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헌터사-181화 (181/200)

# 181

차원 포식자 -2-

천천히 곤죽이 되어 녹아내리는 블러드 공작의 시체.

거기서 블러드 공작이 생전 했던 연구에 대한 지식을 흡수한다.

김현은 속으로 살짝 감탄했다.

'시공 회귀의 비밀에 많이 다가갔구나.'

블러드 공작에게 주어졌던 시간은 짧다. 지구 시간으로 따지면 몇 달 안 되는 기간이었으니까.

고작 그 기간의 연구로 22세기 인류 저항군과 비슷하게 따라갔던 것 같다. 하기야 원래 영원에 대해 계속 연구 중이었으니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지금에 와서는 다 무의미한 일이었다. 블러드 공작은 완전히 김현에게 소화 당하여, 다른 악마들처럼 박제되는 처지가 되었으니.

"네 자리는 여기다."

릴리스의 바로 옆자리.

둘은 사이좋게 짓밟히며 울부짖는 신세가 되었다. 절절한 고통이, 참담한 절망이 넘쳐 흐르지만 김현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대신 악마들 사이로 비집고 나오는 흡혈귀들을 한 번씩 본다. 그들도 김현의 영광을 노래하는 장식 처지에 놓인 것이다.

'불안정해.'

신좌의 구성이 악마계에 치중되어 있어서 그럴까? 중추인 파멸신만 해도 거대한 마신이라고 봐야지, 기계나 곤충은 별로 찾아보기가 힘들다.

지구로 돌아가기 전에 할 일이 있다는 뜻. 지금 상황에서 지구에 돌아가면 그 즉시 인류 전체가 소화되고 만다.

'기갑계……'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바로 그곳이다.

전생에서 무던히도 이용당했지.

기갑계의 기계들은 충왕계의 강화 인간 병사로 참전한 김현을 생포했다. 그리고 가상현실을 이용한 세뇌를 시행하여 써먹었다. 그들의 장갑 기사 재료로는 곤충 인간으로 개조된 지구인이 가장 적합했다나 뭐라나.

그 원한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드디어 힘을 얻었으니 원한부터 갚아야지.

기갑계로 도약.

기갑계는 엄밀히 말하면 이계(異界)가 아닌 외계(外界)에 속한다. 지구와 같은 차원계에 속해 있다는 뜻. 까마득히 멀어서 차원 도약을 쓰지 않으면 도달하기 힘들긴 해도.

쿠웅!

강력한 방어막이 김현을 밀어낸다.

김현은 차가운 눈으로 기갑계의 모성을 노려보았다.

세 개의 인공 태양, 그리고 세 태양 사이를 규칙적으로 운행하는 열두 개의 인공 행성.

모든 것이 기억 속 모습과 똑같다.

김현은 곧 작은 차원. 같은 공간에 두 개의 차원이 겹쳐지자 격랑이 일기 시작했다. 인공 태양이 빛을 잃고 인공 행성은 찌걱거리며 동력 생산이 멈추었다.

당장 칼날 같은 염파가 날아온다.

[누구냐!]

[떠돌이 주제에 감히 어딜 넘보려고?]

[당장 물러나지 않으면 소멸시키겠다!]

세 개의 인공 태양.

거기서 저마다 날아오는 염파였다.

김현은 차분히 그들을 주시했다.

'기갑계의 9성 기계는 다섯이었지.'

그들 중 셋이 바로 인공 태양이었다.

애초에 기갑계는 지구와 비슷하게 인간종 형태에서 시작했다. 그러다가 과학이 극도로 발전하여 자신의 몸을 기계로 대체한 것에서 기갑계가 기원했다. 극도로 발전한 인공지능이나 전자 생명체도 합류하여 덩치를 불렸고.

열두 개의 인공 행성도 이쪽을 주목하는 것이 느껴진다. 인공 행성을 통합 제어하는 9성 등급의 초월적 인공지능이 김현을 경계하는 것이다. 외곽에서도 움직임이 있었다. 외부를 방어하던 기갑계의 최고 전력, 차원 기갑 함대가 돌아오는 모양이다.

