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
용사 육성 계획 -3-
'별일이 다 있네.'
김현은 운집한 사람들을 보며 쓰게 웃었다.
100만 명. 입학생만 100만 명이다. 여기 참석하겠다고 쫓아온 학부모들까지 더하면 수백만 명을 훌쩍 넘어갔다.
그 중, 유독 김현의 시선을 끄는 인물이 있었다.
10대 후반의 백인 남자.
키가 껑충하다. 떡 벌어진 어깨가 인상적. 선 굵은 얼굴은 사내답고 거친 피부에서 흔히 말하는 상남자의 냄새가 폴폴 풍겼다.
또래의 백인 미녀가 남자에게 달라붙어서는 콧소리를 냈다.
"우리 둘이 같이 오니까 진짜 좋다. 그치?"
"어, 음, 당연하지."
"검사받길 잘했지? 안 그래, 피터?"
"네 말이 맞아."
"요즘은 각성자가 대세야. 피터라면 MFL 뛰는 것보다 차원 격투 참가하는 게 훨씬 나아. 내 말만 믿으라니까?"
"당연히 믿지. 그래서 따라온 거잖아."
말과는 다르게 영 떨떠름한 기색을 한 남자.
얼굴도 체형도 전혀 달랐지만, 김현은 남자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피터 알렌.
얼마 전까지 김현의 옆에 있었던 녀석이, 얼굴도 몸도 바꾸고 용사 도시 신입생으로 나타난 것이다.
[좋냐?]
멀리서 염파를 보내자 피터가 특유의 희멀건 웃음을 지었다.
[알아보셨네요?]
[못 알아볼 수가 없지. 그런데 여긴 왜 왔냐? 짱 놀이하면서 평범하게 살 것 같더니.]
[놀이 아니에요……]
[그렇다 치고, 설마 옆에 그 여자 때문이냐?]
피터의 눈에 당황 어린 빛이 잠깐 스쳤다. 여자의 눈치를 살피더니 여자가 김현을 보느라 정신 팔린 틈을 타 살짝 머리를 끄덕거렸다.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괴물들과 더는 싸우기 싫다고 도망간 주제에, 여자 하나 환심 사려고 자질 검사 장치를 속이고 여기까지 들어오다니……
'좋을 때다.'
반면 이런 생각도 들었다.
영육 개변을 하고도 본래의 자신을 간직하고 있다는 뜻이니까. 광명계 종족에 더 가까워졌다면 여자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았겠지. 광명계의 종족들은 광자 생명체이니만큼 유성 생식에는 관심이 없다.
[뭐, 잘해 봐라.]
[흐흐, 네.]
[친구들이 힘들어하면 가끔 도와주고.]
[귀찮은데요.]
[그 정도는 해야지. 원래 본인 아니면 입학 안 되는 거 몰라?]
[저 제 이름으로 입학했어요.]
[어쭈, 신분증 제대로 까 볼까?]
[쩝, 알았어요. 많이 가르쳐 줄게요.]
[진작 그랬어야지.]
김현은 피터의 여자친구를 눈여겨보았다.
낯이 익었다.
티파니 니알.
원 역사에서 지금쯤 각성하는 여자였다. 요정계 성향 각성자로 훗날 미국을 대표하는 각성자 중 하나로 성장한다. 특히 피터와의 못 이룬 사랑 이야기로 유명했다.
'이번 역사에서는 행복하길 빌어주마.'
참 신기하고도 재미있는 일이었다. 전혀 접점 없던 두 사람이 원 역사 따라가듯 이렇게 이어지는 것은.
"사암촌!"
김현은 서서히 단상 위로 올라갔다.
100만 명의 인파. 앞쪽에 앉아 있던 하은이가 세상이 떠나가라 고함을 질러댄다. 4성 각성자답게 강력한 음파가 주위를 후려치자 다른 아이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앉은 순서는 나이 순서. 어린아이부터 앞에 앉혔다. 그래야 키 차이 때문에 앞을 못 보는 불상사를 해소할 수 있으니.
