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
새로운 세계 -1-
겨울.
시베리아의 어느 숲속.
영하 30도의 한파가 몰아치고 있었다. 보이느니 하얀 세상이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발목까지 눈에 묻혔다.
"후으으."
새하얀 입김이 서리서리 풍긴다. 언젠가 서리 거인을 직접 목격했을 때 본 서리 입김 같아 재미있었다.
"춥다."
"내 옷 벗어줄까?"
"됐어."
티파니가 방긋 웃었다. 피터는 웃옷을 벗다 말고 머쓱한 얼굴을 했다.
따라오던 소녀가 둘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둘 다 적당히 하시지? 애인 없는 사람 서러워서 살겠어?"
"사귀면 되지. 저번에는 센도가 고백했다며."
"별로 마음에 안 들어서."
"눈도 높다. 센도 정도면 괜찮은데."
"맞아, 맞아."
"그러니까 여태 솔로지."
"너희들!"
소리 없이 쫓아오던 두 흑인 소녀가 재잘거렸다. 지적받은 동양인 소녀가 눈을 부라리자 둘이 꺅꺅 웃어댔다.
소녀, 많이도 컸다.
키 170에 호리호리한 체격. 긴 생머리가 찰랑거린다. 백옥 같은 피부와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와 어우러져 영화배우라고 해도 믿을 정도.
주하은. 7성 각성자.
10년이라는 세월은 어린아이를 아름다운 여인으로 만들어 놓았다. 실은 아직 중학교에 다녀야 할 나이지만, 성혼으로 인한 조숙 탓에 육체적으로 완벽히 성인이 된 것.
"연애 같은 거 필요 없어. 그냥 혼자 살아."
여태 침묵을 지키던 히스패닉 소년, 벤 티아스가 특유의 늘어지는 어조로 말했다.
하은이가 눈을 흘겼다.
"너도 애인들 많잖아?"
"애인이 아니라 파트너지, 파트너."
"콘돔이나 잘 쓰셔."
"당연한 소리 아냐? 나도 에이즈 걸려서 전전긍긍하며 살고 싶은 마음은 없다고."
벤은 동성애자. 매일 같이 애인을 갈아치우곤 했다. 정확히 말하면 정신적인 사랑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아무리 사이가 뜨거워도 사흘 넘게 유지되는 걸 못 봤다.
캐티가 조잘조잘 떠들었다.
"하은이는 이상형이 너무 세. 그게 문제야."
"맞아, 맞아."
"내 이상형이 뭘!"
"너 삼촌 같은 남자 아니면 쳐다보지도 않을 거라면서?"
"흥, 그럼 그 정도는 돼야지."
"와, 말하는 것 좀 봐."
"사령관님 같은 남자가 지구에 또 어디 있다고 그래?"
"차라리 외계종들 사이에서 찾아봐야 할 것 같아. 무법성 가야겠네, 무법성."
"이것들이!"
하은이가 손톱을 세우며 캬옹 소리를 내자 두 자매가 자지러지며 웃는다. 피터는 그런 그들을 보고 머리를 흔들었다.
"하여간에……"
"뭐 어때. 귀엽잖아."
"야, 그만 떠들어. 어디 놀러 나온 줄 알아?"
"놀러 나온 것 맞지, 뭐."
"그만!"
"쳇. 재미없기는."
나이가 어려서 그런 걸까? 아니면 한 번도 좌절을 겪어보지 못해서 그럴까? 분명히 임무를 받고 나왔는데 다들 들떠서는 소풍 나온 양하고 있다.
'하기야……'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여긴 지구니까. 침식된 세계도 아니고, 그저 조사하러 나온 것에 불과하니까.
"저쪽인 것 같아."
"나도 봤어."
"특이하긴 하네."
티파니가 정면을 가리켰다. 여기 있는 이들 모두 7성 각성자인 까닭에 탐지나 투시 계열 성혼을 가진 사람들은 비슷한 시기에 감지한 것 같다.
