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헌터사-192화 (192/200)

# 192

거목계 -1-

우렁우렁 울리는 정신 감응.

저절로 뒷골이 땅긴다. 우주수의 존재감이 정신을 압박하는 것이다. 동료들이 혀를 깨물거나, 스스로 허벅지를 찔러 정신을 차리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 있는 이들 모두 8성인데도 이 정도 압박이라니……

거의 파멸신에 준한다. 신좌를 통째로 돌격시켜도 필승을 장담하기 어려운 상태. 김현은 정신을 가다듬었다.

"못 본 새 꽤 컸네."

[후후후……]

음험한 웃음을 흘리는 우주수.

[그대 또한 마찬가지다. 과연 내 본신다워.]

"9성이 됐으면 됐지, 지구를 침공한 이유가 뭐냐?"

[알면서 왜 묻지? 당연한 것 아닌가. 내 불완전성을 채우고, 완전한 존재로 거듭나기 위함이다.]

김현이 생각한 것이 맞았다.

우주수는 영속성을 얻기 위해 김현을, 지구를 잡아먹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어떤 세계를 삼키든, 어느 신격을 포식하든 얼치기 신격에 불과하다.

저 꺼먼 우주까지 뻗은 나뭇가지가 흐느적거리며 움직였다. 회색 바람이 일어 일행을 밀어낸다.

[어쨌든 오늘은 담화를 나누기에 좋지 않아 보이는군. 별로 탐나는 것도 없고…… 반가웠다, 내 본신이여. 조만간 그대의 좌를 차지하러 가도록 하지. 인류 또한 나, 멸신의 거목 안에서 하나 될지니 더는 고통도 슬픔도 없을 것이다!]

회색 바람은 일행을 두둥실 띄웠다. 어떻게 반응할 새도 없이 저 멀리 내팽개친다. 아울러 차원문이 열리며 일행을 한꺼번에 집어삼켰다.

몸이 둔해지는 느낌과 함께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용사 도시 지하 연구 시설.

연구원들이 어리둥절하여 일행을 쳐다보았다.

"엇, 언제 돌아오셨어요?"

"차원문은 안 열렸는데……"

과연 9성 신격은 9성 신격. 인간으로 치면 간단한 손짓 한 번으로 일행 전원을 추방한 것이다.

김현은 쓰게 웃었다.

'난감하네.'

당연한 말이지만 9성 신격은 9성 신격만이 대적할 수 있다. 멸신의 거목처럼 세계와 결합하지 않은 상태라면 더 그렇다.

문제는 그 경우 파멸신의 소멸이 가속화된다는 점. 아직 90년은 남았을 시간이 1, 2년으로 줄어들고 만다.

지금 지구 전력으로 외계종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일단은 시간을 끌어 봐야지.'

기존 18세계보다 거목계가 훨씬 위협적이다. 전력은 형편없이 약해도 그랬다. 최대한 개전 시점을 낮추면서 용사 육성을 서둘러야겠다.

"어쩌지? 직접 원정은 피해야 할 것 같은데."

"예전처럼 하자. 자원줄부터 끊어야지."

"자원줄?"

"응. 엘페리아는 한 번 끝장났던 세계야. 거기서 생산하는 성혼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어. 드윌레랑 다른 세계를 한 번 확인해봐야지."

얘기를 하면서도 김현은 기대를 걸지 않았다.

우주수, 멸신의 거목이 내비친 속성은 파멸신과 비슷하면서도 조금 달랐으니까.

폭식.

10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이토록 성장한 탓일까? 멸신의 거목은 순간적으로 자원을 빨아먹고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이런 속성이라면 드윌레를 비롯한 다섯 세계를 지금쯤 다 먹어 버렸겠지.

정말로 그러했다.

7성 은신 계열 각성자를 다섯 세계에 파견 보냈더니 바로 돌아와서 하는 소리가 이거였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소행성 무리만 한 곳에 뭉쳐 있었어요."

"어, 이쪽도 마찬가지입니다."

"저 갔던 곳은 꼭 달 같던데요? 대기가 아예 없어서 생명이 살기는 힘들어 보였어요."

