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2
역병, V -2-
"으으, 목말라."
왜 자꾸 목이 마르지?
강석훈은 계산대에 서 있다 말고 정수기에 차가운 물을 받아왔다. 텀블러를 꿀꺽꿀꺽 단번에 비웠으나 갈증이 가실 줄을 모른다. 오히려 더 심해지기만 했다.
물이 아니라 다른 것이 필요했다.
조금 더 달콤한 것. 한 모금만 마셔도 정신을 일깨울 정도로 다디단 무엇. 그걸 마시면, 마시기만 하면 이 정도 갈증은 훨훨 날아가 버리겠지.
"목마르다……"
강석훈은 퀭한 눈으로 정면만 보았다.
딸랑.
문이 열리며 손님이 들어왔으나 인사 따위 생략했다.
"어?"
여자 손님.
가끔 방문하는 손님이었다. 통통하고 짜리몽땅해서 평소에는 눈길을 잘 주지 않았지.
그런데 이상하다.
메기 같은 입술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특별히 붉지도 않고, 그저 두툼한 게 다인 입술이 오늘따라 너무나 매혹적으로 보였다.
아아, 저것을 빨아먹으면 얼마나 맛있을까.
그 안의 감로수, 이슬, 청량한 음료를……
"어?"
여자가 강석훈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한다.
"새로 오셨나 봐요."
이름은 몰라도 뻔히 얼굴 아는 처지에 새로 왔냐니?
강석훈은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여전히 홀린 듯 여자의 입술만 보고 있었다.
"왜, 왜 그러세요?"
이상함을 느꼈는지 여자가 한 발짝 물러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눈이 게게이 풀리며 역시 홀린 듯 강석훈을 보게 된다.
'잘 생겼어……'
본래 키 170 정도에 다소 통통한 체형, 중심으로 몰린 이목구비 때문에 여자들에겐 인기가 없었던 강석훈이다.
하지만 지금 여자의 눈에 비친 강석훈은 전혀 달랐다.
180의 늘씬한 몸, 또렷한 얼굴, 티 하나 없는 피부에 보석처럼 반짝이는 눈동자. 낯빛이 조금 창백한 것이 옥의 티겠으나 어디 가서 모델이라고 해도 믿겠다.
끼이익.
강석훈이 계산대를 들어 올렸다.
한 발짝 다가온다.
별을 담은 듯한 눈이 영혼을 관통한다.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는 여자.
촉촉한 무엇이 입술에 와 닿았다.
"아, 아아아……"
저절로 나오는 탄성.
무언가 물컹한 것이 입안으로 들어온다.
뱀처럼 영활하게 입안을 휘젓고 다니자 숨이 저절로 가빠지며 허리가 활처럼 휘었다.
그리고 무엇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뜨겁고 끈끈하며 비린 어떤 액체가.
모르겠다.
여자의 이성은 이미 날아가 버렸다. 그저 강석훈을 껴안은 채 벌벌 떨고 있을 뿐. 지고의 쾌락이 여자의 정신은 물론 세포 하나하나 몽땅 점령한지 오래였다.
그래서 몰랐다. 여자도, 강석훈도, 둘 다.
딸랑.
편의점 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오는 것을.
딸랑, 딸랑, 딸랑.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니다. 다섯 명을 넘어 열 명까지 도달했다. 개중에는 사람 머리통만 한 카메라를 든 사람도 있었다.
"으, 저거……"
30대 초반의 한 여성이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세련된 외모, 날렵하게 차려입은 정장, 한 손에 든 녹음기.
신은서였다.
김애경의 동창으로 처음 김현이 여론을 움직일 때 도움을 주었던 기자. 지금은 신은서도 각성자가 되었다. 무형계 성향 투시 계열 각성자라고 했지.
따라서 신은서는 강석훈과 여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을 자세히 투과하여 볼 수 있었다.
피를 빠는 중이다.
기이하다면 기이한 일.
