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헌터사-173화 (173/200)

# 173

역병, V -3-

"이게 저라구요?"

강석훈은 어안이 벙벙해서는 되물었다.

작은 태블릿 PC를 들고 있던 가운 입은 여자가 무감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강석훈 씨가 맞습니다. 기억나지 않습니까?"

"에이, 이게 어떻게 저에요. 딱 봐도 다른 사람인데."

"과연 그럴까요?"

손가락을 튕기는 여자.

강석훈은 몰랐지만 기갑계 성향 각성자였다. 김현과 비슷하게 기계를 해킹하는 정도는 가능했다. 태블릿 PC 화면에 치지직 잡음기 끼더니 빠르게 역재생된다.

이내 태블릿 PC는 1시간 전으로 돌아갔다. 또 1시간 전, 다시 1시간 전 장면에서도 멈췄다. 그렇게 총 4장의 사진을 나란히 늘어놓는다.

"이건……"

강석훈은 간신히 신음을 삼켰다.

태블릿 PC 속.

자신이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키는 180이 넘게 커지고, 중심으로 몰려 있던 이목구비가 보기 좋게 흩어진다. 그렇게 변하고 나자 SNS 스타 미남이 부럽지가 않았다.

"이게, 이게 진짜 저라고요?"

"예. 이제 이해하시겠습니까?"

"말도 안 돼요. 이럴 이유가 없는데……"

"이것도 기억이 안 납니까?'

여자가 태블릿 PC를 재차 조작했다. 이번에는 강석훈 자신이 한 여성과 키스를 나누는 장면이 재생된다.

아니, 키스가 아니라 아예 피를 빨고 있다.

CCTV만으로는 모르겠으나 기자들이 제대로 찍은 다음이다. 둘이 키스를 마치고 강석훈의 입가에만 피가 진득하니 묻은 장면도 마찬가지.

"어……"

강석훈은 아무 말도 못 했다. 증거는 확실한데 자신에게는 아무런 기억도 남지 않은 까닭에.

여자는 그런 강석훈을 멀거니 보고만 있었다.

짐작했던 일.

사실 강석훈이 예비 탐혈자로서 저질렀던 어떤 범죄도 문제되지 않는다. 본인의 의지로 한 것이 아니니까. 중요한 것은 완전히 치료되었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거지.

"실례하겠습니다."

여자가 작은 칼을 꺼내 자신의 손바닥을 그어 버렸다.

자연히 강석훈이 질겁을 했다.

"이봐요!"

이내 손바닥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흡혈귀라면, 탐혈자라면 이 유혹을 견딜 수가 없다. 당장 일어나 여자를 덮치는 게 맞았다.

하지만 강석훈은 혐오스럽다는 듯 눈살을 찌푸릴 뿐이다. 고개를 자꾸 돌리려는 걸 강제로 보게 했다. 혈향을 전신으로 맡을 텐데도 동요하지 않고 있었다.

'됐다.'

치료 됐으면 됐지.

정부 소속 각성자, 송예림은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김현이라고 할까. 이번에도 대한민국과 인류는 김현에게 빚을 진 것이다.

"다행이네요. 제 피에 별 반응이 없는 걸 보면 걱정할 건 없겠어요."

"그래요?"

"네. 푹 쉬다가 퇴원하시길 빌게요. 그럼, 안녕히."

송예림이 동그란 엉덩이를 흔들며 나간다. 강석훈은 송예림의 뒷모습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아…… 어쩌면 이리도 맑아 보이는지.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내딛는다. 수 미터 거리가 단번에 단축된다. 등을 엄습하는 소름 끼치는 기운에 송예림이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크악!"

어느새 괴물처럼 변한 강석훈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백지장처럼 새하얀 낯빛. 확연히 뾰족한 송곳니. 그리고 핏발이 잔뜩 선 두 눈.

흡혈귀!

"이이익!"

반사적으로 발을 차 걷어낸다. 강석훈은 기이하도록 몸이 유연하고 빨랐다. 몸을 뒤집어 피하면서 송예림을 위에서부터 찍어눌렀다.

"아, 안 돼!"

목으로 이를 들이미는 강석훈.

공포에 찬 비명이 터진다.

동시에 문이 열리고 건장한 남자들이 우스스 쏟아졌다. 그들이 강석훈과 몸싸움을 벌이지만 기이하게도 강석훈의 힘은 강화 계열 각성자와도 비견할 만 했다. 모두들 속절없이 떨어져 나간다.

