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5
루프 -1-
동료들은 흩어졌고 김현은 인공 지구에 머물렀다.
악마계의 공격은 지금 폭주하는 거점을 통해 벌어질 터. 그곳을 모두 하나로 묶으려면 인공 지구의 힘을 써야 한다.
"후우."
아무도 없는 곳에서 조용히 내뱉는 한숨.
22세기의 인류 저항군은 시공 회귀를 위해 수많은 시행 착오와 실패를 겪었다. 그 과정에서 시간과 공간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아내기도 했다.
시간 반복도 그 중에 하나.
블러드 공작은 천상계, 충왕계, 기갑계의 성혼을 통해 시간 반복을 이끌어 냈다. 지금 김현도 이세희가 조금만 도와주면 시간 반복을 설치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후환이 두려워서 그러지 않는 것뿐이지.
'어쩌지?'
하지만 여기서 무너져 버리면 다 끝 아닌가.
시간이 없었다. 김현은 빠르게 결단을 내렸다.
'하자.'
누구에게 시간 반복을 걸어야 할까?
김현은 쓰라리게 웃었다.
"운명이야, 운명."
옛 김현은 지구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영혼과 육체를 갈아 넣었다. 김현이라는 자아를 남긴 대신 그 자신은 죽었다고 봐야지.
그 운명까지 고스란히 이어받은 것 같다.
누군가 말했다.
김현은 각성자판 금수저라고.
헛소리!
자신을 몽땅 바쳐가며 외계종들과 싸워야 할 운명을 전승받은 게 무슨 금수저란 말인가?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소시민으로 태어나는 게 나았을 수도 있겠다.
"운명에 치이는 것보다는 낫지."
스스로 다독이며 그렇게 말해본다.
그래. 전생보다는 낫다. 똑같이 육체를 기계로 개조하고, 영혼을 쥐어짜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의지로 바치는 게 남에게 빼앗기고 휘둘리는 것보다는 낫다.
그것을 생각하자 김현의 눈이 어두컴컴해진다.
이번 선택 또한 오롯이 자신의 것.
살고 싶다고?
사실 외계종에게 항복하면 그만. 그렇지 않고 끝까지 대항하는 것은 김현이기에 내리는 결정이었다.
'나쁜 것만은 아냐.'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해 본다.
블러드 공작의 실험에 희생당한 이들에게 영혼의 업이 그득하니 쌓이는 이유.
같은 시간을 무수히 반복하며 운명이 고정되기 때문이다. 만개하며 천변만화했어야 할 운명의 고착화. 현재에 고정된 인간의 영혼에 잠재한 별의 조각이 무거워지며 업으로 남는다.
김현은 업을 양도받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 방법으로는 업을 쌓는 것도 가능하겠지.
"후우……"
그 끝에 기다리는 것은 오직 파멸뿐이지만, 김현은 우주의 나이와는 관계없이 새로 태어난 신생 영혼이니 전화위복이 될지도 모른다.
자아, 생각은 여기까지만 하자.
시간이 없다. 지금부터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어야 겨우 시간에 맞추지 싶다.
인공 지구에 접속.
조작하기 시작한다. 인공 지구 내부, 인공 태양이 웅웅 진동하며 어떤 술식을 빚어내기 시작한다. 굳이 재료를 소모할 것도 없었다. 어차피 김현이 만들 인공 차원의 벽은 오래 지속되지 못할 테니까.
'몇 시간으로 잡을까?'
의미 없다.
고심하다가 1일로 결정했다.
'인류 저항군의 시간 반복도 가장 짧은 게 1일 단위였지……'
성혼 때문에 그렇다.
지구가 1바퀴 자전하는 시간. 성혼은 지구에서 비롯되니 성혼에서 비롯된 시간 반복도 거기에 바탕을 두어야 제대로 발현되었다. 1시간이나 2시간은 인간이 임의로 구분한 것이니 성혼 관점에서 보면 별 의미가 없었다.
