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4
솎아내기 -1-
'이것 봐라?'
김현은 승전 축하 연회가 끝난 다음에야 그 사실을 알았다. 자연스레 두 눈이 번뜩이게 된다.
처음 시작은 기갑계. 연회가 끝나가던 시점에 모든 거점이 철수했다. 그리고 충왕계, 악마계, 불사계 순서로 사라지더니 마지막 거점마저 차원 저편으로 사라진 것이다.
어안이 벙벙한 각성자들만 남겨놓고서.
"어떻게 된 거지?"
"대체 무슨 일이야?"
다들 상황 파악이 안 되어 어리둥절한 표정.
"거대 악마 때문이야."
"그게 왜?"
"거대 악마가 지구를 자기 영역으로 인식하고 있거든."
"하지만 깨어나려면 100년은 넘게 남았다며."
"외계종들에게 100년은 아주 짧은 시간이니까. 괜히 나중에 적대적인 관계를 맺느니 지금 철수하는 게 낫지."
"하……"
김애경이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백혈탑 보고 놀랐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렇게 됐네."
"잠깐만요. 그럼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예요? 외계종 거점이 있어야 무역도 할 수 있잖아요."
"아니죠. 차원 원정 떠나는 팀은 우리 말고도 꽤 있었습니다. 대부분은 외계종 거점을 통한 거였지만, 독자적인 기술을 확보한 팀도 있었죠. 그들이 앞으로 앞서 나갈 겁니다."
당장 차오웨이만 해도 중국에 차원문을 크게 지었다. 김현이 보기엔 참 원시적인 형태지만 하루 주기로 외계 원정을 다녀오는 것에는 문제가 없다.
"그래도 당분간 혼란은 어쩔 수 없겠어."
"그렇겠지. 차라리 잘 됐어. 외계종 거점은 유사시에는 침공 거점으로 활용되니까. 그냥 무법성만 왔다 갔다 하면서 외계종들과 거래하고, 사냥하는 게 나아."
그나저나 종족 변환 각성자들은 어떻게 됐을까?
보통 이런 식으로 야반도주하듯 철수할 때는 우호적인 종족 변환 각성자를 데려가기 마련이다. 신참자는 여러모로 써먹기 좋으니까.
그 생각으로 검색해 보았는데, 이상하게도 주요 각성자들 대부분이 남아 있었다. 몇몇 거점에 들어가는 각성자가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극소수.
'아, 그렇게 된 거구나.'
알 것 같았다.
그냥 좋아서 다른 종족이 되고, 다른 세계에 가려고 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예전에 김현과 거래하던 백흔혼을 생각해 보자.
백흔혼은 살아남기 위해, 가족들을 살리기 위해 유명계로 이주했다. 그것이 완전한 죽음보다는 낫다고 생각했으니까.
지금 지구는 어떤가?
외계종 침공을 잘 방어하고 있다. 종족 변환한 각성자들은 부와 권력을 얻기 위해 종족 변환한 것이지, 진심으로 그 종족이 뛰어나다고 생각해서 종족 변환한 것이 아니다.
성혼 사태가 오래 지속 되었다면 외계종을 상위종이라 생각하는 무리도 나왔겠지. 그러나 1년밖에 안 되었으므로, 그런 자들도 아직 많이 나오진 않았다.
김현은 지구에 남은 종족 변환 각성자들의 이름을 확인하고 눈을 빛냈다.
'알렉산더 브라운, 닉 스미스……'
지금은 거의 가택 연금 중인 처지.
충격이 어마어마할 것이다. 그들의 뒷배라고 할 수 있는 외계종이 모두 떠나버렸으니.
'만나볼까?'
외계종이 사라졌으니 그럴 가치는 있다. 갱생할 거라는 생각은 안 들지만, 혹시 모르는 일. 만약 자제력을 모두 잃고 폭주할 것 같으면 미리 손을 써둬야 하고.
따르르릉!
사색을 끝내고 외부와 통신 회선을 연결하자 머릿속으로 요란한 연결음이 울렸다. 굳이 하나만 받을 것 없이, 전자두뇌의 성능을 이용해 한꺼번에 연결했다.
