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
솎아내기 -3-
인공위성과 각국의 전산망을 해킹하여 찾는 수법은 안 통한다. 닉도 바보는 아니니 으슥한 곳을 찾아다닐 것이다.
문명에서 떨어진 곳.
오지, 혹은 지하.
그 정도는 김현도 유추했다. 하지만 닉이 아직 모르고 있을 사실이 있다.
두 가지.
김현이 악마의 눈을 얻었다는 사실과 9성 신격이 차원 너머에서 대기한다는 점.
'그래도 본신의 힘을 쓸 수는 없지.'
지구에 담기에는 너무나 초월적인 파멸신.
힘을 발현하는 것만으로도 강해진다. 그에 따라 갈망이 깊어진다. 예정된 100년의 유예를 더 앞당기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파멸신은 이제 쥐죽은 듯이 잠을 자야 했다.
아무래도 좋다. 지금 김현 또한 악마의 힘을 품고 있으니까.
눈을 뜬다.
인간의 것이던 눈이 삽시간에 변모했다. 동양인의 갈색 동공이 분화하며 네 개가 된다. 특히 검게 물들며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하자 리아가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사령관님, 그건……"
척 봐도 이질적인 모습.
리아는 몰랐지만 릴리스의 눈이다. 원본은 파멸신에게 남아 있지만 화신인 김현도 쓸 수 있지.
투시와 판독, 탐지를 겸하는 권능.
그것으로 시체, 심장을 본다. 거기서 발하는 고유의 파장이 김현의 눈에 정확히 각인되었다.
"후읍."
가볍게 숨을 들이마시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공간을 꿰뚫고 뉴욕시를 내려다보는 김현.
어려웠다.
무수히 흐르는 혼력과 쏘다니는 각성자들, 그리고 지금도 인간의 영혼에 맺히는 성혼 열매가 모조리 뇌에 들어와 맺혔으니까.
흔한 지구인의 뇌였다면 지금 김현이 받아들이는 정보를 받아들이지도 못했겠지. 새하얗게 김을 뿜다가 바로 타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전자두뇌는 잘 견뎌주었다. 오히려 빠르게 기동하며 불필요한 정보를 모조리 배제했다.
'설마 뉴욕에 있지는 않겠지.'
멀리 갔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마존이나 태평양 심해 정도, 아주 깊은 곳으로.
그런데 아니었다.
어퍼 맨해튼, 타임스퀘어 북쪽의 어느 뒷골목에 비슷한 반응이 잡혔다.
시커멓고 천천히 박동하는 기운.
자세히 살펴보자 김현이 쥔 심장과 동류의 것이었다.
그냥 같은 성혼을 가진 다른 각성자 아니냐고?
천만에 말씀. 완벽히 똑같았다. 성혼이 뿌리는 고유의 파장까지 한 치의 오차도 없다.
'멍청하긴.'
실소를 머금는 김현.
생각해 보니 닉의 선택이 영 틀린 것만은 아니다.
뉴욕의 할렘, 그 아래 펼쳐진 하수도.
질척질척하고 어두운 그곳은 잠시 숨어 있기에 나쁘지 않은 곳이다. 왕왕 차원문이 열려 떠돌이들이 들어오니 사냥도 할 수 있었다. 그들을 쫓아 들어오는 각성자들도 덤.
'8성 탐지 계열 각성자라도 찾지 못했겠어.'
워낙 은밀한 곳에 숨어서, 최대한 존재감을 낮추고 있었으니까.
그리 생각하니 가슴이 잠깐 서늘해진다.
김현이 화신에 많은 힘을 소모하지 않았더라면, 릴리스의 눈 복제를 장착하지 않았더라면 놓칠 가능성이 컸다. 그러면 닉은 힘을 키운답시고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겠지.
"찾았다. 가지."
"네? 어딘데요?"
"하수도."
하수도라고는 해도 맨홀을 열고, 더러운 액체를 몸에 묻혀가며 어둠을 헤맬 생각은 없다.
닉이 숨은 곳 바로 윗지점으로 날아간다.
대로에서 상당히 안쪽으로 들어가야 하는 곳.
오래된 아파트들이 줄을 지어 서 있다. 건물들이 어찌나 다닥다닥 붙었는지 창문을 열고 맞은편 건물 창문으로 도약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 안으로 천천히 비행해 내려가자 모여서 시시덕거리던 청소년들이 둘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어? 뭐야?"
"시발, 짭새다!"