여자의 입에 상처 하나 없음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뼈가 나무뿌리처럼 얽혀 피를 전해주고 있으니.
"역겹네."
"진짜 흡혈귀네요."
"그런데 이상하네요. 제 성혼에는 저 사람이 아직도 인간인 것처럼 보여요."
사람들이 한마디씩 했다.
정확히 말하면 기자들. 요즘에는 무슨 직업이든 성혼이 있어야 대우를 받는다. 기자들의 경우에는 판독, 투시, 탐지 계열 성혼이 대세였다.
"사령관님은 어떻게 보이세요?"
사령관님!
신은서가 부른 그 호칭에 중구난방으로 떠들던 기자들이 일제히 합죽이가 되었다.
슬그머니 뒤쪽으로 시선을 던지는 그들.
딸랑.
편의점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들어온다.
키가 컸다.
덩치도 컸다.
거의 곰을 연상시키는 체구. 아니, 곰보다 더 큰 것 같았다. 여기에 눈은 기계 눈이고, 몸 곳곳이 기계로 대체되어 더욱 이질감을 자아냈다.
"제게도 인간으로 보입니다."
"인간이라고요? 흡혈귀가 아니라?"
"제 기준으로는요. 어쨌든 외계종은 아니니까. 단, 여러분들 상식으로는 흡혈귀가 맞습니다."
"그르륵."
만족할 만큼 피를 빨아서일까.
강석훈이 여자를 떼어냈다. 여자가 잠깐 비틀거리다가 스르륵 주저앉는다. 그런 여자를 만족스럽게 보다가 자연스럽게 몸을 돌리는 강석훈.
다른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거구의 남자와 눈이 마주치게 된다. 혼탁해졌던 강석훈의 눈이 비로소 맑아졌다.
"어엇, 어서 오세요!"
"응?"
"뭐라고?"
여느 편의점 아르바이트생과 같은 반응에 기자들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반면 거구의 남자, 김현은 강석훈의 사정을 꿰뚫어 보았다.
'변형 역병이구나.'
원래 흡혈병은 지구에 구전되는 여러 설화와 비슷하다. 흡혈 행위를 통해 감염되며, 종족 자체가 바뀌어 피를 탐하는 괴물이 된다.
단 불사계의 흡혈귀와는 비슷하면서 달랐다. 여러모로 열화된 상태라고 보면 되겠다. 실제로 흡혈귀들은 흡혈병에 당한 희생자들을 흡혈귀가 아니라 탐혈자(貪血者)라고 부르며 멸시했다.
제법 머리를 썼다. 인간이라는 종이 바뀌지도 않으며 겉으로 티도 안 나니 자칫 늦게 발견했으면 새로운 역병이 지구 전체를 휩쓸었을 것이다. 그 후에는 흡혈귀들 뜻대로 일이 돌아갔겠지.
"어……"
여기까지 유추한 김현의 생각은 어디까지나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이뤄졌다. 강석훈이 김현을 보더니 눈을 커다랗게 떴다.
"호, 혹시 김현?"
마치 연예인 보는 듯한 시선을 보내온다.
대답할 생각은 없었다. 대신 뒤쪽으로 질문을 던진다.
"선생님, 치료할 수 있겠습니까?"
"될 것 같아요. 일단 해볼게요."
김현의 거구 뒤에서 아담한 형체 하나가 나타난다.
강석훈이 펄쩍 뛰었다.
"이세희다! 대박! 저기요, 저기 사인 좀 해주실 수 있으세요?"
분위기 파악을 못 하는 걸까, 아니면 병 때문에 판단력이 흐려진 걸까.
이세희도 묵묵히 손을 내밀었다. 거기서 황금색이 뻗어 나가 강석훈을 감싼다. 강석훈이 깜짝 놀라 두 팔로 자신을 가리더니, 이내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어……"
조금 전과 같다. 여자에게서 피를 빨 때와.
강석훈의 얼굴에 까만 핏줄이 돋았다. 마치 거미줄과도 같은 형상. 그러나 김현은 실은 그게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불사계 문자네.'
