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헌터사-174화 (174/200)

# 174

악마 강림

"흰금 궁전이 왜요?"

이게 무슨 아닌 밤중에 홍두깨인지 모르겠다.

한스에게 묻자, 한스가 말없이 USB 하나를 내밀었다.

손가락 끝을 USB 포트로 변형시켜 꽂았다. 수많은 영상 파일과 사진 파일이 뇌 속에서 재생된다.

"이건……"

USB 내부의 파일은 딱 하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출정식.

릴리스의 주요 애첩들은 물론 권속들, 심지어 릴리스 본인까지 모습을 드러내었다. 꾀꼬리 지저귀듯 아름다운 목소리로 전쟁을 부르짖는다.

더 무서운 것은 릴리스 말고도 여러 8성 등급 악마들이 나타났다는 점. 그들이 릴리스의 옆에 늘어서서 흉포한 눈동자를 빛내고 있었다.

"목표는? 목표는 어디지?"

"그건 말하지 않았습니다만, 릴리스가 하는 말로 봐서는……"

한스가 말꼬리를 흐린다.

USB 안의 음성 파일을 재생한다. 머릿속으로 울리는 연설을 들으며, 김현은 짧게 몸을 떨었다.

[들으라, 나의 충성스러운 신민들이어. 우리 궁전은 영겁토록 번영했고 영겁토록 번영할 바, 너희를 보는 내 마음이 흡족하도다. 그러나 내 마음에 채워지지 않는 공허가 있는 바, 지고의 쾌감을 얻기 위하여 우주 제일의 보석을 약탈하러 갈 것이다!]

예상하지 못한 일.

흰금 궁전의 영향력은 악마계에 짙게 드리워져 있다. 반면 주인인 릴리스의 성향 탓에 직접적인 전쟁을 일으키는 경우는 적었다. 설령 전쟁할 일이 있어도 내부 분란을 유도하거나 다른 악마들을 참전시키는 등 간접적인 방법만 썼지.

김애경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아니, 릴리스가 왜 여기서 나와?"

"그러게 말이야."

"김현 님이 욕심나서 오는 거 아니에요? 예전에 보니까 엄청나게 집착하던데."

동료들도 김현과 무선 연결된 모니터를 통해 지금 장면을 보았다. 이세희가 조금 떫은 얼굴로 지적했다.

"그럴 리가요. 블러드 공작과 릴리스는 저를 부정했잖습니까."

"그런데 릴리스가 탐낼 건 지구에선 김현 님밖에 없어요."

"인공 지구를 노린 건 아닐까?"

"언니 말에도 일리는 있어. 그런데 인공 지구 정도는 릴리스 입장에선 조금 특이한 차원 거점으로밖에 안 보이지 않을까?"

"선생님 말이 맞아요. 릴리스는 악마계에서도 세력이 가장 강한 악마 중에 하난데 특별히 탐낼 게 없죠."

하지만 인제 와서 뭘 어쩐다고?

김현을 옛날로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건 다 탄 재를 생나무로 바꾸는 것보다 더 말이 안 되는 일이니까.

사브리나가 묵묵히 손을 들었다. 김현이 시선을 던지자 정중히 머리를 숙이고는 느리게 입을 연다.

"블러드 공작이 뭔가 수를 쓴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겠지. 릴리스가 움직일 거였으면 진작 움직였을 테니. 무슨 수를 쓴 걸까?"

"최근에 난민들 데려가서 실험했던 것…… 그게 마음에 걸립니다."

김현은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불사계로 납치되었던 난민들은 이미 다 죽었다. 하나같이 나이 아흔은 넘은 노인처럼 생체 시계가 돌아간 채로.

그들을 관찰하고, 진술을 들은 바에 의하면 블러드 공작은 모두에게 똑같은 실험을 했다고 한다.

시공 회귀.

그 과정에서 난민들은 괴상한 경험을 했다고.

하루의 반복.

매일 똑같은 하루를 반복했다던가. 그것도 헤아릴 수 없는 시간 동안. 죽여달라고 부르짖었으나 블러드 공작은 악독하게도 모든 호소를 무시했다.

