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
거목계 -2-
많은 이들이 웃고 떠들고 있으나 그렇지 않은 자들도 있다.
8성 우화에 도전하는 사람들.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다.
그럴 수밖에. 지난 10년, 축적된 경험으로도 8성 우화 실패 시 소멸이라는 위험은 극복하지 못했으니까.
정확히 34명.
나머지는 도전을 포기했다. 김현은 34명의 얼굴을 일일이 하나씩 확인했다.
하은이가 상쾌한 얼굴로 손을 흔든다. 김애경은 발을 동동 구르지만 마냥 좋다는 기색이다. 실패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모습에 되레 믿음이 갔다.
그리고 그 옆의 피터.
굉장히 긴장한 모습이다. 눈도 손도 떨고 있었다. 억지로 의연한 척을 하지만 티파니도 걱정스러워 피터를 안아줄 지경.
[괜찮겠어?]
피터가 억지로 웃었다.
[괘, 괜찮아요.]
[무리하지는 마. 우화는 굉장히 힘들어. 자신 없으면 차라리 도전하지 않는 게 나을 수도 있어.]
[티파니가 도전하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죠.]
티파니가 저렇게 좋을까.
피터가 땀을 뻘뻘 흘리며 티파니의 손을 잡는다. 티파니가 피터를 꽉 안아주었다. 피터의 얼굴에 행복한 웃음이 떠오르는 걸, 김현은 아슬아슬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사랑의 힘으로 우화에 성공하면 좋겠는데…… 두고 봐야 할 일이다.
"모두 준비는 됐습니까?"
"예! 준비됐습니다!"
"네! 사령관님!"
"8성 우화는 지독히 힘들고 고통스럽습니다. 6성 탈각 때와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실패하면 소멸합니다. 그래도 좋습니까? 모두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물론이죠!"
"하겠습니다!"
쩌렁쩌렁한 외침이 연구 시설을 뒤흔들었다.
김현은 그들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결연한 기색이 어려 있다. 그것은 사명감이기도 했고 욕망이기도 했다.
여기 있는 이들은 초기에 6성, 7성을 밟았던 이들이다. 그런 만큼 뒤처지는 것을 못 견뎠다. 따라서 이번에도 8성에 도전하는 것이다.
"시작하지요."
몸을 돌렸다.
위이잉.
연구 시설이 통째로 지하로 강하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수십 미터를 내려간 후, 빈 공간의 벽에서 커다란 캡슐 같은 것들이 툭툭 튀어 나온다.
캡슐마다 이름이 적혀 있었다. 각성자들이 눈치껏 그 안으로 들어간다. 모두 6성 각성자였다.
"승급에 시도하는 분들 모두 저희가 실시간으로 주시하겠습니다. 최대한 도와드리죠."
7성은 그렇게 해서 최악의 상황만큼은 피할 수 있다. 8성은 그게 불가능하지만.
7성에 도전할 각성자들이 모두 들어가고, 8성에 도전할 각성자들만 남았다. 김현은 그들을 연구 시설 중심으로 불러모았다.
이번에는 연구 시설 중심만 따로 떨어져 나와 강하했다. 그리하여 용사 도시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간다. 해저 정도가 아니라 땅속 깊은 곳까지.
"무덤 같네요."
벤이 농담을 했다.
분위기 파악 못 하기는.
싸늘한 시선이 쏟아지자 머쓱하게 웃는다.
"윽, 죄송합니다."
가만히 있다가는 억울한 오해를 받을 상황. 김현은 간단히 설명을 해주었다.
"8성 우화에는 막대한 힘이 필요합니다. 예전에 8성 우화가 끝나자 인공 지구가 잠깐 정전된 적도 있었죠. 그래서 별도의 공급 체계를 만든 겁니다. 용사 도시가 정전되면 큰일이니까."
