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헌터사-171화 (171/200)

# 171

역병, V -1-

서울 신촌의 한 편의점.

강석훈은 연신 하품을 했다.

벌써 새벽 3시.

다른 날 같았으면 한창 단잠에 빠져 있었을 시간이다. 그러나 지금은 형광색 옷을 입고 이렇게 형광등 빛이나 쐬는 신세였다.

딸랑!

"어서오세요."

문이 열리자 반사적으로 인사를 한다.

들어온 것은 술에 벌겋게 취한 젊은 남녀. 서로 몸을 더듬으며 계산대로 다가오더니 삿대질하듯 카드를 던진다.

"야, 빨간 거 하나."

"오빠, 나도 하나 사주라."

"으응, 그래야지. 여기 우리 이쁜이 것까지 두 개 줘."

"예, 손님."

빨간 거?

처음에는 이게 뭘 말하는 줄도 몰랐지. 강석훈은 능숙하게 담배 판매대에서 담배 두 종류를 꺼내 내밀었다. 남자가 담배를 받더니 좋다고 여자 몸을 더듬는다.

"아잉, 오빠, 왜 이래."

말로는 싫다고 하면서 뱀처럼 엉겨 붙는 여자.

'어휴, 진상들.'

내색하지는 않는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만 벌써 3년차. 이 정도 진상은 사실 진상 축에도 못 낀다. 진짜 진상들은 따로 있지.

남녀가 거들먹거리며 편의점 밖으로 나갔다. 그제야 강석훈도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아 쉴 수 있었다.

"지친다, 지쳐."

비번일 날에 무슨 고생이냐?

야간 알바 새끼가 문제다. 일이 있으면 미리 얘기를 하던가, 낮 근무에 이어서 밤 근무까지 대체 어떻게 하라는 건지.

점장도 그렇지. 힘든 거 알면 자기가 대타를 뛰던가. 그 여드름투성이 얼굴을 생각하자 저절로 구역질이 치밀었다.

'그만두던지 해야지……'

하지만 시급을 이만큼 잘 챙겨주고 폐기도 양껏 퍼주는 편의점이 또 있어야 말이지. 강석훈은 한껏 투덜거리면서도 여길 벗어나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아주 잘 알았다.

딸랑!

"어서오세요."

잠깐 졸았나 보다.

유리문이 열리며 한 여자가 사뿐 들어왔다.

저 여자……

강석훈은 반사적으로 침을 꼴깍 삼켰다.

몸에 착 달라붙는 검은색 투피스는 그렇다고 치자. 얼굴은 제법 예뻤다. 가장 봐줄 만한 것은 몸매. 들어갈 데 들어가고 나올 데 나온 몸매가 콜라병과 똑같았다.

'미친, 존내 섹시하네.'

보자마자 하물이 빳빳하게 고개를 쳐든다. 아르바이트하면서 예쁜 여자는 많이 봤지만, 이토록 섹시한 여자는 처음이었다. 당장 달려들어 넘어뜨리고 싶을 정도.

그리고 향기……

모호한 어떤 냄새 같은 게 풍겼다. 냄새를 맡자 이성이 차츰 날아간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두 눈에 핏발이 서는 것을 강석훈 본인만 몰랐다.

여자가 강석훈을 보며 웃는다.

"안녕?"

"아, 안녕하세요."

"빨간 거 하나 주세요."

"여, 여기 있습니다."

고작 그거?

다른 걸 달라고 해도 줄 텐데.

편의점의 물건을 다 달라고 해도 그냥 주고 싶은데……

담배를 꺼내 내민다. 여자가 카드를 강석훈에게 주었다. 그러면서 우연처럼 둘의 손끝이 살짝 스쳤다.

"아앗!"

기이한 전율.

나이 스물다섯에 여자와 손이 스친 정도로 이리 놀라는 멍청이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강석훈의 이성은 완전히 날아가 버렸다. 자신도 모르게 여자의 손을 잡고 꽉 잡아당긴다.

