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9
멸망의 신좌 -2-
"후읍."
의미 없는 심호흡을 한 번 했다.
청량한 공기 대신 악취 나는 혼력만 한껏 스며든다.
차원 전체가 썩는 것 같다. 악마들의 피가, 살점이 흩어지며 마(魔) 속성의 혼력이 세계에 퍼지고 있었다.
자아, 어떻게 해야 할까.
원래 같았으면 8성 악마들의 영체를 재료로 삼고, 성혼을 불씨로 만들어 도전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 외부의 보조도 받을 수가 없다. 가장 원시적인 방법을 쓰는 수밖에.
그게 뭐냐고?
간단하지. 먹는 거다.
신촌 병원에서 별의 관찰이 깃든 안경알을 씹어 삼켰듯이.
'기본은……'
아스타로트가 가장 낫겠지. 강화 계열 성혼이고, 김현의 기존 성혼과도 궁합이 좋으니까.
시체 앞으로 다가간다. 눈 뜬 채 희멀건한 눈빛이 흘러나오고 있다. 잠시 멈칫했다가, 아스타로트의 시체를 뜯어먹기 시작했다.
악마는 기본적으로 영체. 실제로 고기를 먹는 감각과는 조금 다르다. 미각이나 촉각을 느낄 수가 없으니까. 대신 머리가 찌잉 하고 울리거나 가슴이 두근거리고, 욕망이 솟구치면서 하복부가 뿌듯해지는 변화는 있었다.
'악마 포식이라니.'
속으로 헛웃음을 짓는다.
외계종의 시체를 직접 섭취하는 것은 금기시되는 행위 중 하나다. 그 경우 성혼 성향이 크게 변화하기 때문이다. 심하면 종족이 변환되기도 했다.
"우으윽."
아스타로트를 다 잡아먹자 저절로 구역질이 났다.
전신의 혼력이 요동치고 있었다.
기계 장치가 혼선을 일으키고, 생체 조직이 마구 꿈틀거린다. 김현은 기계 장치의 신 성혼과 궁극의 진화체 성혼을 총동원하여 겨우 잠재웠다.
'부족해.'
일단 한 번 포식하고 나자 김현은 강한 갈망을 느꼈다.
9성으로 올라서고 싶다면 여기 있는 악마들을 몽땅 잡아먹어야 한다. 그런 강한 직감이 김현을 이끌었다.
정신없이 악마들을 잡아먹기 시작하는 김현.
메피스토텔레스의 뇌를 퍼먹었다. 레비아탄의 내장을 몽땅 집어삼킨다. 벨리알의 뿔과 날개를 음미하며 먹고, 릴리스의 피부를 정성들여 떠낸 다음 쫄깃한 감촉을 즐겼다.
부족했다. 너무 부족했다.
8성 악마로도 모자라 7성, 다시 6성, 또 5성과 그 아래의 저급한 악마들까지……
먹는다. 또 먹는다.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위해 포식하는지, 뭘 먹는지도 모르고 물 마시듯 입에다가 처넣었다.
그러느라 미처 몰랐다.
자신의 몸에 박혀 있던 기계 부품과 생체 조직은 어느샌가 사라지고, 완연한 악마의 형상으로 변했다는 사실을.
아니, 악마라고 하기도 이상하다.
이것은 괴수.
거대한 괴물.
시커먼 털복숭이 몸에 황소의 뿔을 가진 마수였다. 12쌍의 박쥐 날개가 기괴한 각도로 엇갈려 나 있다. 머리는 세 개에, 인간의 얼굴이 복부에 달렸다. 그 인간 얼굴이 지금도 게걸스럽게 악마들을 삼키는 중.
이성?
이미 사라졌다. 9성의 신격을 얻기는커녕 힘만 강한 괴물로 퇴화해버린 것.
그렇게 운명이 저버리는 성 싶었다……
팟!
바로 그때 예정된 변혁이 일어났다.
세계가 멀어지며 좁쌀처럼 변하는 것.
"크어어엉!"
괴수가 분노에 차 울음을 터뜨리지만 늦었다. 세계는 후퇴했고 시간선이 돌아갔다. 그리하여 괴수는 사라지고 김현만 남았다.
다 죽은 눈을 한 악마들도 함께.
'뭐였지?'
