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헌터사-177화 (177/200)

# 177

루프 -3-

잠시 후 익숙한 광경이 펼쳐진다.

아무 것도 없는 공허한 세계. 한쪽에는 김현이, 반대쪽에는 악마들이 대치하고 있다.

악마들의 가장 앞에 서 있는 것은 하반신은 용이며, 상반신은 악마와 천사를 섞어 놓은 듯한 형태의 인간형 악마.

악마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혼란스러워했다.

[난 죽었는데……]

아스타로트.

분명히 김현에 의해 성혼을 추출당해 죽은 악마가 멀쩡하게 부활한 것이다.

그것은 김현도 마찬가지. 레비아탄에 의해 으깨졌던 멸망왕도 원래의 육중한 모습을 뽐내고 있었다.

메피스토텔레스가 당황하여 소리를 질렀다.

[설마! 시간 반복이냐!]

"그래. 너희만 시간 반복을 쓸 줄 알았어?"

[말도 안 되는…… 어떻게 변방 차원의 미개한 하급종 따위가 시간의 축에 손을 댄 것이냐!]

"모르면 블러드 공작한테 물어보던가."

한 차례 술렁임이 악마 전체에 번졌다.

듣고 있던 아스타로트의 잔혹하도록 아름다운 얼굴이 꿈틀거린다.

[시행하라.]

[어, 잠깐만! 아스타로트!]

메피스토텔레스가 당황하여 지팡이를 들었으나 늦은 다음. 전열에 서 있던 인간들의 심장에서 검은 빛이 솟구쳤다.

세계 전역으로 뻗어나간 빛. 그것이 어떤 조화를 부렸다.

몸이 부웅 떠오른다. 누군가 잡아 끌어당기는 것 같다. 도시 하나 크기의 세계가 저 아래로 가라앉는다. 그리하여 좁쌀만큼 작게, 나중에는 하나의 점처럼 변해 버린다.

아까 본 광경.

그리고 또 다시 익숙한 장면이 재생된다. 김현은 한쪽에, 악마 군대는 반대편에 서 있었다는 말.

"멍청하긴."

김현은 노골적으로 악마들을 비웃었다.

"시간 반복이 중첩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나 봐?"

인류 저항군이 무수한 실험과 희생을 거쳐 알아낸 사실.

시간 반복은 중첩되지 않는다. 시도된 즉시 먼저 펼쳐진 시간 반복에 통합되고 만다. 그 과정에서 잃는 것도 있었다.

검은빛을 뿌렸던 인간들.

지금은 사라졌다. 시간 반복이 그리는 거대한 순환에서 튕겨 나간 것. 원래 시간 축으로 복귀했다는 뜻은 아니다. 시간의 미아가 되어 분자 단위로 흩어지는 죽음을 맞았겠지.

아스타로트가 혼란스럽다는 표정을 짓는다.

[대체……]

"고마워. 내 일을 도와줘서."

[인간 놈!]

아스타로트가 으르렁거린다. 그걸 따라 하반신의 용이 거칠게 울부짖으며 김현을 노려본다.

"덤비게?"

복수의 검을 들어 아스타로트를 겨눈다. 아스타로트가 몸을 움찔거렸으나 성질대로 덤벼들진 못했다. 메피스토텔레스가 지팡이를 들어 저지한 까닭이다.

[뒤로 빠지게.]

[하지만……]

[또 자네 역정대로 일을 그르칠 셈인가! 이번 일은 나에게 맡기게.]

결국 아스타로트가 이를 뿌드득 갈고는 뒤로 물러난다. 황금 보석 지팡이를 하나 메피스토텔레스에게 건네는 것을 보면 지휘권도 이양한 것 같다.

메피스토텔레스가 두 지팡이를 한꺼번에 쥐고는 김현을 쳐다보았다.

[자네도 실수를 한 게 있네, 인간.]

"뭔데?"

[시간 반복이라, 듣기에는 참 거창해 보이지. 모든 어려움을 다 헤쳐나갈 수 있을 것 같고. 실은 그렇지가 못하다네. 가능성이 1인 것을 백 번 정도 재도전하면 성공한 결과만 남길 수는 있겠지. 그러나 가능성이 처음부터 0인 것을 백 번, 천 번, 만 번 반복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나? 정중히 권고할 때 시간 반복을 해제하도록 하게. 그럼 깔끔하게 죽여주도록 하지.]