버티는 여자.

그 가녀린 체구를 생각하면 정말이지 기이한 일이다.

칭얼대듯 팔을 잡아당기는 강석훈을 보며 여자가 새파란 웃음을 지었다.

"후후, 급하시기는. 처음 만났는데 너무 빠르잖아요?"

손을 뻗어온다.

목덜미를 잡은 여자. 이내 강하게 끌어당겨 강석훈에게 입을 맞추었다.

꿀렁, 꿀렁.

여자의 목이 물을 삼키듯 율동하며 움직였다.

털썩!

잠시 후 여자가 놓아주자 강석훈이 얼굴이 하얗게 변해서는 제 자리에 주저앉는다.

여자는 퉤 하고 침을 뱉었다.

"흥! 더러운 새끼, 피는 깨끗할 줄 알았더니 더러운 새끼였네."

짐승처럼 일그러지는 예쁘장한 얼굴.

곧 화사하게 변해서는 유혹적인 빛을 풍긴다.

"사냥감은 많으니까……"

붉은 입술.

립스틱을 발라서 붉은 것이 아니다. 언젠가부터 그녀의 입술에 붉은 피가 선연하게 묻어 있었다.

살짝 미소짓는 그녀.

일반인 보다 살짝 뾰족한 송곳니가 드러난다.

흡혈귀?

아니다. 불사계의 흡혈귀는 다른 치아의 3배 길이에 달하는 긴 송곳니를 갖고 있다. 저건 분명히 일반적인 흡혈귀와는 달랐다. 설령 김현이나 다른 판독 계열 각성자가 있어 그녀를 보더라도 이상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종족] 인간 [진영] 지구

그녀의 상태는 정상적이니까.

여자는 편의점을 한 번 훑어보고는 도도하게 걸어가 냉장고에서 제로 콜라 한 캔을 꺼냈다. 그걸 마시며 올 때 그러했듯이 사뿐사뿐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 몇 분 후.

강석훈이 눈을 떴다.

"어, 내가 졸았나?"

조금 전 있었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강석훈.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스마트폰에 머리를 쳐박는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자꾸 침을 삼키고 목을 쓰다듬었다.

"목이 마르네."

정수기에서 물을 따라 마셔보지만 효과가 없다. 갈증이 더 심해지고 있었다.

머리가 뜨겁다.

화장실에 들어가서 세수를 했다.

언뜻 거울에 비치는 얼굴.

기분 탓일까?

송곳니가 조금 뾰족해진 것 같았다……

***

'왜 움직임이 없지?'

동료들을 우화시키는 동안 김현은 그저 놀고먹지 않았다. 유명계 침공을 대비했을 때처럼 온갖 준비를 했다.

친분 있는 각성자들에게 참전 요청을 하고, 인공 지구에 방어 시설을 설치하고, 몇 가지 함정을 파는 것은 물론 동료들이 새롭게 쓸 보물도 만들고……

한편으로는 무법성에서 정보를 수집했다. 불사계의 복속 차원에도 정찰을 보냈다. 그래서 얻은 결론이 불사계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다는 것.

"다른 거점도 조용하다고요?"

"예, 사령관님."

"이거 이상하네요."

흡혈귀 저택은 김현에 의해 철거되었다. 하지만 남은 거점은 조용했다. 얼마 전에는 사절을 보내오기도 했다.

이번 일은 흡혈귀 종족의 독단에 불과하며, 김현과 블러드 공작이 뭘 하든지 중립을 지키겠다고 맹세한 것.

그렇게까지 나오니 어쩌기가 힘들었다. 무리하면 그 거점들도 철거할 수 있겠으나 흡혈귀들의 수작에 대응할 시간이 없어진다. 동료들의 우화 시간도 그렇고.

"뭔가 꿍꿍이가 있을 겁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령관님. 아마 혈왕의 입맞춤으로 뭔가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건 소용이 없어요. 그때 입맞춤 찍힌 사람들은 다 지웠잖아요."