웃고 있던 하은이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다. 가면을 갈아 끼우는 듯한, 극적인 표정 변화다. 피터는 그걸 보며 속으로 감탄했다.
'역시 배틀 퀸다워.'
하은이야말로 용사 도시의 최강자. 지구 전체를 통틀어도 그랬다. 경지에 올라선 몇 년 전부터는 1년마다 벌어지는 용사제의 무투회 1위를 놓친 적이 없었으니.
당장 피터 자신도 하은이를 상대로는 이기지 못했다. 6성일 때까지는 경지의 차이로 찍어눌렀으나 7성 동급이 된 후로는 그러지 못한 것.
'고마운 사람.'
피터의 눈이 옆에 있는 티파니를 향했다. 티파니는 당시 밝혀진 피터의 진면목을 알고도 변함없이 피터를 사랑해 주었다. 물론, 등짝을 조금 얻어맞긴 했지만.
"저기야!"
티파니가 앞쪽을 가리켰다.
빼곡한 침엽수림 중심, 유독 거대한 나무가 한 그루 보였다.
사람 수십 명이 둘러싸도 남을 정도. 신의 기둥처럼 우뚝 서 있다. 나뭇잎은 거의 없어 앙상하고, 사람 해골 같은 기이한 열매만 나뭇가지에 듬성듬성 늘어졌다.
그리고 나뭇가지가 이루는 곡선이 이상했다. 꼭 고통에 겨워 울부짖는 사람 얼굴을 형상화해놓은 듯하다. 보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지며 마른 침이 꼴까닥 넘어갔다.
"5성 괴물이야! 조심!"
"에이, 고작 5성 가지고 뭘?"
"이상해. 처음 보는 괴물이잖아! 어디 세계 태생인지도 모르겠어!"
용사 도시의 학생들은 기본적으로 18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괴물에 대해 배운다. 자료가 쌓인 지금, 이들이 모르는 괴물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도 좋았다. 그런데 완벽히 미지의 존재와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피터가 헛웃음을 지었다.
"단순한 괴물 소동이거나, 무법자 패거리 짓인 줄 알았는데……"
철컥.
별안간 울리는 쇳소리.
하은이가 허리에 차고 있던 멸망도를 쥐고 거목을 노려보고 있었다.
"생포하자."
"응? 진심이야?"
"5성이라면 충분히 가능해. 그리고 저런 건 우리 삼촌이 직접 봐야지."
"그건 그렇지만, Mr. 김이라면 이미 정체 파악하고 있을걸. 우릴 괜히 여기에다 보내지는 않았을 거 아냐."
이들, 용사 도시에서도 손꼽히는 주하은 일행이 시베리아에 오게 된 것은 전적으로 김현 때문이었다. 졸업 과제라며 시베리아의 외계종 생태 조사를 떡하니 맡긴 것.
피터는 적당하게 넘어가자는 생각이었으나 하은이의 생각은 달랐다.
"이것도 과제잖아. 이 정도는 해야지. 괴물 생포가 아니면 왜 굳이 우릴 보냈겠어? 센도 일행이나 하인리히 일행만 보내도 충분한데."
"어, 사실 걔네들도 충분히 생포할 것 같은데……"
"그러니까 우린 더 해야지. 우리가 용사 도시, 아니 지구 전체에서 최고 아냐?"
6명 전원이 7성 각성자인 것은 이들밖에 없다. 피터가 다른 사람들을 보고는 쓰게 웃었다.
"좋아. 하자. 하은이 네가 힘 좀 써야겠다."
"당연하지."
하은이가 숨을 들이켜더니 몸을 키운다. 단지 3미터 4미터 수준이 아니라 100미터 가까이 커졌다.
거신계의 최상위 성혼, 신왕의 위력.
꾸앙! 꾸앙!
거목을 향해 다가가자 범종 소리가 우레 터지듯 울렸다. 그것을 감지했는지 거목이 부르르 떨었다.
히히히힛! 이힉!