"뛰어!"
무슨 상상을 한 건지 바로 튀어나가는 그들.
희게 한 번 웃고는 그들이 있던 자리로 다가갔다. 맨홀 하나가 살짝 틀어진 채 얹혀 있었다.
"하수도 안에 있나 봐요?"
"그렇지."
"설마 저길 들어갈 생각은 아니죠?"
"당연히."
왼손을 하수도 아래, 족히 수십 미터 지하에 있는 닉에게 겨눴다.
위이잉, 철컥, 철컥.
왼팔이 변형되기 시작한다.
꾸물꾸물 근육이 꿈틀거리고 새하얀 뼈가 드러났다. 인간의 뼈와는 다른, 차라리 금속에 가까운 질감이다. 그것이 기계음을 내며 하나의 거대한 총처럼 변형되었다.
처형자를 닮은, 아니 크게 확대한 듯한 총신.
근육이 거길 덮었다. 기계와 괴물이 교접하는 듯한 움직임이다. 여기에 새카만 기운까지 폴폴 일어나서, 리아가 자신도 모르게 혐오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하여 완성된 것은 악마 형상의 거포. 김현은 전자두뇌에 악마포를 연결하며 세부 조정에 들어갔다.
쿠앙!
둔중한 충격이 울렸다.
어둠을 닮은 광채가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맨홀 뚜껑을 간단히 부수고, 콘크리트 바닥을 간단히 증발시키며 나아간다. 그리하여 수십 미터 아래에 있던 추악한 어떤 것을 단박에 틀어쥐었다.
[뭐, 뭐냐!]
숨죽이고 으슥한 곳에 숨어 있던 닉이 놀라 바둥거렸다.
그러나 무소용. 순수한 힘으로 구성된 무형의 손이 이미 닉을 붙잡은 다음이다.
김현은 왼팔을 뒤로 잡아끄는 시늉을 했다. 닉이 무 뽑히듯 쑤욱 뽑혀 나온다.
[크악!]
김현을 본 닉이 발광을 했다. 시커먼 힘이 사방으로 쏟아진다. 하지만 김현을 감싼 어둠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꽉 그러쥔 그대로 콘크리트 바닥에다가 내팽개친다.
[컥!]
영체인 이상 이 정도 물리적 충격에는 아무 영향을 받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대포에서 나온 어둠의 힘이 뭔가 작용을 하는 듯했다. 닉이 또 비명을 질렀다.
조금 전 김현이 쏟 빛은 그냥 힘만 투사하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일종의 길어진 팔처럼 작용한다. 상대의 성혼을 봉인하는 효과도 있었다. 원래는 벨리알이 가끔 쓰던 것이지만, 김현이 역으로 활용한 것.
닉이 비명을 지르다 말고 리아를 보았다. 추한 손을 더듬더듬 내뻗으며 도움을 청했다.
[리아! 리아 테일러! 협회장! 날 도와줘! 이 아프리카 독재자 놈이 선량한 미국 시민을 고문하는 게 안 보여?]
"선량하다고?"
리아의 이마에 선명한 주름이 그어졌다.
펜트하우스에서 닉의 비밀 영상을 본 것이 바로 몇 분 전이다. 그런데 자신이 선량하다고 자기 입으로 말해?
더구나 리아도 지금은 7성 각성자. 탐지 계열 성혼은 없어도 상대의 진위를 어느 정도는 간파할 수 있다. 이렇게 순수한 영체 상태가 된 닉을 상대라면 더더욱 그렇다.
대부분의 힘을 프랭크에게 넘겨주고 영락한 상태가 된 닉.
육안으로는 잘 확인하기가 힘들다. 일반인이 보면 허공에서 꾸물거리는 얼룩이자 짙은 그림자 정도로 보일 것이다.
실체는 작은 악마. 진흙을 뭉쳐 괴물을 빚은 듯하다. 팔도 다리도 없다. 몸도 머리도 없다. 있다면 심장과 입 하나가 전부. 쥐를 한 마리 잡아 먹었는지 입가에 핏기가 맺혀 있었다.
어지간한 외계종보다 더욱 추악한 모양새. 이것이야말로 닉의 정체성을 가장 잘 표현하는 거였다. 자기 자신에 대한 마음속 깊은 심상이 이러한 외모를 빚었을 테니.
김현은 오른쪽 주먹을 꾹 쥐었다. 주먹이 꾸물꾸물 움직이며 거대한 칼날로 변화했다.
