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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헌터사-176화 (176/200)

# 176

루프 -2-

팟!

빛이 터졌다.

진흙처럼 꾸덕지고, 솜사탕처럼 산뜻한 빛이다. 맑은 빛과 혼탁한 어둠이 뭉쳐 기이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그것이 이 도시 하나 크기의 세상을 한 번 둔하게 때렸다.

[웃!]

[조심하라!]

[결계 활성화!]

김현이 함정 하나로 백라왕과 흑인왕을 쓰러뜨린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 고위 악마들이 부산을 떨며 방어막을 형성했다.

대처가 빠르다. 빛이 터지자마자 대규모의 결계가 악마들을 감쌌으니까.

그러나 무소용.

당연한 일. 지금 터진 빛은 악마들에게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악마들이 웅성대며 주위를 살폈다. 그러다가 가장 앞에 서 있던 아스타로트가 손을 하나 들자 결계가 하나둘 걷힌다.

[무슨 속셈이지?]

대놓고 질문하는 아스타로트.

김현은 가볍게 어깨만 으쓱였다. 두 손목의 팔찌를 기동하여 멸망왕을 불러낸다.

고오오오.

공간이 갈라지면서 기이한 진동이 세계 전역으로 뻗어나갔다. 멸망왕이 가슴을 열고 김현을 받아들인다. 악마들은 그걸 그냥 보고만 있었다.

[설마하니 이것으로 끝이냐?]

빛만 한 번 터졌지 아무 변화가 없으니 의아했나 보다. 아스타로트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

묵묵부답.

대신 양 어깨의 기관포를 쏘아댔다. 왼손에 쥔 처형자도 불을 뿜자 아스타로트가 격노했다.

[건방진!]

악마계에서 호전적이기로 유명한 악마 중 하나. 아스타로트가 용의 날개를 펼쳐 돌진해온다. 눈 깜짝할 사이에 거대한 육체가 김현에게 육박했다.

그래, 이럴 줄 알고 있었지.

복수의 검을 비껴 쳐 올린다. 그 궤적에 아스타로트의 목이 걸렸다. 아스타로트가 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관절을 보호하는 갑각으로 검을 튕겨내려고 했다.

전생에서도 몇 번은 당했던 반격. 오늘도 당해줄 생각은 없었다.

쾅!

복수의 검이 폭주하며 폭발을 터뜨린다. 거대한 검의 일부가 똑 끊어져 날아갔다.

예전 붕괴의 손으로 몇 번 보여준 적 있는 폭주 공격의 변형. 전체를 터뜨려 금속 조각으로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만 끊어 미사일처럼 날린다. 전체적인 파괴력은 더 약해도 일점 공격은 이게 한 수 더 위였다.

[헙!]

기겁하는 아스타로트.

검 조각이 정확히 아스타로트의 목에 박혔다. 그리고 이때, 김현의 눈이 한 차례 더 번뜩였다.

꽈과광!

검 조각이 목에 박힌 채 폭발해 버린다. 자연히 거기 담긴 막대한 힘이 아스타로트의 전신을 뒤덮었다.

[크하아악!]

기습에 가까운 반격에 아스타로트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전신을 김현의 혼력이 무수히 두들겼다. 영체에 직접 타격을 받아 전신이 푸른 불꽃에 휩싸이고 만다.

타타탕!

이어지는 연속 총격.

혼력을 최대한으로 주입한 참이다. 흰색 광탄이 아스타로트의 심장을 두들겼다. 아스타로트가 검은 핏물을 뿜으며 뒤로 날아간다.

[아스타로트 님!]

[서쪽의 지배자시여!]

아스타로트의 권속들이 놀라 난리를 부린다.

급속 추진하여 따라 붙는 김현.

멸망하는 세계를 살며 익힌 격투술이 남김없이 발휘되었다.

왕관 쓴 아름다운 얼굴을 복수의 검을 근접에서 휘둘러 마구 내리긋는다. 처형자가 불을 뿜는 한편, 무릎을 높이 차 초진동 송곳을 검은 털이 난 배에다가 박아댔다. 거대한 구멍이 뚫리자 잠시 물러나 거기에다가 기관포탄을 박아 넣는다.

