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헌터사-170화 (170/200)

# 170

우화등천 -3-

귀중한 자원이라니!

혐오감이 드는 것과 동시에, 구석에 봉인되었던 기억이 올올이 풀려나온다.

기억이라고 하기보단 자료, 기록이라고 해야 할 것들.

혼흔(魂痕).

서경태가 남긴 혼력을 일컫는 단어였다.

반신으로의 우화가 실패한 고위 각성자의 영혼과 육체, 성혼이 모두 녹아든 것이니만큼 그 가치가 크다. 각성자가 생전에 지녔던 성혼을 추출하는 것도 가능하고 가공하여 강력한 보물을 만들 수도 있었다.

가장 유용하게 쓰는 것은 역시 8성 우화 때. 혼흔을 첨가하면 다른 각성자의 우화 성공 확률을 높인다고 되어 있었다. 같은 성향이면 좋겠지만 꼭 그럴 필요는 없고.

"빌어먹을."

다시 욕설이 튀어나온다.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 또한 자신을 들여다본다고 했던가.

22세기의 인류 저항군은 외계종과 마찬가지로 괴물이 되어 있었다. 인간이라는 자원을 아낌없이 갈아 넣으며 투쟁하는, 악에 받친 괴물.

캡슐에 손을 대고 몸을 부르르 떨자 이세희가 의아하다는 눈길을 던진다.

"김현 님, 왜 그러세요?"

"아니, 아닙니다."

21세기의 사고방식으로는 못 할 짓이다. 어떻게 보면 동료의 시체나 다름이 없는데 이걸 원료처럼 활용하다니, 완전히 시체 능욕 아닌가.

그러나 이것 하나 때문에 또 동료를 잃는다면?

이세희나 에일리 중 하나가 또 소멸하여 혼력 덩어리가 되어 버린다면?

안 될 말이다, 안 될 말.

'차라리 동맹들 먼저 시도하게 할걸.'

이런 생각을 했다가 소스라치게 놀라 버렸다.

인간 같지 않은, 괴물이나 할 짓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왜 이 기억이 이제야 활성화된 걸까? 누군가 봉인이라도 건 듯이.

[가치 판단.]

누군가 대꾸하듯이 글자 몇 개가 삐걱삐걱 머릿속으로 떠오른다.

애석한 와중에도 웃음이 나왔다.

'철저하시고만.'

자신의 소멸을 계획하고 실행하던 그 와중에도 이런 안배를 하다니, 역시 난 놈은 난 놈이고 대단하긴 대단하다.

그런데 왜 굳이 봉인을 했을까? 처음부터 풀어놨으면 잘 활용해서 동맹 각성자들을 잡아먹고 동료들을 키웠을 텐데.

'아.'

김현의 마음이 싸늘하게 식었다.

가치 판단, 여기에 모든 해답이 들어 있었다.

옛 김현은 현 김현이 치열하게 고민하고 결정하길 바란 것 같다. 그러니 숨겼겠지. 옛 김현은 강력한 투사를 원했지, 꼭두각시를 원하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동료들이 희생되게 내버려 둔 건 너무하잖아……'

이것은 간극이다.

22세기를 살다 왔던 옛 김현에게는 희생이 당연했다. 동료를 위해 영육을 바치는 일이 22세기에서는 비일비재했다. 반대로 산 자들은 죽은 자들의 유산을 딛고 올라 외계종과 싸웠다.

'마음을 열었었잖아. 그런데 어째서……'

아니다. 실은 그렇지가 않다.

김현이 마음을 열고 받아들인 건 김애경과 가족들이 전부. 물론 동료들도 중요했지만 가족만큼은 아니었다. 최악의 경우라면 그들마저 희생시킬 수 있었다.

본인을 희생하여 공허를 떨쳐내기까지 한 인물이니 더 말해 무엇할까.

"괜찮아요?"

"아, 네.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라서요."

"잊고 있던 거요?"

"네. 선생님한테만 말할 수는 없고 누나랑 사브리나 있는 곳에서 말할 게요."

"도대체 뭔데요?"

"아직은 비밀입니다."

서경태의 혼흔을 쓸 것이냐, 말 것이냐.

