 언제까지 이 짓 해야 하는 거야?"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이렇게만 해도 7성까지 올려준다고 했잖아. 우리 처지에 이 짓 말고 7성 올라갈 방법은 없어."

"아, 난 6성까지만 할 거야. 7성은 실패하면 죽는다고 하더라고."

"하긴 6성은 죽지는 않으니까……"

"왜, 넌 도전해 보려고?"

"미쳤냐? 지금도 잘 먹고 잘 사는데 뭐하러?"

남자들은 또다시 트럭에 타고 남쪽으로 향했다. 불쌍한 희생자들을 유인해서 데려올 모양이다.

은밀하게 앞선 트럭을 추적.

역시나 휴스턴으로 향하고 있었다. 어두운 밤이라 차도 별로 없다. 약 3시간을 달려 새벽 4시 무렵 휴스턴에 진입했다.

휴스턴, NASA 관제 센터가 위치한 곳으로 유명한 도시.

지금은 더 유명한 것이 있다.

흡혈귀 저택.

도시 전체에 드리워졌다. 안개를 휘감은 채 상공에 떠 있다. 다가가면 멀어지고, 물러서면 가까워지는 그곳은 음침한 기운을 사방에 뿌려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실질적인 영향은 없으니 그게 신기하다. 아차원 거점인 만큼 도시 어디서나 접근할 수 있었다. 출입구는 단 한 곳, 도시 중심에만 있지만.

트럭이 그곳으로 다가갔다. 기다렸다는 듯 주위의 CCTV가 오작동을 일으킨다.

'역시나.'

성혼으로 강제 해킹한 것이 아니다. 중앙에서 누군가 손을 댔다. 김현은 휴스턴 경찰서 내부 CCTV를 이용, 그자의 신원을 파악했다.

트럭이 도시 중심에 도달했다. 안개 공간이 자연스럽게 열린다. 그 안으로 트럭이 사라지자 에일리가 안달을 냈다.

"안 쫓아가요?"

"글쎄요."

흡혈귀 저택 안으로 들어가는 건 바보짓. 들어가는 즉시 침입 사실을 들키기 때문이다.

"모가디슈로 돌아갑시다."

"네? 저 사람들은요?"

"바로 가면 안 돼요. 조금 돌아서 가죠. 모가디슈 차원문 통해서 블러드 공작의 영지로 잠입하겠습니다."

"Mr. 김…… 우리 거점은 이미 잃어서 못 가는 거 아니었어요?"

"에이, 그건 아니죠. 불사계에 갈 수는 있습니다. 안전하지 않고, 어디로 갈지 모른다는 게 단점일 뿐이죠. 그래도 블러드 공작 영지 근처로는 떨어질 겁니다."

간단히 말해서 유명계에 처음 갔을 때와 같다. 조금은 운에 기대어야 한다는 뜻.

불사계에 다닐 때 신호 장치를 설치해두었으면 좋았겠으나 흡혈귀들 때문에 실패. 겉으로는 웃으면서도 항상 감시의 눈길을 번뜩인 탓이다.

위험하지만, 모두 필요한 일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오랜만에 다 같이 차원문을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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