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5
흡혈귀 사냥 -1-
볼이 푸들푸들 떨린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두 눈을 찢어지라 부릅뜨고 있었다.
김현은 잠시 시간을 주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탁자를 움켜쥐고 있던 두툼한 손에서 힘이 빠졌다.
"이게, 이게 사실입니까?"
간신히 내뱉은 공허한 물음.
푸른 눈동자가 자기 뒤편을 향했다. 바짝 긴장하여 서 있던 한 흑인 남자가 부동 자세로 대답했다.
"예, 사실입니다. 김 사령관이 건네준 정보와 비교한 결과, 흡혈귀 저택을 감시하던 CCTV와 인공위성에 가짜 영상이 삽입된 것을 확인했습니다."
"하아……"
쿵!
김현 맞은 편에 앉아 있던 남자, 미국 대통령이 별안간 자기 머리를 탁자에다가 세게 박아 버린다.
경호원들이 놀라 부산을 떨었다. 김현도 생경한 시선을 던진다. 미국 대통령이 이렇게 망가진 모습을 보여주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몇 분이 지나고 대통령이 머리를 든다. 이마가 발갛게 변해 있었다. 70살이 넘은 노인이 그러고 있으니 희극적이라면 희극적인 광경이지만 여기 있는 누구도 웃지 못했다.
"그래서 피해가 얼마나 됩니까?"
"추산 중입니다."
"미국인은, 미국인 피해자는 없습니까?"
"지금까지는 그런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하, 이것 참……"
한 가닥 안도와 함께 짙은 불쾌감, 강렬한 혐오감이 차례로 대통령의 얼굴을 스친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낮은 목소리로 묻자 대통령이 소리 나게 이를 갈았다.
"몽땅 연방 교도소에 잡아넣을 겁니다. 죽기 전에는 못 나오게 해야지요, 암!"
"그게 되겠습니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제가 알기로 딱 한 명밖에 없는 것으로 압니다만."
"그건……"
대통령의 눈이 흔들렸다. 자연스레 뒤쪽의 흑인 남자, 신참 CIA 국장을 쳐다본다. CIA 국장이 김현을 난처한 얼굴로 보다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연방 안보망을 해킹한 곳이 뉴욕 타임스퀘어 인근 펜트하우스에서 접속한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유능하시네요. 성혼과 결합된 해킹이어서 추적하기 어려웠을 텐데요."
"저희 요원 중에서 비슷한 성혼을 가진 각성자가 있어서요."
CIA 국장이 피로한 듯 두 눈을 비볐다.
뉴욕 타임스퀘어!
예전에는 김현이 머무르던 건물이다. 지금은 주인이 바뀌었다.
카를로스.
김현의 공백을 훌륭히 매운 공백으로 똑같은 펜트하우스를 내준 것이다. 모든 증거가 카를로스를 가리키고 있었다.
"미국에서 처리하지 못하면 제가 직접 하지요."
"슈퍼 김, 그것은……"
"인간을 노예로 외계종에게 팔아넘긴 전대미문의 사건입니다. 빠른 대처가 불가피해요. 그리고 대통령께서도 아시겠지만 종족 변환 각성자들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 날이 다가오고 있어요."
"마지막 날이라뇨?"
"지구를 보호하는 차원의 벽이 완전히 걷히고, 외계종들이 본격적으로 침략해 올 때요."
도대체 원 역사보다 얼마나 빠른 거지?
그래서 김현은 보다 서두르고 있었다. 당장 불사계의 침공이 예정되어 있으니까.
대통령의 얼굴이 순식간에 10년은 넘게 늙어버린 것 같다. 이마에 주름살이 깊게 파였다.
김현과의 대립 탓에 현재 친정부 성향 각성자들은 대부분 종족 변환 각성자이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그나마 몇 명 영육 개변한 이가 생기긴 했으나 대부분 6성에 불과했다.
한참이나 입술을 달싹였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결단을 내린다.
"좋습니다. 현실적인 어려움을 인정하겠습니다. 슈퍼 김, 슈퍼 김에게 정식으로 의뢰를 하지요. 이번 일의 주동자인 카를로스, 그리고 카를로스의 사주를 받은 각성자 전원을 체포하여 FBI에 넘겨주시기 바랍니다."
"대통령!"
"그것은!"
미국 범죄자의 체포 권한을 자국민 각성자도 아니고, 외국의 독재자에게 넘기다니?