"아……"
김애경과 이세희를 비롯한 동료들의 얼굴이 잠깐 흐려진다. 김현이 말한 정전 사태에서 서경태의 기억을 떠올렸기 때문.
피터가 몸을 떠는 것이 보인다. 티파니가 피터의 엉덩이를 세게 후려쳤다. 그제야 눈이 또렷해졌다.
쿠우웅.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
"우와!"
하은이가 유리창을 통해 밖을 보고는 탄성을 질렀다.
별 무리, 은하의 집합체다.
인공 별이 무수하게 떠 있다. 용사 도시보다 더 큰 공동에 반짝이는 별이 가득하다.
겉보기에는 예쁘기만 하지만, 실은 저것 하나하나가 인공 태양에 준하는 힘을 품고 있다. 10년 동안 발전한 것은 지구의 각성자 전력만이 아니었다는 뜻.
"엄청나네. 이런 걸 만들고 있었어?"
김애경도 이건 처음 본다.
"이거 한 번에 쏴 보내면 9성 신격한테도 통하지 않을까요?"
이건 에일리의 말.
김현은 단호히 머리를 저었다.
"안 됩니다. 택도 없어요."
본인이 9성이니 잘 안다. 아무리 많은 힘을 퍼부어도 생채기 하나 못 낸다는 사실을.
김현은 허공에 손을 뻗어 별 무리를 조작했다. 별 무리가 꾸물거리며 곳곳에서 하나로 뭉쳤다. 그리하여 둥그런 구를 형성하는데, 그 수가 정확히 34개였다.
"삼촌! 조금 이따 봐!"
"하은아! 잠깐만!"
김애경이 하은이를 불렀으나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가뿐히 무시하고는 근처 구 하나로 들어가 버린다. 이세희가 그걸 보고는 머리를 저었다.
"사춘기는 사춘기네."
"예전엔 안 그랬는데……"
"누나가 얼굴을 안 보여줘서 그래."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그래도 하은이는 걱정 안 된다. 실패할 거란 느낌이 안 들어."
"난 불안한데……"
"저도 하은이는 성공할 것 같아요."
9성 신격의 직감이다. 하은이의 성공은 의심하지 않아도 좋다.
정말로 불안한 것은 피터.
아무래도 실패할 것 같은데……
"티파니. 성공해서 보자!"
마지막으로 말리려 할 때 피터가 몸을 날렸다. 하은이의 뒤를 이어 빛의 구 안으로 쏙 들어갔다.
나머지 인원들도 마찬가지. 다이빙하는 수영 선수처럼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자리를 잡고 빛에 휩싸이는 것을, 김현은 무력하게 바라보았다.
이것으로 루비콘강을 건넜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멀리서 그들을 응원하는 것이 전부.
"잘 돼야 하는데……"
"잘 되겠지."
김애경을 비롯한 동료들은 금방 돌아갔다. 다들 할 일이 많았으니까. 김현과 메리만 남아 각성자들의 상태를 주시했다.
하루 뒤.
빛의 구 하나가 찬란한 섬광을 뿜었다.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선 김현.
섬광이 갈라지며 눈부시게 빛나는 인영 하나가 튀어 나온다.
키 5미터, 강인한 듯 호리호리한 체구.
전신이 반투명했다. 황금빛 영체가 강렬한 인상을 자아냈다. 펼쳐진 날개와 머리에 돋은 뿔이 파충류를 연상시킨다.
거인과 용, 유령의 융합체.
그 존재가 눈을 뜨고 김현을 보았다. 자연스럽게 김현의 입가에도, 그 존재의 입가에도 부드러운 미소가 맺힌다.
[삼촌!]
"오냐. 축하한다."
[고마워!]
존재, 하은이는 평소 모습으로 크기를 줄였다. 아직 힘을 완전히 제어할 수는 없는지 피부가 황금색이고, 몸 전체가 어릿어릿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마에 앙증맞은 뿔이 돋아 있는 것은 덤.
[간지럽다.]
