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4
멸망왕 초현
우우우웅.
공간이 일렁인다.
아니, 찢어진다. 금 간 유리창처럼 산산조각 난다.
고요히 정지된 김현의 등 뒤로 거대한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그림자가 구체화 되었다.
강철 거인.
마땅히 자신이 이곳에 있어야 한다는 듯 자리를 차지했다. 위압감을 흩뿌리며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다.
거인의 가슴이 좌우로 벌어진다. 사람 하나 들어갈 크기다. 양팔을 좌우로 벌려 십(十)자 형상이 되어 거인에게 빨려 들어갔다.
철컥, 철컥.
신경 회로 접속.
양쪽 손목에 강철 고리가 감긴다. 발목도 마찬가지다. 손과 발의 전자 신경과 거인의 회로가 연결되었다.
목 뒤의 접속 단자도 그러했다. 거인의 시야가 합치되면서 본인이 커진 듯한 착각이 든다. 막강한 힘과 권능이 작은 심장을 거칠게 뛰게 했다.
"후읍."
짧게 심호흡하는 김현.
블러드 공작의 영지 지척이다. 일반인도 마을에서 오가는 흡혈귀들을 육안으로 관찰할 정도. 아무 은폐 장치를 쓰지 않고 불러낸 까닭에 당장 난리가 났다.
흡혈귀들이 이쪽을 가리키며 뭐라고 소리를 지른다. 몇몇은 안개나 박쥐, 늑대로 변해 뛰어온다. 위급 상황을 알리는 폭죽이 길게 하늘 위로 솟구쳤다.
"시작할까."
팔짱을 꼈다.
양쪽 어깨에서 삐죽, 기관포가 튀어나온다.
슈슈슈슝!
흰 광선 다발을 마구 쏘아내기 시작.
죽음의 비가 내렸다.
화력이 약하다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김현 기준. 4성에서 5성 흡혈귀들이 모여 사는 마을 입장에서는 재앙이 따로 없었다.
콰콰쾅! 쾅쾅!
광선은 모든 것을 찢어발겼다. 마주치는 곳마다 격렬한 폭음과 함께 섬광이 터진다. 집이 무너지고, 흡혈귀가 가루가 되어 산화하고, 먼지가 하늘 끝까지 솟구쳤다.
"으아아악!"
"살려줘!"
"장갑 기사다! 장갑 기사야!"
"도망쳐!"
멸망왕이 기갑계 장갑 기사의 탑승형 장갑을 기본으로 삼은 탓일까? 기갑계가 공격해 온 줄 알았나 보다.
흡혈귀들이 벌떼처럼 도망쳤다. 마을 어디에 이리 흡혈귀가 많았는지 모르겠다. 도망치는 흡혈귀의 수가 가볍게 1천을 넘어갔다.
보통 장갑 기사라면 이중 얼마쯤은 놓쳤을 것이다. 장갑 기사는 전천후 전투가 가능한 대신 이런 원거리 추격전에서는 약한 면모를 보이니까.
그러나 김현은 다르다.
"흥."
왼손에 지긋이 힘을 주었다.
혼력이 주입된다.
여전히 차고 있던 팔찌가 웅웅 떨었다. 자연스럽게 공간이 일그러지며 두 개의 무구가 나타났다.
복수의 검, 그리고 처형자.
멸망왕이 왼손으로 처형자를 잡았다. 몸을 슬쩍 틀어 처형자를 내민 다음 기계 장치의 신을 발현한다.
부리부리한 눈이 섬광을 뿌렸다. 동시에 김현의 의식 속에서 ◎표시가 수도 없이 떠오른다. 메뚜기 떼처럼 도망치는 흡혈귀들을 몽땅 조준한 것.
타앙!
단 한 번의 총성.
그러나 그 결과는 전혀 뜻밖이었다.
두툼하게 튀어 나간 빛줄기가 수십 번이나 분화한 끝에 수천 줄기가 되어 흡혈귀들을 단번에 꿰뚫은 것이다.
"크아악!"
"커헉!"
비명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 와중에도 살아남은 흡혈귀들이 있었다. 6성 이상의 고위 흡혈귀나 순전히 운이 좋아 죽음을 피한 자들. 그들이 질린 눈으로 김현을 올려다본다.
"도, 도대체 저 장갑 기사는 뭐야?"
"감히 공작 전하의 영지에서 무슨 짓을!"
"공작 전하께서 네놈을 단죄하실 것이다!"
