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3
노예 매매 –3-
행운이 따라주었다.
일행이 도착한 곳은 블러드 공작의 영지 인근 야산이었다. 인근이라고는 해도 거리가 수십 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어서 흡혈귀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다.
"고래 부를까요?"
에일리가 탈것을 자랑하고 싶은지 몸을 들썩였다.
"아뇨. 걸어가죠. 이거 하나씩 차세요."
은신 및 변신 성혼이 담긴 팔찌.
저마다 하나씩 차자 저절로 얼굴에 핏기가 빠지며 송곳니가 돋아났다. 누가 보면 4성 흡혈귀 정도로 착각할 것이다.
그래도 방심하면 안 된다.
"블러드 공작은 변형 계열 성혼의 대가입니다. 탐지 계열 성혼도 소유하고 있어요. 눈에 띄면 바로 들통나니까 조심하세요."
한때 김현이 썼던 혈왕과 혈마 성혼.
그것의 원래 주인이 바로 블러드 공작이었다. 오래 산 흡혈귀답게 다른 잡다한 성혼도 많지만, 주력은 바로 그것.
장비를 적당히 숨기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김현이 건넨 핏빛 안개 숨결을 복용하여 안개처럼 변한 상태다. 인간 형태로 달리거나 걸으면 너무 눈에 띄니 당연한 선택이었다.
"바로 저택부터 갈 거야?"
"아니. 노예상부터 확인해야지. 나한테 맡겨."
"맞아. 저번에 보니까 노예들 취급하는 상인들이 꽤 많았어요."
"벌써 지구인 노예가 매매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아직은 없으면 좋겠네요."
노예 매매가 양성화되었다는 것은 곧, 지구인 노예 수급이 그만큼 원활하다는 뜻이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영지에 도착했다.
겉으로 봐서는 목가적인 아늑함을 선사하는 장소. 유럽의 어느 시골 마을에 휴양온 듯하다.
하지만 지금은 그 안에 서린 광기가 선연하게 느껴진다. 옅은 혈향과, 벌건 눈을 숨기지 못하는 흡혈귀들, 그리고 섬뜩하고 아주 작은 비명소리도.
일행도 이제는 그것을 느끼는 모양. 조금은 긴장하여 말없이 김현의 뒤를 따라온다.
재빠르게 주위를 훑는 김현.
흡혈귀를 닮은 가짜 눈 아래서 기계 눈동자가 분주하게 움직였다. 주위의 모든 상점을 단번에 파악했다.
"말씀 좀 묻겠습니다."
"여어, 무슨 일이요?"
"혈액 팩을 사러 왔습니다."
"호오, 그래요?"
혈액 팩을 아무렇게나 걸어놓은 한 노점상.
정육점 돼지 걸어놓은 듯하다. 혈액 팩을 한 줄에 엮어서는 죽죽 널었다. 흘러오는 바람에 버드나무 가지처럼 흔들려 저절로 욕지기가 치밀었다.
일행의 표정도 안 좋은데 그게 흡혈귀 분장을 해서 그런지 혈액 팩을 봐서 그런지 모르겠다.
노점상이 옆에 늘어진 혈액 팩 더미를 툭툭 쳤다.
"요즘에는 지구 산이 최고지. 맛도 좋고 신선하고, 무엇보다 잠재력이 크거든!"
"하긴 그렇겠습니다. 그런데 저희 혈주님께서는 예전에 드시던 것만 드셔서 말이죠."
"어휴, 하여간 노친네들은 어쩔 수가 없어요. 안 그렇습니까?"
"하하하, 위대함의 원천이라고 봐야지요."
김현은 흡혈귀가 할 말을 하며 씨익 웃어 보였다.
가파른 칼날 같은, 흡혈귀의 전형적인 미소다. 뾰족한 송곳니가 슬쩍 드러나며 포식자의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그러자 노점상이 자기 앞에 있는 책상을 열며 혈액 주머니를 꺼낸다.
혈액 팩이 아니라 주머니.
하나는 가죽 주머니, 또 하나는 내장 주머니, 또 하나는 풀잎 주머니였다. 김현은 그 중 내장 주머니를 골랐다.
"어이쿠, 혈주께서 취향이 참 독특하십니다그려?"
