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8
우화등천 -1-
"긴장할 것 없어. 잘 될 거야."
"후우, 그렇겠지?"
김애경은 잔뜩 긴장한 모습이었다. 전에 없이 전신이 경직되어 있었다.
그건 다른 동료들도 비슷했다. 자기들이 승급하는 것도 아니면서 안절부절 못하고 돌아다녔다. 김애경이 오히려 살짝 미소 지으며 위로해준다.
"잘 기다리고 있어. 끝나면 파티하자."
"누나 다음은 내가 할 거야."
"너는 그 동안 휴가나 잘 다녀와."
"지, 진짜 도전하려고요?"
"그럼. 난 개구리처럼 맥없이 삶아질 생각은 없거든."
김현은 김애경을 한쪽으로 이끌었다.
지금 일행이 있는 곳은 인공 지구의 중심.
남극에서 직선으로 파고내려온 참이다. 정확히 말하면 처음 만들 때부터 통로를 뚫어 놓았다. 언젠가 이 날이 오면 쓸 수 있도록.
일행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그들의 시야에 환하게 타오르는 인공 태양이 들어온다. 하나도 아니고 수십 수백 개가 달과 비슷한 은은한 광선을 흩뿌리고 있었다.
"누나 우화(羽化)에는 저것들의 힘이 필요해."
"알아."
우화.
6성 승급을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다 하여 탈각이라 이름 붙인 것처럼 최근에는 8성 승급을 우화라고 불렀다. 어떤 사람은 우화등선(羽化登仙)이라고도 했고, 또 어떤 사람은 살짝 비틀어 우화등천(羽化登天)이라고도 했다.
"그럼, 다녀올게."
탁.
김애경이 가볍게 몸을 날렸다. 성게알 가시처럼 돋은 인공 태양 사이를 유영하여 최초의 핵 쪽으로 다가간다.
손을 뻗는 김현.
인공 지구가 그에 반응했다. 미리 설치해둔 거대한 수정관이 쩌억 입을 벌렸다. 김애경을 삼킨 다음 최초의 핵에 접속하여 단단히 들러붙는다.
그 주변으로 또 하나의 아차원 공간이 펼쳐진다. 김현이 재생할 때 썼던 시간 왜곡 아차원이다. 저 안에서 김애경은 길고 긴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다.
"형, 잘 되겠지?"
"응. 당연하지."
"형이 그렇게 말하니까 그래도 마음이 놓인다."
"누나라면 잘 할 거야."
8성은 어렵다. 대단히 어렵다.
그래도 원 역사에 기록된 애경 장군이라면 8성까진 나아갈 거란 믿음이 있었다.
김현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인류 저항군이 쌓았던 모든 지식을 활용했고, 새롭게 알아낸 영혼의 업에 대한 지식도 써먹었으니……
'문제는 이 사람들인데.'
피터 말고는 모두 8성 도전에 대한 의지를 피력했다. 거기 필요한 준비도 다 해놓았다.
단 8성은 단순한 영육 개변으로는 힘들다. 차라리 종족 합성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단순히 한 종족의 구성 요소를 섞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반대되는 다른 종족도 구성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천상계와 악마계, 광명계과 암흑계, 해성계는…… 무형계도 좋고 혼돈계를 섞는 것도 괜찮지. 시원계도 고려해 볼 말 해.'
사실 김애경도 그랬다.
6성 탈각 시의 환골탈태와는 성격이 조금 달랐다. 당시에는 분자 단위로 부쉈다가 재구성했다면, 지금은 물질적인 한계를 넘어 순수한 영체로 만들어야 한다.
무협 소설에서 잘 나오는 원영신을 만든다고 생각하면 쉽겠다.
거기 필요한 힘은 인공 지구가 공급할 것이다. 속성은 배치된 성혼이 설정한다. 견본 삼아 볼 거신계와 시원계의 고위 외계종도 놓여 있다. 중요한 것은 영혼과 육체를 합일하는 그 불가능한 일을 김애경이 해내겠느냐는 점.
'믿어야지.'