꺼림칙해 한 것은 김현만이 아니다. 확인해 보니 당시 각성자는 모종의 방법을 통해 혈왕의 입맞춤을 모두 제거했다. 흡혈귀들이 애써 함정을 터뜨린 게 모두 수포로 돌아간 셈.

한스가 미간을 찌푸린 채 대답했다.

"흡혈귀들과 오래 거래를 하다 보니 제가 좀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흡혈귀 놈들, 뭐든 일을 할 때면 단편적으로 하는 일이 없습니다."

"단편적으로 하는 일이 없다?"

"뭔가 이중 삼중으로 덫을 치더라고요. 저도 솔직히 말해서 몇 번 당했습니다. 사업가 출신 각성자에 변호사 출신 각성자를 대동한 다음에야 대거리할 수 있었지요."

"일리가 있는 지적입니다."

김현도 아는 사실이다. 비록 22세의 아론이 출생하던 때에는 불사계가 철수한 뒤여서 체화한 지식은 없지만.

"제 생각에는, 혈왕의 입맞춤을 해제하는 것까지 흡혈귀들의 계획에 있었을 겁니다."

"확실히 그렇겠습니다. 그럼, 다음에는요?"

"그것까지는……"

한스가 난처한 얼굴을 한다.

하기야 그 다음 계획은 김현이 유추를 해봐야겠지. 옛 김현의 지식과 기억을 이용해서.

한스를 내보내고 조용히 침묵에 잠긴다. 커피도 한 잔 타왔다. 쌉싸레하면서 구수한 커피 냄새가 김현의 후각을 자극한다.

사실 이런 건 다 필요 없지만 인간이었을 때의 버릇 때문인지 아직도 즐기고 있었다. 오늘처럼 깊이 생각에 잠길 때면 특히 더 그랬다.

'계략, 계략이라……'

혈왕.

입맞춤.

도저히 떠오르는 것이 없다. 발상을 전환하여 근본부터 되짚어 보기로 했다.

'입맞춤을 해제하면 어떻게 되지?'

어떻게 되긴. 근원적인 혼력으로 변하여 흩어지지.

잠깐만.

흩어진다고?

김현의 눈이 반짝 섬광을 토했다.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게 된다.

"설마!"

이렇게 흩어지는 혼력에 뭔가 야료를 부리는 건 쉽다. 실은 굉장히 섬세하고 어려운 일이지만 7성 등급 흡혈귀들이 몸으로 막아가며 시간을 끌어 완성하려고 했던 의식 아닌가. 이 정도는 충분히 하지 싶었다.

문제는 그렇게 흐트러뜨린 혼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매우 적다는 사실. 최소한 김현이나 다른 각성자들 대상으로는 뭘 어쩔 수가 없다. 고위 각성자들의 저항력은 상상을 초월하니까.

중독? 저주? 전염?

다 불가능했다. 여기까지만 생각하면 흡혈귀들이 헛짓했지 싶다.

'목표가 내가 아니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만약에 대량 학살을 염두에 둔다면 더더욱 그렇다.

김현의 머리가 영활하게 돌아갔다.

유명계에게 여섯 개의 복속 차원이 있듯이 불사계에는 여덟 개의 복속 차원이 존재한다. 그것들의 역사를 되짚어 보자 아니나 다를까, 불사계가 과거에 비슷한 짓을 벌인 적이 있었다.

'전염병……'

당시의 세계는 차원의 벽이 굉장히 옹골찼다. 지구와 비교하여 거의 열 배 이상. 그걸 갉아먹으러 불사계는 어떤 것을 퍼뜨렸다.

역병.

흡혈귀와 늑대인간이 밤마다 희생자를 찾아 배회하고, 오래된 해골과 시체가 무덤에서 일어났다. 다른 차원계도 비슷한 방법을 썼지만 불사계의 선점과 강력한 전염성을 이길 수는 없었다. 지금은 소수의 생존자만 남아 성혼을 빨린다고 했다.

