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6
흡혈귀 사냥 -2-
"너무 많아!"
이세희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부드러운 황금색 빛이 강물처럼 내렸다. 방어막이 둘을 감싸 안는다. 저 앞쪽에서 어둠이 폭발처럼 번지는 것이 보였다.
[어리석구나.]
흡혈귀 하나가 딱딱한 얼굴로 두 손을 펼친다. 허공에서 핏물이 생성되어서는 사방을 휘몰아쳤다. 그 서슬에 폭주하던 어둠이 핏물에 휩쓸리고 만다.
"젠장!"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서경태.
투명한 검이 어느 때보다도 불길한 힘을 머금고 있었다. 서경태에게 등을 보이던 흡혈귀가 천천히 뒤를 돌아본다. 이어서 천천히 손을 내밀기 시작.
"안 돼!"
외마디 외침과 함께 방어막이 서경태를 감쌌다. 거의 본능적으로 검을 들어 공격을 막는다. 천천히 확대되는 손이 가볍게 방어막을 부수었다. 검을 후려치자 막대한 힘이 서경태를 관통했다.
"쿨럭!"
피를 토하며 날아가고 말았다.
그나마 죽진 않았다. 하지만 흡혈귀들이 몰려들고 있다. 서경태는 보물, 환신갑을 발동시켜 간신히 그 자리를 벗어났다.
[쥐새끼 같은 놈.]
[언제까지 피해만 다닐 셈이냐?]
[그래봐야 헛된 발버둥에 불과한 것을.]
[얌전히 피를 바치고 안식을 취하거라. 하급종.]
어둠으로 은신한 서경태에게 다시 피폭풍이 휘몰아친다. 전신이 끈끈한 혈액에 뒤덮이고 만 서경태. 7성 흡혈귀 다섯이 쫓아와서 이대로 잡히는 성싶었다.
쭈앙!
이때 쏘아지는 투명한 광채.
멸망포였다.
극대파멸력은 전 차원계에서도 파괴력 하나만큼은 제일 간다고 평가받는다. 이걸 막을 방법은 한 단계 위의 성혼을 개척하는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아까부터 거슬리는군.]
흡혈귀들이 분분히 물러났다. 하필이면 그들의 진행 경로를 교묘히 꿰뚫고 있어 어쩔 수가 없었다.
김애경이 벌어다 준 천금 같은 기회.
서경태가 급히 몸을 날렸다. 몸이 어둠으로 변해 공간을 뛰어넘었다. 거의 순간 이동과 같은 속력. 그와 맞추어 김애경과 이세희를 보호하던 방어막이 잠깐 걷혔다가 서경태를 받아들인 다음에야 재생성되었다.
"휴! 살았다."
"그러니까 조심했어야지."
"열두 마리나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
"언니, 김현 님은 불렀어요?"
"불렀지."
이세희가 방어막을 몇 차례나 강화했다. 귀에 찬 보물, 절대적인 보호의 귀걸이가 부서질 듯 찬란한 빛을 뿜고 있었다. 이것으로 몇 분 정도는 버티지 싶다.
흡혈귀들이 천천히 강하했다. 심판관처럼 원형으로 일행을 둘러싸고는 비웃음을 날린다.
[원군? 원군이 온다고 일이 해결될 것 같나?]
[너희는 미끼다.]
[생각한 대로 움직여줘서 고맙군.]
"설마……"
김애경의 눈이 흔들렸다.
미끼라니?
김현을 이 자리에 부를 줄 알고 흡혈귀들이 이리 나오는 건가 싶었던 것이다.
실제로 다시 무전기를 작동시켜보지만 반응이 없었다. 비밀리에 가지고 다니는 보물, 속삭이는 깃털을 써봐도 마찬가지. 김애경이 SOS 신호를 보낸 다음에야 통신을 차단한 모양.
"언니, 신경 쓰지 마요."
흔들리는 김애경을 격려한 것은 이세희였다.
이세희가 똑바로 김애경을 쳐다본다. 두 눈에 신뢰의 빛이 가득했다. 김애경을 향한 것이 아닌, 이 자리에는 없는 누군가를 향한 신뢰.
"김현 님이라면 반드시 잘하실 거예요."
"그렇겠지?"
"그럼요!"
"좋아. 현이만 믿자."