"전 우주만 떠돌다 왔는데……"

"이상한 광경을 하나 찍어 왔어요. 보실래요?"

그나마 한 각성자가 영상을 건졌다.

영상을 재생하자 끔찍한 광경이 펼쳐진다.

행성 표면이 대부분 시커멓게 변해 버린 곳. 최후의 요새가 항전하고 있다.

부질없었다.

성벽을 지키던 온갖 이종족도, 유령들도 하늘을 관통하고 내려온 거대한 나뭇가지에 꿰이는 신세가 되었으니.

[끄아아악!]

[으학!]

기괴한 비명과 함께 그들이 쪼그라들었다. 육체와 영혼, 성혼까지 몽땅 다. 나뭇가지가 그때마다 울컥울컥 기쁨의 노래를 부른다.

에일리가 메스껍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거, 아까 그 나무 맞죠?"

"맞아요."

"으, 진짜 역겨운 놈이네요. 같은 사람 맞아요?"

"글쎄요? 그렇다고 보긴 어렵죠. 11년 전에 제가 만들기는 했어도 제 인격이나 기억을 주입하진 않았으니까."

"그런 것 치고는 엄청 강해졌는데요? 왜 Mr. 김은 9성이 못 됐는데 쟤는 9성이 된 거예요?"

"그러게 말입니다."

에일리가 입술을 삐죽이며 뭐라고 더 말을 하려다가 급히 입을 닫는다. 이어 뭔가 깨달았다는 듯 생각에 잠겼다.

설마, 김현이 곧 파멸신이라는 걸 안 건 아니겠지?

슬쩍 떠보려는 찰나 이세희가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어떻게 하죠? 9성 신격은 지금 있는 8성 15명으로는 상대하기 힘들다면서요."

"최대한 시간 끌어야죠. 그래도 우리 목표였던 9성 신격은 만들기 어려울 겁니다."

"그럼요?"

"방법은 하나뿐이죠. 이이제이."

동료들이 서로를 마주 본다.

생각해 보면 현 상황에서는 그 수밖에 없지 싶다. 단, 제대로 통할 때.

"거목이 마왕을 공격하려고 할까? 거목의 목표는 지구 아냐?"

"아냐. 지구에 있는 생명 모두를 삼키는 것보다 9성 신격 하나가 더 가치 있어. 그리고 마왕의 바탕은 원래 멸망왕이잖아. 거목 입장에서는 더 탐이 나겠지."

"하긴……"

"마왕만 죽이고 갈 가능성은 없어요?"

"없어요. 거목은 완전해지기 위해서 인류를 멸망시켜야 하거든요."

"그게 무슨 말이야?"

"거목도 나한테 비롯되었으니까. 내겐 사명감이 있어. 그 마왕에게도, 거목에게도 있지. 그 둘은 그걸 부정하려고 해. 그래야 운명을 부수고 완전한 신격으로 거듭나거든."

정확히 말하면 세계에 뿌리내려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라고 해야 하는데 거기까지 설명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적당한 선에서 공개하는 것으로 그쳤다.

동료들 모두 이해하기 어렵다는 눈치다. 그래도 둘을 싸우게 해야 한다는 것만큼은 의견을 같이했다.

"어부지리를 노리자 이거지?"

"그렇지."

"쉽지 않을걸요. 아무리 둘이 싸우고 지쳤어도 약점을 찌르기는 어려워요."

"전력을 더 키워야 합니다. 9성 신격을 탄생시키진 못하더라도, 8성 각성자가 지금의 배 이상은 있어야 해요."

"8성 각성자 몇 명이면 순수하게 이길 수 있을까요?"

"제가 보기엔 힘들어요. 100명은 있어야 될 것 같은데…… 옛날에 마왕 봤을 때도 느꼈고, 이번에 거목 보고도 느꼈어요. 둘 다 너무 세다고요."

"일단, 영혼의 업 쌓은 7성 각성자는 모두 8성 우화에 도전시키는 것으로 하죠."

