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3
합류
더욱 불안정해졌다.
처음에 김현은 기갑계와 충왕계의 외계종을 포식하면 신좌가 안정을 찾을 줄 알았다. 영원히는 아니더라도 얼마 동안은 버틸 것으로 생각했지.
완전히 오산.
안 그래도 작은 세계가 기계와 곤충 박제로 꽉 차 버렸다. 그들이 흘리는 비명에 세계가 쉬지 않고 진동했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더 수를 채웠다간 넘쳐 흘러서, 펑 터져도 이상하지 않겠다.
'강해졌지만, 그만큼 불안해졌어.'
9성 신격을 품기에는 그릇이 너무 작았다. 포화 상태가 되었음에도 배가 고프니 참 우스운 노릇이었다.
'움직이기도 힘들다.'
이게 문제.
이래서야 지구로 가기도 힘들고, 외계로 원정을 가기도 힘들었다.
여기가 끝이라니……
조금은 허무해진다.
주먹을 한 번 쥐어 보았다. 그 간단한 동작을 악마와 기계, 곤충이 게걸스럽게 찬미한다. 그런 모습을 보니 우스웠으나, 한편으로는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신좌에 박제된 그들이나, 신좌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신이나 결국은 같은 신세라는 생각이 들어서.
'몇 년이나 버틸 수 있지?'
불안정하다고는 해도 지금 당장 어떻게 되지는 않는다.
약 100년.
김현에게 주어진 시간이었다.
인간으로서는 적당한 시간이라고 보겠다. 하지만 9성 신격이 된 김현에게는 아니었다.
9성 등급을 신격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뭐냐. 불멸의 삶을 얻으니 그런 것이다. 이러한 김현에게 100년이란 찰나의 세월에 가까웠다.
인간에서 바로 9성으로 올라선 것도 아니고, 수만 년의 시간 반복 끝에 쟁취해냈으니……
'어쩔 수 없지.'
김현은 마음을 비웠다.
불멸의 삶과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했으면 전생에 그렇게 했다. 인류 저항군 말기에 김현은 당시의 여섯 세력 모두에게 러브콜을 받았다. 오기만 하면 지구 총독 자리를 보장하겠다고, 혹은 다른 원정대 사령관을 맡기겠다고도 했었지.
100년. 100년이면 충분하다. 자신의 사명을 달성하는 데는.
김현의 눈이 축 가라앉았다.
"난 지구만 지키면 그만이야."
선언하듯 육성을 낸다.
두 팔 벌려 열렬히 환영하는 박제들. 그들을 보며 진절머리를 냈다. 100년을 함께 해야 할 놈들이 벌써 역겹기 짝이 없다.
'지구로 직접 갈 수는 없어.'
더욱 강해지고 더욱 불안정해진 지금이니 당연한 일.
역시 방법은 하나뿐이다.
화신(avatar).
예전에 지구에도 어떤 영화가 있었지? 접속 장치에 누워 정교하게 재현된 외계 종족의 몸을 움직이는. 또 김현도 얼마 전에 비슷한 것을 만든 적이 있다.
멸신갑.
감당 못 할 변수를 만들까 봐 추가 제작을 중단했지만, 당시 썼던 기술을 응용하면 원거리 운용 화신 정도를 만들기는 쉽지 싶다. 마침 재료도 충분하고.
'100년이라 이거지.'
차라리 화신을 100개체 정도 만들어서 파견할까? 신좌의 재료를 이용하면 8성 등급의 힘은 충분히 부여할 테니 이것만으로도 지구를 지키는 것이 가능하다.
곧 머리를 저어 버렸다. 9성 신격이 되면서 얻은 권능으로 미래를 엿본 결과, 그 경우 지구와 신좌를 구분하는 벽이 엷어져 통합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감당할 수 있는 건 딱 하나.'
그 이상은 독이다.
묵묵히 화신 제작에 들어갔다.
옛 모습을 똑같이 재현하려다가 멈칫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지.'