실험에 실험이 거듭된 나날. 김현이 와서 구해준 것은 고마우나 모두 삶에 대한 의지를 잃은 다음이었다.

'시간 반복이라……'

블러드 공작이 대단하긴 하다. 시공 회귀에 대한 약간의 단서만 얻고도 여기까지 접근할 정도면. 하긴 시간 반복이 가능하다고 해서 시공 회귀가 가능한 건 아니지만.

"혹시, 사령관님을 시간 반복이나 시공 회귀시키면 예전의 업을 다시 얻게 될 거라고 한 건 아닐까요?"

"설마. 설령 그렇게 해도 그들이 보는 관점에선 나는 예전 그 모습이 될 수 없어. 당장 공허와 죽음의 혼종은 어떻게 해? 내가 볼 땐 가능성이 0에 수렴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0이야, 0."

"모르죠. 릴리스가 직접 시공 회귀하려고 할지도요."

"뭐?"

에일리가 뱉은 말에 좌중의 시선이 온통 집중된다.

"릴리스 그년, 딱 봐도 보통 미친년 같진 않았거든요. 아름다운 이니 뭐니 하면서 시공 회귀 시도할 가능성도 있다고 봐요."

"아니, 그럴 거면 자기네 궁전에서 시공 회귀하면 되지 왜 여기까지 와?"

"그야 모르죠."

"블러드 공작이 제안한 거 아닐까? 자기 말대로 하면 시공 회귀시켜준다고?"

"아니, 애초에 시공 회귀가 가능한 거야? 그게 가능했으면 지금 판세가 말이 안 돼. 시공 회귀가 가능한 종족이 열여덟 차원계를 다 점령했겠지."

"난민들 말로는 블러드 공작이 확신하고 있다고 하던데……"

"실패하겠지. 성공했으면 우리한테 그렇게 털릴 수가 없어."

일행은 김현이 시공 회귀했다는 사실을 모른다. 따라서 난민들에 의해 들은 블러드 공작의 시공 회귀 연구도 웬 삽질이냐는 투로 대응하고 있었다.

어쨌든 시공 회귀와 연관된 건 사실인 것 같다. 그 대상이 김현인지, 릴리스인지, 아니면 다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원인은 그렇다 치고, 참전하는 총 전력은?"

"모르겠습니다. 출정식에서 릴리스를 포함하여 8성 악마 다섯을 확인했습니다."

"다섯, 다섯이라…… 그게 다는 아닐 것 같은데."

유명계가 666의 편제를 따랐다면 천상계와 악마계는 777의 편제를 따른다. 9성 등급 마왕 아래에는 7명의 천마가, 천마 아래에는 다시 7명의 신마가, 이런 식으로.

출정식에 나타났다는 8성 악마를 모두 확인한다. 역시나 다들 다른 마왕 휘하의 악마였다.

'어차피 다 오진 않겠지.'

자기네들 차원계를 방어해야 하고, 주체가 흰금 궁전이니만큼 악마계의 8성 악마 49마리가 모두 출정하진 않을 것이다.

많아도 10~20%. 즉, 5마리에서 10마리 남짓. 사생결단을 낼 생각이라면 15마리까지도 올라가겠으나 흰금 궁전의 영향력이 그렇게나 클까?

힘들지, 그건.

"8성 등급 악마 10마리가 참전한다는 가정을 하고 방어 계획을 짜야겠습니다."

다들 헛바람을 들이마셨다.

"그렇게나 많이?"

"릴리스가 작정하고 나서면 그 정도는 나서지 싶어."

"맙소사……"

"그냥 미친년 같더니 제법이네요."

"릴리스는 악마계 최대의 포주면서 은행장이니까요. 켄트 양은 모르겠지만 베갯머리 송사라고 정부(情婦)가 이불 안에서 애교 좀 부리고, 빚쟁이가 빚 탕감 조건으로 참전을 요구하면 거절하기가 쉽지 않죠."

"아, 뭔지 알겠어요."

"이길 수 있을까요?"

"그런데 차원의 벽이 벌써 그렇게 약해진 거야? 아직 8성 등급은 들어오기 힘들다며."

"아직까지는 건재해."

