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헌터사-178화 (178/200)

# 178

멸망의 신좌 -1-

"커헉!"

숨넘어가는 신음.

메피스토텔레스가 눈이 벌게져서는 지팡이를 내리찍었다. 지팡이에 담긴 미증유의 힘이 김현의 전신을 찢어발긴다.

[해체해라, 인간!]

"그렇게는 못 하겠는데."

[그렇다면 또 네게 성혼 추출의 고통을 안겨주마!]

"해보시던가. 내가 그 소리를 지금까지 몇 번이나 들었더라?"

지지 않고 비웃는 김현.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영혼을, 비단 육체만이 아닌 영혼마저 으스러뜨리는 그 고통마저 헤아릴 수 없이 거듭한 끝에 익숙해진 것만 같다.

[네놈……]

처음에는 그윽하던 릴리스의 시선도 바뀌었다. 김현을 원수 대하듯 쳐다보는 것.

다가와서 손을 얹는다. 환상이 김현을 감쌌지만 역시 견뎌낸다. 완전히 무장해제된 지금에도 릴리스의 정신 공격을 생으로 이겨낼 만큼 정신력이 강해진 것.

[강해지고 있군.]

아스타로트가 놀랍다는 듯 말한다. 그 얼굴 한편에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벨리알이 속삭였다.

[인간. 지금 네가 강해지는 것은 썩 좋은 징조가 아니다. 너도 영혼의 무게에 대해 알지 않느냐?]

영혼의 무게, 다시 말하자면 업(業).

여기 있는 김현과 악마들은 이미 똑같은 하루를 수만 번도 넘게 경험했다. 처음 몇 번의 하루를 덧없이 날려 보낸 후, 악마들은 합심하여 김현을 고문했다. 처음에는 육체적인 고통을, 다음에는 영혼의 고문을, 마지막에는 성혼 추출로 이어지는 연쇄 고문.

그 결과 김현의 영혼에 업이 쌓이기 시작했다. 아직 8성 각성자라고 하기엔 모자라지만, 다른 이들보다는 확실히 무거워진 것.

악마들은?

딱 봐도 티가 난다. 무겁다 못해 가라앉을 지경이다. 8성만 아니고 다른 악마들 모두가 다 그랬다.

김현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버티면 내가 이긴다."

[그 전에 네 영혼을 소멸시켜주마!]

"해보던가. 계속 그러고 있잖아?"

[이이익!]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는 육체의 죽음도, 영혼의 소멸도 무의미하다. 되돌아가는 순간 언제 그랬냐 싶게 재생되고 마니까.

[네 시도는 무의미하다.]

레비아탄이 세상을 떨쳐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악마. 태곳적부터 존재한 악마 중의 악마요, 왕 중의 왕이다. 그깟 영혼의 무게는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음이니, 오히려 미래의 권세만 지음될 뿐이다.]

"그럼 견뎌 보시던가."

김현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잠시 고문이 멈춘 틈을 타, 악마들에게 통렬한 일침을 날렸다.

"악마? 천사? 용왕? 너희들은 너희가 선택받은 종족이며, 우월한 족속이라고 믿겠지. 하지만 내 관점에서는 아니야. 성혼을 품을 수 있는 종족이면 영혼의 질은 어느 종족이든 똑같아. 충분한 성혼만 주어지고 계기만 있다면, 각 개체가 너희 수준으로 분명히 올라갈 수 있다고."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것이냐?]

"간단해. 인간의 영혼이 감당할 수 없는 무게는 너희 악마들도 감당할 수 없다! 자, 같이 가자. 너희 영혼이 바스러질 때까지 난 이 시간 반복을 절대 해제하지 않는다."

[어리석은……]

[너도 결국은 소멸하게 된다.]

[시간 반복 술식의 해제 명령어를 대라! 대지 않으면 성혼을 추출하겠다!]

"아, 귀에 딱지 앉겠다. 그냥 추출하라니까?"

사실 김현은 처음부터 시간 반복이 해제되는 명령어 같은 건 설정하지 않았다.