김현은 짧게 비웃음을 머금었다.

"착각하는 게 있어."

[착각?]

"그래. 당신네 전력을 봐. 지구의 모든 각성자와 군대가 다 모여도 당신들을 어쩔 수는 없어. 내가 그걸 모를 것 같아? 그런데 설마, 내가 당신들과 싸우고 또 싸워서 당신들 전부를 전멸시키는 실낱 같은 가능성을 찾아보려고 한 줄 알았어? 그럴 거였으면 애초에 시간 반복 대상을 나 하나로 한정했겠지. 이 세계 전체가 아니라."

[으흠……]

메피스토텔레스도 그 점을 안다. 그래서 전면 공격을 하는 대신 이렇게 말을 붙여 보는 거였다. 최소한 뭘 노리는지는 알아야 했으니까.

[의미 없는 짓이다!]

레비아탄이 우렁우렁한 외침을 토했다.

[인간이여, 너는 우리에게 고문받고, 고통당하고, 수없이 죽을 것이다! 시간 반복? 재미있겠구나! 나는 내 노예들을 고문할 때 죽이지 않으려 애를 써야 했지. 하지만 여기서는 마음껏 고문할 수가 있겠구나!]

동시에 달려드는 거대한 동체. 시커먼 그림자가 김현의 동공 가득 확대되었다.

'성격 급하기는.'

김현에게는 잘된 일이다. 멸망왕을 급히 기동하여 회피한다. 레비아탄이 재미있다는 듯 껄껄 웃으며 체구를 줄인 다음, 거의 순간 이동하다시피 하여 멸망왕을 들이받았다.

휙!

몸을 체조 선수처럼 90도로 굽혀가며 간신히 피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름드리나무 같은 꼬리가 날아온다.

레비아탄의 힘은 결국 무게에서 나온다. 김현도 정면으로 받을 생각은 못했다. 두꺼운 복수의 검을 가로로 뉘여 꼬리를 미끄러뜨린다. 아울러 허공으로 몸을 튕기며 처형자를 난사했다.

타타타탕!

[으하하, 재미있구나!]

레비아탄이 흥겹다는 웃음을 토했다. 머리만 비대하게 늘여서는 김현을 집어삼키려고 했다. 김현은 방심하지 못하고 복수의 검으로 혀를 긋고는 탈출했다.

혼광 악어에게 그랬던 것처럼 레비아탄의 내부로 들어가는 것은 불가. 들어가는 즉시 소화되어 성혼을 추출 당하기 때문이다.

[합세하겠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메피스토텔레스도 끼어들었다. 다시금 마법이 세계를 수놓는다.

[그러시게나!]

레비아탄도 껄껄 웃으며 환영했다.

악마들에게는 1대 1이라는 개념이 별로 없다. 전리품 문제만 해결되면 합동 공격은 얼마든지 했다. 전투 자체에서 쾌감을 얻기보다는 상대를 자빠뜨리고 조롱하며 고통을 줄 때 가장 큰 쾌락을 얻는 족속이니.

'젠장.'

하루를 버틸 수가 있을까?

지금 김현을 공격하는 네 악마 중 전생에서 상대해 본 것은 벨리알이 전부. 그나마 딱 한 번 싸워 본 것이 다다. 아스타로트에게 그러했듯 경험에서 오는 우위를 가져올 수가 없었다.

입맛이 쓰다. 예감했던 고통을 지금부터 견뎌야 한다는 사실을 직감한 탓이다.

'여기가 진짜 나의 전장이구나……'

의지를 다잡는다.

있는 힘, 없는 힘을 모조리 끌어모은다. 처형자를 통해 배출한다. 복수의 검에 숨겨진 기능을 몽땅 썼다. 밑바닥의 밑바닥, 준비한 것을 다 내밀었다.

그러나 오래 버티기는 힘들었다. 김현이 질기게 버티자, 팔짱끼고 있던 아스타로트와 릴리스까지 가세한 것.

위잉……

흔들리는 시야, 울리는 이명, 저릿저릿한 손발.

분홍빛 환각이 펼쳐진다. 아름다운 세상이 김현을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열여덟 차원계가 애초에 연결되지 않아 인간들끼리 지지고 볶는, 김현이 꿈에도 그리던 세상이었다.

"릴리스, 장난질은 하지 말지."

[호호.]