김현은 허공에다가 시선을 던졌다. 기계 안구가 광선을 쏘아 지구와 지구를 감싼 방어막을 그려낸다.

극히 미약하여 흐릿하게 깜빡이는 방어막.

1, 2, 3, 4, 5, 6, 7성에 대한 방어 능력은 이미 소실되었다. 8성도 빠르게 깎여나가고 있었다. 구멍이 뻥뻥 뚫린 성긴 그물을 보는 듯하다.

"내구력은 괜찮아. 완전히 망가지려면 조금 시간이 남았어. 그래도 8성 외계종이 비집고 들어오는 건 가능해."

"유명계처럼?"

"응. 대신 잘못 들어오면 유명계처럼 쫓겨날 각오는 해야지. 반작용으로 차원 통로가 닫힐 테니까."

언젠가는 뚫리겠으나 그때쯤에는 성혼 확보 경쟁이 끝난 후일 것이다. 성혼 하나에 목숨을 거는 외계종들로서는 선뜻 모험하기 어려웠다.

과연 릴리스가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도전을 하려 할까?

릴리스만의 결정이라면 충분히 가능하지. 릴리스는 그만큼 옛 김현을 탐냈으니까. 다른 악마들이 흔쾌히 참전하느냐는 다른 문제지만.

"혹시 말입니다."

사브리나가 망설이다가 어렵사리 입을 뗐다.

"시간 반복이라는 그거, 차원의 벽을 여는 데에는 못 씁니까?"

"응? 뭐라고?"

"똑같은 하루를 반복하는 건 외부에서 보면 시간이 무한하게 늘어나는 거 아닙니까. 차원의 벽에 구멍을 뚫는 작업을 무한히 늘릴 수 있다면……"

"이런 젠장!"

순간 머리를 스치는 게 있었다.

시공 회귀의 원리.

방금 사브리나가 지적한 것을 시공 회귀에서도 사용한다. 현 시간대를 무한하게 늘리고 공간을 일점으로 좁혀서 하나의 송곳처럼 만들어 과거의 시간대와 연결하는 것.

둘을 정교하게 배치하고, 한편으로 원하는 시간대와 연결하는 것이 불가능하여 실패라고 결론을 냈지만, 우연의 중첩으로 아론의 영혼이 21세기로 이동했었지.

여기까진 블러드 공작도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시간 반복에 따른 힘의 집중 정도는 가능하지 싶었다.

그 과정에서 시공 폭주가 일어나겠으나 아무래도 좋은 일. 손해는 악마계와 지구와 일방적으로 볼 테니까.

"사브리나 말이 맞아! 그런 방법을 쓸 가능성이 커!"

"진정해. 어차피 뚫릴 차원의 벽이면 그러거나 말거나 큰 차이가 없잖아."

"아냐, 있어! 한스 사장님, 출정식이 지구 기준으로 3시간 전에 있었다고 했지요?"

"예. 출정식 끝나자마자 지구로 돌아와서 보고 드렸습니다."

"그럼 21시간 뒤 차원의 벽이 깨질 겁니다. 악마계가 소모할 자원도 우리 예상보다 적어요. 어쩌면 8성 악마 10마리가 아니라 15마리, 20마리가 참전할 가능성도 있어요!"

"아무리 그래도 설마 그러겠어? 그러다 천상계가 악마계 뒤통수라도 때리면 어쩌게?"

"누나. 차원의 벽이 아주 약하게라도 있는 거랑 없는 건 차이가 커. 차원의 벽이 있으면 악마들도 자기네 거점을 이용해서 차원 이동을 해서 와야 해. 그런데 차원의 벽이 없으면 공간 이동하듯이 제멋대로 마구 움직일 수 있어."

"저, 정말?"

"그래! 어차피 자기네들 차원은 차원의 벽이 따로 있어서 지켜주는데 무슨 걱정이야! 천상계 침공? 그 즉시 돌아가면 그만이지. 49마리 중에서 20마리만 쳐들어 와도 우린 몇 시간 안에 제압당해!"

"그럴 수가!"

이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다들 얼굴이 창백해진다.

"마, 막을 수는 없어?"

"저쪽에서 시작했으면 못 막아."

"요격이라도 해야지!"