방법이라면 딱 하나.

압도적인 힘으로 시공을 꿰뚫어 차원계 전체를 박살 내는 것인데 그게 가능할까?

8성 악마들이 지지고 볶고 난리를 피운 모양이지만 끄떡도 하지 않았다. 저게 가능해지려면 9성 악마 정도는 튀어나와야 할 것이다. 시간이라도 충분하면 증폭 술식을 겹겹이 중첩하여 뚫어보겠지만 이 세계에서는 하루마다 처음으로 돌아가니 그것도 불가능하다.

[빌어먹을!]

메피스토텔레스가 욕설을 내뱉으며 김현의 심장에 지팡이를 꽂았다.

몸을 떠는 김현.

압도적인 고독, 파멸적인 추위, 쥐어짜는 아픔이 찾아온다.

'이상한 일이야.'

지독히 고통스러운 경험이다.

하지만 지금은 담담히 자신의 상황을 마주 보게 된다. 영혼과 육체가 갈리고 성혼이 강제로 뜯어져 나가고 있어도 한 줄기 이성을 유지하는 것.

찢어지는 영혼 너머로 언뜻 어떤 것이 엿보였다.

까맣되 밝고, 멀되 가까운 무엇.

공허.

김현의 형상을 빼닮은 그것이 이쪽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기억난다.

언젠가 마주한 적이 있었지.

옛 김현의 기억 속에서, 아니 아주 예전에 언젠가, 그것도 아니면 어젯밤 꿈속에서, 혹은 조금 전 악마들에게 비웃음을 날릴 때……

모르겠다, 모르겠어.

혼몽한 의식 속에서 김현은 무한히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세계의 시간이 돌아가 첫 장면이 재생되었다.

[잡아!]

악마들이 우르르 날아온다.

8성 악마들만 아니라 아래 등급 악마들도 악다구니를 부리고 있었다. 아차 하는 사이에 김현이 도망칠 모든 방향을 점해 버린다.

[포기한 거냐?]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고문당하는 걸 피하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던 김현이다. 지금은 그저 멍하니 있으니 이상했나 보다.

"포기? 그럴 리가."

김현은 양팔을 벌렸다.

"마음대로 해보라고."

[으드득!]

릴리스가 별안간 이를 갈았다.

[이 핏덩인 녀석아, 여가 부군을 만나겠다는데 왜 이리도 방해하는 것이냐?]

"말 잘했다. 하나 물어보자. 도대체 네 그 부군이라는 놈을 어떻게 만나겠다는 거야? 너도 인정했잖아. 완전히 죽어서 없어졌다고. 시공 회귀라도 하려고?"

릴리스가 멈칫하더니 순순히 대답했다.

[새로 만들 생각이다.]

"만든다고? 어떻게?"

[네 영육이라면 꽤 괜찮은 재료가 되겠지……]

뒷말은 아끼고 김현을 주시하는 릴리스.

퍼뜩 소름이 끼쳤다.

옛 김현이 저질렀던 일을 비슷하게 재현할 생각이었나 보다. 그 바탕은 지금의 김현처럼 기계와 곤충이 아닌, 유령과 흡혈귀, 그리고 공허가 됐겠지.

하지만 어떻게?

애초에 유령과 흡혈귀의 혼종이 된 것부터가 기적이다. 오죽하면 그 희귀함에 릴리스가 그토록 탐을 냈을까. 여기에 공허까지 더한다고?

"불가능한 소리야. 그런 존재는 앞으로도 없었고, 뒤로도 없을 거다."

[흥. 억겁의 세월을 투자한다면 못 이룰 것도 아니지. 그것이 블러드 공작과의 계약 조건이었다. 블러드 공작은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했다.]

"쯧, 욕심에 눈이 멀었구나, 멀었어."

보나마나 뻔하다. 블러드 공작은 만든다가 아니라 만들도록 한다고 조건을 달았을 것이다.

블러드 공작 입장에서도 좋지. 공허와 시공에 관한 연구가 결국은 영원으로 이어지니까. 애가 닳아 있던 릴리스는 몇 가지 조건을 다는 것으로 수락했을 테고.