"그러게 말입니다. 텁텁한 게 뭐가 좋다고. 혈주님께서는 이런 게 인생의 맛이라고 하시지만, 솔직히 이해가 안 됩니다."
"인생의 맛이라…… 인간 출신인가 보지요?"
"예. 제가 그런 것처럼요."
노점상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장 주머니를 내주었다.
오크 내장으로 만들었고, 오크 피를 담아놓는 주머니.
김현은 내장 주머니는 다섯 개, 혈액 팩을 스무 개 주문했다. 노점상이 김현 뒤의 일행을 보고는 납득 했다는 얼굴을 한다. 노점상이 주머니를 챙기는 사이 슬쩍 물어보았다.
"요즘 특식은 없습니까? 혈주님께서 몸보신을 하고 싶어 하셔서요."
"오크 특식은 없소만. 요즘 오코아에서 성혼 뽑아내느라 다들 난리라서."
"어, 오코아에서요? 그럴 일이 있습니까?"
"왜긴. 지구 때문이지. 알고 보니 거기가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닌 모양이오. 천상계가 가진 듀크 차원계나 혼돈계의 발라르, 악마계의 어비스 수준이라니까 말 다 했지. 이번에 어떻게든 지구를 병합하겠다고 공작님들께서 앙앙불락하시는 것 같소."
이런, 좋지 않다.
불사계도 어쩌면 대규모 침공을 계획한다는 소리 아닌가.
노예 매매는 그 전조겠지. 블러드 공작이 다른 공작들을 설득하기 위한.
"그래요? 시골에 살다 보니 소식이 늦었네요."
"그런 것 같수다. 차려입은 것도 그렇고……"
노점상이 얕잡아보는 눈빛을 보내자 김애경이 눈에 불을 켜고 마주 본다. 그 서슬 퍼런 눈빛에 노점상이 얼른 사과했다.
"미안하게 됐소. 입이 주책이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뭐 어떠냐는 태도. 자신도 4성이고 여기 있는 이들도 4성이니 꿇릴 거 없다는 기색이다.
무시하고 계속 질문을 던졌다.
"정말 아무 특식도 없습니까? 오코아 출신이 아니더라도 괜찮습니다."
"흠…… 지구산 특식이라면 조금 있소만."
"그거라도 부탁드립니다."
"질이 별로 안 좋은데, 그래도 좋소? 가격도 비싼데."
"어쩔 수 없죠. 요즘엔 특식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에요."
"높으신 분들 전쟁놀이하시느라 성혼을 쥐어짜고 있으니 어쩔 수가 없지. 그래도 이번 일만 잘 되면 한동안은 특식이 넘쳐날 거요."
"그것 때문에 참는 거죠."
"따라오시게."
노점상은 주변에 손짓하곤 김현 일행을 어디론가 이끌었다. 뒤로, 3성 등급의 우락부락한 흡혈귀들이 나타나 노점을 지켰다.
데려간 곳은 인근의 한 큰 창고. 은밀하게 주위를 살피더니 경고했다.
"어디 가서 여기서 특식 샀다고 하면 안 되네."
"뭐 그게 비밀이라고 그럽니까?"
"안 돼, 안 된다고. 원래 이 특식들은 블러드 공작께서 쓰시는 거거든. 상태 안 좋은 것들만 빼돌린 거야. 블러드 공작께서 눈 감아 주시고는 계시지만, 대놓고 했다가는 괘씸죄로 피 주머니 처형을 당할 거야."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겠다.
블러드 공작이 이번에 김현을 관찰하면서 얻은 지식을 실험하는 모양이다. 그 과정에서 생긴 희생자가 이렇게 팔려 나오는 모양.
분위기가 무거워진다. 일행이 분노하자 혼력이 진동하며 무형의 파장을 퍼뜨리는 것.
[마음 다스리세요. 여기서 들키면 죽도 밥도 안 됩니다.]
[하아.]
[시발 것들……]
[형, 그냥 다 죽이면 안 돼?]
[지금은 안 돼. 22시간 뒤에 시작하자.]
[22시간 뒤…… 알았어.]
진입하고 24시간 뒤, 즉 지금부터 22시간 뒤에 돌아가는 차원문이 열린다. 김현의 말인즉슨 2시간 동안 마구 퍼붓고 단번에 도망치자는 거였다.