하은이가 자기 머리를 벅벅 긁었다. 막 영체가 새로 태어난 까닭에 겪는 사소한 문제점이다.
김현은 하은이를 살펴보며 눈을 빛냈다.
[명룡신왕(8★, 혼합)]
명왕, 용왕, 신왕. 하은이가 가지고 있던 세 개의 성혼.
그것들이 하나의 성혼으로 통합되었다. 하은이는 자신도 모르게 9성으로 가는 길을 찾은 것이다.
김현도 수만 년의 하루를 반복한 다음에야 이룬 것이 별개 성혼의 융합 아닌가. 저 성혼을 통해 자신만의 정체성을 찾고, 세계를 창조할 정도의 거력을 품는다면 바로 9성 신격에 도달한다.
"축하한다. 역시 우리 하은이야."
[헤헤헤. 나 잘했지?]
"그럼!"
"주 양, 축하드려요. 주 양이야말로 인류의 희망이에요."
[에이, 인류의 희망은 우리 삼촌이죠.]
하은이가 스스럼없이 김현의 팔짱을 끼었다. 막 각성하여 뜨거운 열기가 침습했으나 김현은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용암에 빠져도 끄떡도 안 할 위인이니 이 정도는 가볍다.
[다른 사람들은?]
"아직 멀었어. 하루 밖에 안 지났다."
[아 진짜?]
"그래. 많이 피곤하지? 올라가서 조금 쉬고 있어. 우주 나가서 힘도 좀 써보고."
[에헤헤, 역시 삼촌이 내 마음을 안다니까. 나 가볼게!]
막 승급했으니 조금은 들떴을 것이다. 피곤하기도 피곤하겠으나 한시바삐 자기 힘을 써보고 싶겠지. 하은이가 빛으로 변하여 통로고 뭐고 다 무시하며 하늘을 향해 쏘아졌다.
용사 도시 전체가 들썩이더니 거대한 힘 하나가 순간 이동하여 오는 것이 느껴진다. 김애경이었다. 멀리서 협회장 일에만 골몰하는 것 같았어도 실은 하은이의 동태를 주시했던 것.
엄마니까.
김현은 흐뭇한 마음이 되어 별들을 주시했다.
다시 하루 뒤.
"아!"
김현은 안타까운 탄성을 내뱉었다.
영롱하게 빛나던 별 중 하나가 빛을 잃었다. 하필이면 김현이 잘 아는 사람이 들어갔던 별이었다.
피터가 골랐던 별. 김현의 예감이 제대로 들어맞은 것이다.
김현은 욱신거리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멍청한 녀석……"
메리가 그 마음을 안다는 듯 묵묵히 서 있었다.
불행은 하나만 오지 않는 법.
불 꺼진 별 바로 옆의 별 또한 빛이 꺼지고 말았다. 8성 우화를 겁내던 피터가 도전하게 만든 원동력, 티파니를 담은 별이었다. 그것을 보니 가슴이 더욱 쓰라렸다.
원 역사에서도 둘은 사랑의 결실을 보지 못했다. 그때는 티파니가 먼저 죽었고, 피터는 복수심에 불타 뉴욕으로 진군하던 외계종 군단을 막아서 처절한 공방전을 벌이게 된다.
이건 원 역사보다 더 안쓰럽다. 원 역사에서는 육체만 죽음을 맞이했지만, 이번엔 영혼마저 소멸했으니.
"하아."
나오느니 한숨뿐.
대기하고 있던 이세희와 에일리가 소식을 듣고 들어왔다. 애통한 눈으로 어둠에 잠긴 별을 바라본다. 하지만 동료들이 어떤 감정을 느끼든, 이미 소멸한 사람이 돌아올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억지로라도 뜯어말릴걸……"
이세희가 늦은 눈물을 흘린다.
에일리가 바닥을 후려쳤다.