CIA 국장은 물론 동행한 정부 요인들이 기겁하며 말렸다. 그러나 대통령의 결심은 이미 확고하게 굳어 있었다.
"현실을 보세요. 카를로스가 어디 순순히 잡혀주겠습니까? 그리고 지금 7성 각성자들은 믿을 수가 없어요. 알렉산더? 닉? 알렉산더는 보나마나 정의 구현하겠다며 카를로스를 불태워 죽이려고 할 거고, 닉은 심장을 뜯어먹겠다고 난리 칠 겁니다. 여기 슈퍼 김 말이 맞았어요. 이 둘은 진작 정리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대통령님, 우리 미국의 위대한 각성자 군대를 동원하면 카를로스 회장 정도는 충분히 제압할 수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나오는 희생은요? 사람이, 각성자가 가장 중요한 시대입니다. 범죄자 하나 잡자고 한 명이라도 잃어서는 안 돼요. 슈퍼 김, 부탁합니다."
"그러지요."
결과가 이렇게 나올 줄 짐작하고 있었다. 김현은 순순히 몸을 일으켰다.
이곳은 미국 워싱턴.
김현 기준으로 뉴욕까지는 금방이다. 날아가도 그렇고, 거점을 통과해도 그렇다.
워싱턴 외곽의 아차원 공간으로 들어갔다. 인공 지구에 진입하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일행이 김현에게 모여든다.
"얘기는 잘 됐어?"
"어, 자료 받아왔어. CIA는 CIA더라. 누가 카를로스랑 붙었는지 다 알아내던데?"
"설마, 지들이 먼저 알았던 건 아니겠지?"
"그렇진 않은 것 같았어."
카를로스 일당의 수법이 허술했다고 봐야지. 성혼을 이용한 범죄인 탓에 속여넘기기는 했으나 작정하고 조사하면 흔적을 금방 찾아냈던 것.
조직 자체가 그리 크지는 않았다. 불사계 각성자들로만 구성된 까닭이다. 더구나 카를로스도 결국은 끄나풀에 불과했다.
"티쓰 백작……"
김현은 낮게 이름 하나를 읊었다.
얼마 전 흡혈귀 저택의 관리자로 온 7성 흡혈귀였다. 다른 거점의 외계종이 대부분 5성 등급인 것을 생각하면 참 이질적이었다.
"둘 다 잡아야 해."
"우리, 불사계랑도 싸우는 거예요?"
"그냥 놔둘 수는 없죠. 그래도 일단 말은 해봅시다."
"응? 어떻게?"
"외교적인 수단을 써보자는 거지."
김애경이 김현을 멀뚱히 쳐다본다. 그게 통하겠느냐는 투.
당연히 말만으로 어떻게 되지는 않는다. 일종의 명분 쌓기인 동시에 다른 차원게에 대해 경고하는 거였다.
"우선은 카를로스부터 해결하자. 티쓰 백작은 그 다음이야."
"좋아. 카를로스는 네가 직접 잡을 거지?"
"그래야지. 누나랑 다른 분들은 국경이랑 휴스턴에 있는 놈들 처리해주세요. 이번에도 두 개조로 나뉘면 될 것 같네요."
"간단하겠네요."
"어, 불사계에서 너 엄청나게 고생했잖아. 이번에는 쉬운 일 하면서 쉬어."
"난 이번 일 끝나면 휴가 갔다 올 거야. 그동안 너무 바빴어."
"마음대로 해."
"야, 그런데 나는 언제 8성 도전하면 되는 거야? 능력치는 꽉 채웠는데."
김애경이 기습처럼 물어왔다.
할 말이 없다.
"연구 중이야. 지금 시도하면 실패할 가능성이 커."
"그래? 그 업이라는 게 뭔지 몰라서 그런 거지?"
"맞아."
"시간 날 때 업 측정기 같은 거라도 만들어 봐. 나도 보고, 여기 세희랑 경태, 피터랑 에일리도 보면서 머리를 맞대보자. 그래야 뭐라도 좋은 생각이 나오지."
"그래야겠어."
"전 8성 올라가고 싶은 생각이 없는데……"
피터가 꿍얼거리다가 에일리에게 눈총을 받고 조용히 입을 닫았다.
CIA에게서 받은 정보를 나눠주었다. 탐지 계열 성혼은 피터만 있으니 피터가 에일리와 함께 국경을 넘기로 했다. 서경태는 잠시 쉬고, 김애경과 이세희는 휴스턴을 정리할 것이다.