더 강하게 만들어도 좋다. 단 1개체에 불과하다면.
잠시 고민하던 김현의 시선이 자신의 몸, 즉 파멸신에 가 닿았다.
이걸 적당히 응용하면 되지 않을까?
퉁!
손가락을 튕긴다.
직접 설계도를 그리고, 설계도대로 재료를 준비하고, 금속을 녹이고 망치를 두드려 가며 만들어야 했던 예전과는 다르다.
이것 하나로 벌써 신좌가 꼬물거리며 화신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허공에 뭉치는 빛덩이 하나.
'인간형으로. 아, 조금 작게.'
장갑 기사는 크기와 무게에 영향을 많이 받지만 새로 만들 화신은 아무래도 좋다. 그래서 옛 모습, 정확히 말하면 성혼을 막 얻었던 그때 모습을 똑같이 재현했다.
한때 김현의 상징과도 같았던 금속 의수까지도.
김현은 속으로 픽 웃었다.
'사실 이럴 필요는 없는데.'
그냥 그러고 싶었다.
어쩌면 이런 불합리를 굳이 선택하는 것에서 자신이 인간임을 주장하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딱 5초 만에 완성된 화신.
겉으로 봐서는 완전히 인간이다. 내부는 악마와 기계와 곤충이 뒤섞였으나 외부에서 식별할 방법은 없다. 최소한 8성 우화를 마친 각성자가 와야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이라도 알겠지.
"다 됐나?"
김현은 자신의 화신으로 목소리를 내어 보았다.
모든 것이 똑같다.
목소리도, DNA도, 홍채도, 지문도, 모두 다.
따로 인격을 부여하진 않았다. 멸신갑에게 얻은 교훈 때문이다. 차원 통신을 통해 항시 본체인 파멸의 신좌와 연결되어 있고, 만약을 대비한 보조 인공지능만 달았다.
"돌아가자."
파멸의 신좌는 어느새 처음 위치했던 곳으로 돌아가 있었다.
지구와 겹쳐진 공간. 모가디슈의 인공 지구와 바로 연결되는 지점. 악마들을 유인했던 그곳이다.
푸욱.
파멸신이 손가락을 내밀어 허공에 구멍을 뚫었다.
어릿어릿 어떤 광경이 엿보인다.
지구의 전력이 모두 집결해 있는 모습.
김애경, 이세희, 에일리, 사브리나는 물론 미국의 리아 테일러, 중국의 차오웨이, 사우디아라비아의 무함마드, 대한민국의 신필종, 박준 등 유력 각성자는 모두 보였다.
그들만이 아니다. 모가디슈의 경비대와 치안대, 다국적 각성자 연합이 모두 대기 중이었다. 가히 지구 전력의 절반 이상이 집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현에게는 까마득한 옛 얼굴들.
반가운 마음이 든다. 당장 구멍 너머로 뛰쳐나갔다.
퍽!
둔탁한 소음과 함께 김현이 방어 차원에 떨어졌다.
"현아!"
가장 먼저 뛰어온 것은 역시 김애경.
이들 기준으로는 아직 며칠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다. 기갑계와 충왕계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들이 아는 것이라고는 김현이 살신성인하여 악마들과 함께 외곽 방어 차원에 남았다는 것 정도.
"난 괜찮아."
김현은 흐리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김애경이 멈칫한다.
뭔가 이상했다.
외모가 바뀐 것은 이미 몇 번 그랬으니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조금 전 입가에 걸린 웃음, 확실히 이질적이었다. 현 김현이 복제 인간인 것을 알고 봤을 때보다 더 그랬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곧 사라져 버렸다. 김현이 예전의 그 웃음을 되찾았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되찾은 것이 아니고 기억해 내어 흉내낸 것이지만.
"악마들은?"
"다 죽었어."
"죽었다고? 정말?"
"응. 그럼 내가 아무 대책 없이 혼자 남았겠어?"
"김현 님, 걱정했잖아요."