9성 등급 기계신격이 김현 하나 때문에 놀라 달려오는 것. 김현은 조금이나마 뿌듯해지는 감정을 느꼈다.

[그대는 누구인가. 식별 코드를 제시하라.]

[제시하지 않으면 공격하겠다.]

차원 기갑 함대가 가장 먼저 이빨을 드러냈다.

묘한 감흥이 몰려온다.

지구에 파견되기 전까지는 저 기갑 함대의 일원으로서 외계종들과 싸우고 다녔는데……

문득 장난기가 돌았다.

[식별 코드 #3095823874PPJEWQF12340. 지구 파견 장갑 기사단의 총단장이자 제 2 행성에서 수위 장갑 기사의 자격을 받았다.]

아울러 혼력 인증 진행.

언젠가 펜타곤의 침식 세계에서 했던 그대로였다. 기갑계의 양식을 완벽하게 따른 식별 코드.

그러나 차원 기갑 함대의 9성 기계신격은 여기에 속지 않았다.

[에러. 제시한 식별 코드는 존재하지 않는다.]

[에러. 지구 파견 장갑 기사단이라는 산하 단체는 구성된 적이 없다.]

[에러. 수위 장갑 기사 중 지구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 봐라?

김현의 눈이 번뜩였다.

수위 장갑 기사 중 지구인이 없다는 말은, 이미 장갑 기사 중에는 지구인이 있다는 뜻인데?

지구에 돌아가면 제대로 봐야겠다.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장갑 기사가 되었다면 인류팔이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니까.

기이잉.

기갑 함대에서 기이한 울림이 울렸다. 그리고 수만 척은 넘을 법한 우주함이 주포를 꺼내 김현을 겨눈다.

[최종 통첩한다. 지금 즉시 퇴거하라. 퇴거하지 않으면 요격하겠다.]

키잉, 키우웅.

주포를 꺼낸 것은 기갑 함대만이 아니다. 인공 행성에서도 장거리 요격용 광선 포대가 튀어나왔다. 심지어 인공 태양도 빛을 꺼뜨리며 열기를 한쪽으로 집중한다. 태양의 힘을 한꺼번에 쏟아내려는 것이다.

'제법인데.'

측정되는 힘이 어마어마하다. 저 다섯 갈래 공격 중 하나만 지구에 직격해도 지구 생태계 전체가 가루가 될 정도. 하지만 김현은 한껏 비웃음을 머금었다.

[이해가 되지 않아.]

[무엇이 말이냐?]

[예전부터 생각했다만, 너희는 왜 그런 비효율적인 형체를 고집하는 거지?]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결론을 말해라.]

[흠.]

5대 1로 싸우기는 힘들다. 그래서 김현은 불사계에서 그랬던 것처럼 타협안을 제시했다.

[장갑공 유칼리드와 포격공 카드란, 강습공 데드, 비호공 마스테와 휘하 군단을 내게 넘겨라. 그러면 얌전히 물러가겠다. 원한다면 차후 재침공하지 않겠다고 서약하지.]

[헛소리!]

[떠돌이 주제에 당치도 않은 말을 하는구나!]

[동지들, 더 들을 필요가 있나?]

[없다.]

[놈을 죽여 새로운 차원 함대의 밑거름으로 삼자!]

빛이 날아온다.

우주를 수놓은 무수한 빛의 세례.

은하수가 쏟아지는 것 같았다. 특히 그중에서도 세 갈래 태양광선이 무시무시했다. 피격되면 달도 별도 깨부술 기세.

그러나 김현은 흉악한 웃음을 지을 뿐 별달리 대처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피부와 같은 차원의 벽을 단단히 했을 뿐이다.

그래, 차원의 벽.

광선 세례는 허무하게도 공간을 갈랐다. 김현이 마음을 살짝 먹은 것만으로 위상이 갈려서 같은 공간 다른 차원계를 강타했기 때문이다.

[전탄 빗나감!]

[차원의 벽 확인!]

[차원 고정 실시!]

[전탄 재장전!]

기갑계의 대처도 빠르다. 인공 태양 하나가 봉인 계열 성혼을 이용해 김현의 움직임을 묶고, 다른 기갑신격들은 모두 재장전에 들어갔으니까.

