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2
나는 개미다
야룬자는 일꾼이다.
일꾼이지만 그냥 평범한 일꾼은 아니었다. 최근에 유입된 DNA 합성의 결과로, 남들보다 더 큰 뇌, 발달한 대뇌피질, 정교한 앞발을 가지고 있었다.
[야룬자, 이것 좀 파헤쳐 보지.]
[예, 반장님.]
눈이 하나 없는 늙은 반장이 야룬자를 불렀다.
뭔가 해서 보니 두툼한 철근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야룬자는 조용히 더듬이를 까닥거렸다.
[병정들에게 말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 치들 턱질 한방이면 단번에 잘릴 것 같은데요.]
[자네가 가서 말해보던가.]
[제가 하죠.]
야룬자는 가까이 가서 허리를 들고 앞발을 내밀었다.
다른 이들은 지구의 개미를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그런데 야룬자는 조금 다르다. 개미 인간이라고 할까. 통통한 꽁무니가 달렸다는 것을 제외하면 갑각 두른 인간을 보는 듯하다.
앞발이 특히 그랬다. 영락없이 인간의 손을 닮았다. 야룬자는 앞발을 조막조막 움직여 철근을 해체했다.
두툼하다고는 하나 인간 기준일 때 이야기. 2성 성혼을 품은 야룬자는 이 정도쯤 쉽게 구부리고 떼어낸다. 실타래 풀듯 풀며 철근을 떼어내자 뒤에서 탄성이 터졌다.
[역시 야룬자!]
[이번 세대 일꾼들은 다 저렇다며?]
[종족의 미래다워.]
[흥, 그래 봐야 턱질을 못하니 한계가 있지.]
평소 야룬자를 경원시하던 한 일꾼이 으스대며 턱을 치켜든다.
흉험하게 빛나는, 거대한 낫을 연상시키는 턱.
야룬자는 부러움과 가소로움을 동시에 느꼈다.
'그래 봐야 병정들에 비교하지도 못하는 주제에.'
일꾼은 일꾼으로 태어나 일꾼으로 살다가 일꾼으로 죽는다. 태생은 극복할 수 없다.
그것이 충왕계의 수많은 종족 중에서도 이들, 엡틸리온 종족에 내려진 숙명.
하지만 야룬자는 꿈을 꾸고 있었다.
언젠가 공을 세워 3성 성혼을 받고, 4성 성혼을 받아 더 높은 지위로 나아가고 싶다는 욕망. 보통의 일꾼들과 다르게 야룬자를 비롯한 새로운 세대가 공통으로 품고 있는 향상심(向上心)이었다.
'두고 보라고. 언젠가는……'
그런 상념을 묵히며 몸을 낮출 때였다.
우르르릉.
갑자기 지하 갱도 전체가 진동했다.
주위 일꾼들의 더듬이가 부산하게 움직인다.
[뭐지?]
[그리타 족이 찾아온 거 아닐까?]
[아냐, 이건 이상하다!]
[커! 진동이 너무 커! 이상해!]
[웜도 아니다! 비상! 모두 밖으로 튀어나가!]
평생을 지하 갱도에서 살며 배달된 자원을 해체하고 채취하는 것에 소모하는 엡틸리온 종족의 일꾼들.
전에 없이 강렬한 위기감이 뇌를 후벼 파고 있었다. 아우성을 치며 갱도 밖으로 튀어나간다. 철근 더미가 널브러져 있다가 그런 그들을 찔렀으나 아픔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야룬자도 달렸다. 기본적인 체력과 속도가 약한 까닭에 금세 뒤처진다. 그때, 기이한 느낌이 야룬자의 머리에 내려앉았다.
'뭐, 뭐……'
따닥, 딱딱.
도대체 무슨 일일까?
두려운, 지독하게 두려운 일이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야룬자는 본능적으로 그걸 알았다.
시커멓기만 한 천장을 올려다본다.
그래서는 안 될 것 같다. 그런데 그렇게 해야 할 것 같다.
이율배반적인 느낌에 몸을 떤다. 어느새 더듬이가 바싹 내려와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다. 야룬자는 배를 바닥에 붙이고는 비척비척 발을 땅에다가 비볐다.
'뭐지, 뭐지……'
툭, 투둑, 툭툭.
발이 제멋대로 움직인다.
야룬자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가지 마!'
이대로 있어야 해!
밖에 나가면 안 돼!
그렇게 외쳤으나 소용없다. 끝없는 공포가, 어떤 강력한 욕구 때문에 저절로 밖을 향해 기게 된다.