따라서 정확히 24시간은 아니고 23.934시간 정도 되겠지. 거기에 맞추어 시간 반복을 설정했다.
장소는 악마들이 쳐들어올 거점을 묶은 인공 차원 전부.
유명계 침공 때를 생각하면 되겠다. 당시도 방어 차원을 만들었듯이 이번에도 임시 방어 차원을 만드는 것이다.
'한 번 해봤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도저히 시간에 못 맞췄다. 동료들이 성혼 농장을 만들면서 아차원 공간 생성에 도가 튼 것도 도움이 됐고. 그게 아니었으면 어디 하나 구멍이 뚫렸을 것이다.
웅웅웅웅.
인공 지구의 자원을 총동원했다. 그것 때문에 지구와의 연결도 잠깐 끊었다. 자연히 시민들 사이에서 난리가 났지만 감수해야 할 일이었다.
[한 사장님. 제가 지금부터 불러드리는 걸 모가디슈 창고로 가져오세요.]
[예, 사령관님.]
[차오 원수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엇, 사령관님? 어쩐 일이신지?]
휘하의 각성자에게 지시를 내리는 한편, 동맹 각성자들에게 참전 요청을 한다.
단순히 동맹만 아니라 영육 개변한 각성자들에게 의뢰를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들도 사태가 심각하다는 사실을 눈치챘는지 김현이 지정한 곳으로 달려오겠다고 약속한다. 대신 그만한 대가를 약속했다.
8성 각성자로의 도약.
서경태가 소멸했다는 사실은 이들도 대부분 안다. 하지만 김현이 다른 각성자들을 모두 우화시키는 데 성공시켜서 또 김현에게 걸어볼 생각인 것 같다.
'바쁘다, 바빠.'
조치해야 할 일은 또 있다.
[대통령님, 잠깐 괜찮으신지요?]
[아, 슈퍼 김? 회의 중입니다만 말씀 하세요. 아무렴 슈퍼 김이 중요하지 회의가 중요하겠습니까?]
[닉을 조심하세요. 가능하다면 신변을 확보하는 것도 좋겠습니다.]
[안 그래도 24시간 감시 중입니다.]
[이런.]
7성 악마계 성향 각성자를 24시간 감시? 미쳤나?
[당장 철수시키고 테일러 양 보내세요. 악마계 침공이 임박했습니다.]
[예? 아, 혹시 무저갱 4곳 빛나는 게……]
[예. 길게 설명할 시간 없습니다. 악마계 침공을 일단 제가 막기는 하겠습니다만 악마계 각성자들 분란 일으키는 것까지는 제가 못 막습니다. 그나마 테일러 양이 7성 되서 다행이죠. 빨리 보내세요.]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이런 정보를 알려주시고…… 역시 슈퍼 김은 미국의 영웅이자 첫 번째 친구입니다.]
미국 대통령이 호들갑을 떨었다.
김현은 그저 쓰게 한 번 웃고 말았다.
저쪽에서는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김현이 이렇게 연락한 건 미국만이 아니었으니까. 각국의 각성자 정보를 해킹하여, 계약자 출신 악마계 성향 각성자가 있는 곳에는 모조리 연락했던 것.
세계적으로 난리가 났다. 악마계 거점이 수상하게 빛나는 것도 그렇고, 악마계 각성자들을 잡아들인다고 부산을 떠느라 더 그랬다.
[설치 했어!]
[여기도요!]
동료들이 거점 인근에 준비를 마쳤다고 연락을 해왔다.
[바로 차원 방벽 구축 들어갑니다.]
방법은 간단하다. 동료들이 설치한 유도 장치를 통해 인공 지구와 4곳 거점을 연결한다. 그것을 다 한데 묶어서 새로운 차원을 만든다.