'거리도 적당해.'
블러드 공작은 자신의 저택에 모인 힘을 활용할 수 있다.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우면 차원문을 강제로 닫을 수도 있겠으나 그건 불가능.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어 뒤만 봐야 할 것이다.
창고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작은 밀실에 다 늙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갇혀 있었다.
둘 다 의식을 잃은 상태.
"세상에……"
이세희가 기함했다.
벌거벗겨 놓았는데 전신이 종기투성이다. 고름이 질질 나와 끔찍한 냄새가 났다. 무슨 짓을 당한 건지 두 손의 손톱이 모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정말로 끔찍한 것은 외적인 상태가 아니다.
능력치 창에서 보이는 나이.
각각 22살, 25살.
파릇파릇한 창창한 나이인데 외견상으로는 완전히 노인.
블러드 공작의 실험이 남긴 여파였다.
"이건 너무 한 거 아닙니까?"
속으로는 부글부글 끓었지만 그걸 내색할 수는 없다. 무전기를 통해 일행을 진정시키며, 김현은 그냥 불만투성이인 것처럼 외쳤다.
노점상이 코웃음을 친다.
"그럼 사지 말던가. 그쪽 말고도 살 족속은 많아."
"내 눈을 삐꾸로 본 모양인데, 살 이딴 건 혈은화 1닢으로도 안 사. 속이 다 곪아 문드러진 걸 누가 산다고 그래? 됐어. 집어치워."
대차게 몸을 돌렸다.
그러자 노점상이 손을 흔든다.
"어이쿠, 어이쿠, 왜 그러시나. 뭐, 맞는 말이야. 공작 전하께서 무슨 짓을 하셨는지 몰라도 특식들 상태가 다 별로지. 그런데 말이야, 맛이 굉장히 좋아."
"저 상태인데 맛이 좋다고?"
"그래. 한 번 맛이라도 보고 결정하라고. 농장만 못 차린다뿐이지, 잠깐 취하기에는 딱 좋다니까?"
못 이기는 척 몸을 돌렸다. 노점상이 히죽 웃으며 22살 늙은 남자의 손가락을 스윽 긋는다. 혈선이 그어지며 핏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빌어먹을.'
깜빡했다.
더는 흡혈귀가 아니라는 사실을.
하지만 지체할 수는 없었다. 자연스럽게 손가락을 입에 물려고 하자 노점상이 허공에 손가락을 튕긴다. 덕택에 딱 한 방울만 입에 들어왔다.
맛이 없다. 비리다. 토해 버리고 싶다.
그 찰나의 순간, 김현은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22살 남자와 25살 여자의 영혼에 쌓인 업.
만신창이가 된 육체와는 별개로, 그 업이 굉장히 무거웠던 것이다. 거의 종족 변환한 각성자들과 맞먹을 정도.
'대체……'
의문을 품으면서도 짧게 감상을 내뱉었다.
"희한한데."
"그렇지?"
노점상이 어떠냐는 눈빛을 한다.
"분명히 육체적인 영양은 별로야. 그런데 맛이 기가 막혀. 이 고양감이 엄청나다니까? 한 방울 먹었는데 그 정도면, 다 빨아먹으면 얼마나 되겠어?"
김애경이 뒤에서 어처구니없다는 시선을 던진다. 그러거나 말거나 노점상은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어떻게 할래? 혈은화 1만 닢만 줘. 그쪽 혈주도 흡족해 할 거야."
"허, 혈은화 1만 닢? 너무 하잖아. 두고두고 먹을 수도 없고, 하루이틀이면 죽을 것 같은데."
"싫으면 관둬. 나도 사례할 곳이 많아서 그 정도는 받아야 해."
"쯧, 그러다 안 팔리면?"
"어휴, 인간 출신이라 그런지 화통한 맛이 없고만."
"그쪽도 마찬가지야."
혈은화는 예전에 삼각 무역을 하던 때 쓰던 게 많이 남아있다. 대부분은 무법성에서 썼지만, 오늘을 위해 남은 혈은화를 싹싹 긁어 가져왔다.
2만 닢을 확인한 노점상이 헤벌레 웃었다.
"이봐, 다음에는 또 언제 들르지? 원한다면 더 준비해줄 수 있는데."