괴이한 소리와 함께 기괴한 기운을 뿌리기 시작.
해골 형상의 희끄무레한 것들이 마구 날아온다. 질러대는 귀곡성. 일반인이라면 듣기만 해도 혼백이 뽑혔겠으나 이쪽에는 저항력이 무시무시하게 강한 하은이였다.
"흥!"
코웃음 한방에 기이한 것들이 우스스 떨어졌다.
그걸 눈여겨본 후 아래쪽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이것들 유명계랑 비슷한데?"
"그런 것 같은데 일단 잡아가고 분석해보자! 속성이 비슷한데 확실히 달라! 그리고 말 좀 작게 해!"
"내 마음이거든?"
거목이 가지를 비벼 기이한 음파를 쏘고, 뿌리를 땅에서 빼어 휘두르며 반항을 했다.
하지만 등급의 차이란 절대적인 법. 그 무슨 수를 써도 하은이를 어쩔 수는 없었다. 하은이는 우악스럽게 거목을 뽑아내고는 어깨에 짊어졌다.
봉인 계열 성혼이 쏟아져 거목을 마비시켰다. 그 상태에서 인근의 도시로 이동했다.
왜애애앵!
러시아 도시에서는 잠깐 소란이 벌어졌다. 거인이 거목을 짊어지고 걸어오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피터가 직접 날아가 시장과 면담하는 등 진정시킨 다음에야 길을 터주었다.
"엄마! 배틀 퀸이야!"
"진짜네."
"TV에서 보던 거랑 똑같아!"
용사 축제는 각성자만의 축제가 아니다. 최근에는 올림픽만큼이나 인기가 있었다. 6, 7성 각성자들이 맞붙는 무투회 본선의 경우 차원 격투보다 인기몰이할 지경.
그래서 냉정해진 시민들은 하은이 일행을 금세 알아보았다. 워낙 덩치가 커서 접근은 못 해도 멀리서 부리나케 사진을 찍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손이라도 흔들어 주겠으나 공적인 일로 나왔으니 그럴 수는 없다. 최대한 빠르게 걸어서 거점을 이용, 인공 지구를 통해 용사 도시에 도착했다.
"고생했다, 하은아."
"삼촌!"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마중 나와 있었다.
하은이는 거목도 내팽개치고 달려들었다. 크기만 줄인 채 그 사람에게 안기자 몸이 살짝 들썩였다.
"어휴, 이 녀석. 다 컸으면서 아직도 어리광이니?"
"삼촌한테만 그러는 건데? 엄마는?"
"뉴욕에 있지."
"치잇."
"협회장이잖아. 네가 이해를 해야지."
김애경은 몇 년 전부터 각성자 협회장으로 취임했다. 본부가 뉴욕에 있는 만큼 뉴욕과 용사 도시에서 번갈아 머물렀다.
김현은 떨어지는 거목을 눈짓하여 붙잡았다. 용사 도시의 인공지능이 반응하여 기계 골조로 받아낸 것. 저절로 지하가 갈라지며 그 안으로 거목이 들어갔다.
"그런데 삼촌, 저건 도대체 뭐야? 처음 보는데."
"글쎄다. 자세한 건 연구해 봐야 알겠지만 짐작하는 건 있다."
"뭔데? 뭔데?"
"확실해지면 가르쳐주마."
"치잇! 뭐든 삼촌만 알고 있고!"
"대신 너한테 가장 먼저 가르쳐줄게."
"정말이지?"
"그럼!"
"삼촌, 그러면 우리 점수는 몇 점이야?"
"상태를 확인해봐야겠지만 손상도 별로 없고, 완전한 상태로 생포해 왔으니 최소한 A라고 봐야지."
"야호!"
하은이가 까르르 웃으며 달려나갔다. 일행과 합류하여 웃음꽃을 피우며 환호를 지른다. 전원 7성이니만큼 낮은 성적이면 그게 더 이상했겠지만 속으로 걱정은 했나 보다.