야룬자만 아니라 지하 갱도의 일꾼들이 모두 그랬다. 구세대 일꾼들은 특히 더 심했다. 까만 눈을 흐리멍덩하게 물들이고는 평소 경멸해 마지않던 다족류 종족처럼 꿈틀꿈틀 기어갔다.
'으으, 안 돼, 안 돼.'
그러나 야룬자의 의지와는 별개로, 지하 갱도를 벗어나 지상으로 나오고 말았다.
어두컴컴한 세계.
축축하다.
지구의 늪보다 더하다. 이 세계, 충왕계에는 하늘이 존재하지 않고 습도가 극히 높아 손만 휘저어도 물방울이 맺힐 지경이니까.
야룬자는 보았다.
저 높이, 분홍색 짐승 살점 같은 천장이 있어야 할 곳이 두 갈래로 쩍 벌어져 있는 것을.
'도, 도대체?'
상상도 못 했던 광경.
그 사이로 나타난 것은 시커먼 어둠이었다.
지하 갱도의 그것과는 다르다. 평소 천장 아래서 보았던 어둠과도 다르다.
어둠 사이 촘촘히 박힌 별을 보면서 야룬자는 의문을 품었다.
'성혼?'
충왕계에서 나오는 빛이라곤 곤충들이 자연스럽게 뿜는 빛과 성혼을 발현할 때 발산되는 빛밖에 없으니 당연한 사고.
하지만 이 또한 곧 정지되고 말았다. 벌어진 천장을 더욱 비집으며 거대한 존재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눈이 커진다.
전신의 솜털이 파르라니 일어난다.
축 늘어지다 못해 스스로 탈락하여 떨어지고 마는 더듬이.
스스로 정보를 차단한 채, 야룬자가 간신히 앞발을 들어 자기 눈을 가렸다.
'괴물!'
지금 야룬자의 뇌를 점령한 단 한 가지 단어.
그렇다, 괴물.
키가 10킬로미터는커녕 훨씬 더 커져 20킬로미터에 달하고, 악마의 몸에 기계의 갑옷을 갖춘 존재다. 눈에서는 불꽃 타오르듯 정광이 쏟아지고, 번들거리는 각질이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예고한다.
이것이 괴물이 아니면 무엇이 괴물이라고 할까.
[----!]
웅장한 외침이 세계 전체에서 토해진다.
그 울림이 세계를 훑고 지나간다. 야룬자도 몸의 구속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아아, 생명의 여신이시여……]
[생명의 여신께 축복 있으리!]
[이럴 때가 아냐! 다들 대피하자고!]
비로소 기운을 낸 반장이 더듬이를 격렬하게 마찰하며 소리쳤다. 다른 일꾼들도 더듬이를 마주쳐 동의를 표한다.
야룬자는 허탈한 감정을 실어 되물었다.
[어디로요?]
대피할 곳은 없다.
그제야 일꾼들도 그걸 깨닫고 멀거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투둑, 툭.
붉은 액체가 쏟아진다.
일꾼들이 허겁지겁 달려들었다.
[신혈이다!]
[비껴, 내 거야!]
[으아아, 이 향긋한 냄새! 달콤한 맛! 이제 죽어도 좋아!]
[나도 한 번 먹어보자!]
광분한 일꾼들이 마찰하는 더듬이가 왱왱 소리를 냈다.
꼭 빕티온 종족들이 떼로 날아오기라도 한 것 같다.
그걸 보자 불길한 느낌이 엄습해 온다.
신혈이 떨어진다?
다시 말해서 괴물이 침입한 쪽이 생각외로 가깝다는 뜻 아닌가.
'도망가자.'
물론 도망갈 곳은 없다. 어딜 가도 괴물의 공격에 휩쓸릴 테니.
그렇다고 해서 넋 놓고 있다가 죽을 수는 없지.
야룬자는 더듬이를 아까 떼 버린 걸 다행이라고 여겼다. 그게 아니었으면 신혈의 유혹에 굴복했지 싶다.
몸을 돌려 달아나는 야룬자.
방향?
모른다. 그저 멀리, 아주 멀리 달렸다. 평소 병정들이 주둔하고 있는 유충탑이 아니라 그 반대편으로. 어째서인지는 모르지만 그래야 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같이 가세!]
유일하게 따라붙은 것은 일꾼 반장.
야룬자는 어지러운 것을 참고 반장을 돌아보았다.
[신혈 한 방울 드시지 않고요?]
[본디 단 것에는 독이 든 법이지…… 우리 같은 일꾼들은 이런 일 생기면 그냥 피해 가는 게 상수야.]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나 보죠?]