"글쎄? 혈주님께서 좋아하실지 어쩌실지 몰라서. 결정되면 박쥐라도 날려서 알려주지."
"좋아. 내 주소로 박쥐 보내라고."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김현은 이 근방을 깡그리 불태울 작정이었으니까.
흡혈귀들의 눈을 의식해 짐짝처럼 희생자들을 싣고 나왔다. 이세희가 남몰래 빛을 뿌리고 짧은 한숨을 쉰다.
[성혼이 안 먹혀요.]
[그렇습니까……]
입안이 깔깔해진다.
이세희의 성혼으로 안 된다면 지금 김현이 동원할 수 있는 어떤 방법으로도 이들을 구할 수 없다. 시간이라도 넉넉하면 어떻게 해보겠으나 하루 이틀이면 죽을 테니 그것도 불가.
잠시 침묵이 흘렀다.
김현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최소한 죽음이라도 지구에서 맞을 수 있게 해주지요. 흡혈귀에게 유린당하고, 한 끼 식사가 되는 게 아니라 인간다운 죽음을 맞을 수 있게요.]
[응.]
[그래야죠.]
잠시 침울했던 일행에 활기가 돈다.
아니, 이것은 분노였다.
동족을 유린하는 흡혈귀에 대한 본능적인 분노와 복수심. 그것이 일행의 마음을 활활 태우고 있었다.
영지를 돌아다니며 정보를 모았다.
그렇게 얻은 내용은 노점상에게 얻은 정보와 비슷했다. 블러드 공작이 지구에서 오는 노예를 완전히 독점하고 있으며 실험 결과 빈 쭉정이가 된 노예들이 특식이라는 이름으로 유통되고 있다는 것.
[저길 가야 한다는 뜻이네요.]
서경태가 블러드 공작의 저택을 노려보았다.
[너무 무모해. 저기 들어가면 반드시 걸려.]
[저는 괜찮지 않을까요?]
[블러드 공작을 얕보지 마. 가벼워 보인다고 속까지 가볍지는 않아. 저택 내부는 돌아다닐 수 있겠지. 실험실로 들어가면 그 순간 걸린다.]
[그런가요……]
서경태가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귀환까지 10시간도 남지 않은 시점. 사람들을 저택에 내버려 두고 돌아가야 하나 싶었다.
이때, 김현의 머리에 어떤 계획이 스치고 지나갔다.
굉장히 난잡하고 위험천만한 계획.
잠깐 망설일 때, 구해온 늙은 남자가 눈을 떴다.
백태가 가득 낀 눈.
그 눈에 음울함이 넘쳐났다.
"마마……"
생의 마지막 순간, 사람은 누구나 엄마를 찾는다고 한다.
끊어질 듯 애달픈 목소리를 듣자 속에서 부글부글 차오르는 것이 있었다.
눈앞의 이들을 구하지도 못하면서 무슨 인류를 구하려고 하나.
전생, 혹은 원본 아론의 인생이 떠오르면서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
머리가 뜨거워진다.
솟구치는 분노로 이성을 잃을 것만 같았다.
간신히 이성을 찾으며, 일행을 한 번 둘러보았다.
[이렇게 하죠.]
즉석에서 짜낸 계획을 제안했다.
위험한 건 다들 안다. 그러나 너무 처참한 사람들의 모습에 다들 분노한 상태였다.
김애경이 김현을 똑바로 보며 물었다.
[정말로 가능하겠어? 냉정하게 대답해줘. 사람들을 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 목숨도 중요해. 우리 중 하나라도 여기서 죽으면 안 돼.]
[지금이라면 가능해. 지금이라면.]
[좋아, 맡길게.]
구출한 사람들을 데리고 블러드 공작의 영지를 떠났다. 그리고 몇 갈래로 찢어졌다.
서경태와 이세희, 김애경은 블러드 공작의 저택 쪽으로, 피터와 에일리는 구출한 사람들과 함께 야산에서 대기. 김현 혼자 블러드 공작의 영지에 남았다.
기다린다.
하루가 꼬박 가고 석양이 질 무렵 행동을 개시했다.
쩌엉!
양쪽 손목에 찬 팔찌를 마주치는 김현.
두 눈이 이글거렸다.
최강의 장갑, 멸망왕의 데뷔전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