"여보세요."
[아, 슈퍼 김! 접니다.]
[안녕하세요? 혹시 저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어요. 한성일보의 신은서에요.]
[리아 테일러입니다.]
[오랜만입니다. 김 회장님, 저 차오입니다.]
이런 식으로 걸려온 전화만 적어도 100통.
사고를 분할하여 동시에 대답했다.
[예, 말씀하세요.]
[외계종 거점이 모두 사라졌던데 어떻게 된 겁니까? 거대 악마 때문에 그렇다고는 들었습니다만 도통 무슨 소린지……]
[그거 들으셨어요? 1시간 전에……]
뭔가 했더니 다 똑같은 소리.
김현은 동료와 동맹 각성자들에게 했던 말을 똑같이 반복했다. 단, 각국의 국가 원수에게는 새로운 말을 덧붙였다.
[제가 알아보니 종족 변환 각성자들은 지구에 남은 것 같습니다.]
[좋은 일 아닐까요? 직접적인 침공 때만 아니면 종족 변환 각성자들도 인류를 수호하는 이들이잖습니까.]
[좋은 일인지 아닌지는 두고 봐야 알지요. 일단은 제가 한 번씩 만나 보겠습니다.]
[엇…… 굳이 그러실 필요까지?]
[혹시 모르니까요. 그래서 말입니다만, 해당 각성자의 명단을 넘겨 주셨으면 합니다. 기왕이면 조사할 수 있는 권한도요.]
[음……]
[불편하시면 안 넘겨주셔도 됩니다.]
[아니, 아닙니다. 대신 이쪽에서도 요원 몇 명을 동행시키지요.]
[그렇게 하세요.]
국가 주권을 가볍게 무시하자 국가 원수들이 난감해하며 타협안을 제시했다. 김현 혼자 날아다니며 종족 변환 각성자들을 잡아가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연회가 끝나고 다들 전후 처리에 바빴다. 김현도 전자두뇌의 일부 자원을 거기 할당하고 있었다. 어차피 누굴 데려갈 필요도 없으니 당장 날아오른다.
쌔액!
LA 상공에서 나타난 김현.
알렉산더는 LA 비버리힐즈의 대저택에서 칩거하고 있었다. 음속을 돌파하여 그쪽으로 날아간다. 하늘 위에서 머물며 잠시 기다리자, 헬기 한 대가 급하게 이쪽으로 다가왔다.
한 아름다운 여인이 머리를 내민다.
리아 테일러.
침공 방어전에 대기한 것으로도 모자라 여기까지 날아오다니, 상당히 부지런해진 모습이다.
"동행한다는 사람이 그쪽이야?"
"네, 맞아요."
리아는 다소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사이가 조금 가까워졌다고는 하나 화인처럼 잊히지 않는 기억이 있을 테니.
김현은 리아의 뒤에 선 양복쟁이들을 한 번씩 보았다. 어느 기관인지는 모르겠지만 미국 정부에서 나온 것 같다.
"바로 가지."
휘익!
눈 깜짝할 사이에 대저택 정원에 착지한 김현.
풍압도 뭣도 없었다. 물리 법칙을 무시하는 움직임에 리아가 혀를 내둘렀다.
양복쟁이 하나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겨우 수색 영장 받아서 가져왔는데……"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리아는 한 번 쓰게 웃고는 역시 뛰어내렸다.
"쫓아오기나 해요."
그대로 강하.
리아의 전신이 한 줄기 불꽃으로 변했다. 대기를 가르며 정원에 내려앉는다. 착지 직전 몸이 원래대로 돌아오며 수풀 하나 태우지 않았다.
이것이 과연 7성과 8성 각성자의 위엄인가.
양복쟁이들이 서로를 마주 본다.
"우리도 내려가죠."
"낙하산 쓰게?"
"그냥 가도 될 것 같은데요."
"조종사 양반, 갑시다!"
"쯧, 고생이 많수다."