그때마다 쾅쾅 하며 충격파가 울렸다. 세계 전체가 홍역을 앓고 있었다.

[이놈이!]

아스타로트도 그냥 당하지만은 않는다.

서양의 용을 닮은 하체. 반인반수의 형상.

용이 불을 뿜는다. 지옥불이 무한하게 쏟아졌다. 한 번 뒤덮으면 소멸할 때까지 타오르니 당연히 물러날 줄 알았다.

무시한다.

그냥 지옥불을 덮어썼다. 오히려 더 도발적으로 달려들었다. 복수의 검을 두 손으로 잡고는 그대로 내리그었다.

썽둥!

[크아악! 이 하찮은 놈이!]

단칼에 잘리고 마는 용의 머리.

아스타로트가 발광을 했다. 용의 머리가 구슬픈 울음을 흘리며 허공을 떠다닌다. 표면이 곤죽으로 변해 버린 것이, 저걸 재생하려면 고생 꽤나 하게 생겼다.

지켜보던 8성 악마들이 낄낄거렸다.

[아스타로트 놈, 잘 난 척은 다 하더니 꼴 좋구나!]

[보기 드문 장면이로세! 부관, 잘 녹화하고 있겠지?]

[예, 마몬 님!]

[저걸 포르노로 만들어서 팔아먹으면 잘 팔릴 거야. 흐으, 내 하물도 빳빳해지는군. 릴리스, 그쪽도 하나 살 텐가?]

[흐응, 나쁘지 않겠어. 저급한 취미지만, 가끔은 저급한 영상이 끌릴 때가 있는 법이지.]

[역시 환락의 대모다운 말이로세.]

[저 인간놈, 보이는 것과는 다른데? 깃털같이 가벼운 놈이 뭐 저리 잘 싸워?]

[아스타로트가 방심한 거겠지. 아무리 약해 보여도 우리로 치면 천마의 작위에 이른 자다. 얕보면 안 돼.]

[흐흐, 이 기회에 천마 작위가 하나 비었으면 좋겠군.]

[안 그래도 아스타로트는 치우고 싶었어.]

악마들은 한가로이 둘의 결투를 지켜보았다.

김현과 아스타로트는 원래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 두 가지 요소가 현재 상황을 결정하게 되었다.

멸망왕, 그리고 전생의 경험.

기갑계의 장갑 기사가 괜히 기갑계에서 심혈을 기울여 육성한 게 아니다. 최강의 장갑인 멸망왕이 있으니 파괴력, 반응 속도, 방어 능력, 모든 점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또, 전생에서 몇 번 싸워보았다는 것도 한 몫을 했고.

일방적인 격투 끝에 복수의 검이 아스타로트의 심장을 꿰뚫었다.

[네놈, 네놈……]

아스타로트가 비참하게 사지를 꿈틀거린다.

용으로 된 하반신은 모조리 뜯겨나갔다. 두 팔도 팔뚝 아래가 없다. 얼굴도 난도질 당하여 처참한 모양새다.

여기에 검은 보석 같은 심장이 적출되어 바스라졌으니……

"흥."

김현은 비웃음을 한 번 날려주었다.

이어서 성혼 추출 시작.

아스타로트의 눈이 크게 벌어진다.

[안 돼! 안 돼! 차라리 나를 죽여! 소멸시켜라!]

"싫은데."

[살려줘! 친구들! 나를 살려줘! 제발! 날 살려주면 복속의 맹약을 하겠다!]

차디찬 김현의 반응에 목놓아 도움을 요청하지만 악마들은 멀리서 이죽거리기만 했다.

[어, 잘 가라고.]

[그 동안 함께 해서 더러웠어.]

[다시는 만나지 말자.]

김현으로서는 참 고마운 일. 느긋하게 성혼 추출을 끝냈다. 그러자 존재의 근거를 잃은 아스타로트의 몸이 모래처럼 무너져 내린다.

완전한 소멸.

8성 성혼만 9개 남았다.

[후후후……]

마몬이 징그럽게 웃으며 두꺼비 같은 몸을 일으킨다.

[내가 놈을 처리해도 되겠지? 친구들?]

[누구 마음대로?]

[그건 안 되지.]

가만히 있던 악마들이 참전하겠다는 눈치를 내비친다.