김현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악마들을 쳐다보았다.
멸망왕에서 내려 악마 포식을 시작했던 것까지는 기억이 난다. 아스타로트와 메피스토텔레스를 잡아먹은 것도. 그런데 그 후의 기억이 도려낸 것처럼 존재하지 않았다.
'아냐……'
다음 순간, 김현의 눈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사라져 버린 기억. 거기서 흐릿하게나마 어떤 영상을 잡아낸 것이다.
시커먼 짐승의 앞발이 악마들을 마구 헤집고 있다. 거기에 입을 가져가는 자신. 그리고 포식.
"젠장."
첫술에 배부르랴만 이건 심하다.
고작 악마 둘 잡아먹고 정신 줄을 놓고 괴물이 되다니?
시간 반복이 아니었다면 꼼짝없이 끝장났겠지……
'그래, 내게는 시간 반복이 있어.'
사실상 무한의 기회를 보장받은 셈.
될 때까지 해보자.
악마 군단과 정면으로 싸워 이기는 건 가능성이 0이었지만, 이건 최소한 0은 아니니까.
'그냥 먹어서는 안 돼.'
이 경우 악마의 피와 살이 직접적으로 육체에 영향을 미친다. 그 결과 어떻게 되는지는 조금 전 뼈저리게 체감했다.
이번에는 성혼 추출로 시작.
악마의 정혈과 성혼을 한꺼번에 빨아들인다. 첫 대상이 된 아스타로트가 낮은 신음을 흘렸지만 그뿐. 몇 번 꿈틀거리다가 김현의 제물이 되었다.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
확실히 성혼 추출은 악마 포식보다 안정적이다. 대신 시간이 훨씬 더 걸렸다. 그리고 아스타로트와 메피스토텔레스, 릴리스까지 흡수하자 전신이 뿌득뿌득 차오른다.
여기까지가 한계.
셋이 뱉은 8성 성혼만 27개다. 그것들이 김현의 몸에서 격렬하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큭!"
제어해 보려고 하지만 불가능.
김현의 몸이 부풀기 시작했다. 멸망왕 내부를 가득 채우는 것으로 모자라 그마저 뭉그러뜨리며 삐져나온다. 결국에는 풍선처럼 변하여 터져 버렸다.
꽝!
다시 하루 전으로 돌아온 김현.
무수한 빛이 두 눈동자에서 명멸하고 있었다.
"어렵네."
하긴 한두 번에 될 거라곤 생각도 안 했지.
어쨌든 무턱대고 흡수하는 방법으론 안 된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하다. 김현은 두 차례의 실패로 그 사실을 완벽하게 깨달았다.
격을, 영혼의 크기를 늘리는 작업부터 선행되어야 한다. 그릇이 마련되지 않고서는 아무리 쑤셔 박아도 헛짓이다.
'재료가 있어야 하는데……'
결국 9성은 악마계로 가야 할까?
그건 싫다.
그러면 닉과 같은 길을 가는 것 아닌가. 자신의 욕망을 이기지 못해 온갖 범죄를 다 저지르는 길로.
악마가 주가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그걸 제어할 방법이 필요했다.
무심코 주먹을 쥐어 본다.
끼기기긱.
금속 손가락이 마찰하며 거친 소리가 들렸다.
'멸망왕이라면 가능하지.'
기갑계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최고, 최강의 장갑. 이거라면 제어 중추의 역할을 하지 싶다.
그렇다면 새로운 신의 그릇은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
악마들을 기워서 거대한 마수를 만들어? 김현 본인이 한 차례 변하기도 했던 그놈을?
아냐, 그건 8성까지나 통하는 방법이다.
악마들이 둥둥 떠다니는 주위를 재차 둘러본다. 그걸 보니 생각나는 단어가 있었다.
시산혈해.
이 단어에서 어떤 영감이 솟구쳐 김현의 뇌를 자극했다.
시체 산에 피의 바다라 이거지……
이런 세상을 새로운 그릇으로 삼으면 어떨까?
아무리 작다고는 해도 어엿한 하나의 차원. 여기 있는 악마들의 영체도, 성혼도 모두 담을 수 있다.
'그럼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차원계가 육신인 각성자라?
그야말로 신. 대신 평범한 일상은 완벽하게 날아가겠지. 지구로 제대로 돌아갈 수 있는지나 의문스럽다.
