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5
솎아내기 -2-
하지만 김현에게는 가소로울 뿐.
옆에서 리아가 비명을 지르건 말건 천천히 손을 뻗는다.
동시에 시간의 권능을 발현.
세계가 느려진다. 김현은 빨라진다. 두 흐름이 상승 작용을 일으켜 눈앞에서 빛나는 극대파멸의 섬광이 느릿느릿 타올랐다.
빛과 어둠이 화려하게 부딪치고, 서로가 소멸되어 단 한 줄기 힘으로 변하는 과정이 모두 눈에 담겼다.
그것은 하나의 폭풍이면서 격렬한 파도와도 같았다.
그러나 순일하지 못했다. 정교하지도 않았다. 빛과 어둠의 파편들이 아직도 군데군데 남아 마지막 순간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극대파멸력이 완성되지 못하고 폭주하는 것이다.
움켜쥔다.
공간을, 시간을.
혹은 한때 알렉산더 브라운이라 불렸던 힘 덩어리를.
또 하나의 권능 발현.
시간 역행.
언젠가 그랬듯이 단 0.1초에 불과하다. 그 이상은 김현에게도 무리였다. 그 정도로도 충분했다.
세상을 파멸시킬듯 뻗어 나가던 섬광이 어느새 돌아갔다. 가루가 되어 흩어진 알렉산더의 몸도 인간의 형체 정도는 갖춘다.
눈이 마주쳤다.
의아해하는 듯한 알렉산더의 눈동자.
그걸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순수한 힘의 파장이 알렉산더를 휩쓸었다. 빛을, 어둠을 그대로 흩트려 버린다. 애초에 부딪히지 못하도록 멀찍이 떼어놓는 것.
전부는 못한다. 김현이 들어서기 전에 융합한 게 있으니까. 그래도 폭발력을 극도로 억제하는 것은 가능했다.
"조금 이따 보자고."
콰앙!
알렉산더의 멱살을 쥐고 수직으로 날아올랐다. 어마어마한 충격파가 대저택을 단박에 때려 부순다. 폭음과 함께 먼지가 터지며 주위를 덮쳤다. 단지 대기를 돌파한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수백 미터는 떨어진 주위 집들이 수십 채 이상 폭삭 무너져 내렸다.
"꺄악!"
비명을 지르는 리아.
주민들을 대피시켜서 다행이다. 그렇지 않았으면 이 충격파에 수십 명은 사망했을 터.
"이건 대체……"
7성과 8성의 차이가 이렇게 크다고?
리아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볼 때 김현은 이미 리아의 시야에서 벗어난 다음이었다.
어둑한 우주.
대기권을 완전히 벗어난 다음에야 저 멀리 알렉산더를 던져 버린다.
"너…… 너!"
이를 갈며 외치는 알렉산더.
충격과 공포로 얼굴이 얼룩져 있다.
당연한 일. 분명히 전신의 힘을 폭주시키며 의식이 끊겼다. 그런데 눈 떠 보니 김현이 자신을 붙잡고 날아오르는 중이고, 또 힘이 폭주하여 터진다고 생각해 보라.
전신이 터지는 고통 또한 따라오고 있다. 끊기는 의식이 분절 분절 연결되며 죽었다가 살아나길 반복한다. 원인조차 알 수 없으니 두려울 수밖에.
김현은 설명해 줄 생각도 없었다. 대기권을 완전히 벗어난 다음, 투포환 던지듯 힘껏 날렸다.
팟!
드디어 타오르는 극대파멸력.
작은 태양이 뜬 것 같았다. 순수한 파괴력이 김현을 덮친다. 김현은 혼력의 방어막을 전개하여 광범위하게 지구 전면을 막아섰다. 심지어 궤도를 도는 인공위성들까지도.
'내 귀중한 친구들을 잃을 수는 없지.'
인공위성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데?
빛과 어둠의 반발인 만큼 알렉산더의 극대파멸력 폭주는 매우 강력했다. 그러나 김현을 어쩔 수는 없다. 일반적인 8성 각성자라면 제법 상처를 입었겠으나 김현은 단순한 8성 각성자가 아니니까.
9성 신격의 화신.
지닌 힘은 8성 수준이라고 해도 질에 있어서 차이가 크다. 9성 신격과 8성 등급은 8성과 1성의 차이보다 큰 바, 8성 각성자 7, 8명은 힘을 합쳐야 김현을 어떻게 하지 싶다.