평소 같았으면 웃었겠으나 오늘만큼은 얼굴을 굳혔다.
[학교에서는 선생님이라고 부르랬지?]
[헤헤.]
하은이가 혀를 내밀며 웃었다.
옆에는 캐티와 캐시가 나란히 앉아 있다. 그 둘도 사브리나가 구해 온 3성 성혼을 먹고 각성자가 된 참이다. 그래서 용사 영재 학교에 입학하게 된 것.
주위 아이들이 그런 하은이와 두 자매를 힐끔거렸다. 그들도 아는 것이다. 하은이는 김현의 조카이고, 두 자매는 그런 하은이의 둘도 없는 친구라는 사실을.
'벌써 파벌이 생기는구나.'
조금 주의해야겠다.
하은이가 인의 장막에 둘러싸여 철딱서니 없는 공주님으로 자라는 것은 막아야 하니까.
"참 좋은 날입니다."
태양은 쨍쨍하고 소금기 섞인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온다.
3월.
소말리아와 같은 위도라고 믿기 어려운 날씨.
사실은 김현이 개입한 거였다. 인공적으로 날씨를 조절한 것이다. 그래서 본래 지금쯤 용사 시 위에 도달하여 비를 뿌려야 했을 먹구름은 진행이 유예되었다. 오늘 행사가 끝나고 손님들이 모두 돌아갔을 밤은 돼야 비를 쏟아붓겠지.
"오늘 이렇게 용사 학교의 첫 입학생을 받게 되어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먼 길 와주신 분들께 모두 감사 말씀 올립니다."
오래 연설하지는 않았다.
거듭 감사하고 마왕을 쓰러뜨릴 용사 육성에 전력을 쏟겠다는 말 정도만 했다.
짝짝짝짝!
2분 남짓한 연설이 끝나자 열렬한 박수가 쏟아진다.
언어의 장벽?
그런 것은 없었다. 현인의 목걸이 때문이 아니라 김현이 정신 감응을 응용하여 연설했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여기 있는 학생들과 학부모, 그 외 참석자들 모두가 김현의 각오와 다짐을 생생히 전달받았겠지.
펑! 펑!
입학식이 끝나자 하늘에서 폭죽이 터졌다.
꽃송이가 수만 개 이상 그려진다. 장엄한 광경에 탄성이 터졌으나 그냥 보기 좋으라고 그린 게 아니다. 불꽃놀이를 구경하던 학생들이 별안간 눈을 문질렀다.
"학생분들은 하늘에 보이는 화살표를 따라가세요. 학교 배정, 기숙사 배정, 학급 배정과 담임 면담이 오늘 이뤄집니다. 학부모분들은 자유롭게 도시 안을 구경하시면 됩니다. 자녀들을 따라가도 좋고요."
학부모들에게는 불꽃놀이가 단순한 불꽃놀이로 보인다. 하지만 학생들에게는 불꽃놀이가 뭉쳐 저마다 다른 화살표로 보이게 해놓았다. 일종의 네비게이션 역할이라고 보면 되겠다.
학생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시선을 하늘 위로 올리고는 거길 따라갔다. 반대로 단상을 향해 돌진하는 아이도 있었다.
"삼촌!"
하은이.
성혼의 영향 탓에 제법 커서, 거의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로 보이는 아이가 김현에게 안겼다.
"어휴, 이 말썽꾸러기 녀석."
"헤헤헤. 엄마는 안 왔어?"
"엄마는 모가디슈 시장 선거 때문에 바빠."
"치잇. 놀이공원 같이 간다고 해놓고 거짓말쟁이!"
"거짓말 아니야. 모레면 끝나잖아. 그때 용사 시에 있는 놀이공원 갈 거야."
"진짜?"
"그럼. 우리 하은이가 용사 파크 첫 손님으로 예약되어 있잖아."
"신난다! 캐티랑 캐시도 같이 가도 돼?"
"당연하지."