그래, 김현이라면 잘하겠지.
흡혈귀들이 무슨 함정을 준비했든 박살 내고 구해줄 것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할까?
김애경이 몸을 살짝 떨 때, 뒤에서 서경태가 조금 들뜬 목소리로 소리쳤다.
"누나들, 저기 봐요! 형이 왔어요!"
"벌써?"
고개를 드는 일행.
저 위 구름 사이로 언뜻 무언가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그로부터 타오르는 흰 광선이 벼락처럼 내리꽂히는 것도.
김현.
그가 도착했다.
***
'열두 명.'
김현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하은이를 돌려보내고 아예 멸망왕을 타고 온 참이다. 일행을 둘러싸고 겁박하는 모습이 아주 잘 보였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아무리 블러드 공작이 불사계에서는 강력한 권력을 자랑하는 공작이라고 하나 자기 거점에 열둘이나 되는 7성 흡혈귀를 배치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다른 공작들의 가신을 빌렸겠지. 감히 자기 저택을 공격한 자를 잡기 위해.
'이게 다는 아니겠지?'
한 단계 위 각성자를 잡으려면 하위 단계 각성자 10명이 필요하다. 이것은 상식이다. 또한 각성자와 외계종 사이의 관계에서도 대부분 적용된다.
하지만 김현에게는 멸망왕이 있다. 가히 최강의 장갑이라고 자부할 수준이다. 이런 김현을 잡으려면 10명으로는 부족하고 20명은 있어야 하지 싶다.
'더 오는 걸까?'
바로 저쪽에 흡혈귀 저택이 보인다. 어쩌면 그곳을 통해 7성 흡혈귀가 더 나올지도 몰랐다.
한 12명만 더 나오면 김애경이나 다른 동료를 견제하면서 김현을 상대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겠어?
설마 그렇게까지 멍청할까 싶었다. 김현이 버티는 사이 다른 동료를 더 모으면 그만인데. 그렇다고 8성 흡혈귀나 외계종이 더 오고, 예상보다 더 많은 7성 외계종을 동원하기엔 불사계가 비축한 성혼이 부족할 거고.
찌이잉.
통신도 재개되었다. 혹시 해서 미리 보험을 들어둔다.
[김현입니다. 휴스턴에서 불사계 흡혈귀들과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도와주실 수 있는 분은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사례는 톡톡히 하겠습니다.]
동료들만 아닌 동맹 각성자들에게, 그리고 새롭게 6성과 7성이 된 각성자들에게 보낸 전언.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쿨럭, 커헉!]
[큭! 큭! 과연 재생자야. 블러드 공작 전하를 밀어붙였던 자다워.]
[재생자는 무슨. 과분한 유산을 받은 금수저에 불과하지.]
[저놈의 피를 빨면 나도 장차 혈조의 위에 오를 터.]
12명의 7성 흡혈귀는 제법 강력했다. 예고 없이 들이닥친 주포 공격을 자기들끼리 힘을 모아 막아낸 것이다.
옷이 그을리고, 머리카락이 녹아내리는 등 낭패한 모습이긴 해도 실질적인 타격은 없다. 김현의 피를 탐내며 높이 뜬 멸망왕을 노려보고 있었다.
철컥, 철컥.
주포를 분리하여 등에 집어넣었다. 처형자를 왼손에 쥐고 복수의 검을 들었다. 흡혈귀들도 기세를 올리며 날아왔다.
'무슨 꿍꿍이냐?'
아무리 봐도 저 열둘만으로는 김현을 어쩌기 어려운데……
뭐, 모르면 모르는 대로 다 방법이 있다.
홱 몸을 돌렸다. 추진 장치를 최대한으로 가동한다. 멸망왕이 포탄처럼 뛰어나가며 흡혈귀 저택을 향해 돌진했다.
[어엇, 이놈이?]
[거기 서라!]
[이놈! 정정당당하게 싸우자!]
빠르게 쫓아오는 흡혈귀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흡혈귀 저택에 뭔가를 꾸미고 있었다는 듯이.
하지만 방심할 수는 없다. 김현은 괜히 득의에 차 방심하는 실수를 저지르진 않았다. 정신 계열 성혼이 없어 흡혈귀들의 속내를 들여다보기가 불가능했기 때문.
대신 익숙한 장면을 연출했다.