알렉산더의 대저택은 헬기 한두 대가 아니라 수십 대가 내려앉아도 될 크기였다. 헬기가 로터음을 내며 천천히 하강했다.
그 사이 김현과 리아는 대저택의 문 앞에 도달했다.
김현이 문을 뜯고 들어가려고 하자 리아가 말렸다.
"잠깐만요. 일단 적법한 절차를 밟게 해주세요."
"뭐, 그렇게 해."
귀찮다.
차라리 연락 안 하고 바로 침실로 내리꽂을 걸 그랬을까?
지금도 침실에 있는 것으로 파악이 되는데……
리아가 초인종을 눌렀다. 외부 카메라가 켜지자 거길 들여다보며 말한다.
"알렉스. 안에 있어?"
몇 분 후 대답이 들렸다.
[무슨 일이지.]
항상 자신만만하던 알렉산더답지 않게 축 늘어진 목소리.
"너도 알고 있지? 모가디슈의 김현 사령관님께서 찾아오셨어."
[흥…… 사령관님은 무슨.]
승승장구하던 알렉산더를 실각시킨 사람이 김현이어서 그럴까. 희미한 적대감이 묻어나왔다.
"너도 지금 상황은 알 것 아냐. 언제까지 이렇게 있을 생각이야? 다시 세인트 소드라는 말 듣고 싶지 않아?"
[흥……]
"어쨌든 들어간다?"
[그러던가.]
삐익.
잠금장치가 해제되면서 녹색 불이 들어왔다.
문을 열고 들어간다.
대저택 안은 컴컴했다. 암막으로 햇빛을 다 가린 모양새다. 그걸 보며 김현은 한 가닥 의문을 품었다.
'알렉산더는 태양의 천사로 종족 변환했는데?'
원 역사에서도 그랬고, 현 역사에서도 그랬다.
리아도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또 무슨 지랄이야."
벽의 전원을 누르는 리아.
그러나 불이 들어오질 않는다. 김현이 슬쩍 대저택의 스마트 시스템에 접속해 확인해 보아도 마찬가지. 대저택 내부의 조명 관제와 암막 관제가 모두 고장 난 상태였다.
못 견디겠는지 리아가 손가락을 튕겨 불꽃을 발한다. 매우 밝은 광량이었는데, 괴상하게도 대저택 내부를 채운 어둠에 잡아먹히며 빛이 소멸되고 있었다.
이제 알겠다.
"요원들 들어오지 말라고 해라."
"네?"
"우린 괜찮지만, 그 사람들은 위험해."
뭔가 심상치가 않다.
리아가 무전기를 통해 진입 불가 명령을 내렸다. 송수신 감도가 좋지 않은 걸 김현이 개입하여 겨우 연결이 됐다. 외부의 인기척이 멀어지는 것이 느껴진다.
침실로 향하는 둘.
쥐 죽은 듯한 적막이 장막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고위 각성자인 둘이라 어둠을 꿰뚫어 보는 거지, 일반인이 들어왔으면 소리도 빛도 없는 저택을 헤매다가 굶어 죽어도 이상하지 않겠다.
"분위기가 묘한데요."
침묵을 참다못한 리아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이리저리 퍼지는 대신 공간 속으로 흩어져 소멸된다. 그 기이한 현상에 리아가 침을 삼켰다. 침 삼키는 소리도 소실되어, 괴상한 반향을 만들어냈다.
이것 때문에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는 것이다. 김현은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아주 잘 알았다.
'어둠의 천사.'
악마계의 혼탁한 어둠과는 다른, 혼돈계의 속삭이는 어둠과 구별되는, 천상계 어둠만 보이는 특징.
빛의 천사와 어둠의 천사를 융합한다고?
좋지 않다.
김현은 인근 관공서 서버에 접속하여 해킹했다.
왜애애앵!
아스라이 울리는 성혼 경보.
미국인들이 당황해서는 밖으로 나온다. 그도 그럴 것이 성혼 사태가 안정화된 최근에는 들은 적이 없었던 경보니까.
"뭐, 뭐에요?"