닉이 다급하게 외쳤다.
[자, 잠깐! 뭘 하려고?]
"이렇게 할 생각이다."
푸욱!
칼날이 닉을 꿰뚫었다.
경직되는 닉.
심장이 크게 한 번 박동했다. 그것으로 끝. 두 조각으로 갈라지며 폭발하고 만다.
촤학!
더불어서 퍼지는 검은 피.
이것 전부가 사악한 악마의 영혼이나 다름이 없었다. 김현은 왼손을 쥐고 힘을 주입했다. 빛의 손이 타오르며 검은 피를 불사르기 시작했다.
리아가 멀거니 김현을 쳐다본다.
"꼭 죽여야만 했나요?"
"너도 봤잖아? 7성 각성자 닉 스미스는 예전에 죽었어. 자기 영체를 자기 동생에게 덮어씌웠을 때 죽은 거야. 지금 남은 건 7성 악마 닉 스미스지."
"하지만 닉은 미국 시민이에요. 죽을 거면 전기 의자에 앉혔어야 했다고요."
"헛소리. 전기 의자? 악마가 퍽이나 잘 죽겠다."
"그런 말 하는 거 아니라는 걸 아시잖아요."
"됐어. 내가 미국 대통령 얼굴을 봐서 그쪽이랑 같이 다닌다는 사실을 명심해. 닉 스미스는 인류의 적이야. 하루만 늦게 왔어도 뉴욕 시민 열 명은 넘게 잡아먹었을걸? 인간 아닌 것들을 인간으로 생각하지 말라고. 알아들어?"
리아가 입술을 깨물더니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하여간에……
본인이 7성 각성자가 되었고, 조만간 8성에 도전하기로 했으면서 예전 사고 방식을 고수하면 어떻게 하냐.
그나마 리아는 나은 편이다. 갱생 불가능할 줄 알았는데 환골탈태하면서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되찾은 것으로 보이니.
침식 세계에서의 PTSD를 극복했다고 할까.
무시하고 날아오른다. 다음은 인디애나주의 테러 호트로 갈 생각이었다. 미국에 종족 변환 각성자는 많지만 가장 유명한 3인, 그중에서도 전대 전미 협회장인 카를로스를 처리해야 했으니.
테러 호트는 조용했다.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고 있었다.
김현이 카를로스와의 면회를 요청하자 교도소장라는 자가 코웃음을 쳤다.
"사형수 면회라니, 공식 절차를 밟으시오."
"공식 절차라고?"
"그렇소. 최소 1주일 전에 공문을 보내셔야지. 카를로스 같은 흉악범을 아무나 면회해도 되는 줄 아셨수? 가족도 아니고, 변호사도 아니면서."
이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쭈욱 읊는데 그 과정이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전대미문의 7성 각성자 수감자라서 그럴까?
김현처럼 아무 연고가 없는 이는 주지사의 허가증까지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 소릴 듣고 있노라니 헛웃음이 절로 나온다.
옆에 앉은 리아의 얼굴이 다급해진다.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대통령께서도 직접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항입니다."
"아, 그래도 절차는 지켜야죠. 우리나라가 어디 아프리카에 있는 3류 후진국도 아니지 않습니까?"
김현을 외면하듯이 하며, 슬쩍 비웃음을 흘리는 교도소장.
저 말이 누굴 향한 것인지는 뻔했다.
'시간 낭비 했네.'
스르륵 일어난다.
교도소장이 어쩔 거냐는 눈으로 김현을 쳐다본다. 리아가 급히 김현을 붙잡으려고 했다.
김애경이나 이세희도 아니고, 주제에 어딜?
자연스럽게 뿌리친다. 그리고 한쪽 방향으로 뚜벅뚜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엇? 뭐하는 겁니까!"
교도소장의 바로 옆 쪽을 지나치는 김현.
그냥 지나가면 섭섭하지. 셋이 사이에 두고 있던 탁자를 지나쳤다. 김현의 주위에 어린 어둑한 기운이 탁자를 집어삼킨다.
정확히 말하면 탁자 전체는 아니고, 그 기운에 닿은 부분만. 흡사 지우개처럼 싹싹 지워버리고 지나갔다. 심지어 교도소장의 옆에 있는 장식장과 그 뒤의 벽까지 전부 다.
벽에 큰 구멍이 뚫렸다. 정확히 사람 하나 지나갈 법한 크기의 구멍이다. 더구나 사람 모양으로 나서, 누군가 이곳을 뚫고 지나갔다는 사실을 크게 웅변하고 있었다.