여기 있는 악마 중에서는 서열이 높은 자들이다. 메피스토텔레스는 물론, 레비아탄과 벨리알까지 참전했다.

"왜, 한꺼번에 다 덤비시게?"

김현의 말에 네 악마의 시선이 교차했다.

하나만 나서서 성혼 아홉 개를 다 독식할 것이냐, 아니면 셋씩 갈라먹을 것이냐?

탐욕스럽기로 차원계 전체에 이름 높은 그들이지만 바보는 아니다. 여기서 혼자 나서기에는 조금 전 아스타로트를 대상으로 보여준 김현의 용맹이 마음에 걸렸다.

메피스토텔레스가 흐물흐물 웃었다.

[시간 끌 것 있나? 빨리 끝내고 성혼을 갈라먹지. 이거 참, 인간 놈들 성혼이나 빨아먹으려고 왔더니 가외의 소득이 있게 생겼군.]

[그럽시다.]

[흐흐흐, 한 번이라도 당하는 놈은 종말의 그날까지 비웃어 주마.]

네 악마가 천천히 다가왔다.

인간을 닮은 메피스토텔레스, 점액질로 녹아내린 두꺼비를 보는 듯한 마몬, 거대한 악어 괴수의 형상을 한 레비아탄, 언뜻 보면 아름다우나 성혼으로 보면 추악하기 그지없는 벨리알.

'이길 수 있을까?'

힘들다.

김현은 죽음을 각오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제부터 겪을 고통을 예감하며 각오를 다졌다.

"죽어!"

넷 중 가장 약한 것은 마몬. 빛처럼 돌진하며 복수의 검을 휘두른다.

[요 놈이?]

적잖이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다. 마몬이 썩은 고깃덩어리 같은 두 손을 내밀었다. 질척거리는 황금색 빛이 일어나 강력한 방어막을 형성했다.

깡!

복수의 검이 방어막을 내리치자 금속음이 터졌다. 동시에 돌아오는 강력한 반탄력.

[경고, 경고. 손목과 팔꿈치 관절에 비정상적인 손상이 가해지고 있습니다.]

멸망왕의 충격 흡수 장치로도 완벽히 분산이 안 된 모양이다. 김현의 시야 한쪽에 홀로그램으로 멸망왕의 상체 관절 마디마디가 붉게 표시되는 걸 보면.

"나도 알아!"

부르짖으며 몸을 뒤집었다. 황금색 방어막이 토해내는 반탄력을 거꾸로 이용해 벨리알에게 뛰어든다.

[오호.]

벨리알이 짧게 감탄을 한다. 마몬의 성혼은 충격을 몇 배로 증폭하여 반사하는데 그걸 견뎠다는 게 인상 깊었나 보다.

냉정하긴 냉정했다. 아스타로트처럼 당하는 대신 두 손을 한 데 모았다. 그 중심에 흐린 검은 광채가 어리더니 김현을 정확히 직격했다.

암전되는 시야. 전개되는 미궁.

거대한 미궁이 김현을 가뒀다. 강력한 공간 계열 성혼이자 정신 계열 성혼으로, 대상을 아차원 공간에 잠시 가두는 효과가 있었다.

"또 이거냐!"

거세게 부르짖는 김현.

옛날 생각이 난다.

김현이 여기 당해 있는 동안 조금씩 말라갔지. 나중에는 고목처럼 말라 비틀어지게 된다. 당시 천운으로 빠져 나오지 못했으면 거기서 완전히 끝났을 것이다.

"무너져라!"

복수의 검을 역수로 쥐고 지면에 번개처럼 꽂았다. 이어 멸망왕의 추진 장치를 극한까지 혹사시켜 지면을 뚫고 들어간다.

쾅! 콰쾅!

땅이 아니라, 벽처럼 무너지고 마는 지면.

그곳을 뚫고 나오자 예의 허무 공간이었다. 악마들이 보내는 시선이 화살이 되어 김현에게 날아와 꽂힌다.

[이, 이거 뭐야?]

[어떻게 벨리알 님의 미궁에서 저리 쉽게 벗어날 수가 있지?]

[빌어먹을 인간 놈이!]