다행히 원 역사 김애경의 후배 격인 8성 각성자의 수기를 김현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걸 모호한 깨달음의 형태로 뭉그러뜨려 놓았다. 김애경이 힘들 때마다, 포기하려 할 때마다 인공 지구가 자동으로 전해주게 된다.
이 모든 것을 다 감안하여 성공 확률 50%.
낮다면 낮고 높으면 높은 수치. 김현은 김애경이 반드시 이번 일을 성공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형은 양도 의식 치렀다고 했죠?"
"응. 이상하게 실패하더라."
"왜 그럴까요?"
"이미 한 번 써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양도 의식으로 업을 쌓으면 김현도 9성에 도전하는 게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에 기갑계와 충왕계의 복속 차원에 한 번씩 다녀왔다. 생존자를 만나 양도 의식을 치렀으나 실패. 업이 모이려 하다가도 김현이 무슨 시도를 하든 덧없이 흩어져 버렸다.
덕택에 기갑계와 충왕계와의 관계만 악화되었다. 지구의 거점에서 관리자가 모가디슈를 찾아온 것. 불사계와의 일전이 코앞에 있어서인지 점잖이 경고만 하고 돌아갔다.
'난 우주적 관점에서도 어린아이니까……'
22세기에서는 사후 세계에 대한 진실이 어느 정도 밝혀졌다.
무한의 윤회.
죽은 영혼은 거대한 운명의 수레바퀴에 들어간다. 대부분은 환생하는데 그 과정에서 거치는 것이 유명계에서 보았던 명천의 우물이었다. 자연히 대부분의 영혼은 이 무한 차원계와 나이 먹은 만큼 나이를 먹었다.
그 관점에서 따지면 김현은 영혼의 나이도 1살이 안 됐다. 업이 쌓일래야 쌓일 수가 없었다.
"나가자. 할 일이 많아."
"전 언니 조금만 더 보다 갈게요."
"잘 보이지도 않는데…… 그렇게 하세요."
요즘에는 6성과 7성 승급을 원하는 각성자가 엄청나게 많다. 종족 변환된 각성자가 얼마나 변할 수 있는지 밝혀져서 더 그랬다.
에일리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들었어요? 카를로스 재판일이 오늘이래요."
"아, 그랬습니까? 몰랐습니다."
"어차피 항소심 가겠지만, 미국 역사 상 유래 없는 긴 징역형이 떨어질 거란 예측이 대부분이에요."
"하긴 죄질이 나쁘긴 하죠."
"나쁜 정도가 아니에요. 카를로스가 불과 몇 달 동안 블러드 공작에게 팔아넘긴 사람만 몇 명 인 줄 알아요?"
"글쎄요. 요즘 제가 신문을 볼 시간이 없어서…… 하룻밤에 100명씩 잡으면 3천 명 정도 아닐까요?"
"호호호, 정확히 12355명이래요!"
"예? 그게 가능한 수칩니까?"
카를로스가 노예 매매를 한 기간이 대충 두 달이 조금 넘는다. 그 짧은 기간 동안 만이천 명이나 팔아넘겼다고?
여기에는 김현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듣고 있던 피터와 서경태도 마찬가지였다.
"에일리, 그게 진짜야?"
"헉! 나 가는 사이트에서 1만 명 넘는다는 소린 들었는데 1만 2천 명이나 돼?"
"진짜야. 이번에 장부 발견됐어."
"하, 1만 2천 명이라니……"
"캐러밴이 그렇게 많았어?"
"많지. 멕시코만 가도 치안이 안 좋은데? 거긴 공권력 다 붕괴하고 마약 카르텔들이 왕 노릇 하고 있어."
에일리가 김현을 힐끔 쳐다본다.
멕시코가 그렇게 된 것에는 김현에게도 일부 원인이 있었다. 멕시코의 한 마약 카르텔 보스가 김현의 동맹 각성자 중 하나였으니까. 차오웨이나 무함마드에 비하면 존재감이 떨어지지만, 7성 각성자가 된지 오래였다.
"이번에 브라질이랑 아르헨티나에서도 7성 각성자가 생겼으니 좀 나아질 겁니다. 미국도 그렇고요."