뜻은 딱 하나.
전염.
'미리 알아서 다행이다.'
굳이 기자들을 대동한 것도 이유가 있다. 현재 상황을 정확히 알리기 위해서다. 무조건 숨기는 게 능사는 아니니까. 이런 일일수록 초기에 확실하게 잡아야 한다.
"끝났어요."
치료는 간단히 끝났다. 강석훈도 여자처럼 정신을 잃고 주저앉는다.
"엇, 저 사람 원래 얼굴이 저랬어요?"
"아뇨, 아닙니다. 제가 계속 찍고 있는데 이 원장님께서 치료 시작하시면서 변형됐어요. 키도 작아지던데요?"
"이야, 좋은 병이네요. 그럼 여자가 걸리면 쭉쭉빵빵 미녀가 되는 걸까요?"
"아무리 외모지상주의 세상이라고는 해도 흡혈귀가 되면서까지 잘 생기고 싶진 않은데요."
"호호, 그건 그래요."
긴장감 없는 작자들 같으니.
이때쯤 여자가 깨어났다.
"으음…… 어, 여기가 어디지? 누, 누구세요?"
눈앞에 늘어선 기자들을 보고 겁먹은 표정을 짓는다.
그럴 만도 하다. 기자들도 기자들이지만 김현과 이세희가 가장 앞에 있으니까. 기계 인간에 천사 인간. 정체를 안다면 모르겠으나 그렇지 않으면 놀라는 게 당연하다.
신은서가 가장 먼저 달려가 녹음기를 들이밀었다.
"안녕하세요! 한성 일보의 신은서입니다."
"네? 한성 일보요?"
"네! 잠시 인터뷰 좀 할 수 있을까요?"
"대, 대체 무슨……"
여자는 어안이 벙벙해서는 눈을 굴렸다.
그 모습을 보고 김현은 한 가지 사실을 확신했다.
'흡혈 당시를 기억하지 못하는구나.'
아까 강석훈이 보인 행동을 보면 탐혈자나 희생자나 다 마찬가지인 것 같다. 그러다 나중에 피를 많이 빤 다음에는 어쩔지 모르겠지만, 초창기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역병을 옮기고 다니겠지.
기자들이 여자에게 몰려간 틈을 타 편의점 밖으로 빠져 나왔다. 강석훈도 정신을 차리는 것이 보인다.
이세희가 옆으로 따라붙었다.
"선생님, 어때요?"
"병 자체가 어렵진 않네요. 3성 성혼만 되어도 충분히 치료하겠어요."
"능력치가 낮아도요?"
"아…… 정정할게요. 성혼과 의지 능력치 25 정도는 필요할 것 같아요. 그래도 그 정도 각성자면 간단해요. 하루에 20명도 넘게 치료할 테니."
"백신을 만드는 건 어떻습니까?"
"백신 좋죠. 어렵지는 않을 것 같아요. 제가 제 성혼으로 적당히 가공하면 김현 님이 대량 생산 들어가면 되겠네요."
"흠."
백신이라고 했더니 이세희는 주사기에 담아 투여하는 그런 백신을 생각했나 보다.
유감스럽게도 김현의 생각은 다르다.
이세희가 원형 백신을 만들면 그걸 인공 지구로 대량 생산하여 지구의 대기에 살포할 생각이었다. 흡혈귀가 역병을 퍼뜨린 방법과 비슷하다. 이렇게 퍼뜨린 백신은 저절로 증식하며 역병을 효과적으로 잡아먹겠지.
"아, 그럼 이미 감염된 사람도 회복될까요?"
"거기까진 힘듭니다. 면역을 획득하는 정도에서 멈출 것 같네요. 시간이 지나면 백신이 강해지지만, 그만큼 역병도 강해지지 싶어요."
"아쉽네요."
"백신 자체의 힘을 강화하면 가능하겠지만 그럼 백신 때문에 사람들 몸이 더 상할 수가 있어요."