1년이 지난 지금, 모가디슈만이 아니라 소말리아 곳곳의 도시에서 선거가 한창이다.
지금은 소말리아가 옛 인구를 회복했다. 아니, 그 수준을 넘어 거의 1.5배 이상으로 불어났다. 인근 국가에서 꾸준히 인구가 유입되었고, 이번 용사 도시 건설을 계기로 많은 사람이 아예 정착했으니까.
이에 따라 김현은 소말리아 운영에서 거의 손을 뗐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이제는 힘의 축도 용사 도시로 옮겨가고 있었다.
"하은아, 빨리 가야지. 선생님 기다리시겠다."
"조금 기다려도 되잖아."
"어허. 삼촌이 뭐라고 했지? 하은이를 특별 대우한다고 했어?"
"아니."
"학교에서는 하은이도 다 똑같은 학생이다. 교칙은 지켜야 해. 알았지?"
낮은 목소리로 힘을 주어 말하는 김현.
이러면 아무리 귀여움받는 하은이라도 어쩌지 못한다. 입술을 삐죽이며 달려나가더니 저 멀리에서 소리쳤다.
"삼촌 바보!"
아예 성혼까지 발현하여 검은 선이 되어 사라졌다.
아직 어려서 그런지 막무가내다. 하긴 대한민국에 있었으면 아직 유치원생이니 그럴 만도 하지.
학생들이 한참 이곳저곳에서 모이고 있었다. 그들의 상태를 단번에 확인하며 속으로 입맛을 다셨다.
'최상급은 몇 명 없구나.'
역시 대부분 국가에서 최상급은 직접 거둬들인 모양.
물론 몇 군데 예외는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대한민국. 신필종이 김현을 발견하고는 깊이 허리를 숙여 보인다. 부인으로 보이는 사람도 옆에 있다가 인사를 했다.
'대한민국은 훈련소를 운영하지 않나 보네.'
각성자 전력 상위권 국가 중에서는 유일했다. 상급 이상은 모조리 보냈다. 교육열 뜨거운 나라답게 그 수가 엄청났다. 대한민국이 이러지 않았으면 100만은커녕 90만도 못 채웠겠지.
김현으로서는 기꺼운 일. 신필종에게 손을 살짝 흔들어 주었다. 신필종이 감격한 표정을 짓더니 목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경술팔적은 없어.'
원 역사에서 김애경을 배신했던 이들은 그럴 수 없게 되었다. 뭇 세계가 진작에 지구와의 연결을 끊었으니까.
딱 한 명, 주태일만 빼고.
주태일이 5성 각성자가 됐다는 소식까진 들었다. 하지만 6성 영육 개변까진 시도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돈이 한두 푼 드는 것도 아닐뿐더러, 실패하면 모든 힘을 잃고 마니까.
'그런 비열한 종자가 자기 힘으로 고위 각성자까지 갈 리가 없지.'
속으로 비웃으며 천천히 걸어갔다.
마냥 천천히 걷는 것 같으나 실상은 달랐다. 공간을 접어가며 어느 건물 안으로 쏘옥 들어간 것.
외곽에 위치하여 아직 텅 빈 교실. 탁상에 걸터앉아 홀로그램 모니터를 조작하던 어떤 남자가 김현을 보고 놀라며 일어섰다.
"사령관님? 여기엔 어쩐 일이십니까?"
"어쩐 일이긴요. 제 조카 잘 부탁드린다고 하려고 왔지요."
"하핫…… 그 점은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남자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몸의 윤곽이 희끄무레해졌다가 또렷해지는 것을 반복하는 남자.
유령 사냥꾼, 박준.
유명계의 침공에서 김현에게 협력한 것을 계기로 사이가 계속 가까워졌다. 지금은 김현 일행의 정규 구성은 아니더라도 후보쯤은 된다.
"조카분을 많이 아끼시는 모양입니다."
"당연하죠."