누구든 직접 나설 것 같지는 않다. 조금 전 한 수를 보고 김현이 최소 7성 등급, 어쩌면 8성 등급이라는 사실을 눈치챘으니.
철컥.
그러거나 말거나 김현은 다시 처형자를 장전했다. 처형자의 총구에 푸른 빛이 어른거리자 살아남은 흡혈귀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설마?"
불길한 예감은 금방 현실이 되었다.
또다시 죽음의 비가 쏟아졌다. 이번에도 빛줄기가 분화된다. 다만 수천 줄기가 아닌 수십 줄기 수준이라 하나하나에 실린 힘이 어마어마했다. 살아남은 흡혈귀가 모조리 전멸하고 말았다.
김현은 차갑게 한 번 웃었다.
기계의 눈으로 보는 세상.
숫자와 기호가 지배하는 시야에 살아 움직이는 존재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최소한 김현의 시선이 미치는 곳은 완전히 죽음의 세계로 변했다.
휘이잉.
불어오는 바람에 열기가 솟구친다. 폐허가 된 시골 마을에 불이 붙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감히……]
때마침 들려오는 블러드 공작의 격노한 음성.
[이놈! 내 동맹의 후신이라 어여삐 여겼거늘 감히 내 자손들을 학살해?]
흥분했는지 말투까지 바뀌었다.
멸망왕에 타고 있는 상태지만 김현의 정체를 꿰뚫어 본 모양.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주포를 꺼내 저택을 겨누었다. 처형자까지 결합하여 힘을 집중하자 주변의 공기가 파르르 떨었다.
[네놈, 네놈……]
싸늘한 살의가 가득 밀려온다.
심장이 당장 얼어붙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분노.
무시했다.
바로 방아쇠를 당겼다.
쭈앙!
일순 멸망왕이 하얀 광채에 잠겼다가 나타났다. 길쭉한 주포 앞에서 빛의 용이 뛰쳐나간다.
세상 만물이 침묵했다.
지상에 태양이 강림한 것 같다.
빛의 용이 모든 것을 먹어치웠다. 세상의 종말이 선언된 듯 죽음이 저택을 강타했다.
그러나 김현은 똑똑히 보고 있었다.
충격 직전 저택 전체가 흐린 빛을 뿜는 것을.
핏빛 방어막이 혀로 핥듯 저택을 휘감아 빛의 용을, 멸망하는 세계의 공격을 막아내고야 마는 것도.
물론 완벽하지는 않았다.
주포 공격은 김현의 힘을 단번에 쏘아내는 막강한 공격. 저택 주변이 완전히 폭발에 휘감겼다. 폭삭 일어나는 흙먼지가 화산에서 분출되는 화산재 같았다.
흙먼지가 세상을 뒤덮었으나 김현은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는다. 자연히 흙먼지를 뚫고 이쪽으로 새처럼 날아오는 한 인영(人影)을 볼 수 있었다.
멋진 신사복을 입은 미남자.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져 있다. 김현이 일찍이 보지 못했던 표정. 두 눈에서 이글거리는 붉은 광망이 심상치가 않았다.
탕!
불문곡직하고 방아쇠를 당기는 김현.
새하얀 광탄이 미남자의 이마를 직격 했다.
역시 만만치가 않았다.
미남자가 흐물텅하게 변하더니 머리가 직각으로 뒤를 향해 꺾인 것. 광탄은 허무하게 허공만 갈랐다.
[갓 태어난 애송이 주제에 영겁의 세월을 살아온 나에게 맞서려는 것이냐! 잠자코 목덜미를 내놓아라!]
블러드 공작이 두 팔을 벌렸다. 몸이 핏물로 변하여 폭발적으로 증식했다. 김현보다 거의 2배는 커져서는 전방위에서 피의 촉수를 뻗어 덮쳐왔다.
"고작?"
혈마 성혼은 김현도 한동안 쓴 바가 있다. 뭘 하려는 것인지 훤히 보였다.
오른손에 힘을 주었다. 복수의 검이 혼력을 양껏 주입 받고 부르르 떨었다.
쿠콰콰콰!
동력핵이 격렬하게 돌아갔다.
무한한 힘이 공급된다.
멸망왕이 새하얀 빛을 뿜었다. 강철의 몸 전체가 달아오른다. 취이익, 뿌연 증기 같은 게 새어 나왔다. 막대한 힘 때문에 주위 공간이 괴상하게 왜곡되었다.