[잡담은 그만.]

레비아탄이 또 나선다.

[인간. 또 시작해 보지. 과연 어디까지 버티나 보겠다.]

"그러던가. 뭐, 지옥 형벌 10만 종이라고 했지? 그거 다 별 것 아니었어. 이번에는 좀 참신한 걸로 괴롭혀 봐. 이름만 거창했다고. 차라리 성혼 추출이 가장 고통스러웠어."

[훗, 울고 짜고 애원하던 주제에 허세 만만이로구나.]

김현도 처음부터 이리 대범하게 넘기진 못했다. 처음 백 번의 하루를 보낼 때만 해도 추한 모습을 보였다.

숨넘어가는 비명을 지르는 것은 기본. 울면서 악마들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하기도 했다. 죽여주겠다는 말에 이성을 잃고 굴욕적인 행동도 했으니……

그러나 기억 속에서는 벌써 까마득하다. 수만 번의 하루, 햇수로 따지면 벌써 300년을 보낸 탓에 김현은 전과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 있었다.

"어, 그래. 그랬지. 그런데 내 느낌에는 너희가 곧 그렇게 될 것 같은데."

[놈……]

고작 300년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시간 반복. 아무리 작다고는 해도 세계 하나가 통째로 지워졌다가 재생성되는 것을 반복하고 있다.

거기서 생기는 업은 무시무시했다. 이제는 악마들도 느낀다. 자신들의 영혼이 무거워진다는 사실을. 그만큼 힘도 더 강해지지만, 부담도 더 커졌다.

[어째서 네놈만 멀쩡한 거냐!]

멀찍이 있던 낮은 등급의 악마 하나가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그냥 무시.

악마들, 특히 전면에 선 메피스토텔레스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안 올 거야? 그럼 내가 간다?"

[노옴!]

일직선으로 덤벼드는 메피스토텔레스.

마법을 부리고 어쩌고 하지도 않는다. 급한 마음에 육박전으로 지팡이를 휘두르고 본다.

여유롭게 맞이하는 김현.

복수의 검이 지팡이를 미끄러뜨렸다. 육박전은 원래 메피스토텔레스의 장기가 아닌 만큼 균형이 무너지고 만다. 그때를 노려 추진 장치를 발동시켰다. 멸망왕이 급속 가속하여 메피스토텔레스에게 파고든다.

[어딜!]

때를 맞추어 아스타로트가 끼어들었다.

여기 있는 자 중 육박전으로 상대가 될 것은 역시 아스타로트와 레비아탄 밖에 없다. 김현이 최초 가졌던 이점은 없어진 상태. 시간 반복을 거듭하면서 서로에게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다.

[인간!]

레비아탄이 뒤에서 입을 쩍 벌리고 달려들었다. 이미 불붙은 이상 김현도 전력을 다해 대항했다. 복수의 검이 꺾이고, 처형자가 박살 나고, 멸망왕이 소멸하여 맨몸으로 싸우게 될 때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은 결박되어 고문당하는 신세가 된다. 릴리스가 차가운 눈으로 김현의 육체를 조금씩 포 떴다. 그때마다 영혼이 깎이고, 성혼이 추출되며 강렬한 통증이 영육을 점령한다.

"이봐, 또 이거야?"

그러나 김현은 비웃기만 했다.

똑같은 전투, 똑같은 고문, 똑같은 상황.

악마들에게는 김현의 의지를 꺾을 어떤 방법도 없었다. 사실 애초부터 해체 명령어가 없으니 헛수고이기도 했지만 발악하듯 김현을 고문하고 있었다. 선택지가 없으니 어쩔 수 없겠지만.

흔들리는 시야 너머 또다시 공허가 넘실거린다. 김현은 그걸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또 자살해야 하나?'

아직까지는 공허가 침습하지 않았다. 그걸 끌어들이지는 않았으니까.

그저 서로 마주 볼 뿐.

쪼르륵.