김현이 직접 세우고도 구멍이 뻥뻥 뚫린, 어설프기 짝이 없는 계획이었다. 시간이 없으니 강행할 수밖에 없었지만.
즉각 실행.
전자두뇌가 불타는 것 같았다. 이렇게 과부하가 걸리는 건 처음이었다. 지구 전체를 해킹하는 것보다 더 힘든 것 같다. 김현은 육체에 공급되는 힘까지 극단적으로 차단해가며 전자두뇌에 모든 자원을 할당했다.
씌웅!
인공 지구가 거대한 빛줄기를 토했다.
빛이 지구를 직격 했다. 쏜 것은 분명히 한 줄기인데 기이하게도 네 군데에 동시에 틀어박힌다. 아울러 멀쩡히 존재하던 공간이 지워지며 회색 장벽으로 대체되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래?"
"몰라. 또 외계종들 쳐들어오는 건 아니겠지?"
"침공이 맞대! 속보 떴어!"
"뭐?"
이쯤 되자 일반인들도 악마계 침공에 대한 사실을 알아차렸다. 어디에선가 비밀이 새어나간 것.
그러나 당장은 동요가 크지 않았다. 김현이 각성자들을 모았고, 이번에도 방어 차원에서 전투가 벌어진다는 것이 함께 알려졌기 때문이다.
침공, 이기기만 하면 오락거리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김현이 모든 전투에서 이겼다는 점이 일반인들의 안전 불감증을 부채질했다.
"이번에도 이기겠지?"
"당연한 말을! 다크 쉐도우가 죽은 게 아쉽다."
"맞아. 너 다크 쉐도우 팬이었지."
"난 홀리 앤젤이 좋아."
"디스트럽터가 최고지!"
차원 전장도 있고, 김현 일행이나 많은 각성자들의 사냥 장면을 방송으로 흔하게 볼 수 있어서일까?
고위 각성자를 연예인 보듯이 하는 사람이 많았다. 김현에게는 긍정적인 대목이지만 이런 곳에 신경 쓸 시간은 없었다.
침공 예상 시간 1시간 전.
모든 준비를 완료하고 방어 차원에 들어왔다.
"정말 너 혼자로 되겠어?"
김애경이 묻자 김현은 손을 가볍게 휘저었다.
"그래. 괜히 차원 방벽을 이중으로 설치했겠어? 함정 써서 악마들 날리고 시작하자."
"또 무슨 일 생기는 건 아니지?"
"그럴 리가. 어차피 공허는 내가 부르고 싶어도 못 불러. 그래도 비슷하게 재현은 할 수 있으니까 하급 악마들은 모조리 쓸려나갈 걸."
"조심하고. 이번에도 무슨 일 생기면 안 된다."
"걱정하지 말라니까. 아, 선생님은 여기에 수성 성혼 좀 넣어주세요."
"얼마나요?"
"탈진 직전까지요. 어차피 1시간 뒤면 회복되니까."
"그렇게 많이요?"
"네. 많이 필요해요."
22세기에 천상계 총독은 천공성 성혼을 발현하여 폭주하는 시공의 문을 제어하려 했다. 김현은 그걸 이세희의 수성 성혼으로 대체하여 비슷하게 따라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이번에 시도하는 건 시공 회귀가 아니라 시간 반복이니까.
미리 준비해 온 커다란 힘의 수정에 이세희의 성혼을 받았다. 이세희가 한계에 가깝게 힘을 주입하고는 땀을 흘리며 물러난다.
"다들 2차 방벽에 가 있으세요. 저도 함정 발동하고 바로 넘어가겠습니다."
"조심하세요."
"Mr, 김. 조심해서 넘어와요. 무리하지 말고."
"사령관님이 오시길 기다리겠습니다."
다들 넘어가고 혼자 남았다.
커다란 공동. 도시 하나가 들어갈 정도로 넓은 공간.