명멸하는 빛을 보다가 몸을 돌렸다.
알렉산더 브라운은 완벽하게 소멸했다.
안타깝다면 안타까운 일이지만 별로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김현에게 있어 알렉산더는 인종차별주의자 1에 불과했으니까.
천천히 대저택이 있던 자리로 내려간다.
주위가 온통 폐허가 되어 있었다. 단순히 빠르게 이동하면서 생긴 충격파 때문이라고는 보기 힘들 지경. 중심에 내려앉자 리아가 괴물 보듯이 쳐다본다.
"무섭네요."
짧은 한마디.
의식적으로 뒤쪽, 저 높은 하늘을 일별하며 말했다.
"저게 터진 것보다는 낫겠지."
"그런 말이 아니었어요."
리아가 허탈하게 웃었다.
"그런데 대체, 알렉스는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요? 평소에도 오만하고, 잘못된 생각을 하긴 했지만 이럴 녀석은 아니었는데……"
"사람이 바뀌었으니까."
"단지 그 이유만으로는……"
"충분히 그럴 수 있어. 종족 변환한 자는 인격이 전혀 다르게 바뀐다. 알렉산더 같은 인물은 더할걸. 원래부터 천상계와 어울리는 성격이었으니까. 네가 보기에는 알렉산더에게도 어떤 장점이 있었겠지. 그 장점, 이젠 모두 사라졌다. 종족을 바꾼 다음에. 장점은 사라지고 단점은 1만 배 정도 강해졌다고 보면 정확하겠지."
리아가 복잡한 얼굴로 김현을 바라본다.
김현이야말로 알렉산더의 타락에 직접적으로 기여한 인물. 하지만 김현이 없었다고 해서 알렉산더가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했을까?
모를 일이다.
돌이켜 생각하면 알렉산더가 3성 각성자일 때의 모습도 썩 좋은 것만은 아니었고.
"움직이지. 뉴욕으로 가야 한다."
"아!"
김현의 재촉에 리아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테러 호트는요?"
"테러 호트?"
"카를로스 전 협회장이 수감되어 있는 곳이요!"
인디애나 주의 한 소도시에 위치한 미국 연방 교도소.
사형수를 수감하는 곳으로 악명이 높았다. 카를로스는 얼마 전 사형을 언도 받고 이곳에 수감되었다. 1만 년 징역형 이야기도 나왔으나, 흡혈귀의 특성상 세월은 의미가 없으므로 사형이 언도된 것이다.
잠깐 갈등했다.
뉴욕으로 가서 닉을 잡을 것이냐, 테러 호트로 가서 카를로스를 처리할 것이냐?
"뉴욕부터 가지."
"괜찮을까요?"
"봉인구 제작에 나도 참여했다."
굳이 악을 써서 믿으라고 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믿음직스러운 그 말.
물론 침공 직전, 블러드 공작이 뭔가 야료를 부렸을 가능성은 분명히 있다. 하지만 불사계의 본격적인 침공은 악마계 침공 이후로 예정되었을 테니 그게 발동한다고 해도 지금 당장은 아니다. 최소한 얼마 동안 말미는 있지 싶다.
"잠깐만요! 저건 뭐라고 설명하죠?"
리아가 귀 안에 꽂아놓은 통신기를 가리킨다. 김현은 어깨를 살짝 으쓱였다.
"정확하게 설명해. 그래야 다른 7성 각성자도 대비를 하지."
"설마 또 자폭 공격하는 사람이 있으려고요?"
"충분히. 뉴욕의 닉만 해도 의심스럽다. 중국이나 사우디아라비아, 이스라엘에도 많을 거고."
김현은 거침없이 살았고, 자연스럽게 적을 많이 만들었다. 그들 중 적당히 부추기면 자폭 공격을 할 자는 많고도 많다.
인간이라면 자기 목숨이 아까운 줄 알지만, 외계종 중에는 목숨 따위 지푸라기처럼 생각하는 족속도 있었다. 지구 정복에 실패한 김에 김현에게 조금이라도 피해를 주는 것은 생각해 볼 만 했다.
왜 자기네 세계로 데려가지 않고 소모하느냐고?