'죽는 것보다는 낫겠지.'
여기서 영겁의 시간을 보내고 나면 업의 무게에 영혼이 짓눌린다. 그 끝이 어떨지는 블러드 공작의 희생자들을 통해서도, 눈앞의 악마들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었다.
장고에 들어간다.
어떻게 차원계와 악마, 멸망왕, 자신을 동화시킬 것인지.
유혹하듯 어떤 형상이 김현의 앞에서 어른거렸다.
공허의 형상.
이 힘을 끌어내면 간단하다. 즉시 차원계의 모든 것이 하나로 녹아들어 공허의 마왕이 탄생하겠지.
'그건 안 돼.'
그거야말로 아랫돌을 빼서 윗돌을 괴는 행위. 미래의 파멸을 담보로 현재의 어려움을 돌파하는 짓이다. 옛 김현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했지만, 현 김현은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었다.
장고에 장고, 장고를 거듭했다.
시간은 많았다. 무한히 반복되고 있으니까. 설계도를 구상하는 것에만 거의 몇 년은 흘려보낸 것 같다.
[아름다운 이여……]
릴리스가 그 말을 남기더니 울컥 죽어 버린다.
되돌아간 시간에서도 살아남지 못했다. 영체는 살아 있되 자아가 지워졌다. 멍한 눈을 하고 둥둥 떠다니는 게 할 수 있는 일의 전부.
완벽한 침묵, 길 잃은 시선이 김현을 감싼다. 그것을 느끼며 천천히 허리를 폈다.
"시작하자, 멸망왕."
기한은 24시간.
그 안에 모든 작업을 마쳐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원래대로 되돌아가 버린다.
손을 뻗어 메피스토텔레스를 가까이 가져온다. 성혼을 추출하는 한편 뇌를 꺼내 멸망왕의 머릿속 전자두뇌에 이식했다. 자연스레 악마의 뇌를 뒤통수에 단, 괴상한 형태가 된다.
이어 레비아탄의 몸을 멸망왕에 두르고, 아스타로트의 하반신을 멸망왕의 다리에 연결했다. 여기에 릴리스의 피부로 겉을 덮고 벨리알의 뿔과 날개를 박아 넣으면 끝.
"크으윽."
전 차원계에 이름이 알려진 악마들이다. 지구의 신화에 등장할 정도이니 오죽할까.
반발 작용이 엄청났다. 김현은 겨우 그것들을 달랬다. 성혼은 흡수하지 않고 마법진을 구성하는 데 썼다. 김현의 계산대로라면 이것으로 멸망왕과 악마들의 영체가 융합되어야 했다.
그러나 계산 실패.
쾅!
폭주하며 멸망왕의 폭발하고 말았다.
"쯧."
혀만 한 번 차고 재도전했다.
어려웠다. 아주 지난한 일이었다.
하나의 완성된 장갑에 강제로 악마들을 덧붙이는 일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김현은 끈기를 가지고 족히 수천 번을 시도하며 조금씩 수정해 나갔다.
아스타로트의 심장으로 멸망왕의 심장을 보완한다거나, 메피스토텔레스의 신경계를 전자 신경계에 이식하고, 레비아탄의 근육으로 곤충 근육을 대체하며, 릴리스의 네 동공 눈을 박아넣고, 추진 장치를 제거하는 대신 벨리알의 날개를 복제하여 엇갈려 배치했다.
다섯 대악마만 활용한 것도 아니다. 나머지 8성 악마의 시체도 유용하게 썼다. 관절을 합성하여 재구축하거나, 인대를 서로 다른 악마의 것을 써서 재배치하는 식으로.
그리하여 1만 번의 도전 끝에 새로운 멸망왕을 완성했다.
위풍당당하게 선 거대한 기계 악마.
겉으로 보기에는 기계지만 곳곳에 생체 조직이 남아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악마의 조직이다. 본래 순수하던 영체에 물성을 부여했다고 보면 되겠다.
검은 뿔, 검은 날개, 검은 몸, 검은 꼬리.
시커먼 색 일색인 녀석이 적잖이 마음에 들었다.
"네 이름은 파멸신이다."
단순히 왕이라고 부르는 건 조금 부족하지.
김현은 이런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름 짓는 실력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뭐 어떤가?