"멍청한 새끼, 너드 새끼, 병신 새끼……"
함께 한 시간을 따지면 1년이 조금 넘는다. 11년간 따로 행동했으니 절대적인 시간만 따지면 일행으로 활동한 기간이 짧았으나, 당시의 급박 했던 상황 때문에 밀도가 굉장히 높았다.
바쁘기 그지없는 김애경도 날아와 잠깐 추모를 했을 정도. 하은이도 한참을 울었다. 어릴 때의 기억도 기억이지만, 최근 피터와 함께 다니며 정이 많이 들었으니까.
별이 지는 만큼 빛이 터진다. 빛이 밝은 만큼 그림자도 짙어졌다. 많은 이들이 죽고 많은 이들이 살아남았다.
총 18명.
절반보다 조금 많은 숫자였다.
"캐시, 엉엉엉!"
하은이의 친구 하나도 돌아오지 못했다. 하은이의 친구이면서 사브리나의 막냇동생이었다.
사브리나도 멀찍이 서서 가만히 눈물을 찍어냈다. 난민으로 떠돌던 때부터 사이가 각별했던 자매들이다. 탄탄대로만 있을 것 같다가 소멸했으니 가슴이 아플 수밖에.
'그래도 많이 성공했어.'
옛 동료와 지인의 죽음을 딛고 냉정히 현실을 본다.
이제 지구가 가진 8성 각성자는 33명이다. 7성 각성자도 4백 명을 넘었으니 9성 신격을 제외한 전력으로는 여느 세계에 견주어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여기서 김현은 비정한 결정을 내렸다. 소멸한 16명이 남긴 혼흔을 바로 사용하겠다고 한 것.
"야, 그건 너무 하잖아."
"시간이 없어. 거목계가 다가오고 있다고."
"거점도 설치되지 않았어. 아직 시간 있을 거야."
"거목계는 다른 세계와 달라. 거점을 설치하는 게 아니라, 직접 부딪쳐 올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지. 세계와 세계가 직접 이어져. 인공 지구와 원래 지구를 생각하면 되겠네. 엘페리아의 대륙이 하늘 위에서 거꾸로 나타날 수도 있고, 태평양 한가운데에서 부상할 수도 있어. 확실한 건, 우주선이나 차원문이 아니라 비행기로 이동하게 돼. 그것만은 장담한다, 진짜."
지구와 직접 이어진다?
상상도 못 한 말에 모두 숨을 죽였다.
강경하던 김애경도 뜻을 꺾었다.
"후, 알았어.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내가 뭘 어쩌겠니."
"항상 고마워, 누나."
"말이라도 못하면."
그리하여 며칠 후, 지구에는 새로 6명의 8성 각성자가 생겼다.
영혼의 업을 따져서 가능성이 큰 각성자에게 혼흔을 투여한 결과다. 최초 포기했던 16명이 아닌 다른 이들에게 기회가 돌아갔다. 비정한 선택에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았으나 거기 신경 쓸 시간은 없었다.
김현의 예언이 현실이 되었으니까.
얼마 후.
잠에서 깨어난 사람들은 괴상한 환상을 보기 시작했다.
세상이 녹색으로 변했다. 회색 도시도, 푸른 강도, 파랗던 하늘도 모두 지독하게 진한 녹색이 되어 음산한 향기를 뿌리고 있었다.
그리고 움트는 새싹.
해골을 닮아서 섬뜩하도록 징그러운 것들.
"나 병원에 가 봐야겠어."
"왜?"
"이상한 게 보여."
"나도 그러는데……"
이런 것은 어쨌든 부차적인 문제. 정말 큰일은 서울시에서 벌어졌다.
높이 200킬로미터, 지름 40킬로미터 초거대 나무의 환영이 서울 시민들을 홀리고 있었다.
거룩한듯 사악하고, 기괴한 아름다움을 뽐내는 나무.
우주수, 그리고 거목계.
그것이 지구의 차원계에 겹쳐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