리아도 그걸 들었다. 당황하는 얼굴을 하더니 김현을 돌아본다. 김현의 소행이라는 사실을 눈치챈 것 같다.
"혹시 모르니까."
"음……"
"조금 기다렸다가 가지."
"좋아요."
어쩌면 천사들이 후퇴하면서 뭔가 수작을 부렸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가능성이 큰 것은 알렉산더였다.
극대파멸력이 뭐냐.
불과 얼음 등 정반대의 힘을 융합 및 폭주시켜 탄생하는 것이 극대파멸력이다. 빛과 어둠 또한 같은 결과를 빚어낸다. 오히려 더 근원적인 영역까지 들어가므로 더 위험했다. 알렉산더가 폭주한다고 김현이 어떻게 되지는 않겠으나,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도 없다.
미국의 대피는 신속했다. 금세 인근에서 인기척이 싹 사라진다. 헬기에 타고 온 양복쟁이들도 개입한 까닭에 더 빨랐다.
침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짙은 어둠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 안에 벌거벗은 천사 하나가 태아처럼 몸을 웅크린 채 이쪽을 쳐다본다.
인간의 특질이라곤 단 하나도 남지 않은, 성스러운 느낌마저 풍기는 남성 천사.
"알렉산더 브라운."
뉴욕 사태 이후 오랜만.
알렉산더가 고개를 들어 이쪽을 본다. 두 눈이 시꺼멓게 변해 있었다. 백로처럼 새하얗던 날개도 검은 깃털이 돋았다.
하지만 완전하지는 않다. 눈 같은 경우 흑진주처럼 까만 것이 아니라 푸르고 흰 기운이 같이 돌아 얼룩덜룩하다. 날개도 까만 깃털, 반만 까만 깃털, 얼룩만 묻은 깃털이 혼재하여 아름답다기보다는 먼지 쌓인 것처럼 보였다.
"옐로우 몽키……"
알렉산더가 이를 간다. 리아가 흠칫 놀라 헛바람을 들이마셨다. 김현도 차갑게 한 번씩 웃었다.
"그때 맞은 게 부족했나 보지?"
"크크……"
듣기 싫다는 듯 고개를 날개 사이로 파묻어 버린다.
유난히 크게 불룩해지는 가슴께.
어둠을 흡수하는 중이다. 가슴이 부풀었다가 내려앉을 때마다 어둠이 미미하게 옅어졌다.
"어리석긴."
"크크크……"
"죽고 싶으면 외딴곳에서 혼자 시도해라. 이런 도시에서 하지 말고."
"무슨 상관이냐."
"네가 죽든 말든 도전은 네 마음이지만, 애꿎은 시민들까지 휘말릴 것 같으니 하는 말이다."
"흥…… 관심 없다."
빛과 어둠의 융합.
김현은 머리를 저었다. 천상계에서도 성공하지 못해 영원히 묻어버린 걸 알렉산더에게 시도하라고 시키다니?
이건 정말 버린 돌 취급이다.
성공하면 좋다. 천상계 입장에서는 공짜로 8성 각성자를 얻는 셈이니까. 실패하면? 아무래도 좋다. 짜르봄바보다 더 강력한 폭탄을 꼴 보기 싫은 지구에 선물하는 셈이니까.
설득할 시간은 이미 지났다. 거부 반응이 일어나며 알렉산더의 피부가 갈라지고 있었다.
빛이 새어 나온다.
투명하되 어딘가 불안정해 보이는 빛.
리아의 눈이 흔들렸다.
"알렉스……"
저 빛이 무엇인지 아주 잘 알고 있다. 극대파멸력 제어에 실패했을 때 보이는 현상이니까.
알렉산더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크크, 그래도 놈들이 하나는 진실을 말했군."
일그러진 눈이 김현을 주시했다.
"8성 따위 못 되어도 좋다! 네놈만은 데려가겠다!"
파파팟!
빛이 폭주한다.
거대한 섬광이 터져 나왔다.
우주에서 가장 강대하다고 평가받는 힘……
극대파멸력이 김현을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