그런 그들을 보다가 몸을 돌렸다. 몸을 영체화하여 바로 지하로 내려간다. 하은이 앞에서는 애써 담담한 척했지만 기실 가슴속에서는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아, 사령관님."
용사 도시 지하.
거대한 연구 시설이 위치했다. 새하얀 가운을 입은 연구원들이 오락가락하며 어떤 괴물들을 분석하는 중이었다.
나무.
아까 하은이가 잡아 온 거목은 그중 하나에 불과하다. 거대한 선인장, 꽃나무, 식충 식물같이 생긴 것도 많았다.
김현은 한 백인 여자에게 다가갔다.
메리 린디아.
뉴욕 사태 당시 김현과의 교신을 맡았고, 투명 거룡을 저지하던 마법진의 총괄을 맡았던 인물.
그때 눈여겨본 김현에게 발탁되었고, 지금은 용사 도시의 연구소장직을 맡았다. 8성에는 아깝게도 도달하지 못했으나 7성의 극은 달성한지 오래.
"좀 어떻습니까?"
"안 좋은 소식이에요. 기존에 존재하던 열여덟 세계 중 어느 곳과도 달라요."
"쯧…… 역시 그렇습니까?"
"네. 사령관님 지적처럼 유명계와 비슷한 힘을 쓰긴 하는데요, 어디까지나 곁가지인 느낌이에요. 근간은 식물이에요."
"성혼은요?"
"안 그래도 한 마리 지금 추출 중이에요. 와서 보실래요?"
"그러죠."
연구 단지 중심으로 이동.
괴물들만큼이나 거대한 추출기가 돌아가고 있었다. 병원에서 보이는 원통형 MRI를 크게 확대한 모양새다. 빛을 쪼일 때마다 고통스러운지 나무 괴물이 기이한 신음을 뱉었다.
쪼그라드는 괴물. 마르는 체액. 그 가운데 녹회색의 별이 점점이 떠오른다.
[급속 성장(5★, ??)]
김현은 성혼에 꼬리표처럼 달린 정보에 주목했다.
??이라고 했겠다.
물음표의 뜻은 명확하다. 22세기와 21세기를 통틀어 만나보지 못한 세계라는 뜻이다.
물론 차원계에 열여덟 세계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그것들 말고도 알려지지 않은 세계가 무수하게 많았다.
하지만 다른 세계를 침식하고, 성혼을 약탈하려 시도하는 세계는 기존의 열여덟 세계가 전부다. 다른 세계가 더 있었다면 기갑계 장갑 기사로서 뭇 세계를 넘나들었던 전생의 아론이 몰랐을 리가 없다.
"이건 무슨 뜻일까요?"
메리가 걱정스러운 투로 묻는다.
김현은 명쾌하게 정의했다.
"새로운 세계가 출현했다는 뜻이죠."
"새로운 세계……"
"19번째 세계라고 봐도 됩니다."
연구원들의 얼굴이 어두워진다.
지난 11년, 지구는 한동안 평화로운 시절을 보냈다.
세계 침식은 성혼 농장 덕에 극도로 억제되었고 차원문을 넘어오는 떠돌이는 그 즉시 척살 당한다. 각성자들은 무법성을 통해 각 차원계를 돌며 외계종을 사냥하여 성혼과 진귀한 재료를 수집했다.
말 그대로 대사냥 시대. 원 역사보다 몇 배는 길고 화려했으며 평화로웠다.
앞으로 수십 년은 이어질 줄 알았더니……
'멸신갑. 설마 너는 아니겠지?'
식물 근간, 유령 속성, 원 역사에서는 없던 세계의 출현이라는 점에서 멸신갑을 의심해 본다.
메리가 질문을 던졌다.
"19번째 세계로 인정하면, 이름을 뭐라고 지을까요? 세계와 직접 접촉한 건 아니지만, 부를 이름은 있어야죠."
고민할 것도 없다.
"거목계, 거목계로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