그야 아주 짧은 순간 위기만 모면하려고 쓴 성혼이니 당연하지. 벨리알이 작정을 하고 힘을 모아 성혼을 발현했다면 이리 쉽게 나오지는 못했을 터.

당장 김현을 보는 벨리알의 눈이 축축해졌다.

[놈……]

"어째 듣기보다 약한데? 제대로 힘 좀 써 봐."

짐짓 얄팍한 도발을 날렸으나 벨리알은 코웃음만 쳤다.

[교활하기는. 네 소멸은 확정이니 더 보채지 마라.]

"할 수 있으면 해보던가."

[그러지.]

벨리알의 공세가 확연히 강해졌다.

환상을 걸고, 전기 신호를 흘려보내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지옥불과 극점 냉기를 소환하여 공격하는가 하면 기기묘묘한 소환수를 부렸다.

다른 이들도 적당히 손을 보탠다. 온갖 마법이 김현을 괴롭혔다. 황금색 방어막이 시도 때도 없이 생겨나 김현의 진로를 가로막았다. 레비아탄은 직접 몸을 날려 육박전을 즐겼다.

[크하하! 이것도 받아보아라!]

"웃!"

레비아탄은 본래 달 보다 큰, 거대한 악어 형태의 해룡이다. 김현과 육박전을 하겠다고 크기를 멸망왕의 2배 정도까지 줄였다. 그런데도 질량은 여전하니 도저히 맞붙을 수가 없었다. 스치기만 해도 가루가 될 판이니.

[으하하하! 즐겁구나, 즐거워!]

"젠장!"

레비아탄이 다른 악마들과는 달리 특별한 마법도 재주도 없지만 49 천마 중 상위에 있는 이유. 크기를 줄여도 질량이 같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면 거의 살아 있는 재앙이다.

악마들은 차분히 김현을 압박했다. 분전했지만 에정된 끝이 조금씩 다가왔다. 그리하여 약 하루가 지났을 때, 멸망왕은 파괴되고 두 팔과 두 다리가 잘리는 신세가 되었다.

마몬이 낄낄 웃으며 두툼한 혀로 김현을 핥았다.

[으하하하! 그러게 좀 얌전히 있지 그랬어. 흐흐, 이거 이거 한 입에 삼켜도 비리지가 않겠네. 콱 먹어버릴까?]

[그럼 안 된다, 못생긴 두꺼비 녀석아.]

경계하고 있던 릴리스가 즉시 날아왔다.

[이 핏덩이는 내 아름다운 이의 재료가 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살려두어야 하니 탐욕을 거두어라.]

[마몬에게 탐욕을 거두라니, 재미있는 말을 한다니까. 릴리스도.]

[그게 계약이었으니 어쩔 수 없지. 성혼은 우리가 가져도 저 육체는 릴리스에게 귀속하기로 했으니.]

[끙!]

마몬이 아쉽다는 듯 뒤로 물러났다.

릴리스가 김현을 끌어안고는 그윽한 눈으로 쳐다본다.

[핏덩이야, 조금만 참거라. 네 옛 아름다운 모습으로 되돌려 줄 테니.]

도대체 뭘 어떻게 한다는 거야?

릴리스가 말하는 옛 모습으로 돌이키기란 불가능하다. 릴리스도 그 사실을 잘 알 텐데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하긴, 그런 건 아무래도 좋지.

김현은 아직 고문 당하지 않은 것을, 성혼을 추출 당하지 않은 것을 매우 감사히 여겼다. 아무리 수만 번의 죽음을 각오했다 해도 고통을 더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

어느새 머릿 속에 맞춰둔 시계가 0시 0분 0초를 향해 가고 있었다.

득의하게 웃으며 악마들을 한 번씩 둘러본다.

악마들이 어처구니 없다는 눈빛을 보냈다.

[웃어?]

[미쳤나 보군.]

[미쳤으니 혼자 우릴 막아섰겠지.]

[장난은 끝이다. 이제 차원 방벽을 무너뜨리고……]

레비아탄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팟!

세계가 또 다시 하루 전의 그 기이한 색채로 물든 까닭이다.

휘익 멀어지는 세계.

무슨 상황이 벌어졌는지 악마들이 눈치 채기 전, 김현의 목소리가 멀찍이에서 들려왔다.

"다시 보자, 멍청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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