내심 감탄하면서도 몸을 일으킨다. 지금부터 왜 저들이 비효율적인지 온몸으로 가르쳐줄 작정이었다.

출렁!

거대한 파동이 기갑 태양계를 강타했다.

EMP가 터진 것 같은 충격. 순간적으로 기갑계의 반격이 정지된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으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크허엉!"

괴성을 지르며 현계에 강림하는 파멸신.

수면 위에 일렁이던 그림자가 육체를 갖추고 튀어나오는 듯한 광경이었다. 키 10킬로미터에 달하는 거구가 파멸적인 위세를 뿌리며 기갑계를 굽어본다.

[발사!]

파멸신을 노리고 쏟아지는 공세.

김현은 무수한 빛무리가 그리는 궤적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빛의 속도로 질주하는 공격을 어떻게 보냐고?

간단하다.

시간 변동.

시간 반복을 수만 번이나 겪은 까닭에, 또한 그 힘이 새겨진 세계와 합체한 까닭에 김현은 시간에 대한 권능을 손에 얻었다. 세계의 속도를 감속하고, 본인의 속도만 가속하는 것은 시간 반복에 비하면 훨씬 쉽다.

한 가지 더.

10킬로미터에 달하던 거구가 급격히 줄어든다. 1킬로미터, 100미터, 10미터, 심지어 2미터 크기까지.

집중된 공격에도 틈은 있다. 10킬로미터 크기의 목표물에게 쏘았기 때문에 더 그렇다. 김현이 거의 광속에 가깝게 움직여 광선 포격을 피해냈다.

목표는 차원 기갑 함대.

가장 중심이 되는 거대한 전함을 노린다.

포격공 카드란.

차원 기갑 함대의 여러 중추 중 하나이며, 강력한 광선 주포를 여덟 문이나 탑재한 거대 전함이었다.

[적 접근 중.]

[요격 개시.]

[장갑 기사 출격.]

[호위기 출격.]

[화망 구성 중…… 요격 불가.]

[정체불명의 성혼 발현. 관성의 법칙을 무시하고 있음.]

[시간 계열 성혼으로 판정.]

[가속 0.2초, 감속 0.3초, 다시 가속 1.1초……]

[크기 변환 중. 촘촘한 화망 필요.]

[계산 완료. 동지들은 이쪽 제어에 따라주기 바람.]

차원 기갑 함대의 통합 제어 전자 생명체, 전뇌신. 계산 능력으로는 전 우주 최고라는 명성답게 금세 대비책을 마련한 것 같다.

쏟아지는 공세.

이번만큼은 피할 도리가 없었다. 시간을 주물러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인공 태양 세 개가 김현을 주시하는 것이 컸다. 조금이라도 실수했다간 즉각 태양광선이 쏟아질 테니.

[고작 이 정도냐?]

하지만 김현은 회피하는 대신 정면으로 뚫고 나갔다.

어느새 거대한 검이 김현의 두 손에 들려 있다. 그것을 등 뒤로 숨기며, 차원의 벽을 전력으로 전개하여 돌진했다.

봉인 계열 성혼 탓에 다른 위상으로 옮겨가진 못했으나 차원의 벽은 전 차원계에서도 가장 강력한 방어막.

뚫지 못한다.

모조리 튕겨 나가고 만다.

급류를 역행하여 올라가는 연어처럼, 김현은 하나의 거대한 칼날이 되어 광선 포격을 꿰뚫었다.

갑자기 눈앞이 하얘진다.

태양 광선이 집중된 것.

시기적절한 공격이었으나 김현은 기다렸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이어,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난다.

직진하던 김현이 공간이동 하듯 수만 킬로미터 밖에서 나타난 것이다.

덕택에 태양 광선은 김현을 맞추지 못하고 까마득히 빗나갔다.

[이것은?]

[공간 이동?]

[아니다. 시간 역행이다!]

딱 0.1초.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거의 광속에 가깝게 이동 중이었으니까.