김현의 마음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사실 옛 김현이나 현 김현이나 거의 비슷한 사람이다. 완벽히 동일 할 수는 없어도 같은 유전자에 감정과 기억을 공유하니까. 그런 사람이 다른 결론을 내리기란 어렵다.

"할 말이 뭐야?"

김애경이 피터를 끌고 왔다.

굳이 올라가서 비밀회의를 열었다. 한철군과 한스는 뺐지만 사브리나는 참석했다. 앞으로 서경태의 빈 자리를 채울 테니 자연스러운 일.

"저 이제 가면 안 돼요?"

피터는 아까부터 좌불안석이다.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발을 동동 굴렀다.

에일리가 인상을 팍 긁었다.

"너까지 자꾸 신경 쓰이게 할래?"

"그래도……"

"가고 싶으면 가라."

툭, 내뱉듯이 던지는 김현.

시선이 집중된다.

"네?"

"야, 지금 뭐라고 했어?"

"농담이시죠?"

"다시 말하죠. 피터, 가고 싶으면 가. 기꺼이 보내주겠다. 지금까지 네 배당도 다 챙겨주지. 아, 시간은 조금 걸리겠지만 1년 내로 모두 정산해주마."

"지, 진심이세요?"

"야!"

"누나. 평안 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인데 이래서야 뭘 할 수 있겠어? 이쯤에서 서로 갈 길 가는 게 좋지."

"그래도……"

"마음은 이해해. 그래도 보낼 사람은 보내주자.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만두고 싶은 분은 말씀하세요."

다른 사람이라고 해봐야 이세희와 에일리가 전부. 사브리나는 김현에게 무한한 충성을 맹세했고 김애경은 운명 공동체이니까.

그 둘을 한 번씩 보자 이세희가 섭섭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전 왜 보세요? 김현 님이 절 구해주셨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 같이 하기로 했잖아요. 그리고 사람을 이렇게 만드셨으면 책임을 지셔야죠. 저 좋다는 남자도 많았는데."

짐짓 쾌활하게 날개를 들어 보이는 이세희.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하하하."

"Mr. 김, 저도 여기까지 와서 튈 생각은 없어요. 흥, 저는 저딴 너드 새끼처럼 겁쟁이가 아니라고요."

오랜만에 입에 담는 단어, 너드.

피터가 목을 자라처럼 움츠린다. 에일리가 바닥에다가 침을 뱉었다. 서경태와의 죽음으로 인한 균열이 더욱 커지는 장면이었다.

"고맙습니다. 단, 피터. 너한테 조건이 하나 있다."

"뭐, 뭐죠?"

"인류를 배신하지 마라. 그랬다간 지옥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네 성혼을 회수하겠다. 그것 말고는 없어. 자유롭게 살아. 너무 심한 범죄는 저지르지 말고."

"저, 정말이죠?"

"그래, 가라. 지금."

김현은 손을 까딱까딱 흔들었다. 피터가 엉거주춤 일어나더니 눈치를 본다. 아무도 잡으려고 하지 않자 비로소 빠르게 도망쳤다.

에일리가 욕설을 퍼부었다.

"너드 새끼, 개새끼, 창녀 자식 같은 새끼…… 가서 엿 같은 지옥에나 떨어져라!"

물론 피터는 이걸 듣지 못했다. 회의실을 벗어나는 즉시 무전기도 벗어 던지고 우주의 빛 성혼을 활용해 지구로 돌아갔으니까.

에일리가 진정하고 자리에 앉자 김애경이 묻는다.

"그렇게 빨리 피터를 내보내야 할 이유가 있었어? 잘 다독여서 끌고 가도 좋은데."

"갈라서야 할 사람은 빨리 갈라서는 게 좋아. 길이 다른 건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지금도 충분히 무리하고 있는데 새로 변수를 끌어안을 생각은 없어."

"어쩌면 광명계에게 포섭당할지도 몰라."

"글쎄. 피터 성격을 보면 그럴 것 같진 않아. 광명계에서 접촉하면 도망치겠지. 지금처럼."

"하긴."

"그건 그렇고, 여기 있는 사람들과 의논할 게 있어. 다른 분들도 잘 들어주세요. 사브리나?"