급히 만드느라 아무 것도 없다. 우주와 같았다. 빛도 공기도 없는 그곳을 홀로 유영하며 시간을 보낸다.
쩌정, 쩡.
보이는 것이라고는 오직 네 개의 거점과 연결된 통로 뿐. 그나마 그곳이 유리벽 금 가듯 갈라지기 시작했다. 이내 요란한 소리와 함께 강렬한 어둠이 폭발하듯 투사된다.
무너지는 차원의 벽.
언뜻 지옥의 풍경이 엿보인다.
용암 바다에서 영혼들이 고통 받으며 울부짖고 있다. 얼음 칼날을 몸에 박은 죄인들이 유황돌을 삼키며 괴로워한다. 작은 악마들이 칼날 다리를 지나다 떨어져 아래에서 입을 벌린 마수들의 먹잇감이 된다.
워낙 멀어 지독히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광경. 지구가 악마들에게 떨어지면 지구에도 같은 지옥이 펼쳐지겠지.
[호오……]
한 악마가 고개를 빼꼼 내밀더니 흥미롭다는 표정을 짓는다.
까만 신사복을 차려 입고 길쭉한 지팡이를 든, 피부가 거칠고 귀가 뾰족하다 뿐이지 인간을 닮은 악마.
아는 악마다.
"거물이 납셨군."
[후후, 제법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어서 말이야.]
자연스럽게 걸음을 옮겨 방어 차원 안으로 들어온다.
허공을 걷는 듯한 그 우아한 동작을, 김현은 조금 긴장하여 쳐다보았다.
메피스토텔레스.
속임수의 대가로 전 차원계에 이름 높은 8성 등급 악마.
이 자만이 아니다. 김현이 알만큼 유명한 악마가 속속 등장했다.
아스타로트, 마몬, 레비아탄, 벨리알……
여기에 릴리스까지.
그 수가 도합 스물. 악마계로서도 작정을 하고 전력을 퍼부운 것이다.
8성 악마만으로 끝이 아니다. 악마 군대가 수도 없이 방어 차원으로 몸을 들이민다. 고위 유령들만 쳐들어 왔던 유명계와는 전혀 다른 전력. 김현의 시야에 새까맣게 악마들로 들이찼다.
[흐응, 혼자냐?]
[함정이라도 설치했나 보지.]
[후후, 다 부질 없는 짓을……]
악마 군대 사이에 이질적인 존재들이 끼어 있었다.
지구인.
눈에는 보석을 꽂았고 귀는 흑요석 송곳으로 꿰어놓았다. 코는 잘렸고 입은 꿰맸으며 벌거벗은 육체에는 온갖 마법 술식이 가득하다. 특히 시선을 잡아끄는 건 심장 위치에서 소용돌이치는 기괴한 빛이었다.
뿌드득.
저절로 이가 갈렸다.
시간 반복을 언제든 실행할 수 있는 휴대용 보물이라고 보면 되겠다. 저걸 보니 어떤 희생을 치러서라도 지구를 지켜야겠다는 의지가 강렬하게 타오른다.
릴리스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곧 내 아름다운 이를 되찾을 수 있겠구나.]
[약속은 지켜라, 릴리스.]
묵직하게 압박하는 아스타로트.
마몬이 핥는 듯한 시선으로 김현의 뒤를 주시했다.
[으흐흐, 나도 성혼 맛 좀 볼 때가 되었지.]
[흥, 재수 없는 녀석.]
[너야말로.]
승리를 확신했는지 다들 여유가 만만했다.
김현이 시간 반복을 준비했다고는 생각하지 못한 모양. 하긴 블러드 공작이 시간 반복의 단초를 김현에게서 얻었다고 알리진 않았겠지. 릴리스와 일시적 동맹을 맺었다곤 하나, 악마계 또한 블러드 공작에겐 경쟁자에 불과하니까.
더 시간 끌 필요가 있을까?
짧게 읊조렸다.
"루프(Lo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