"역병, 역병이라 이거지."

흔히 흡혈병이라 불리는 그것.

그럼 오히려 쉽지. 지금 지구에 각성자가 얼마나 많은데. 판독 계열이든 투시 계열이든 각성자에게 걸려서 흡혈귀들이 처단 당하는 것은 순식간이다.

아니지, 아니야.

불사계의 복속 차원이 된 이밀럼과 지구는 확연히 다르다. 이밀럼은 당시에 1, 2성 각성자들이 전부였지만 지구는 고위 각성자들이 넘쳐나니까. 흡혈귀들이 그걸 과연 간과했을까?

"확인해 보자."

당장 손가락을 변형시켜 집무실에 있는 LAN 선에 연결한다.

세계 인공위성에 모조리 접속.

김현의 성혼이 알려진 후 확실히 보안 체계가 복잡해지긴 했다. 미국이나 러시아, 중국 등 몇몇 국가는 안보망을 해킹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런 곳은 그냥 슥 살펴보고는 포기. 오늘 일은 굳이 거기까지 갈 필요는 없으니까.

세계 곳곳을 확실하게 살핀다.

인공 위성으로, CCTV로, 자동차 블랙박스로. 심지어 일부 스마트폰 카메라도 해킹했다.

막대한 정보량이지만 전자 두뇌가 모조리 버텨낸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김현.

흡혈귀가 나타났다면 응당 남았을 흔적이 하나도 없다. 버려진 시체도, 핏자국도, 은밀한 괴소문도, 모두.

심지어 전 세계 경찰 기록을 뒤져봐도 마찬가지. 흡혈귀가 나오면 반드시 실종 사건이 급증해야 한다. 세계 어느 곳을 뒤져봐도 그런 곳이 없었다. 있다고는 해도 미친 각성자나 범죄 조직에 연류된 것뿐.

'잘못 짚은 걸까?'

분명히 이거다, 하는 느낌이 왔었는데……

재차 검색해 본다. 이번에도 흡혈귀의 행방은 찾지 못했다. 나온 것이라고 해봐야 떠돌이 흡혈귀 몇 마리가 전부.

"틀렸나?"

에라, 모르겠다.

정신적인 피로가 어마어마했다. 김현의 합성 육체는 피로를 느끼지 않지만 정신은 어쨌든 인간이니까. 지구 전체를 검색하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의자를 최대한 뒤로 젖히고 눕듯이 앉았다. 이곳저곳을 들여다본다. 그것마저도 싫증이 나서 인터넷을 멋대로 쏘다녔다.

일반인 기준으로 보면 인터넷 서핑 중.

성혼이 성혼인 덕에 검색하는 정보가 엄청났다. 언어도 가리지 않았다. 영어, 중국어, 포르투갈어, 스페인어, 일본어, 러시아어, 한국어 가릴 것 없이 아무 거나 읽어내린다. 그러다가 이상한 게시물을 발견했다.

"이것 봐라?"

제목, 뱀파이어의 키스.

격정적으로 키스하는 한 남녀가 스마트폰에 촬영되고 있었다. 훤칠하고 잘생긴 남자와 못생기고 뚱뚱한 여자의 조합이었다. 그런데 남자 쪽에서 좋아 죽는지 으스러지라 끌어안고는 힘을 주어 쪽쪽 빨아댄다.

요즘 스마트폰 카메라, 좋긴 좋다. 꼴깍꼴깍 움직이는 목울대까지 다 촬영되는 걸 보면. 꼭 음료수 마시는 것 같지 않은가.

영상은 여자가 주저앉고 남자가 어디론가 떠나면서 끝이 났다. 잠시 후 여자가 멀쩡하게 일어난 걸 보면 그냥 흥밋거리로 올렸나 보다.

하지만 영상을 확인한 직후, 김현은 으스스한 웃음을 머금었다.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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