어느새 몸을 낮춘 멸망왕.
그대로 돌격한다.
추진 장치가 격하게 빛을 토해냈다. 찰나의 순간 무한히 가속한다. 공간이 접히며 타오르는 혜성이 블러드 공작을 직격했다.
더욱 무서운 점은 직격 순간 복수의 검을 휘둘렀다는 점. 성혼이 내는 힘, 멸망왕의 무게, 속도에서 오는 파괴력이 이 일격에 온전히 집중되었다.
[커헉!]
이 공격에는 블러드 공작마저 온전하지 못했다.
거대한 핏물처럼 변한 블러드 공작이 단번에 두 조각 났다. 단순히 물리적인 충격을 입은 것에서 그치지 않고 복수의 검에 실려 있던 혼력이 블러드 공작을 강타했다.
그냥 당하지만은 않는다. 두 조각이 난 상태에서도 피의 촉수가 뻗어온다. 흡사 투창처럼 변하여 수십 군데를 동시에 찌르고 있었다.
아쉽게도 한 발짝 늦었다. 이 상황을 예측하고 돌진하던 기세를 이용하여 블러드 공작을 수십 미터도 넘게 지나쳤으니.
[너, 너!]
블러드 공작이 이를 갈며 소리쳤다.
몸을 복구하긴 했는데 잘생긴 얼굴에 상처가 남았다. 사선으로 그은 듯 지렁이 같은 흉터가 꿈틀거렸다.
동시에 일그러지는 시야.
정신 공격이다.
무시. 생체 신경계를 우회하여 전자 신경계만으로 멸망왕을 제어했다. 그러자 돌진해 오는 블러드 공작이 여과 없이 노출된다.
혼몽한 듯 멍하니 있다가 복수의 검을 올려 쳤다.
[헛!]
블러드 공작이 기겁하여 몸을 튼다. 복수의 검이 블러드 공작을 사타구니부터 머리까지 둘로 쪼개 버렸다.
그러나 이것은 속임수.
얕았다.
대신 등 뒤에서 붉은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김현을 더는 얕보지 않고 나름 속임수를 섞은 것.
'제법.'
안타깝게도 이것도 김현의 예상에 들어 있었다.
전투 경험의 차이라고 할까. 김현은 이와 비슷한 육박전을 수도 없이 겪었지만, 블러드 공작은 워낙 초월적인 힘을 가진 탓에 육박전 경험이 오히려 적은 것 같다.
왼손이 어느새 오른쪽 겨드랑이로 들어간 뒤. 처형자가 등 뒤의 블러드 공작을 향해 불을 뿜었다.
타타탕!
빛줄기가 블러드 공작을 후려쳤다.
타격 직전 블러드 공작이 몸에 구멍을 뚫어 빛줄기를 흘려보내려 했다. 그러자 광선이 지근거리에서 쾅쾅 터져버린다. 혼력의 폭풍이 김현과 블러드 공작을 동시에 때렸다.
[큭!]
멈칫하는 블러드 공작.
김현은 달랐다. 혼력 폭풍을 몸으로 받아내며 돌진했다. 복수의 검이 눈 깜짝할 순간에 블러드 공작을 수천 갈래로 찢었다.
유효타는 아니었다. 블러드 공작이 뿌옇게 흐려지며 사라진다. 그리고 수백 미터는 족히 떨어진 곳에서 나타났다.
공간 이동.
김현은 조롱 섞인 도발을 날렸다.
"도망을 잘 치는데? 공작이라는 직함이 아깝다. 차라리 블러드 쥐새끼라고 바꾸면 어때?"
[이놈이 감히!]
"야옹! 무섭지?"
블러드 공작이 얼굴을 굳히고 손을 길게 저었다. 피의 물결이 겹겹이 중첩되며 김현을 노렸다. 여기에 허공에서 핏방울이 생성되어 비가 되어 내리고, 피의 안개가 자욱하게 꼈다.
'이제 진짜구나.'
블러드 공작의 장기.
피의 지옥.
세계가 피 속성 혼력으로 가득 차 블러드 공작을 돕게 된다. 이곳은 블러드 공작의 영지이고, 그 어느 차원계보다 피 속성 혼력이 짙은 곳이니 더 큰 위력을 내겠지.
지금까지는 김현이 조금 우위를 가져갔다면 이제부터는 우열이 뒤집힌 셈.