자원 문제 때문이겠지. 고위 각성자가 합류한다는 건 전력이 강화되는 대신 분배되는 성혼도 줄어든다는 뜻이니. 지구 정복에 성공했다면 모르겠으나.
"휴우, 알았어요."
"바로 가지."
손가락을 튕기자, 기이한 흡입력이 일어나며 김현과 리아를 한꺼번에 끌어당긴다.
다른 이들은 모가디슈에서만 가능하지만 인공 지구의 설계자이자 제작자인 김현은 지구 어디서나 가능한 공간 이동.
어느새 인공 지구의 지면에 도착했다. 한달음에 인공 지구의 북미 대륙을 가로질러 뉴욕에 도달한다.
뉴욕은 평소와 같았다.
사람들이 오가고,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고, 차들이 느릿느릿 주행하는 중이다.
닉이 사는 곳은 타임스퀘어 인근의 한 펜트하우스.
예전에 김현이 살던 곳보다 더 높고 더 컸다. 심지어 굽어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니, 닉이 김현에 대해 가진 감정을 알 만했다.
"아직은 아무 일이 없네요. 그런데 닉도 자폭하진 않겠죠?"
"몰라, 지금은."
악마들은 수틀리면 자폭이라도 해서 상대를 죽이려고 하니까.
문제는 뉴욕 도심에 대피령을 내리기는 힘들다는 점이다. 안 그래도 한낮, 뉴욕이 가장 바쁜 시간. 이때 대피하는 건 극도로 어려웠다.
'극대파멸력은 아니겠지.'
천상계는 어둠의 힘을 자연스럽게 쓰지만, 악마계는 빛의 힘을 극도로 혐오하니까. 타락천사 출신 악마들 중에는 간혹 빛의 힘을 간직한 자가 있으나 그런 자는 악마계에서도 희귀하다. 그들의 육체를 종족 변환하라고 내어주진 않을 것이다.
하늘을 날아 펜트하우스로 접근했다. 보안 장치가 작동하여 경고고를 발했다.
[정지. 이곳은 사유지입니다. 돌아가십시오.]
컴퓨터 주제에 무슨?
김현은 눈만 한 번 깜빡여서 펜트하우스의 모든 전자 기기를 해킹했다.
닉은 거실에 있었다.
술병 천지. 위스키, 브랜디, 데킬라, 진, 맥주, 할 것 없이 온갖 종류의 술병이 바닥에 나뒹군다. 그 중심에서 시커먼 형상의 악마가 술병을 나발 부는 중.
카메라로 보기만 했는데 술 냄새가 나는 것 같다.
닉이 꺼억 트림을 했다.
"이봐, 초대장도 없이 남의 집에 오는 건 그렇다 쳐도 보안 장치까지 손대는 건 너무하지 않아?"
"별로 너무하진 않은데. 멀쩡한 사람들 심장 뜯어먹는 게 너무하는 짓이지."
김현의 제어에 창문이 문이 벌컥 열렸다. 거기로 들어가며 말하자, 닉이 늘어진 채 히죽 웃었다.
"다 죽일 놈들 죽였는데, 그게 뭐?"
리아가 급히 부연 설명을 했다.
"닉의 성장을 돕기 위해 사형수를 동원한 적은 있습니다. 하지만 민간인 피해는 없었어요."
"진짜?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건……"
"설령 그렇다고 해도 문제지. 세계의 경찰이라는 국가에서 사형수라고는 해도 산 채로 심장이 뜯어져 죽게 해? 나랑 동급이네, 동급이야. 성혼 추출만큼이나 잔인한 짓 아냐?"
리아가 입을 오물거린다.
거기다가 쐐기를 박았다. 초거대 TV가 저절로 켜지며 어떤 영상이 재생된 것이다.
심장을 뜯어먹는 닉의 영상.
리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주장했던 것처럼 사형수만이 먹히는 게 아니었다. 다양한 각도, 다양한 거리에서 촬영한 영상 속에는 역시 다양한 사람들이 출현했다.
양복을 잘 차려입은 멋쟁이, 미니스커트를 입은 아가씨, 다 죽어가는 노파, 뚱뚱한 중년 남자, 심지어 어린아이까지……
"닉! 어떻게 저런 짓을!"
독살스럽게 외치지만 닉은 무시하고 술만 들이켰다.
"뭐 어때? 빨리 강해지라며?"
"그래도, 그래도 어떻게 저런 짓을……"
"총체적 난국이지."