빛줄기가 지나간 자리를 스치는 김현. 드디어 거대한 전함이 눈앞에 들어온다. 파멸신의 본체보다 큰, 웅장하기 짝이 없는 전함이다.

"비효율적이야."

크기를 키우는 김현.

달려들던 힘까지 모두 동원하여 거검을 내리긋는다.

공간이 갈라질 정도의 일격.

혼력이 방출되며 잿빛 불꽃이 토해진다. 방어막이 생성되고, 요격용 광선포가 쏘아지나 간지럽기만 했다. 거검은 모든 것을 부수고 함선에 틀어박혔다.

콰아앙!

그대로 침몰하는 전함.

카드란의 성혼은 원거리 포격에 집중되어 있었다. 접근을 허용했을 때부터 승산이란 없었다. 덩치가 워낙 커서 둔하기만 하면 더더욱 그렇다.

[퇴함하라, 퇴함하라!]

[본함은 지금부터 자폭 절차에…… 크윽!]

누구 마음대로?

김현은 카드란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그리고 야만스럽게, 물고기를 손질도 안 하고 먹어치우는 원시인처럼 뜯어먹기 시작했다.

[무, 무슨 짓인가!]

카드란의 인공지능이 비명을 지른다.

포식당한다, 라는 개념조차 없는 기갑계의 기계들.

생경할 것이다.

지금 느끼는 공포가, 두려움이…… 지금만큼은 그들이 그토록 얕보던 생물들을 이해할 수 있겠지.

[내 부품에서 손을 떼라!]

전뇌신이 호통을 치며 공격을 해온다.

무수히 날아오는 광선들.

중성자 탄이니 반물질 폭탄이니 하는 것도 보인다.

극히 파멸적인 위력을 자랑하지만, 김현에게는 오히려 고마운 공격들.

손가락을 튕긴다.

즉석에서 이뤄지는 해킹. 반물질 폭탄 몇 개가 폭발했다.

쾅! 콰콰쾅!

주위의 폭탄이 거기 휩쓸려 연쇄 폭발을 일으킨다.

기갑신격들이 분노하는 것이 느껴졌다.

[감히……]

김현의 구성 요소 중 하나는 기계 장치의 신이다. 당연히 이런 일도 가능했다.

모든 폭탄을 다 해킹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럴 필요까진 없다. 일부만 해킹해서 터뜨려도 다 터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놈들, 약한데?'

이유는 간단하다.

신격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세계에 속박된다. 그럼으로서 자신을 유지하고, 또한 세계를 유지한다. 파멸신을 통해 힘을 온전히 투사하는 김현과는 많은 면에서 달랐다.

대신 김현은 그만큼 불안정하니 일장일단이 있다고 하겠다. 기갑계의 다섯 신격은 기갑계가 끝날 때까지 존속하겠지만, 김현은 세계의 파멸이 시계 바늘 똑딱거리듯 천천히 다가오고 있으니.

'몸의 균형을 맞추면 나아지겠지.'

그런 희망을 품고 기계들을 잡아먹었다.

앞서 언급했던 장갑공 유칼리드와 강습공 데드, 비호공 마스테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인공 행성 일부도 내려앉아 습격했다. 그리하여 10마리나 되는 8성 기계를 먹어치운 다음에야 물러났다.

[나중에 또 보자.]

예의 바르게 인사를 남겼으나 기갑신격들은 영 탐탁지 않은 모양이다.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차원 통로를 메우고, 차원의 벽을 강화하는 기갑신격들.

그걸 보며 자신 넘치는 웃음을 흘렸다.

'나는 강하다.'

정말로 강하다.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다른 신격들이 뿌리에 80% 정도 힘을 주어 세계를 유지한다면 김현은 그 반대. 밖으로 분출하는 힘이 훨씬 더 컸다. 다른 신격들이 세계와의 결합을 포기해야만 김현과 대적할 수 있었다. 따라서 앞으로도 김현의 독주는 계속될 듯하다.

그렇다면 방문해야 할 곳이 또 있지.

충왕계.

어떻게 보면 기갑계보다 더 김현을, 전생의 아론을 농락했던 자들이다.

김현의 눈이 짐승처럼 번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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