"남미에 그 나라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리고 후안은 민간인한테는 관심이 아예 없어요."
"쩝."
"그나마 지구 상에 새로운 전쟁은 없으니까 그게 다행이죠."
김현이 만든 차원 전장은 제법 여기저기서 쓰이고 있었다.
가장 많이 쓰인 곳은 바로 중국.
차오웨이가 반대편 각성자들에게 차원 전장에서 모든 은원을 해결하자고 공개적으로 제안했다. 어차피 주석도 암살 당했겠다, 각성자들은 차오웨이의 제안을 받아들여 차원 전장에서 거세게 맞붙었다.
결과는 차오웨이의 승리. 지금은 차오 회장이 중국의 모든 요직을 장악했다.
이외에도 소소한 분쟁이 차원 전장을 통해 해결되고 있었다. 각성자 피해는 제법 나는 편이지만 적당한 선에서 멈추는 중. 무엇보다 민간인 피해가 없으니 차원 전장을 만든 보람이 느껴졌다.
"저기, 카를로스 재판 보러 갈래요?"
피터가 몸을 들썩였다.
가만히 머리를 젓는 김현.
"난 바빠서."
"나도."
"나중에 인터넷으로 보면 되지."
"쳇."
피터가 볼을 부풀린다.
김현은 조금 염려 섞인 얼굴로 피터를 보았다.
어째서인지 요즘 들어 영 집중하지 못한다. 틈만 나면 밖으로 나돌려고 했다. 인공 지구의 관리에도, 6성과 7성 각성자 승급에도 열의를 보여주지 않았다.
현실 도피적 경향이라고 할까. 특히 8성 우화를 언급할 때 가장 그랬다. 어떻게든 거부하려 하고, 화제를 돌리려고 했던 것.
'강제로 시도하게 할 생각은 없는데…… 차라리 사브리나를 정규 인원으로 올릴까?'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사브리나도 7성을 달성했으니까. 업은 아직 쌓지 못했지만 능력치는 거의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 8성에 오를 자격이 된다는 뜻.
'하여간 대단하다니까.'
사브리나의 초고속 승급은 모가디슈에 시사하는 바가 컸다. 옛 이슬람 가르침은 이제 구태의연한 것으로 취급을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힘없이 이리 치고 저리 치던 소녀가 지금은 전 세계에서 50위 안에 드는 강력한 각성자가 되었으니까.
"그럼 저 혼자 갈게요."
"휴가라 생각하고 잘 다녀와. 아, 그리고 너한테 8성 강요하지는 않을 거니까 자꾸 그러지 않아도 돼."
"누, 누가 뭐라고 해요?"
"지금까지 같이 해준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해. 네가 무슨 결정을 내리든 존중할 거야. 아, 우리와 인류를 배신하는 것만 빼고. 외계종한테 붙으면 바로 회수 조치 들어간다."
피터의 눈이 흔들렸다. 지금까지 몇 번 말하긴 했으나 이렇게 확정적으로 단언한 것은 처음이기 때문.
서경태와 에일리가 말가니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경태 너도 그렇고 켄트 양도 마찬가지입니다. 가급적 저와 함께 끝까지 갔으면 하지만, 꼭 8성이 되지 않더라도 인류를 위해 공헌할 방법은 있어요. 7성도 낮은 등급이 아닙니다. 각 차원계에 7성 등급 외계종은 2, 3백 마리 정도밖에 안 돼요. 그 정도면 충분히 자기 역할을 합니다."
"자기 역할을 한다고는 해도, 세계 정상은 아니잖아요. 그렇죠?"
"그건 그렇죠."
"됐어요, 그럼. 전 8성까지는 올라가볼래요. 어째선지는 모르겠지만 Mr. 김 믿고 따라가면 거기까진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요."
"고맙습니다."
9성은 김현도 장담을 못한다.
완전한 미지의 영역.
요즘 들어서는 9성에 도전하지 말고 8성에 멈추는 게 좋지 않느냐는 생각까지 들었다.