탕! 탕! 탕!

급기야 총까지 쏘지만 무소용. 송예림이 강석훈에게 잡아먹히기 일보 직전이었다.

"오케이, 거기까지."

이질적인 목소리가 울렸다.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다른, 기계음이 확연히 섞여 나오는 목소리.

김현이었다.

거대한 체구를 우뚝 세우고 팔짱을 낀 채 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강석훈이 움찔 놀랐다.

송예림의 피를 얻기 일보 직전인데도 송예림을 놓고 비틀비틀 물러난다. 일단 전투 태세를 하긴 하는데 어쩐지 맥이 빠진 것 같다.

"살려주세요!"

송예림이 울며 소리쳤다.

"걱정하지 마십쇼."

한 발짝 크게 다가선다.

그러자 강석훈이 발악하듯 두 팔을 크게 휘저었다. 붉은 광채가 빛나며 김현을 덮쳐오지만 김현에게는 어린아이 장난 같기만 하다.

왼손으로 강석훈의 두 손을 봉하고, 배에다가 강력한 주먹질을 한 방 먹여주었다. 강석훈이 답답한 소리를 흘리다가 축 늘어졌다.

"후, 감사합니다. 죽는 줄 알았어요."

송예림이 다소곳이 허리를 숙였다.

"별 말씀을. 심각하긴 하네요. 이렇게 빨리 변형될 줄은 몰랐는데."

"변형이라뇨?"

대답하지 않고 생각만 정리했다.

강석훈에게 가해진 초능력의 양이 너무 많았나 보다. 8성 각성자인 이세희가 직접 손을 썼으니 사실 당연했다. 그래서 김현이 직접 찾아오게 되었다.

설레설레 머리를 젓는다.

그나마 빨리 와서 다행이지. 10분만 늦었어도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흡혈귀로 변했겠다.

"저기, 어떻게 된 거죠?"

"말씀드리기 곤란합니다. 일단 여기 있는 분들은 자리를 비켜주시겠습니까? 강석훈 씨부터 치료해야죠."

송예림과 경호원들이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다 김현이 다시 말을 하자 그때서야 밖으로 나간다.

강석훈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종족] 탐혈자 [진영] 지구

역시 종족이 바뀌었다.

이렇게 된 이상 강석훈을 인간으로 되돌리는 것은 힘들다. 불사계의 흡혈귀들이 그걸 노리고 있다면 더더욱.

'종족 변환을 병으로 인식하고 치료하려고 하는 게 상식적이지.'

그렇다면 상식을 넘어서는 파격으로 응수해야 한다. 질질 끌려가기만 해서는 가랑비에 옷 젖듯 피해만 누적될 뿐이다.

손을 뻗어 강석훈의 가슴에 가져간다. 두웅둥, 확실히 인간보다 느리게 뛰는 고동이 손바닥을 진동시켰다.

"조금 아플 겁니다."

푸욱.

손가락을 찔렀다.

"커헉!"

강석훈이 기절해 있던 와중에도 몸을 퍼덕였다.

갈비뼈 사이를 뚫고 심장에 맞닿은 손가락. 송곳처럼 예리하게 변형되어 있다. 손가락을 통해 김현의 피가 주입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궁극의 진화체 성혼이.

김현의 구상은 간단했다. 탐혈자를 치료하는 대신 진화시킨다. 아직 인간의 자아가 남아있는 만큼 인간에 가깝게. 피를 주기적으로 마시긴 마셔야겠으나 갈망은 없도록.

'나중에는 완전히 인간으로 바꿀 수도 있겠지……'

과연 얼마나 원할지는 모르겠다. 탐혈자, 아니 음혈인(飮血人)이라고 불러야 할 이 새로운 종족은 기존의 인간에 비교하여 외모가 우월하고 체력과 지능도 뛰어날 테니.

어쩔 수 없다. 외계종과의 교류가 시작된 이상 혼혈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당장 김현 자신과 다른 동료들도 21세기 기준으로는 완전한 인간이라고 볼 수 없지 않은가.

울컥, 울컥.

진화가 시작되자 강석훈의 몸 곳곳이 불룩해졌다가 되돌아가는 것을 반복했다.

손가락을 빼고 관찰했다.