키이잉, 키잉.
어깨에서 드러나는 기관포, 등에서 고개를 내미는 주포, 초진동 송곳과 처형자.
전탄 발사였다.
쿠쿠쿠쿵! 콰콰쾅!
화려한 빛줄기가 허공을 수놓는다. 지구의 항모 전단을 모두 합친 것보다 압도적인 것이 멸망왕의 전탄 발사다. 김현의 성혼을 탄약으로 활용하는 까닭에 광선 하나의 파괴력도 어마어마하다. 흡혈귀 저택에서 방어막이 강화되었으나 이것만으로는 멸망왕의 공격을 막기 어려웠다.
[빌어먹을! 막아!]
[의식이 끝나기 전에 저택이 파괴되면 안 된다!]
흡혈귀들이 입에 거품을 물고 달려들었다.
의식?
김현은 귀를 쫑긋 세웠다.
지금까지 얻은 정보에 의하면 저택 내에서 뭔가 대규모 마법을 쓰려는 것 같다. 아마도 김현을 겨냥한 공격이겠지. 저주나 장거리 공격 같은.
'무시할까?'
대놓고 함정 냄새가 폴폴 풍긴다.
하지만 전생의 지식에 의하면 블러드 공작은 외통수 공격의 달인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린다.
의식을 부수겠다고 돌진하면 함정에 걸리고, 내버려 두면 대규모 의식이 완성되어 원거리 저격이 날아오는 종류일 확률이 높았다.
'저택에 들어가면 안 돼.'
내부에서 걸리는 함정이 가장 무서우니까. 자신이, 정확히 말하면 옛 김현이 백라왕과 흑인왕에게 함정을 걸어 일거에 분쇄해버린 것처럼.
'원거리 공격만 하자.'
김현은 동력핵의 출력을 최대한으로 높였다. 고속으로 비행하며 계속해서 전탄 발사를 날린다. 막대하게 뿌려대는 화력에 저택의 방어막이 실시간으로 깎여 나갔다. 마침내 파멸적인 광선이 직접 저택을 때리기 시작한다.
[이, 이런!]
[안 돼!]
흡혈귀들이 죽기 살기로 달려들었다. 아예 몸으로 광선을 막아서기 시작한다. 그 처절한 모습에 잠깐 유혹이 들었다.
'돌격할까?'
전탄 발사가 파괴적이긴 하지만 관통력은 약하다. 가장 확실하게 상대를 처리하는 방법은 역시 돌격이다. 전력으로 돌진하여 모든 힘을 실어 복수의 검을 내리긋는 것.
하지만 꺼려졌다. 김현은 멸망왕에 저장된 모든 혼력을 털어 넣었다. 저택에는 전혀 접근하지 않고 원거리 공격만 퍼부었다.
저택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방어막과 흡혈귀들만으로는 방어하기 어려웠기 때문.
반격이 날아오지 않는 게 이상하긴 했다. 외부 방어 장치 정도는 있는데 모조리 침묵 중. 당장이라도 돌격하고 싶은 마음을 꾹 억누르며 공격을 했다.
[나도 도울게!]
[저 왔습니다. Mr. 김!]
[오랜만입니다. 김 사령관님.]
[인공 지구가 편하기는 편하네요. 저도 자유 통행권을 얻을 수 있을까요?]
이때쯤 동료와 동맹 각성자들이 속속 참전했다.
김애경이 멀리서 멸망포를 쏘아댄다. 파괴력으로 따지면 멸망왕에게 비교할 수 없으나 관통력만큼은 대단했다. 멸망포가 저택을 직격할 때마다 깊고 깊은 구멍이 생겼다.
피터도 빛의 비를 뿌리고, 에일리가 거대한 해일을 만들어 저택을 휩쓸었다. 어느새 차오웨이가 날아와 불의 새로 저택을 유린하고, 무함마드도 번개룡을 소환한 다음이었다.
신필종이나 박준 같은 대한민국 각성자도, 멸망포 비슷한 극대파멸력을 다루는 리아도 보였다.
심지어 알렉산더와 닉까지 참전했다. 저택은 공격하지 않고 흡혈귀만 공격하는 것이 노림수가 뻔히 보였으나 그냥 넘어갔다. 지금은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판이니.
[이럴 수가, 이럴 수가……]
흡혈귀 하나가 멍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본다.