"어어, 어?"
사태 파악을 못한 교도소장이 입을 크게 벌린다. 설마하니 김현씩이나 되는 인물이 이토록 막무가내로 나올 줄은 몰랐던 모양.
리아가 교도소장에게 쏘아붙었다.
"이렇게 될 줄 몰랐어요? 절차? 통할 사람에게 절차대로 했어야죠!"
"하, 하지만, 이게 제 일입니다."
"어휴, 애국자 나셨네요. 애국자 나셨어."
급히 김현을 따라 들어간다. 하지만 교도소 안쪽은 이미 난리가 난 상태였다.
어둠을 휘어감은 김현이 거침없이 걷는다. 벽도 뚫고 시설도 뚫었다. 사람 모양의 구멍이 일직선으로 났다.
사정이야 어떻든 외부 침입.
교도관들이 소총을 들고 김현을 겨누었다.
"정지! 손 들어!"
"두 손 들고 엎드려!"
귀찮기는.
무시하고 묵묵히 전진. 상황을 이미 전파 받았을 텐데 비협조적으로 나오는 자들에게 본때를 보여줄 마음도 조금은 있었다.
리아가 뒤늦게 따라나와 악을 쓴다.
"그만! 그만! 공무 수행 중입니다. 다들 자기 일 봐요!"
교도관 중에는 각성자가 꽤 있었다. 당연히 김현과 리아를 알아보았다.
"저 사람, 슈퍼 김 아닙니까?"
"어, 맞네?"
"전미 협회장도 있잖아!"
"이게 무슨 일이야?"
"범죄자가 아니었어?"
얼굴이 곧 신분증인 둘.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 둘이 갑자기 연방 교도소에 찾아와 깽판을 부릴 이유가 없다.
김현은 약간의 아쉬움을 느꼈다. 총을 쏘기라도 했으면 테러 호트에, 아니 미국 전체에 뜨거운 맛을 보여줬을 텐데……
'카를로스가 더 급하지.'
일직선으로 걷는다.
교도관들이 물러난다.
하지만 벽이 지워지고 시설이 지워지는 광경을 보고만 있기는 힘들었나 보다.
결국 김현이 교도소 내부로 진입하여 수감자들이 있는 구역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몸으로 앞을 막아섰다.
"슈퍼 김. 여기는 안 됩니다."
"범죄자들이 갇혀 있는 곳입니다."
"말로, 말로 하지요."
"설마 우리 교도소를 부술 작정은 아니지요?"
심지어 리아까지 가세했다.
아랫입술을 꾹 다문 채 두 팔을 벌리고 앞을 막은 것.
김현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들을 한 번 보았다. 그리고 그들이 막거나 말거나 무시하며 전진.
"아악!"
비명이 터졌다.
죽일 생각까진 없었다. 대신 저만치 튕겨 버렸다. 7성 각성자인 리아도 예외는 없었다. 김현을 감싼 검은 기운에 닿자마자 전신의 뼈가 부러지며 수백 미터는 넘게 나가떨어졌다.
앞을 막은 교도관 전부가 그랬다. 이제는 김현을 막을 것이 없다. 멀쩡한 교도관들도 사색이 되어 주춤주춤 물러났다.
한 교도관이 총을 다시 집으려고 했다. 김현이 시선을 주자 옆에 있던 교도관이 손을 뻗어 말린다.
"멍청아, 관둬!"
김현이 진심이 되면 여기 있는 모두 몰살을 면치 못할 테니.
얼음장 같은 눈동자가 교도관들을 한 차례 훑었다.
전율하는 교도관들.
요즘에는 조용했지만 김현이 어떤 사람인지 상기하고 있었다. 미국 국방장관도 모욕하며 죽였던 인물인데, 여기 있는 교도관들에게는 더한 수를 써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튀어!"
"나가자!"
김현이 교도소를 관통한 까닭에 큰 구멍이 났다. 죄수들이 거길 통해 달아나는 걸, 교도관들은 무력하게 보고만 있었다.
마지막으로 카를로스와 대면한 김현.
온갖 구속 장치에 결박된 카를로스가 눈을 뜨고 김현을 보았다.
"무슨 일이지……"
완전히 성혼을 봉인당한 까닭에 외부에서, 지구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잘 몰랐나 보다.
어떻게 할까.
김현의 대답은 간단했다.
푸욱!
거대한 칼날이 심장을 관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