"살아와서 다행이에요."
"역시 사령관님이십니다."
다들 크게 안도하는 기색을 보였다.
차오웨이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아리송한 얼굴을 한다.
"그럼, 이걸로 끝입니까?"
맥빠진다는 기색.
유명계 침공보다 몇 배는 큰 규모의 침공이라는 말에 만사 제쳐두고 달려온 참이다. 그런데 대기 며칠 한 것으로 끝이라고 하니 의아할 법도 했다.
김현은 빙그레 웃으며 손을 휘저었다.
"운이 좋았지요. 반만 걸려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악마놈들이 전부 다 함정에 걸렸어요. 쉽게 가니 다행입니다."
"음……"
"걱정하지 마세요. 저번 유명계 침공 때도 그렇고, 이번에도 여러분이 보여주신 마음은 잘 받았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 모두에게 1성 승급을 보장하겠습니다."
"잠깐만, 보장한다고요?"
"아. 중간에 일이 잘못되어 실패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미리 유서는 써두고 시도하세요. 대신, 일체의 재료를 제가 부담하도록 하겠습니다."
"하하! 역시 사령관님은 통이 크십니다."
"원하신다면 악마들에게 얻은 성혼을 분배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아, 그것보다는 승급이 훨씬 낫지요."
차오웨이가 김현의 동료들을 힐끔거렸다.
한때 같은 선상에 있기도 했었으나 다시 치고 나간 김현의 동료들. 8성이 된다면 더는 벌어지기 힘들 것이다.
'9성은 신의 영역이라고 했지?'
차오웨이는 눈치가 빨랐다. 9성은 하늘 위의 경지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8성에만 도달해도 지금의 권세를 유지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지 싶다.
황제.
현재 중국의 주석은 차오 회장이지만, 차오웨이는 어느새 그런 호칭을 꿈꾸고 있었다.
그냥 해산하기도 뭐하다. 김현은 지원하러 온 각성자들을 인공 지구로 데려가 작게나마 잔치를 열었다. 모가디슈의 시민들이 높은 일당에 환호하며 인공 지구로 올라와 일을 돕고, 서울의 온갖 출장 뷔페를 불러다 음식을 하게 했다.
술이 공수된다.
소주, 맥주, 막걸리, 위스키, 사케, 보드카, 럼, 마유주, 그 외에도 각 지역의 전통 술들……
잔뜩 긴장하고 있다가 풀어진 까닭일까. 곳곳에서 각성자들이 폭음을 하고 술에 취해 돌아다녔다. 시장바닥에 온 듯 꺾이는 노래가락이 귀로 파고들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김애경이 김현을 보다 묻는다.
"뭘?"
"너 말야. 또 달라진 것 같은데……"
이걸 어떻게 대답하지?
김애경만 아니라 동료들도, 동맹 각성자들도 귀를 쫑긋 세우고 있다. 기자들 역시 주위를 얼쩡거렸다.
그냥 함정만 팠다고 말해서는 곤란하다. 침공한 악마들의 규모는 조금만 있어도 알려질 테니까.
고심 끝에 사실을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
"함정을 팠어. 그냥 함정이 아니고 시간 반복 함정으로."
"시간 반복 함정이라고?"
"응. 혹시 타임 루프라고 알아? 영화에도 몇 번 나왔는데."
"알지. 블러드 공작이 실험하던 거잖아."
"그걸 설치했어."
"뭐? 뭐?"
비로소 사태의 전말을 짐작한 각성자들.
경악하여 입을 쩍 벌린다. 블러드 공작의 실험체들, 아니 희생자들이 어떤 일을 겪었고 어떠한 결과를 맞이했는지 다들 알기 때문이다.
"사, 사령관님은 괜찮은 겁니까?"
사브리나가 놀라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러다 자기 혼자 멈칫하고는 얼굴을 뒤로 뺐다.
"아, 난 괜찮아. 혹시 아까 방어 차원 안을 본 사람 없어요? 잠깐은 봤을 것 같은데."