"네! 사령관님!"

"너도 의견 있으면 주저하지 말고 얘기해라. 어떤 내용이라도 좋다. 넌 지금 옛날의 그 힘없는 난민 소녀가 아니라 우리 동료로서, 어엿한 7성 각성자로서 이 자리에 있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지?"

"예, 사령관님!"

인정받았다는 생각 때문일까.

사브리나의 얼굴에 은은히 홍조가 맴돌았다.

동료들도 별말이 없었다. 오히려 당연하다는 태도. 사브리나는 예전부터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입증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계속 변죽을 울려?"

김애경이 눈살을 찌푸렸다. 김현이 심상치 않은 얘기를 꺼낼 거라는 사실을 눈치챘나 보다.

"중요한 말이지, 중요한 말."

"뭔데?"

"경태가 남긴 거, 봤지?"

"뭘 남겼…… 아, 그거. 그런데 그게 왜?"

"그걸 우리가 쓸 수 있어."

"쓴다고?"

잠깐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나 보다. 김애경이 조금은 멍한 눈으로 김현을 주시했다.

이해하는 데 걸린 시간은 거의 찰나에 가까웠다. 김애경이 분노하여 탁자를 내리쳤다.

꽝!

단단한 대리석 탁자가 가루가 되어 흩어진다.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호랑이처럼 포효하는 김애경.

"네가 말한 그건 경태 시체나 다름이 없어! 불태워서 날려 보내든, 매장하든 해서 장례를 치를 생각해야지 그걸 가지고 뭘 하겠다고? 경태가 어떤 앤데! 우리를 위해서, 사람들을 위해서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누나."

"아, 왜!"

"누나니까 솔직히 다 까놓고 얘기할게. 죽은 경태가 중요해, 여기 살아 있는 동료들이 더 중요해?"

"그건 또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나도 잘 몰랐는데, 경태가 남긴 거…… 흔적이니까 혼흔이라고 할게. 혼흔을 보고 깨달았어. 내가 봤던 미래에서도 나왔던 거야."

그 말에 흥분을 조금 가라앉힌다. 여기까지 온 것 모두가 김애경이 알기로는 김현의 미래 예지에서 비롯되었으니.

"혼흔을 쓰면 8성 우화 성공 확률을 높일 수 있어."

"그래서?"

"그래서라니?"

"그래서 시발, 너는 경태 시체를 이용해서 우화를 하자는 거야? 야! 그건 너무 하잖아!"

전에 없이 격동하는 모습. 생전 안 하던 욕까지 하는 걸 보면 화가 나긴 많이 난 모양이다.

말이 안 통하겠다. 김애경 대신 이세희에게 화살을 돌렸다.

"이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는……"

"선생님 본인이, 잘 상상이 안 가면 옆에 앉은 켄트 양이 우화 도전하다가 실패했다고 생각을 해봐요. 제가 알기로 저걸 쓰면 20% 정도 성공 확률이 높아집니다. 그 20% 때문에 사람 생명이 왔다 갔다 해요."

"20%……"

"솔직히 저거 없으면 확률은 반반입니다. 50%와 70%의 차이는 커요. 두 번에 한 번 성공하느냐, 세 번에 두 번 성공하느냐의 차이에요. 선생님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저는, 저는……"

이세희가 울 듯한 표정을 짓는다.

캡슐이 있을 바닥 쪽을 보았다가 김현을 보고, 잔뜩 화가 난 김애경을 봤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역시 안 되겠어요! 전 반대에요!"

"그렇습니까?"

이세희는 그럴 줄 알았다. 평소 서경태와 누나 동생하는 사이에, 간호사로서의 윤리 의식도 있으니.

말없이 에일리를 본다. 에일리가 가래침을 탁 뱉더니 말했다.

"다들 팔자 좋네요? 전 찬성이에요."

"에일리!"

"흥, 당연한 거 아니에요? 산 사람은 살아야죠. 그리고 여기 있는 사람들이 죽을 때마다 멸망의 시계 시간이 앞당겨지는 건 알고 있죠? 다들 배가 불렀어. 지구를 엘페리아나 드윌레 꼴로 만들고 싶어요?"