[아니. 여신님이 이런 일을 당한 적은 없었어. 여왕님 뱃속에 타 있을 때나 흙 땅에 내렸을 때는 겪어 봤지만……]
오랫동안 대화하지는 못했다. 한동안 묶여 있던 괴물이 움직이기 시작한 까닭이다.
쿠웅! 우르르릉!
괴물이 착지하여 땅을 박차자 질척한 바닥이 몽땅 뒤집히며 갈색 액체가 솟구쳤다.
이 또한 신혈.
달콤한 냄새가 확 풍겼지만 그걸 핥을 시간은 없다. 바닥이 쩍쩍 갈라지고 있었다. 거대한 건축물이 매몰되었다가 박살 나며 사방으로 살점과 피를 뿌린다.
거기서 쏟아지는 왕혈, 장군혈, 군관혈……
전율하면서도 쏟아지는 잔해를 해치고 달렸다. 순간적으로, 군관이나 장군으로 태어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랬더라면, 그래서 탑으로 변태했다면 저들처럼 도망치지도 못하고 당했을 테니.
[맙소사!]
뒤에서 반장이 놀라 숨을 들이켠다.
괴물이 길쭉한 막대기 같은 걸 뻗어 마구 휘두르고 있었다. 그때마다 천장이 찢어져 작은 빛을 품을 어둠이 흘러나오고, 내부의 장군탑과 군관탑이 마구 쓰러진다.
거기서 그쳤다면 차라리 다행. 괴물이 다른 손을 들어 기괴하게 변형시켰다. 흡사 상위 종족의 입을 보는 듯한 형태.
그곳으로 잔해가 마구 빨려 들어갔다. 여신의 뱃속에서 사는 다른 종족들도 기성을 지르며 흡수된다. 심지어 아까 흩어진 동족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끼이이익!"
"캬아악!"
어찌나 다급했는지 페르몬도 아니고 육성으로 울부짖는다.
충왕계의 종족들에게는 상당히 충격적인 광경.
반장이 부들부들 떨었다.
[저 놈…… 덩치가 커지고 있어.]
[뭐라고요?]
[저 괴물 새끼! 우리 종족을 잡아먹고 덩치를 불리고 있다고!]
그런가?
야룬자는 거기까진 몰랐다. 없애 버린 더듬이 때문에 머리가 너무 어지러웠다. 머릿속에 드는 생각이라곤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다시 도망치기 시작.
괴물이 근처의 유충탑으로 성큼성큼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그때마다 바닥이 찢어지고 여신이 비명을 지른다. 야룬자는 간신히, 정말 간신히 괴물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놈이 유충탑을 먹었어…… 응? 아니네?]
살짝 뒤를 돌아본다.
괴물은 유충탑을 보며 기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응? 저걸 표정이라고 하나?
최근에 발견되었다는 외곽 행성의 원주민들이 저런 얼굴을 한다고 한 것 같다. 그들의 DNA 일부를 받았기 때문인지 괴물의 얼굴에 서린 감정을 조금이나마 알아낼 수 있었다.
그것은 분노.
"크아악!"
괴물이 유충탑을 보며 괴성을 지른다. 거기 서린 힘이 세계 전체를 뒤흔들었다.
[으헉!]
[억!]
야룬자와 반장, 너 나 할 것 없이 나동그라지고 만다.
때를 맞추어 갈라지는 천장. 더는 세계를 보호하지 않고 우주에 개방하고 만다.
공기가 순간적으로 흩어졌다. 절대 영도가 야룬자를 엄습한다. 몸은 얼어붙고, 숨이 턱턱 막히는 감각에 야룬자는 어떤 개념을 연상했다.
죽음.
반장이 공포에 질려 부르짖는다.
[여신이시여, 당신의 아이들을 보살피소서!]
충왕계.
이들은 진즉 자신의 고향별을 잃었다. 대신 9성 신격들이 행성의 파편과 융합하여 하나의 세계가 되었다. 커다랗게 육체를 부풀리고, 그 속에서 자신의 권속을 살게 한 것.
당연히 외부 침입에 취약하다. 그걸 방지하기 위해 온갖 방어 체계는 다 꾸려놓았으나, 김현이 방어막을 통째로 갉아 먹어가며 침입하자 불의의 일격을 당한 것.
"으하하하!"
김현은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렸다.
충왕계 여신 하나가 자신의 권속을 포기했다. 전투형으로 육체를 변형시킨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다른 여신 둘이 자신의 권속을 자기 동료들에게 전달하고 있었다.