읊조리듯 외치자 짧은 웃음이 송곳처럼 귓가로 파고든다.

그리고 둔중한 충격.

"큭!"

간신히 신음을 삼켰다.

용의 몸을 가진 악마가 김현을 정면으로 들이받은 것이다. 릴리스의 정신 공격과 아스타로트의 저돌적인 돌진이 제대로 맞물려 발휘되었다.

손발이 어지러워진다.

김현을 상대로 날뛰는 악마들 하나하나가 신화나 설화에 나올 정도로 강력한 악마들이다. 8성 악마 중에서도 상위권이었다. 이들이 하나둘도 아니고 여섯이나 합공을 해오니 당할 수가 없었다.

딱 18시간.

그게 김현의 한계였다.

그래도 오래 버텼다. 최강의 장갑을 타고 있다고 해도 대단한 것은 대단한 일.

[제법이었다, 인간.]

레비아탄이 멸망왕을 씹어먹으며 툭, 하고 치하의 말을 던졌다.

금속 부품이 우스스 떨어진다. 레비아탄은 멸망왕의 심장만 빨아먹고는 만족에 겨워 그르릉 하는 숨소리를 냈다.

[으흐흐, 굴욕을 갚아줘야겠군. 기대해도 좋다, 인간.]

아스타로트가 눈을 벌겋게 빛내더니 왼손을 김현의 오른팔 어깨죽지에다가 가져갔다.

다가올 상황을 직감했다.

눈에 힘을 주는 한편 전자 회로를 몇 차단했다. 아니나 다를까, 아스타로트가 힘을 주어 김현의 오른팔을 뜯어냈다.

부드득!

금속 뼈가 꺾이고, 생체 근육이 뜯어지며 줄줄 늘어났다. 보통 사람보다 확연히 짙은 검붉은 피가 푸확 하고 터진다.

실로 끔찍하고 잔인한 장면.

그러나 김현의 얼굴은 담담하기만 했다. 아스타로트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으르렁거렸다.

[잔재주를 부려? 놈!]

강렬한 성혼이 김현을 훑는다.

순간 눈가가 꿈틀거리고 마는 김현.

분명히 차단한 전자 회로가 복구된 것이다. 거길 따라 강렬한 통증이, 무수히 많은 오류 경고가 밀려들었다.

"으아아악!"

김현은 찢어져라 비명을 질렀다.

그제야 아스타로트가 흉악한 웃음을 지었지만, 김현은 계속 비명을 지르는 대신 싸악 안면 몰수하고는 얼굴 가득 비웃음을 머금었다.

"좋냐, 변태 새끼야?"

[이 천한 하급종이!]

그대로 왼팔까지 뜯어버린다.

처절한 고통이 척추를 관통하여 대뇌까지 직격한다. 김현의 이마에서 한 줄기 식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견뎌낸다. 이 정도 고통쯤은 지금까지 겪어왔던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으니.

[그만하게, 아스타로트.]

[하지만……]

[고문할 시간은 많아.]

[흐흠, 어차피 고문할 거면 내가 조금 갖고 놀면 안 될까? 내 고문을 제대로 감당하는 존재가 드물어서.]

[그만두지. 지금은 물어볼 게 많아.]

[쯧, 알았어.]

악마들은 물러나고 메피스토텔레스만 앞으로 나섰다. 지팡이를 들더니 김현의 상처 두 곳을 툭툭 친다.

"끅!"

전깃불로 지지는 듯한 통증. 저절로 신음이 나온다.

메피스토텔레스가 손을 휘저었다. 앉은뱅이 의자가 두 개 소환된다. 작은 탁자와 다과도 따라왔다. 메피스토텔레스가 차를 한 모금 하더니 살짝 턱짓을 했다.

[어때, 차라도 한 잔?]

"가지가지 한다, 아주."

악마들이 기괴한 취미를 가진 것이야 이야깃거리도 아니다. 앉은뱅이 의자에 걸터앉았다. 메피스토텔레스가 차를 따라 주는데, 아쉽게도 팔이 없어 차를 마실 수가 없다.

메피스토텔레스가 이죽거렸다.

[왜 그러는가? 차가 입에 안 맞나?]

"어, 다 망해가는 세상의 다 늙은 여자의 눈물 따위를 마시는 건 내 취향 밖이라서 말이지."

신루차.

즉, 거신의 눈물 차.