핏빛 눈이 김현이 아닌 다른 각성자들에게 고정되어 있다.
[왜, 의외인가 보지?]
[네놈!]
저택을 돌아보는 흡혈귀.
무너지기 직전이다. 흡혈귀들이 무엇을 꾸몄든 이제는 실패로 돌아갔다.
[흥. 이겼다고 기고만장해하지 마라. 지금부터 시작이니까. 조만간 지옥이 네놈을, 네놈들을 찾아갈 것이다!]
지옥?
의문을 표시하려는 찰나 흡혈귀가 혀를 빼어 깨물었다. 그게 무슨 술식의 발동 조건이라도 되는지, 흡혈귀가 한 줌 핏물이 되어 쭈욱 날아갔다.
저 뒤에 있는 흡혈귀 저택을 향해서.
이 흡혈귀만이 아니다. 다른 흡혈귀 모두 마찬가지였다. 다들 핏물이 되어 사라진다. 막 심장을 부수고 성혼을 취하려던 알렉산더와 닉만 닭 쫓던 개 처지가 되었다.
"젠장!"
알렉산더가 침을 뱉는 것이 보였다.
이때, 갑자기 모골이 송연해졌다.
전신의 솜털이 올올이 일어선다.
백라왕과 흑인왕을 직접 대면했을 때 이후로는 처음 느끼는 감각. 아니, 태어나고 나서 처음 느끼는 맹렬한 위기라고 해야겠지.
당장 추진 장치를 분사하여 물러섰다.
"후퇴! 다들 후퇴하세요! 위험합니다!"
아울러 모여 있는 각성자 전원에게 경고.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김애경이었다. 보물, 용왕 날개를 발동하여 급히 몸을 뺀다. 그걸 보고 에일리와 서경태도 빠르게 뒤로 돌아왔다.
"후퇴! 후퇴!"
"뒤로 빠져!"
이쯤 되자 다들 이변을 눈치챘다.
최대한 빠르게 후퇴한다. 여기 있는 모두가 최소 6성 각성자이니만큼 속도가 아주 빨랐다. 말 그대로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
그러나 흡혈귀들이 만든 함정은 이렇듯 후퇴하는 정도로는 피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팟!
터지는 붉은 섬광.
무형의 파장이 인근을 휩쓸었다.
모든 생명체를 훑고 지나간다. 순식간에 지평선 너머까지 질주하여 사라지는 파장.
둥!
김현의 심장이 크게 한 번 뛰었다.
"어?"
"뭐야?"
각성자들이 어리둥절하여 자기 심장을 확인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확실한데 아무 이상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
김현만 알고 있었다.
흡혈귀들이 무슨 짓을 한 건지.
'혈왕의 입맞춤이잖아?'
사신의 표식과 비슷한, 괴물들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물건이다. 예전에 김현이 4성 떠돌이들을 유인하려고 쓴 적이 있지.
인제 와서 이걸 왜?
현지종 각성자를 암살하기에 좋다고 하나 그것도 하위 등급일 때다. 5성만 되어도 잘 당하지 않았다. 뭔가 노림수는 있을 텐데 얼른 감이 잡히질 않았다.
"끝난 겁니까?"
"예, 끝났습니다. 모두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거야 원……"
멀찍이서 흡혈귀 저택이 있던 곳을 살피는 각성자들.
아무것도 없다. 항상 주위를 맴돌던 탁한 혼력마저 사라져 청량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저한테 빚진 겁니다."
차오웨이가 악의 없는 웃음을 던진다.
김현은 찾아온 각성자마다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다녔다.
"모두 감사드립니다. 보답은 확실히 하지요."
"기대하겠습니다."
"나중에 뵙지요."
짧은 시간 수백 명도 넘는 사람이 모인 것치고는 다소 싱거운 감이 있었다. 차라리 그게 다행이다. 정말 재앙으로 번졌으면 큰일이 났을 테니.
모가디슈로 돌아온 김현 일행.
혈왕의 입맞춤은 잠시 뒤로 미뤄두었다. 때마침 중요한 정보가 입수되었기 때문이다.
엘페리아와 드윌레를 비롯한 유명계의 복속 차원으로 보냈던 멸신갑.
그것이 드디어 영혼의 업에 대한 단서를 찾아 보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