여기서 하루가 다 지났다.
재차 돌아가는 시간.
상관없다. 이미 한 번 완성한 이상 간단히 재현할 수 있으니.
고오오오.
두 팔을 들어 올린다.
세계가 응답하며 부글부글 끓기 시작한다.
멸망왕이 저절로 벗겨지며 자기 강화 절차에 들어갔다. 김현과 멸망왕의 전자두뇌가 연결되어, 악마를 해체하고 덧붙이는 행위를 스스로 실행하는 것.
그 사이, 김현은 어떠한 권능을 발현했다.
수없이 악마 포식과 성혼 추출, 시체 해체를 진행하며 저절로 눈 뜬 권능.
소화.
악마 시체들이 조금씩 녹아들었다. 세계 전체가 하나의 위장이 되어 버린 것 같다. 소화액이 분비되지도 않았건만, 저급 악마부터 성혼과 혼력, 영체가 한데 녹아들어 탁한 어둠으로 변화한다.
흡수하지는 않는다. 굳이 자신이 흡수할 필요도 없다. 그저 녹이고, 또 녹이기만 한다.
4성, 5성, 6성, 그리고 7성까지……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도.
오로지 자아만 남았다. 이 과정에서 김현은 수백 번의 실패를 맛보았다. 그다음에야 세계에 대한 통제력을 발휘하여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었다.
곤죽 같은 어둠으로 가득 찬 세계.
어둠이 넘실거린다.
극히 농밀하여 바다에 빠진 것만 같다. 멸망왕이 악마 시체를 자기 몸에 덧붙일 때마다 물살이 일어 흐물거리며 밀려왔다.
'끝을 보자.'
파멸신이 된 멸망왕에 접속했다.
기이한 속삭임이 웅얼거리며 들려온다.
워낙에 강대한 힘을 품은 탓에 파멸신에게도 조그마한 자아가 생긴 것이다.
그러면 안 되지.
찍어누른다. 갓 태어난 자아는 김현이 지닌 영혼의 무게에 짓눌려 퍽 하고 소멸해 버렸다.
이어 동화 시작.
이 시점에서 김현이 곧 세계였고 김현이 곧 녹은 어둠이었다. 파멸신과의 동화는 쉬웠다. 파멸신 또한 녹아서 흐물흐물해지더니 세계에 투사된다.
그렇다, 투사.
어떻게 보면 각인이라고 표현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부글부글.
그에 따라 세계가 변화한다.
격렬히 끓고 있었다. 기화되어 기체가 되더니, 응결하여 액체가 되어, 다시 딱딱하게 굳어 고체로 화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은 악마들의 형상.
바로 김현에게 잡아먹힌 악마들.
그것들이 세계의 경계에서 몸을 내밀고 울부짖고 있었다. 그 상태로 고정되어 버렸다. 울음과 절망을 온몸으로 뿌리며, 조각상처럼 변한 채 세계의 중심을 우러렀다.
마지막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파멸신.
키 10킬로미터 이상의 거구. 악마들의 경배를 받으며 세상을 굽어본다.
그리고 그 뒤.
거대한 옥좌가 있다.
8성 악마들이 남긴 잔재로 만들어진 옥좌. 팔걸이에 아스타로트와 레비아탄이 걸려 피눈물을 흘린다. 릴리스는 두툼한 발에 짓밟혀 괴로워하고, 메피스토텔레스는 의자의 머리받이가, 벨리알은 등판 장식이 되었다.
[으으, 살려줘……]
[으흐흑……]
단순한 시체가 아니다.
악마들은 부활하여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
예전의 권세를 모두 잃은 채, 1성 악마만도 못한 잡귀가 되어 버린 신세. 가장 괴로운 것은 예전의 기억과 자아를 모두 간직했다는 점.
"흠."
묵직한 음성이 천둥처럼 세계를 울렸다.
시간은 더 반복되지 않는다. 김현이 직접 시간 반복을 해제했으니까.
"이것이 9성인가."
작은 독백.
초월적인 눈빛을 던진다.
이 작은 세계만이 아닌 바깥의 세계도, 지구도, 악마계는 물론 기갑계와 충왕계까지 꿰뚫어 보는 김현.
모든 운명을 초월했다.
신격을 얻었다.
대신……
한 가지 제약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