혼력을 극도로 맑게 유지시켜주고, 영혼을 일깨우는 효능을 가진 차였다. 메피스토텔레스가 즐겨 마시는 것으로 유명했다.

[오호.]

메피스토텔레스가 감탄한 얼굴을 한다. 그러더니 흥이 깨졌다는 듯 김현의 의자를 없애 버렸다.

퍽!

분명히 아무 것도 없는 세계인데 언제부터 땅이 생긴 걸까?

김현은 단단한 대리석 바닥에 거칠게 나동그라졌다. 성혼이 전부 금제되어서 전신에 힘이 없었다. 지금 김현은 일반인보다도 못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시간 반복을 한 이유가 뭐지? 우릴 이길 수도 없는데……]

이럭저럭 하는 사이 벌써 20시간이 지났다. 4시간 밖에 안 남았다는 사실 때문에 바로 직구를 날린다.

"글쎄?"

순순히 대답하면 재미없지. 김현은 엎드린 채 얼굴만 들고는 히죽거렸다.

메피스토텔레스가 한숨을 쉰다.

[이런, 이런…… 그렇게 뻗댈 처지가 아닌데.]

"어차피 4시간 후면 새로 시작이다. 고문할 거면 해 봐."

[결국, 알게 될 거, 왜 그리 뻗대는 건가? 이해할 수가 없군.]

그냥 말해주면 재미없잖아.

김현은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메피스토텔레스의 얼굴이 기묘하게 뒤틀린다. 그러더니 지팡이를 김현의 명치에다가 가져갔다.

"끄아아악!"

소름끼치게 터지는 비명.

일반적인 고문을 한 것이 아니었다. 메피스토텔레스는 김현에게 성혼 추출을 시행했다.

본격적으로 한 것은 아니고 아주 조금만, 거의 맛보기로.

그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웠다. 생명과 영혼, 혼력이 빠져나가는 느낌이란 지독하기 짝이 없었다. 무한한 고독의 우주에서 부유하며 전신을 쥐어짜는 느낌이라고 하면 비슷할까.

'이걸 감수했던 거냐……'

옛 김현의 선택을 상기하자, 사무치도록 뜨거운 감정이 가슴속에서 휘몰아친다.

서경태도 생각난다. 서경태 또한 마지막 순간에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 테니……

[성혼을 추출당해도 4시간만 지나면 멀쩡히 살아나겠지?]

메피스토텔레스가 사악한 웃음을 짓는다.

[약속하지. 왜 이런 일을 저질렀는지, 그것만 알려주면 돼. 그럼 최소한 앞으로 4시간 동안은 그대를 얌전히 내버려 두겠네. 단, 이 관대한 제안도 뿌리치면 시간이 반복될 때마다 그대는 성혼 추출의 고통을 겪게 될 것이야.]

악마들이 흥미롭다는 눈빛을 번뜩인다.

이것은 아귀지옥.

수락해도 고통, 거부해도 고통만이 기다린다. 과연 이 대가 센 인간이 어떤 선택을 할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비죽 웃는 김현.

"너희는 다 멍청이야."

[그게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닌 것 같네만.]

"알고 싶어 하니 알려주지. 블러드 공작의 실험체들, 너희도 다 확인했겠지? 영혼의 업이 쌓인 대신, 육체가 노화되어 죽기 직전이 됐다는 걸?"

[그랬다만.]

"그럼 말이다. 기본적으로 영원히 사는 악마들은 어떻게 될까? 1만 년, 10만 년은 버티겠지. 그런데 그게 1억 년이라면? 10억 년이라면? 여기 있는 너희 중에, 지구 기준으로 1억 년을 온전히 보낸 자가 하나라도 있어?"

정답부터 말하자면 없다. 이들이 걸핏하면 입에 담는 게 영겁과 영원이지만, 기실 그들의 차원계는 일반적인 물질계와는 시간의 흐름이 전혀 다르니까. 괜히 1주기를 시간 흐름의 기준으로 삼는 게 아니다.

메피스토텔레스의 눈이 커졌다.

[설마?]

김현이 활짝 웃었다.

"같이 죽자!"

구르르릉.

언젠가부터, 김현의 심장에 새겨진 폭주 술식이 돌아가고 있었다.

그것이 빛을 뿜었다.

번쩍!

핵폭탄도, 중성자 폭탄도 능가하는 가공할 파멸의 빛을.

빛이 세상을 집어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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