"뭐가 살짝 보이기는 했어. 거대한 악마 같은 거?"
"저도 봤어요."
"하도 컴컴해서 전……"
"전 거대한 악마와 악마 군단을 봤습니다. 확실하지는 않습니다만."
워낙 짧은 시간이어서 8성 각성자의 동체 시력으로도 살필 수가 없었나 보다.
김현은 묵직하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거, 멸망왕이에요."
"네?"
"아, 그러고 보니 멸망왕이 없네요."
"멸망왕이라니, 무슨 뜻이에요?"
"말 그대로죠. 시간을 계속 돌리다 보니까 악마들도 못 버티고 영혼이 녹아내리더라고요. 그러면서 멸망왕에 들러붙었어요."
"멸망왕은 멀쩡하고?"
"당연하지. 멸망왕은 기계고, 영혼이 없으니까. 내 생각에는 악마들이 멸망왕을 핵으로 해서 새로운 9성 신격으로 재생하는 것 같았어."
"뭐?"
이건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새로운 9성 신격의 대두라니? 그것도 지구에 적대적일 게 뻔한, 악마계의 일원으로?
다들 멀거니 이쪽을 쳐다본다. 기자들도 그랬다. 말투는 별 것 아닌 것처럼 얘기하지만, 내용이 충격적인 까닭에 원고를 송고하는 것도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아, 놀랄 필요 없어요. 완성되기 전에 시간 반복 해제하고 도망쳤으니까. 제가 나오면서 차원의 문도 닫혔으니 당분간은 별일 없을 겁니다."
"당분간? 그게 언제까진데?"
"적어도 100년. 장담할 수 있어."
100년이면 지구인에게는 까마득한 시간.
이세희가 안도하여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쨌든 이번 위기는 넘긴 거네요."
"그것만이 아니죠. 그 거대 악마 때문에 다른 세계가 우리에게서 손을 뗄 확률이 높습니다."
"네? 어째서요?"
"거대 악마가 온전히 태어나면 자신이 태어난 세계를 자양분으로 삼으려고 할 겁니다. 이번 경우에는 그게 지구겠죠. 아차원이라고 해도 결국은 지구에 예속되어 있지 않습니까."
김현은 진실과 거짓을 교묘하게 섞었다.
사실 이 말이 맞다. 김현이, 파멸의 신좌가 온전한 9성 신격이 되려면 지구 전체를 잡아먹어야 했으니. 그러면 18 세계에 이른 19번째 세계가 탄생할 것이다.
대부분이 진실인 만큼 설득력이 있었다. 김현의 말을 듣고 있던 이들의 얼굴이 삽시간에 창백해졌다.
"100년, 100년은 남아 있다 이거지?"
김애경이 소맥 한 잔을 마시고는 쾅, 내리치며 묻는다.
"100년이면 충분하지! 어쩌면 200년일 수도, 300년일 수도 있는 거 아냐?"
"누나 말이 맞아."
"까짓 거 100년 동안 우리도 8성 50명, 9성 5명 정도 만들면 되겠네!"
"하긴 그러면 되겠네요! 해봐요! 100년이잖아요, 100년! 1년 만에 여기까지 왔으니까 100년이면 충분하죠!"
다들 하나가 되어 흥겹게 소리친다.
처음 세계가 침식되고 괴물들이 나타났을 때는 까마득해 보였던 목표. 이제는 완벽히 구체화 되었다.
즉석에서 100년 대계가 구성되기 시작한다.
조금은 서글펐다.
이들이 타도하자고 외쳐대는 거대 악마가 바로 자신이었으니까.
'뭐 어때.'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는 것을.
한 마디 거들고, 한 마디 반박해가며 계획을 세워나간다.
술자리에서 만들어진 계획치고는 제법 정교한 계획.
그러는 사이 지구에서도 큰 변화가 있었다.
현재 101개에 달하던 외계종의 거점.
그것들이 싹 사라져 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