"잠깐만. 강제로 그럴 수는 없어. 그럼 역효과만 나."

"자원 받아야죠."

"그래도……"

"누나, 어쩔 수 없어. 언제까지 끼고 살 수는 없잖아."

김애경이 묘하게 안절부절못한다. 김현은 김애경의 손을 잡아주었다. 김애경이 이렇게 걱정하는 이유가 있었으니까.

하은이 때문이다. 하은이는 특별 과제, 졸업 과제라는 명목으로 온갖 의뢰를 수행했다. 그러면서 영혼의 업을 쌓았다. 지금은 충분히 8성 우화에 도전해도 될 정도.

다른 7성 각성자 중 도전해도 될 각성자가 다 합치면 50명을 넘어간다. 이중 절반만 성공해도 25명. 목표치는 충분히 달성한다.

"시, 실패하면 어떻게 해?"

"하은이를 믿어. 하은이라면 반드시 성공할 거야."

"박준 씨도 실패했잖아! 하은이라고 꼭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어!"

김현이 하은이의 담임 선생님으로 초빙했던 박준.

3년 전에 8성 우화에 도전했다가 혼흔만 남기고 말았다. 그 혼흔은 이후 다른 유명계 각성자의 우화에 활용되었다. 유족들이 비탄에 잠겨 혼흔이라도 넘겨달라고 울부짖었지만, 김현은 욕을 먹으면서도 그 요구를 묵살 했다.

"하지만 누나. 이건 하은이가 결정해야 할 문제야."

"하은이는 아직 어려!"

"7성 각성자가 뭐가 어리다고 그래? 누나. 하은이는 생물학적으로 어릴지는 몰라도 정신적으로는 이미 성인이라고 봐야 해. 누나가 하은이를 설득한다면 나도 말리지는 않겠지만, 하은이가 결정을 내리면 누나도 존중해 줘."

"너…… 삼촌이면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김애경이 비난하는 듯한 눈으로 본다. 이세희도 마찬가지. 멀뚱멀뚱 보고 있던 에일리가 입을 삐죽였다.

"아이를 너무 과보호하는 거 아니에요? 이건 Mr. 김 말이 맞다고 봐요. 벌써 15살이니까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두라고요."

"그러다 죽으면요?"

"에이, 우화하다 죽는 게 저런 거목에 잡아먹히는 것보다는 낫겠는데요? 고통스러운 건 똑같아도, 최소한 죽어서도 노예로 농락당하지는 않겠죠."

거목계의 외계종이 하급밖에 없는 이유.

멸망한 세계와 파견 나온 유령들을 잡아먹은 후 그 잔해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지구가 거목계에게 점령당하면 기존의 각성자들을 재활용하여 외계종을 만들 것이 뻔했다.

김애경이 일순 말이 막혀 씩씩거렸다. 김현은 그걸 보며 머리를 흔들었다.

'하여간에……'

딸 얘기만 나오면 이성을 잃는 건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그러니 어머니겠지.

김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손뼉을 한 차례 짝하고 쳤다.

"조만간 고위 각성자들 대상으로 전원 승급 절차에 들어가겠습니다. 성혼은 많이 모아뒀으니까, 비용은 저희가 100% 대도록 하죠."

"하급 각성자들은요?"

"거기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일단 어부지리를 노릴 최소한의 전력을 확보하는 것부터 집중하죠. 우리 차원계 밖에서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니 7성과 8성 각성자에 주력하겠습니다."

어마어마한 성혼과 외계종의 육신, 진귀한 재료가 필요하다.

그 정도는 감당할 수 있었다. 지난 10년 동안 용사 도시에 쌓인 성혼이 엄청나게 많으니까. 또 김현 자신이 파멸신이니 우주수를 쓰러뜨리는 것은 어렵지 않아 보인다. 이쪽은 지구 각성자와 파멸신 연합이라면, 저쪽은 우주수 혼자 다 해야 하니까.

문제는 그 이후.