'9성 1명만 있으면 완전히 목표 달성인데……'
9성은 완벽히 신화의 영역. 단순히 행성 거죽만 훑는 수준을 넘어 우주 전체에 개입하는 것도 가능하다.
대신 그만큼 초월적이므로 성혼 다툼이니 뭐니 하는 것에서 손을 떼게 된다. 가만히 앉아 존재감만 드리우는 다른 차원계의 9성 외계종이 그러하듯이.
'어쨌든 거의 왔어.'
8성 각성자 십여 명만 확보해도 다른 차원계가 함부로 대하지는 못한다.
조금만, 조금만 더 가자.
시공 회귀를 해가며, 스스로를 공양해가며 염원했던 단 하나의 소원이 이루어지기 직전이다.
"형, 나는 8성 도전할 거니까 말리지 마."
서경태가 어깨를 펴고 자기 자신에게 다짐하듯이 말했다.
눈이 차갑게 번뜩이고 있었다.
"그래, 나도 도와줄게."
"고마워. 난 원수를 갚을 때까지 절대 멈추지 않을 거야."
"지금은 바빠서 힘들지만 언젠가 같이 충왕계 다녀오자. 놈들한테는 나도 빚이 조금 있어서."
"하하, 말이라도 고마워."
아버지를 눈앞에서 잃어야 했던 서경태.
아직도 그 원한을 잊지 않고 있다.
김현도 마찬가지.
사실 원한으로 따지면 김현이 더 깊다. 전생의 가족들 모두가 충왕계에게 유전자 조작을 당하고 태어나 강화 인간 병사로 활용당하다 죽었으니까. 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이 충왕계와 얽혀 있다고 봐야겠지.
어쨌든 복수라는 강력한 동인이 있는 한 서경태는 끝까지 따라올 성 싶다. 8성 우화에도 도움이 될 테고.
이때쯤 인공 지구 표면에 도착했다. 바로 자기들 집무실로 돌아가 일상을 시작한다.
그렇게 3일이 지났다.
인공 지구 전체가 한 차례 옅은 빛을 뿌렸다. 길 가던 사람들이 어리둥절해서는 땅을 쳐다본다.
"어?"
"뭐였지?"
상황을 제대로 안 것은 김현의 일행이 전부.
당장 인공 지구 내부로 들어갔다.
"누나!"
"성공했구나!"
"축하해, 언니!"
"축하합니다. Miz. 김!"
김애경이 당당하게 걸어나왔다.
탈각 이후 당당해졌던 체격은 원래대로 돌아갔다. 피부도 평범하게 변했다. 예전의 백옥 같던 피부는 사라졌다.
다만 눈빛이 특이해졌다. 별빛처럼 심원하게 변한 것. 보고 있으면 빨려들어갈 듯 기이한 느낌을 풍긴다.
"그림자를 잃은 소감이 어때?"
김현이 씩 웃으며 물었다.
그러자 다들 깜짝 놀란다. 아닌 게 아니라 사방에서 비춰대는 인공 태양에 그려지는 그림자가 김애경 혼자 없었기 때문.
김애경이 김현처럼 씩 웃었다.
"만들면 되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작은 그림자가 생겼다. 이질감을 찾아볼 수 없어 더 기이한 광경이었다.
입을 벌리고 김애경을 쳐다보는 일행.
서경태가 주먹을 불끈 쥐고 앞으로 나섰다.
"이제 제 차례죠?"
"벌써 하게?"
"언제 불사계가 쳐들어올지 모르잖아요. 혈왕의 입맞춤도 그렇고."
"너무 서두르는 것 같은데……"
"걱정 마세요. 저도 반드시 성공할 거예요."
몇 번 더 말렸으나 서경태는 옹고집을 부렸다. 결국 서경태의 8성 우화를 시작했다.
타성에 젖었던 것일까. 아니면 지금까지 잘 되었으니 앞으로도 잘 될 거라고 안이하게 생각했던 것일까.
모든 적공이 헛되었다.
서경태가 8성 우화를 시작하고 하루도 지나지 않아, 인공 지구가 빛을 잃고 싸늘하게 식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