"아직 저택은 공격하지 마. 알았지?"
"알았어. 그런데 장담은 못해."
"현장에서는 현장 판단이 우선이지. 누나가 알아서 해."
그 자리에서 흩어졌다.
가볍게 몸만 날리는 것으로 뉴욕에 도착했다. 요즘 부쩍 돌아다니는 관광객들처럼 뒷발을 마주치고 현실의 뉴욕에 가려고 할 때였다.
"삼촌!"
머리 위에서 작은 악동이 떨어졌다.
"삼촌! 여기서 뭐 해!"
"안녕하세요, 사령관님."
"안녕하세요."
하은이를 따라 떨어진 흑인 꼬마 둘이 다소곳이 인사를 했다.
보아하니 뉴욕에서 놀다가 이제 오는 모양. 난처한 마음에 팔짱을 끼자 하은이가 두툼한 왼쪽 다리에 달라붙었다.
"어디 가? 나도 같이 갈래!"
"삼촌 일하러 가는 거야. 놀러 가는 거 아냐."
"나두, 나두!"
하은이가 다리를 꽉 잡았다. 떼어놓으려다가 관두었다. 어차피 자신이 보호하는 한 위험한 일은 없을 테니.
"너희 먼저 돌아가라."
"예, 사령관님."
뉴욕으로 직행한다.
이제는 더 숨길 생각이 없었다. 오른쪽 손목에 찬 팔찌를 작동시켜 멸망왕을 꺼냈다.
"우와! 로보트다!"
여자아이지만 성혼의 영향인지 외계의 기술에 깊이 호기심을 보여주는 하은이다. 멸망왕을 보고는 눈을 반짝였다.
"하은아, 여기 탈래?"
"진짜? 진짜 그래도 돼?"
"당연하지."
"삼촌 최고!"
멸망왕은 김현이 타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 성능을 발휘한다. 블러드 공작이 상대라면 절대 하지 않을 일이나 7성에 불과한 카를로스 상대인데 뭐 어떤가.
기이잉, 철컥.
열리는 가슴으로 하은이가 기어 들어갔다. 멸망왕의 눈에서 퍼런 안광이 번뜩인다. 이내 잔뜩 신이 난 하은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와, 삼촌! 나 로보트 탔어! 로보트!]
"그래, 그래. 구경 잘 하고 있어."
[이거 쏴 보면 안 돼?]
"안 돼. 얌전히 잘 있으면 나중에 쏘게 해줄게."
[약속이다?]
"그래, 약속."
김현과 하은이를 태운 멸망왕이 천천히 상승했다.
왜애앵!
귀청을 두드리는 굉음과 함께 누군가 정신 감응을 걸어온다.
[정지! 누구냐?]
그냥 아차원 공간에서 나온 거면 뉴욕의 각성자들도 신경 쓰지 않는다. 척 보기에도 위압적인 멸망왕과 함께 비행하고 있으니 바로 제지가 들어온 것.
익숙한 느낌이었다. 김현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모가디슈의 김현입니다.]
[아! 저번에…… 반갑습니다. 메리 린디아라고 해요.]
[반갑습니다.]
[죄송하지만 옆에 그건 치워주시면 안 될까요? 시민들이 무서워할 것 같은데.]
[안 됩니다. 제가 미국 대통령한테 의뢰를 받은 게 있어서요.]
[의뢰라뇨?]
[두고 보시면 알 겁니다. 린디아 양이라고 했지요? 린디아 양이라면 백악관과 연결되는 선이 있을 테니 거기 통해서 물어보세요. 협회 통해서 말고요.]
[협회를 통하지 말라니, 무슨 말씀이세요?]
[설명할 시간 없습니다.]
쿠아앙!
김현이 속도를 높였다.
덩달아 멸망왕이 폭발적으로 가속한다. 둘이 단번에 음속을 돌파하면서 강렬한 충격파가 사방을 후려쳤다.
"엄마야!"
"뭐, 뭐야?"
놀란 시민들이 부리나케 사방으로 흩어진다.
마침 석양이 지는 시간. 붉은 하늘을 배경으로 김현과 멸망왕이 아주 잘 보였다.
요즘에는 사람이 나는 것쯤 이야깃거리도 아니다. 그러나 신장 5미터의 로봇은 희귀했다. 척 보기에도 육중하게 생겨서 위압감을 폴폴 흘리는 멸망왕 같은 종류는 더더욱 그랬고.