'우주수를 잡아먹으면 완전히 끝인데……'

그 즉시 마왕으로서의 힘도, 신격으로서의 불완전함도 극에 달한다. 지금은 깊은 명상을 통해 자신을 제어하고 있으나, 그때도 이게 가능하다고 자신할 수가 없다.

'내가 주연을 해서는 안 돼.'

결론은 그것.

인류 각성자가 끝장을 봐야 한다. 그래서 우주수가 뿌리는 권능을, 업을 다 흡수해야 한다. 이후 기세를 몰아 파멸신까지 끝장내면 해피 엔딩.

참 어려운 조건이었다. 그러나 불가능한 조건도 아니다. 김현이 철저하게 돕기만 한다면.

"삼촌!"

소식을 들은 걸까?

하은이가 잔뜩 흥분한 얼굴을 하고 뛰어 들어왔다.

"19번째 세계가 발견됐다면서요!"

"그래, 맞아."

"그게 그거죠?"

"맞아, 맞아."

"우와!"

하은이가 폴짝폴짝 뜀뛰기를 했다. 흥분하긴 흥분했나 보다. 같이 들어온 하은이 동료들은 그저 쓰게 웃고만 있었다.

반면 피터는 얼굴이 영 텁텁했다. 팔을 껴안은 티파니가 활짝 웃고 있어도 그랬다.

"저기, 사령관님."

"응?"

"조만간 대규모 우화를 시행한다고 들었습니다. 그게 사실입니까?"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더니.

굳이 비밀로 할 것도 없어 연구원들이 듣건 말건 즉석 회의를 진행했더니 이 모양이다.

김현은 순순히 긍정을 표시했다.

"맞아. 전 지구의 7성 각성자 중 업을 충분히 쌓은 51명 전원에게 우화를 제안할 거야. 6성 각성자도 마찬가지고."

"너무 급박한 거 아닐까요? 아직 시간은 많이 있는데……"

"승급시킨다는 소리는 들었으면서, 왜 승급시키는 것인지는 모르는 거냐?"

"아, 그야……"

피터가 머리를 긁적였다.

듣고 있던 티파니가 눈을 반짝였다.

"정말이에요? 정말 우화 신청받나요?"

"티파니, 잠깐! 이건 위험해! 7성까지 승급하던 거랑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난다고!"

"그럼 이대로 7성에서 주저앉게? 난 그럴 생각 없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8성 도전할 거니까 그렇게 알아."

티파니가 피터의 팔을 팽개치고 앞으로 나왔다.

질세라 하은이가 김현에게 매달린다.

"삼촌! 내가 먼저지? 그렇지?"

"글쎄다. 누나랑 먼저 상의해 보지 그러니?"

"엄마는 계속 안 된다고 하잖아! 왜 안 돼? 내가 7성 각성자 중에서는 가장 센데?"

김애경의 얼굴이 흐려졌다. 사실 그래서 반대하는 말을 내기가 궁색했다. 하은이는 지구의 어떤 7성 각성자보다 강했고, 혼자서도 너끈히 두셋을 상대하곤 했으니까.

"조용히 얘기 좀 하자."

"좋아!"

"티파니, 잠깐 시간 내줄래?"

"그렇게 해."

"캐티, 캐시. 이리 와."

사브리나도 캐티와 캐시를 챙겼다. 언뜻 김현을 돌아보는 눈에 신뢰가 가득한 것이, 두 자매는 8성 우화에 무난히 도전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홀로 남은 소년, 벤이 쓰게 웃었다.

"누군가 챙겨주는 사람이 있는 건 참 좋은 일이네요."

외계종이 판치던 10여 년 전 수없이 많은 고아가 생겼다.

벤도 그들 중 하나.

김현은 말없이 벤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몇 시간 후 대규모 승급을 시행하겠다는 발표를 했다. 그것도 모든 재료를 용사 도시에서 부담하겠다고.

자연히 신청자들이 밀려들었다.

7성 각성자 수십 명, 6성 각성자 수백 명……

많은 갑론을박이 있었다.

주저와 도전, 눈물 어린 호소가 있었다.

그리고 며칠 후.

세계 각지에서 각성자들이 밀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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