진화는 순조롭다. 탐혈자와 인간의 DNA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조금씩 변화하고 있었다.

주는 어디까지나 탐혈자. 인간의 DNA는 크게 영향을 발휘하지 못한다. 기껏해야 피부, 골격의 생김새, 모발, 생식기 정도에나 관여했다. 속은 탐혈자의 것이 대부분을 채우고 있었다.

'인간은 겉모습에 구애되는 법이지.'

속이 달라도 겉이 같으면 동족으로 인식할 수 있다. 김현은 원 역사를 통해 그 사실을 아주 잘 알았다.

차별과 편견은 존재하겠지만 뭐, 그거야 같은 인간끼리도 피부색이나 국적, 여러 장애 때문에 생기는 거니 상관없다.

"으으, 여긴……"

오래지 않아 진화가 끝났다.

[종족] 음혈인 [진영] 지구

새롭게 바뀐 강석훈의 정보.

피에 대한 갈망은 없다. 보통 사람처럼 하루 세 끼니를 먹고, 1달에 1번 100cc의 선혈을 섭취하면 충분하다. 그리고 차차 변하여, 몇 주 뒤에는 CCTV에 찍힌 모델 같은 모습으로 변하겠지.

"강석훈 씨, 정신이 듭니까?"

"누구…… 으헉, 김현이다!"

강석훈이 펄쩍 뛰었다. 그 서슬에 천장까지 뛰어올라 머리를 박아 버린다. 머리를 감싸는 강석훈을 보자 저절로 실소가 나왔다.

"괜찮습니까?"

"으으, 그런 것 같습니다. 그, 그런데 저한테는 무슨 일이세요? 어제도 오시고……"

"그럴 일이 있습니다. 자세한 건 저기 분들한테 들으세요."

"네?"

어리둥절 해하는 강석훈을 뒤에 두고 병실 밖으로 나온다. 송예림이 벽에 두 손을 짚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물리진 않았지요?"

"헉, 헉, 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가요?"

"치료해놓고 돌아가서 확인해 보니 흡혈귀 놈들이 수작을 부렸더라고요. 역병을 치료하면 약간의 잠복기 후에 폭주하도록 만들어 놨습니다."

"세상에…… 지금은 치료된 거죠?"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김현은 송예림에게 강석훈의 상태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음혈인이라는 새로운 종족으로의 변화.

송예림은 설명을 듣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그럼 흡혈귀가 된 거잖아요!"

"그건 아닙니다. 피를 1달에 1번 마셔야 한다는 걸 제외하면 사람과 똑같습니다. 자식을 낳는 것도 가능하고요."

"그, 그래도요. 어쨌든 사람은 아닌데……"

"왜 사람이 아니죠? 사람의 정의가 뭔데요?"

"그, 그게……"

송예림의 눈이 흔들렸다.

김현은 강하게 못을 박았다.

"지구를 흡혈귀들에게 넘겨줄 게 아니면 지금은 이게 최선입니다. 정부에도 그렇게 전하세요. 기자들에게는 제가 따로 기자 회견을 열어 알리지요."

"잠깐만요! 기자 회견은 미루시는 게 어떨까요? 사실이 알려지면 혼란이 커질 거예요!"

"그건 제가 판단합니다. 그리고 모두 감추는 게 능사는 아니에요. 어차피 불사계를 배제하고 나면 지원자들은 완전한 인간으로 되돌려줄 생각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제 말대로 하시죠."

송예림은 입술을 짓씹었다.

사실 이해가 되지 않는다. 멀쩡한 사람을 음혈인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종족으로 바꾸는 것도 그렇고, 그걸 바로 대중에게 알리겠다는 구상도 그렇다.

하지만 뭐 어쩌겠나. 자신은 그저 흔하디흔한 각성자에 불과한 것을. 지금 이 말도 대한민국 정부에 전하라는 심부름에 불과했다.

그 증거로 김현은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몸을 돌리고 있었다. 병원 밖으로 나가더니 팔다리의 추진 장치를 점화하여 사라져 버린다.

"하아, 도대체……"

꺼질 듯한 한숨을 듣는 둥 마는 둥 날아올랐다.

할 일이 많았다. 인공 지구로 돌아가자마자 기자 회견부터 열었다. 하루 전, 대한민국 서울에서 있었던 일이 알려진 다음이라 기자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거기서 김현은 모든 정보를 공개했다.