"저 사람 누구야?"
"사진 찍어, 사진!"
벌써 타임 스퀘어가 코앞이다.
언제나 관광객들로 넘쳐나는 그곳. 길게 줄까지 서 있다. 김현과 멸망왕이 천천히 지나가자 타임스퀘어가 아니라 김현과 멸망왕을 찍기 시작했다.
그리고 김현을 따라오는 집요한 시선.
동일한 눈높이다. 한때 김현이 일행의 거점으로 쓰기도 했던 펜트하우스에서 출발하는 시선이 김현을 쏘아보고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처형자를 들어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콰쾅!
펜트하우스가 요란하게 폭발했다.
격렬한 진동이 사방을 뒤흔든다. 요란한 경보음이 뒤따라 울리고, 사람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실제 피해는 없다.
오로지 펜트하우스만 겨냥하여 폭발시켰으니. 심지어 그 안에 머무르고 있던 사람들도 모두 온전했다.
"이게 무슨 짓이오!"
엉망이 된 카를로스가 먼지 속에서 솟구쳤다.
블러드 공작처럼 핏물로 변한 상태다. 어린아이 셋, 그리고 파리한 안색의 중년 여자를 끌어안고 있었다. 얼굴과 팔만 인간이라 적잖이 기괴해 보였다.
"오랜만이야, 카를로스."
"김 사령관……"
김현은 카를로스의 바로 앞에서 정지했다. 잔뜩 겁먹은 어린아이들이 카를로스의 품 안에서 칭얼거렸다.
"아빠, 무서워."
"무서워하지 마라, 우리 귀여운 일리아. 아빠가 지켜주마."
언뜻 보기에는 단란한 가정 같다.
그러나 이걸 보는 김현의 입가는 호젓한 미소를 짓는 대신 비틀려 일그러진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다정하신 아버지인데?"
분노가 차오른다.
체인스 가족이 생각났다.
이들이 펜트하우스에서 호의호식할 때 수많은 사람이 흡혈귀들의 실험체로 넘겨졌다. 그것을 생각하니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흡혈귀들에게 그 많은 가족을 팔아넘긴 주제에 네 자식은 소중하다 이거냐?"
카를로스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이들 앞에서는 그 일을 언급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가관이다.
꼴에 가족들에게는 자기 범죄를 알리기 싫은 모양.
아니꼽기 그지없었다. 김현은 입술을 비틀며 웃고는 복수의 검을 내리쳤다.
"아악!"
인정사정 보지 않는 공격에 카를로스가 비명을 질렀다. 그 와중에도 자기 몸을 변형시켜 가족들만큼은 확실하게 지키고 있었다.
"여, 여보!"
"아빠!"
"나쁜 놈아! 아빠 때리지 마!"
"으아앙!"
가냘픈 울음이 처량하게 울려 퍼진다.
그러나 김현은 더 속이 꼬이는 느낌을 받았다. 진짜 피해자가 누군데, 정말 울어야 할 자들이 누구인데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턱!
왼손을 내밀어 카를로스의 멱살을 쥐었다. 김현과 카를로스의 눈이 마주친다.
격노하여 이글이글 타오르는 김현의 눈동자.
카를로스가 체념하여 말했다.
"항복하겠습니다. 제 가족들은 건드리지 마십시오."
"흥!"
거칠게 카를로스의 가족들을 쳐냈다.
공중에서 떨어져 펜트하우스 폐허로 떨어진다. 막 기어나온 경호원들이 급히 그들을 받았다.
"대체, 대체 왜 이러는 거요! 전쟁이라도 하자는 겁니까?"
"그래, 전쟁이다."
"뭐……"
"수천 명이나 되는 난민들을 흡혈귀 먹이로 던져주고도 온전할 줄 알았나? 너희에겐 죽음도 사치야. 가슴 잘 씻고 기다려라. 모조리 심장에 나무 말뚝을 박아줄 테니."
"여보!"
"아빠!"
카를로스를 들고 날아올랐다. 물론, 혼력을 조금 주입하여 성혼을 봉인하는 걸 잊진 않았다.
금세 워싱턴에 도착.
하지만 오늘 밤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현아! 여기 좀 도와줘!]
[왜? 티쓰 백작이 역습이라도 했어?]
[여기 수가 너무 많아! 7성이 10명은 넘는 것 같아!]
"빌어먹을 흡혈귀들……"
침공 임박.
그 사실을 피부로 느끼며 거칠게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