"21시간 만에? 그건 불가능해."

"그럼 구경만 할 거야?"

"그럴 리가. 생각 중이야. 혹시 좋은 생각 있는 분 없어요?"

죽음과도 같은 침묵이 찾아온다.

다들 생각에 잠겼다. 조금이라도 머리를 굴려본다. 다가올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

한철군이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물었다.

"사령관님. 악마계에서 시간 반복으로 차원의 벽을 뚫으면 벽이 바로 소멸하는 겁니까? 아니면 조금 시간이 걸려서 소멸합니까?"

"시간이 걸리겠죠. 몇 개나 구멍을 뚫느냐에 따라서 달라요. 제 생각에는 많아도 7개를 넘지 않을 겁니다. 최대한으로 잡아도 6개겠죠. 시간 반복으로 차원의 벽을 뚫으면 반작용 때문에 자기네 거점도 날아갈 테니."

한철군의 눈이 번쩍였다.

"그럼 몇 개를 시도했을 때 효율이 가장 크겠습니까?"

"효율이라뇨?"

"악마들은 극도로 이기적인 놈들 아닙니까. 제 생각에는 차원의 벽을 완전히 날리는 건 악마들도 바라지 않을 것 같습니다. 몇 개만 날려서, 악마계와 지구 사이의 벽만 부수려고 하겠지요. 그것도 가능하지 않습니까?"

악마계와 지구 사이의 벽만 무너뜨린다?

가능하지. 유명계도 비슷한 기법을 보여주었으니.

몇 개, 몇 개여야 할까……

옛 기억과 기록을 꺼내가며 전자 두뇌가 순식간에 계산을 마쳤다.

"네 개, 혹은 다섯 개입니다. 네 개면 차원의 벽이 조금은 남는 대신 다른 차원계에는 영향이 별로 없고, 다섯 개면 차원의 벽을 거의 없애는 대신 다른 차원계도 수월하게 드나들 수 있게 되네요."

"그렇다면 전 네 개에 걸겠습니다. 악마놈들, 티끌만큼이라도 다른 종족에게 좋은 일을 할 녀석들이 아닙니다."

"한 사장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그래서 말씀드립니다만, 우리가 새로운 차원의 벽을 설치하면 어떨까요?"

"와우!"

에일리가 놀랐다는 듯 박수를 쳤다. 한철군이 에일리를 한 번 보고는 말을 이어나갔다.

"만리장성이 뚫리면 산성이라도 써서 방어를 해야지요. 저는 잘 모릅니다만, 사령관님이라면 차원의 벽도 충분히 만드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언뜻 복잡해지는 한철군의 눈빛.

이따금 그랬다. 김현이 복제 인간이라는 점을 이 흉악한 몸을 볼 때마다 떠올리는 것.

그건 그렇고 차원의 벽이라.

가능하지 싶다. 김현도 아차원 공간을 다루고 공허를 잠깐 휘두르면서 배운 게 많으니까. 인공 지구를 만들면서 더 늘었고.

"으음."

이때, 김현은 짧게 신음을 뱉었다.

"왜 그래?"

"영상으로 봐."

손짓하여 인공 위성 영상을 허공에 띄우는 김현.

세계 각지에 산재한 7곳의 악마계 거점.

무저갱.

그 중 네 곳이 기이한 색채를 뿜고 있었다. 아울러 언제 뱉었는지 몰라도 내부에 있던 지구인 각성자들이 튕겨져 나와 바닥을 나뒹굴었다.

이세희가 침을 꿀꺽 삼켰다.

"김현 님, 저거……"

"네, 맞아요. 정확히 24시간 남았네요."

뭔가 특수한 결계를 편 것 같다. 단순히 시간 반복만 하고 있으면 외부에 저런 빛이 보일 턱이 없으니.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움직이죠."

너 나 할 것 없이 회의실에서 튀어 나갔다.

그러나 김현은 알고 있었다.

단순히 인공 차원의 벽을 설치하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악마들이 또 시간 반복을 시행할 경우 새롭게 설치한 차원의 벽은 종잇장처럼 찢어질 테니.

가능한 방법은 딱 하나.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시간 반복에는 시간 반복.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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