김현은 짧게 말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부, 비도덕적인 각성 주체, 강해지기만 하면 어쨌든 좋다는 사회 분위기, 진실을 외면하는 대중들. 이들의 합작품이야."
맹세하건대, 김현은 수많은 살인을 저질렀어도 이런 식의 살인만큼은 저지르지 않았다. 차라리 깔끔하게 죽이면 죽였지.
리아의 눈이 흔들린다.
호수처럼 푸르른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몰랐다고 하진 마. 너도 비슷한 짓을 저질렀잖아."
"전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어요."
"그래. 퍽이나 자랑스럽겠다. 알고도 모른 척했으니 조금은 낫다 이거냐? 전미 각성자 협회장?"
입술을 꾹 깨문다.
정곡을 찔린 탓.
할 말은 있었다. 카를로스가 급히 검거된 까닭에 빈자리를 메우느라 고생했다고.
하지만 그런 말이 통할 사람이 아니지 않은가.
할 말을 잊은 리아를 뒤로 하고 김현이 앞으로 나선다.
저벅저벅.
유리 조각이 신발 아래에서 뭉그러졌다.
닉이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흐흐, 그래, 죽여라. 죽여!"
이건 이상한데.
김현은 닉이 어떤 인물인지 아주 잘 안다. 원 역사에서 어떻게 행동했는지, 어떤 최후를 맞았는지 알고 있으니 더 그렇다. 여기에 닉이 변환한 악마 종족에 대해서도 아니 더더욱.
그런데 이렇게 체념적인 태도를 보인다고? 악에 받쳐서 달려드는 게 아니라?
악마계의 침공이 실패해서 그렇다고 해석할 수는 있다. 하지만 부자연스럽다.
"넌 누구냐?"
자연스레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된다.
닉이 모호한 눈동자로 김현을 주시했다.
"누구냐니?"
이어 코웃음을 한 번 쳤다.
"나? 닉 스미스다. 전미 대륙에서 가장 강하고 세계를 호령할 남자, 블랙하트 닉 스미스란 말이다!"
말이 갈수록 커진다.
나중에는 쩌렁쩌렁 울려 펜트하우스 너머까지 뻗어갔다. 그러나 잠시뿐, 그것도 귀찮다는 듯 축 늘어져서 술병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리아가 눈살을 찌푸린다.
"대체……"
여기서 김현은 감을 잡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닉을 주시한다.
9성 신격이 된 이래, 김현에게는 능력치창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품은 성혼도 어떤 성혼이다, 라고 딱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웠다.
권능.
그렇게 말해야겠지.
정체를 간파하기는 쉽다. 기계신격의 기계 눈과 곤충신격의 겹눈이, 악마신격의 다중 동공 눈이 동시에 있기 때문이다.
술에 취해 어물어물하는 닉의 얼굴에 어떤 비슷한 얼굴 하나가 스쳤다.
그 이름을 불렀다.
"프랭크 스미스."
"내 동생은 왜?"
"제법 교묘한 속임수야."
그렇다.
김현의 눈앞에 있는 것은 닉 스미스가 아니라 프랭크 스미스였다. 닉의 영체를 대신 입고 흉내를 내고 있었던 것.
다른 육체로 영혼을 옮기기란 쉬우나 영체는 그게 어렵다. 그런 까닭에 무기력해져 술만 마시고 있었다.
닉, 아니 프랭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내 이름을 불러라, 내 이름을!"
"됐다. 편안히 보내주마."
분수에 맞지 않은 영체에 이식된 이상 소멸은 확정적.
가슴에 팔을 박고 심장을 꺼냈다.
시커먼, 징그러운 고깃덩이와 같은 심장.
그것을 보고 확신했다.
닉은 극에 이른 7성 각성자였다. 따라서 농밀하고도 강력한 힘을 품고 있어야 하는데 어째 어설프다. 기껏해야 갓 7성에 오른 각성자보다 조금 강한 정도.
'어디 간 거지?'
겨우 이따위 저급한 연막만 남겨놓고?
신격을 얻은 지금, 7성 성혼의 파편만 가진 채 숨은 닉은 실질적인 위험이 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김현은, 김현의 육감은 여기서 닉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속삭였다.
잡아야 한다.
어떻게?
위이이잉……
김현의 전자두뇌가 한계까지 돌아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