성혼이 다 추출되었나 보다. 존재의 근거가 모래성처럼 허물어지는 것을 느꼈다.

움직이지도 않는 입술을 달싹여 유언처럼 비웃음을 남겼다.

"또 보자고, 멍청이들."

또다시 반복.

도대체 얼마나 오랜 세월을 악마들과 드잡이질을 벌였을까?

백 년이 뭐냐, 천 년이 뭐냐, 거의 만 년 가까이 지나간 것 같다.

횟수로 따지면 300만 회를 훌쩍 넘겼다는 뜻.

그쯤 되자 악마들에게 확연한 변화가 생겼다.

"흐읍, 흐읍."

"그르르륵."

"클클, 크르륵."

움직임도 느려지고 숨 쉴 때마다 가래 끓는 듯한 소리를 낸다.

겉으로 보기에도 그랬다. 생생한 젊음을 간직하던 놈들의 피부에 주름이 거추장스럽게 졌다. 검고 빨갛고 파랗던 터럭도 전부 새하얗게 탈색되었고, 용처럼 뻗던 날개는 삐걱거리며 제대로 펴지지 않았다.

그걸 가만히 주시하는 김현.

예전 같았으면 비웃음이라도 날려줬겠으나 그런 게 없다. 입만 꾹 다물고 있다.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영혼이 무거워졌고, 그에 따라 노인과 같은 신중함을 갖게 된 탓이다.

[흐으, 흐, 만족하느냐?]

메피스토텔레스가 이 빠진 몰골로 오물거린다.

대답하지 않는 김현.

복수의 검을 치켜세웠다.

서걱!

내리치자 메피스토텔레스가 좌우로 두 조각 났다.

그 상태에서도 기력이 남았는지 몇 마디를 더 남긴다.

[너도 결국은 우리처럼 될 것이다. 아니, 더 끔찍하지. 아무것도 없는 우주에서 무한한 고독을 맛보아라……]

이어서 아스타로트도, 마몬도, 레비아탄도, 벨리알도 모두 김현의 손에 죽었다.

다들 기력이 없다. 소멸하기 직전의 항성과 같다. 시간이 반복되면 반복되는 대로, 하루가 돌아가면 돌아가는 대로 순순히 김현에게 목을 내주었다.

[여의 끝이 이런 것이라니……]

릴리스가 두 손을 휘저었다.

[아름다운 이여, 그대를 다시 보고 싶었거늘……]

김현은 묵묵히 릴리스를 내려다보다가 오른발을 쳐들었다.

푸콱!

단숨에 내리찍자 릴리스가 짓뭉개져 그대로 사망하고 만다.

[인간 놈!]

[죽어라!]

대항하는 악마가 몇은 있었다.

그러나 적다. 이 거대한 군세와 비교한 한 줌에 불과하다. 다른 악마들은 모두 무기력증에 빠진 채로 김현에게 하나하나 살해당했다.

우두커니 서서 좁은 우주를 한 차례 돌아보는 김현.

시체, 시체, 시체뿐이다. 세계 전체가 거대한 무덤이 된 것만 같았다.

긴 침묵.

살아 있는 존재는 하나밖에 없지만 시간 반복이 해제되지는 않았다. 이대로 무한의 고독을 곱씹다가, 김현까지 업에 짓눌려 소멸하고 말 운명인 것 같다.

'그럴 수는 없지.'

칙칙한 눈으로 악마들의 시체를 보며 생각했다.

방법은 있다.

힘으로 차원의 벽을 뚫고 나가면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결 과제가 있다.

9성 승급.

8성 우화를 넘어서 진정한 신격(神格)을 얻는 것.

재료는 준비되어 있었다.

바로 눈앞에 그득하게 놓인 악마의 시체들. 그리고 성혼.

'가능할까?'

방법은 모른다. 성공 확률은 아무리 관대하게 따져봐도 0.01%가 채 넘질 않는다.

하지만 이대로 썩어갈 것이 아니면 도전하는 수밖에.

철컥, 철컥.

멸망왕을 해체하고 밖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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