"저도 사령관님 덕에 7성까지 올라왔으니 열과 성의를 다해서 가르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영혼의 업은 잘 쌓고 계시죠?"
"조금 어렵네요. 차원 통로가 봉쇄되어서 더 그런 것 같습니다."
"예전과 비교하면 어려워지긴 했죠."
1년이 지난 지금, 외계종들도 영혼의 업에 대해 많은 것을 파악했다. 그래서 지구인들이 자기 복속 차원에 들어오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었다. 차원의 벽도 나날이 보강하고, 발견 즉시 척살대를 보내 죽이려고 들었다.
궁하면 통하는 법. 연이은 탐사로 완전히 멸망한 세계를 여럿 찾아냈다. 그곳에서 업 양도 의식을 치렀다. 지성 종족이 멸종한 까닭에 꽤 어려웠으나, 어쨌든 다음 8성 우화를 차곡차곡 준비하는 중이다.
"전 그만 가보겠습니다."
이쪽으로 달려오는 하은이의 기척을 느끼고 몸을 일으켰다.
"예. 미셸 선생님과 노부오 선생님께도 사령관님께서 다녀가셨다고 전해드리지요."
"부탁드립니다."
미셸은 프랑스인 거신 성향 각성자다. 노부오는 일본인 용왕 성향 각성자이고. 박준까지 포함하여 이 셋이 하은이를 교육하는 데에 중추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잘 돼야 하는데……'
김현은 처음에 김애경에게 기대를 걸었다. 원 역사에 기록된 모든 각성자 중 최고였던 김애경이라면 자력으로 9성을 성취하지 싶어서.
하지만 최근에는 김애경의 성장이 지지부진했다. 본인이 별로 의욕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심지어 1년 전, 파멸의 신좌를 자기 눈으로 직접 보고도 그랬다.
'절박하지 않은 탓이지.'
이것이 원인.
원 역사에서 김애경은 모든 것을 잃었다. 거기서 오는 상실감과 분노가 김애경이 전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래서 모든 도전을 분쇄했고 불과 몇 년 만에 7성 각성자가 되고, 100년 가까이 이어질 인류 저항군의 근간을 닦았다.
지금은?
김현에게 의지하고 있다. 그것이 독이 되었다. 8성까지는 김현이 강제로 끌고 오다시피 하여 이룩했으나, 9성만은 그게 힘들 것 같다.
'신이 되는 게 그리 쉬울 리가 없지.'
하나의 세계를 만드는 일이기도 하니까.
따라서 현시점에서 9성이 될 가능성이 가장 큰 것은 김애경이 아니다. 김현은 전혀 다른 인물을 꼽고 있었다.
주하은.
바로 김현의 조카.
물론 나중에 가면 어찌 될지는 모른다. 아직 어린아이이니만큼 10년은 두고 봐야지.
"안녕하세요!"
하은이가 기운차게 소리치며 교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 아저씨가 왜 여기 있어요?"
"왜 여깄긴. 네 선생님이라 여기 있는 거지."
"아저씨는 사냥꾼이잖아요?"
"원래는 대학 교수였어, 욘석아."
그래서 김현이 특별히 부탁하기도 했다. 그냥 성혼만 쓸 줄 아는 다른 사람들보다는 훨씬 낫지 싶어서.
캐티와 캐시도 하은이를 따라 들어온다. 하은이가 얌전히 자기 자리로 가 앉았다. 셋이 줄곧 어울려 다녀서 그럴까? 하은이는 둘 앞에서 가장 까불면서도 어른스러워 보이려고 할 때가 있었다. 요즘 부쩍 몸이 성장하면서 더 그랬다.
슬슬 차는 학교들.
각 교실에서 담임 선생과 학생들의 첫 대면이 이뤄지고 있었다.
'선생 수급하느라 고생 조금 했지……'
최소 4성 최대 7성으로 꾸리려고 했으니까.
김현은 감흥 깊은 얼굴로 용사 시 곳곳을 둘러보았다.
그렇게 용사 도시의 첫 입학식 날이 저물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