"네? 설마요."
"진짭니다. 백신도 천상계 성혼에서 비롯된다는 걸 잊으시면 안 돼요. 사실 이 방법은 간편하긴 한데 회수하는 시점이 늦어지면 부작용이 생겨요."
"그렇겠네요."
이세희가 씁쓸한 표정을 짓는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름답고 성스럽기만 한 천상계 성혼. 기실은 푸르뎅뎅이 괴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세희 본인이 가장 잘 아니까.
김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초기에 발견해서 다행이다. 멋모르고 방치 했다가 수면 위로 부상한 다음에야 부랴부랴 움직였으면 피해가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이 안 된다.
바로 백신 제작 시작.
채 하루도 되지 않아 끝이 났다. 이세희가 빛나는 글자 형태의 원형 백신을 완성했고, 김현은 그걸 인공 지구 최초의 핵에 집어넣었다.
지구로 투사하기만 하면 된다. 그 즉시 역병의 수명이 끝날 테니.
'이걸로 정말 끝이야?'
최후의 순간에 김현은 망설였다.
열여덟 차원계 종족 중 음흉하기로 따지면 불사계의 흡혈귀들은 단연 선두권에 속한다. 전면전보다는 암약을 즐기며, 막강한 화력보다는 계략을 통해 복속 차원을 만들고자 하는 자들이 그들이다.
그런 그들이 이렇게 속이 뻔히 보이는 계략을 썼다고?
지금 퍼지는 역병, 대한민국 기자들에 의해 V라는 이름이 붙은 이 병은 은밀하고 전염성이 대단히 높긴 해도 결국은 발견되게 되어 있다. 8성 각성자가 다섯 명이나 존재하고, 7성 각성자도 수십 명, 6성 각성자가 수백 명이니 시간문제.
'내가 과민한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V만으로는 치명적이지가 않다.
인류의 숫자를 많이 줄일 수는 있겠지. 그러나 김현의 예상으로는 그래 봐야 1억 명 내외였다. 그 이상 희생자가 늘어나면 김현이 나서지 않더라도 다른 각성자들이 상황을 간파했을 것이다.
"1억, 1억이라……"
흡혈귀들이 노린 전과로는 부족하다.
분명 다른 노림수가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자연히 한쪽으로 시선을 돌리게 된다.
이세희가 만든 원형 백신.
설마 이것도 흡혈귀들의 계산에 들어 있던 게 아닐까? 김현의 동료들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흡혈귀들도 갖고 있으니.
즉각 시간 가속 아차원 공간에서 실험을 시행했다.
결론부터 말해서 김현의 추측이 맞았다.
원형 백신이 V를 잡아먹는 건 맞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생각지도 못한 변형이 일어난다.
항생제 내성을 획득한 슈퍼 박테리아를 보는 듯했다.
"젠장."
그걸 확인하고 김현은 짧게 욕설을 내뱉었다.
새롭게 변형되는 V.
어설픈 흡혈귀를 만들지 않는다. 완벽한 탐혈자를 만든다. 여기에 탐혈자가 죽는 즉시 시체를 터뜨려 피를 사방에 퍼뜨린다. 비산하는 피에 닿으면 그 자리에서 탐혈자로 변하는 것은 덤.
큰일 날 뻔했다. 정말로 큰일 날 뻔했다.
그렇다고 문제가 해결되었느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이번에는 이세희가 생각한 대로 주사기 앰플 형태로 만들어 주사해 보았다. 그러자 똑같은 반응이 일어난다. 며칠 뒤 희생자가 탐혈자로 변하여 미친 듯이 피를 빨고 다니는 것.
"이 음흉한 새끼들……"
새삼 이가 갈렸다.
쉽게 가는 줄 알았더니 이게 대체 뭐냐?
늦은 밤 김현의 시름이 깊어진다.
그리고 실은 이때, 지구에서는 김현이 간파한 미래가 벌써부터 훌쩍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