블러드 공작이 얼굴만 구체화하여 으스스하게 웃었다.
[내 진짜 힘을 보여주마, 갓난아기 놈아.]
"찍찍대지 말고 덤비기나 해. 야옹!"
[이놈이 계속!]
블러드 공작이 노호하며 달려들었다.
비가 내렸다.
공간을 찢으며 피의 마수가 포효했다.
피의 안개가 뭉쳐 멸망왕의 팔다리를 얽어맸다.
어렵긴 어렵다. 김현은 점차 힘이 부치는 것을 느꼈다.
'이곳이 불사계만, 하다못해 블러드 공작의 영지만 아니었어도……'
그랬다면 완전히 박빙, 상식적으로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블러드 공작도 그 점을 눈치챘다. 더욱 노호하며 덤벼든다. 두 눈이 핏빛 섬광을 연신 토해내고 있었다. 지금 김현을 놓치면 어려워진다는 사실을 간파한 까닭.
둘의 전투는 인근 지역 전체를 떨쳐 울렸다. 싸우는 도중 빗나간 공격이 지상에 떨어지기라도 하면 난리가 났다. 블러드 공작의 족속들이 방어하고 있을 저택은 아주 홍역을 앓고 있었다.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1시간, 2시간……
김현은 지금도 잘 싸우고 있었다. 멸망왕 덕이 컸다. 워낙 잘 만들어서 피의 지옥이 펼쳐진 상태에서도 호각으로 맞붙은 것.
'슬슬 시간이 된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했을 때, 블러드 공작의 저택에서 투명한 광채가 천장과 방어막을 뚫고 쭈욱 솟구쳤다.
[뭐지?]
블러드 공작이 의문을 표하면서도 김현을 몰아친다. 김현은 복수의 검으로 공격을 받아내고 처형자로 반격했다.
'성공했구나.'
곧 기다리던 소리가 들렸다.
"꾸아악!"
원시 불새의 울음.
"히히힝!"
천마 무리가 질러대는 소리도 함께.
투명한 광채가 솟구친 곳을 통해 불새가 날아오르고 있었다. 등에 사람들이 가득 보였다. 그 뒤를 따라 천마 무리도 분주히 날개를 휘저었다.
상황을 알아차린 블러드 공작이 길게 고함을 질렀다.
[내 실험체!]
그러나 어떻게 해볼 수는 없다. 블러드 공작이 몸을 빼려고 했으나 김현이 필사적으로 막았으니까.
저택에서 흡혈귀들이 뒤늦게 쫓아왔다. 모두 7성이고 숫자도 제법 많았다. 김현은 폭발적으로 추진 장치를 기동하여 하늘 높이 솟구쳤다.
이어지는 전탄 개방.
주포가 삐죽 고개를 내민다. 어깨 위의 기관포도 개방된다. 초진동 송곳에도 혼력이 어리고, 처형자도 힘껏 흰 섬광을 머금었다.
일제 발사.
광선이 마구 쏘아진다. 뒷일은 생각하지 않고 혼력을 아낌없이 퍼부은 공격. 블러드 공작조차 정면으로 막을 생각은 못 하고 물러나야만 했다.
[놓칠 줄 아느냐?]
블러드 공작이 거머리처럼 달라붙었다. 김현의 힘이 쇠하기만 기다렸다. 실험체도 실험체지만, 김현만큼은 살려 보내지 않겠다는 태도.
결론부터 말해서, 블러드 공작은 김현을 끝내 놓치고 말았다.
다 멸망왕 때문.
멸망왕이 평소 저장하는 혼력은 바다처럼 광대하기 그지없었다. 따라서 김현은 전탄 발사를 오랜 시간 유지할 수 있었고, 야산에서 대기하던 피터와 에일리가 합류하여 천금 같은 시간을 벌어주었다.
[맹세하노라!]
차원문을 넘는 김현에게 블러드 공작의 진노가 쏟아졌다.
[네 소중한 모든 것을 파괴하겠다! 고향 별은 피의 웅덩이로 만들고, 네가 사랑하는 모든 자들을 가장 비천한 노예로 만들어 흡혈귀에게는 피를, 늑대인간에게는 살을, 해골들에게는 뼈를, 시체에게는 내장을 주어 영겁토록 고통받게 할 것이다!]
김현은 코웃음만 쳤다.
어차피 그렇게 할 거였으면서 무슨?
빈정대며 도발을 남겼다.
[할 수 있으면 해보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