신랄한 지적.

김애경과 이세희의 얼굴이 흐려졌다.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가만히 있던 사브리나도 끼어든다.

김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용기를 얻고 거침없이 말했다.

"두 분께는 죄송합니다만 저도 사령관님 의견에 찬성합니다. 시체를 이용해 뭔가를 하는 행위…… 혐오스럽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하지만 전 이미 비슷한 일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너……"

"사령관님께서, 그리고 다른 분들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까지 제 삶은 지옥이었습니다. 돌아가신 서 장군님도 그런 세상을 만들지 않기 위해 싸웠다고 알고 있습니다. 서 장군님께는 죄송하지만, 쓸 수 있는 건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애경이 복잡한 눈으로 사브리나를 쳐다본다.

난민으로 떠돌던 때의 사브리나는 무슨 일을 겪었을까. 비록 말은 하지 않고 있으나 김현이 보았던 강간 정도가 끝은 아닐 것이다. 당시의 소말리아는 말 그대로 지옥이었으니까.

"그래도, 경태를 생각하면 그럴 수는 없어."

"그 말에는 공감합니다. 하지만 도덕과 윤리는 결국 생존이 담보 되어야 챙길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우린 살아 있고, 살아남을 거야."

"아직은 아니지요. 시장님은 못 느끼십니까? 저는 항상 제 목에 들어온 칼날을 느끼며 사는데요."

사브리나가 자기 목을 한 번 쓰다듬는다.

처량하면서 애처롭고, 바짝 독이 오른 듯한 기색에 김애경이 말을 잊었다.

남은 것은 결정뿐.

"시발!"

김애경이 발을 한 번 크게 굴렀다.

남극의 탑이 거세게 진동한다. 그래도 이성을 잃진 않았는지 탑이 무너지진 않았다.

"하고 싶은 대로 해!"

그 말만 남기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린다.

기권.

김현의 시선이 이세희를 향한다. 이세희가 손을 꼼지락거리더니 대답했다.

"솔직히 전 반대에요. 다른 사람들 생각이 그렇다니 끝까지 반대하진 않겠지만, 대신 제가 우화할 때는 쓰지 않을래요."

"선생님 뜻도 존중합니다. 그렇게 하지요."

"하아! 경태가 유서 써놨다던데 그것부터 확인해 볼게요."

유서.

여기 있는 모두가 가끔 유서를 쓰곤 했다. 죽을 거라고 생각은 하지 않았으나 죽음이 옆에 있는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서경태의 유서에는 별다른 내용이 없었다. 농담 섞어 가며 편지 쓰듯 유서를 써놓았다.

'경태야……'

이깟 유서 한 장이 서경태가 남긴 모든 것이라니, 참 안타깝다.

"시작하겠습니다."

"네."

시간이 없다. 바로 8성 우화를 시작했다.

대상은 에일리.

서경태의 혼흔을 투여했다. 김애경은 못마땅한 얼굴이었으나 애써 외면했다.

닷새 만에 성공.

"힘들었어요……"

에일리가 파리한 얼굴로 기어 나와서는 바로 기절했다.

다음 차례는 누구일까?

이세희가 나섰다.

"제가 먼저 할 테니까 실패하면 제 혼흔은 사브리나한테 쓰세요."

"세희야."

"걱정하지 마. 성공할 거니까."

확률은 반반.

결과부터 말하면 성공이었다.

"저도 갑니다."

사브리나의 마지막 도전.

김현은 초조하게 기다렸다. 사브리나까지만 성공하면 8성 각성자가 다섯이 된다. 8성 각성자 다섯이면 최소한의 자위 능력은 발휘할 수 있었다.

팟!

"성공이다!"

사브리나가 우화에 도전하고 나흘 후, 인공 지구가 파르르 빛나자 김현은 주먹을 불끈 쥐고 환호했다.

솔직히 말해서 이세희와 사브리나 둘 중 하나는 실패할 줄 알았는데 운이 좋았다.

그러나 운이 좋은 것은 거기까지.

조만간 벌어질 거라 생각했던 불사계의 침공은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

김현이 모르는 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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