셋이서 김현을 상대하겠다는 뜻. 이렇게 진심으로 나오면 김현도 사실 위험해진다.
"날 얕보지 마라!"
퇴각하는 대신 되레 달려들었다.
우주로 뿌려지는 곤충들을 마구 잡아먹었다. 그때마다 파멸신이 부쩍부쩍 자랐다. 심지어 대피 중이던 여신의 주둥이를 찢고 거기서 뿌려지는 곤충들도 먹어치웠다.
[커헉, 컥컥!]
그 중 야룬자라는 이름의 일꾼이 있었으나 김현은 몰랐다. 궁극의 진화체 성혼이 반응하는 바람에 지구인의 DNA가 회수된 것을 알아차리고 또다시 분노했을 뿐.
"죽인다!"
우주 공간을 절단하듯 짓쳐 드는 거검.
여신의 몸이 두 동강 났다. 그러나 이 정도 충격으로 죽을 9성 곤충신격이 아니다. 이계의 신격들처럼 개념의 권역을 갖지는 못해도, 육체적으로는 극도로 발전해 있다.
동강나면 동강나는 대로 분열하는 여신의 자아. 둘이 합창하듯이 소리쳤다.
[감히 내 자식들을 죽이다니! 네놈을 잡아먹고 말겠다!]
[얌전히 내 자식들의 재료가 되어라!]
"누가 할 소릴?"
처절한 난타가 이어졌다.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으려고 하는 전쟁.
김현은 곤충들로 자신의 일부를 만들려고 했고, 곤충신격은 김현의 DNA를 얻어 새로운 자식을 얻으려고 했다.
조금씩 불리하게 돌아간다.
자식들을 대피시킨 여신 둘이 새로이 합류했기 때문이다.
척 보기에도 기괴한, 거대한 지렁이나 혹은 지네를 닮은 형체.
우주를 자유자재로 유영하며 김현을 압박하고 있었다. 벌써 주변에는 소화액을 뿌옇게 뿌려 놓았다. 거기에 아무리 부수고 잘라도 파편 하나하나가 자아를 얻고 대항하니 김현도 상대하기 힘들었다.
'이쯤에서……'
뒤로 물러나기 시작.
목표는 채웠다. 곤충들을 한껏 포식했으니까.
단, 여신들의 살점과 피는 피했다. 등급이 높다고 함부로 먹었다간 육체의 주도권을 두고 여신의 분신과 싸우게 될지도 모르니까.
[놈!]
[변방의 하급종자 주제에!]
여신들이 악을 지르지만 무시.
이번 습격으로 충왕계의 전력은 1/3 가까이가 떨어져 나갔다. 여신들이 이걸 복구하려면 시간 꽤 걸릴 것이다.
복수하려면 할 수 있겠지. 조금 전의 간이 전투형도 아니고 완전 전투형을 취하면 김현과 막상막하로 싸울 테니. 하지만 종족 보존과 번성이 최우선 목표인 충왕계가 과연 그런 선택을 하려고 할까?
[복수하고 싶으면 찾아와라.]
차원 너머로 몸을 던지는 김현.
수면 출렁이듯 파멸신이 파장이 되어 사라진다. 공간을 겹치고 있던 파멸의 신좌가 시공적, 개념적으로 완벽히 멀어졌다.
이를 가는 여신들.
벽을 쌓는 것이 느껴진다.
조금 전 습격을 교훈 삼아 다시는 이런 습격이 성립되지 않게끔 새로운 법칙까지 추가하여.
한 가지 더.
차원 통로도 스스로 무너뜨렸다. 자기들 복속 차원으로 향하는 통로만 남겨놓은 상태.
"후후."
가슴이 상쾌했다.
해묵은 원한을 해결했고, 충왕계 또한 지구의 성혼 경쟁에서 탈락시켰으니.
이로써 탈락한 세계는 네 개.
유명계, 기갑계, 충왕계.
악마계도 사실상 탈락이다. 침공 실패를 알면 즉시 문을 닫아걸겠지.
'이대로 열여덟 세계를 전부 다 돌자.'
언제 이런 통쾌함을 또 맛보겠나?
아직 김현에 대한 정보가 제대로 돌지 않은 지금이 기회였다. 지금이라면 어떤 세계도 김현의 침공을 제대로 방어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몸을 일으켜 악마계로 향하려고 했을 때.
찌이잉……
기묘한 진동과 함께 세계가 말을 듣지 않은 탓이다.
'이건?'
신좌의 상태를 확인하고, 김현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