불사계가 흡혈귀 저택을 희생시켜가며 발동시켰던 혈왕의 입맞춤. 거기서 시작된 역병 V, 또한 역병을 성혼으로 치료할 경우 며칠 뒤에 폭주한다는 사실까지.

"천상계 성혼이 아니라 다른 성향 성혼으로도 치료가 안 됩니까?"

"어떤 성향, 어떤 계열, 어떤 종류든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한 성혼 회복약이나 질병 치료제로도 V는 치료가 됩니다. 문제는 다음이죠. 일단 치료가 되면, 감염자는 잠복기를 거쳐 반드시 탐혈자라는 괴물이 됩니다."

"맙소사……"

"그, 그건 치료가 안 됩니까?"

"치료는 가능하지만 이미 종족이 변했으니 한 가지 방법밖에 없습니다. 종족 변환이죠."

종족 변환.

탄식이 흘러나왔다.

엄청난 자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전 세계의 V 감염자가 몇이나 되는지 알 수가 없는데 그들을 모두 치료하려면 막대한 성혼이 필요하겠지.

"그래서 저는 차선을 선택했습니다."

필요한 것은 김현의 피에서 추출한 성혼 조금. 주입하는 즉시 흡혈귀의 피와 반응하여 탐혈자를 음혈인으로 변환시키겠지.

간단히 설명해주자 기자들 사이에서 일제히 술렁임이 번졌다.

"그건 탐혈자라는 괴물 대신 음혈인이라는 괴물을 만드는 것 아닙니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기자도 있었다.

"글쎄요. 음혈인을 괴물이라고 부르는 건 저와 제 동료들, 그리고 세계 유수의 각성자들을 모두 괴물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말인데요?"

"흐흥!"

김현 옆에 앉아 있던 이세희가 콧소리를 냈다. 기자가 흠칫 놀라서는 정중히 사과를 했다.

"제 표현에 불쾌하셨다면 사과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어쨌든 지금 인공 지구에서 감염자를 확인할 검사 장치와 치료 주사액을 생산하는 중입니다. 각국에 공급할 테니 최대한 빨리 V에 대처해 주시기 바랍니다. 생산 방법도 공개했습니다. 종족 변환이 죽는 것보다는 낫겠지요."

그 날부터 바로 전 세계가 들썩였다.

병원마다 사람들로 들끓었다. 혹시나 V에 걸렸을까 봐 검사를 받아보는 것이다. 검사 장치는 전기만 공급하면 X-ray 찍듯 감염 여부를 확인할 수 있어서 순식간에 감염자를 색출할 수 있었다.

[감염자들 부럽다.]

[왜?]

[음혈인 되면 조낸 잘 생겨진다잖아.]

[진짜임?]

[어, 맞어. 내 사촌 동생도 그거 걸렸는데 거의 전신 성형 수준으로 이뻐지더라.]

[나도 음혈인으로 종족 변환하고 싶은데 방법이 없을까?]

[감염자랑 찐하게 키스부터 하고 가라.]

[개이득이네. 키스도 하고 성형도 하고, 캬!]

[지랄들. 난 인간인 채 죽을란다.]

[인간이 뭐가 좋냐? 고위 각성자들 봐. 다 영육 개변해서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는 몰골이잖아.]

[사람은 사람이지.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아닐지 몰라도.]

[약해빠진 호모 사피엔스 하느니 영육 개변한 고위 각성자 되고 싶다.]

[나도.]

다행히 거부감은 적었다. 김현의 일행이, 동맹이, 그리고 수많은 각성자들이 인간의 껍질을 진즉에 벗어 던졌기 때문이겠지.

김현은 인공 지구의 남극 기지에 앉아 상황을 주시했다.

흡혈귀들이 마련한 함정은 잘 피해 간 것 같다. 하지만 여기서 끝은 아닐 것이다. 흡혈귀들도 지구 상황을 알 테니, 그에 맞추어 작전을 수정하겠지.

과연 어떻게 나올까.

인공 지구의 힘까지 써서 전자두뇌를 혹사 시켰다. 가능한 모든 경우를 가정하고 대응 계획을 짰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김현도 허를 찔렸다.

급한 보고가 올라왔다.

악마계의 흰금 궁전.

그곳의 동향이 심상치 않다는 보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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