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
거목계 -3-
김현은 눈을 가늘게 떴다.
'역시, 이런 식이구나.'
예측했었다. 지구를 보호하던 차원의 벽이 벌써 몇 년 전에 벗겨진 이상, 세계 자체를 겹치는 형식으로 공격해 올 가능성이 컸으니까. 다만 주요 지점이 어디인지 몰랐지.
이세희가 인공위성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김현을 돌아보았다.
"김현 님, 저기 신촌 같은데요?"
"뭐가요?"
"우주수 중심이요."
우주수의 환영을 자세히 들여다본 후 김현도 그 말에 동의했다. 서울시에 강림한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신촌을 중심으로 하여 마포구, 서대문구, 고양시 일산 등에 걸쳐 있었다.
"그냥 보고만 있을 거야?"
"그럴 리가. 일단 사람들부터 대피시키자."
"저 사람들 왜 그냥 가만히 있지? 정신 공격이라도 당한 걸까?"
"9성 신격이 그래. 일반인…… 아니, 하급 각성자는 버틸 수가 없어. 보기만 해도 공황 상태에 빠지거나 홀리게 돼."
이제 일반인은 세계에 없다. 아무리 허약한 이라도 1성 성혼 정도는 각성하고 있었다.
김현은 우주 한편을 보며 짧게 갈등했다.
파멸신을 출정시켜?
멸신의 거목이 지구로 직접 강림한 이상 파멸신 없이는 상대가 불가능하다. 김현은 간단히 준비 운동만 시키기로 했다.
쿠으으음.
하늘 너머에서 울리는 광량한 포효.
저절로 머리카락이 쭈뼛 선다. 지하 깊은 곳, 김현이 있는 용사 도시의 상황실까지 그 포효가 들렸다. 옆에 있던 8성 각성자들도 놀라 고개를 쳐들 정도.
상황실의 홀로그램이 바쁘게 바뀌었다. 그러다가 달 옆에 뚫린 거대한 검은 구멍에 집중한다.
"저길 보세요!"
구멍 너머에서 한 존재가 이쪽을 보고 있다.
칠흑 같은 몸, 징그러운 뿔이 돋아 있다. 기계 갑옷을 전신에 걸쳤으며 탄력 넘치는 근육이 군데군데 노출되었다.
마왕.
인류가 100년을 기약하고 힘을 기르게 만든 원흉.
마왕은 거대한 검을 들었다. 검에서 타오르는 푸른 불꽃이 지구는 물론 태양까지 사를 듯하다. 그 시선이 서울시를 향한다는 사실을, 여기 있는 이들은 물론 마왕을 목격한 이들 모두가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쿠으으으음!
다시 포효.
그때마다 마왕이 커진다. 아니, 지구에 가까워진다.
엎친 데 덮친 격.
사람들이 몸을 떨었다. 거목계가 지구에 겹쳐지는 것도 무서운데, 마왕까지 깨어나 공격해오니 그럴 수밖에 없다.
"빌어먹을, 남의 땅에서 무슨 짓거리야?"
에일리가 분통을 터뜨렸다.
"시간이 없어요. 시민들부터 구합시다. 세계가 완전히 연결되면 저 사람들, 완전히 괴물로 변해 버려요."
"젠장."
"너무 빨랐어……"
대규모 승급 이후, 세계의 모든 7성과 8성 각성자는 여기 모여서 합숙 훈련을 하고 있었다. 피해 가려는 사람도 있었으나 전방위에 걸친 압박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인공 지구를 이용, 가장 가까운 거점인 고양시로 향한다.
고양 시에 도착하자 환영이 더욱 가깝게 다가왔다. 이곳에서도 우주수의 환영이 잘 보였다. 시민들도 비슷해서, 어기적어기적 도망치고 있었다.
"정신 차리세요!"
이세희의 광범위 성혼 세례.
정신 방어든 물리 방어든 강력한 위력을 보이는 성혼이다. 성혼을 뒤집어 쓴 시민들이 당장 깨어났다. 어안이 벙벙하여 주위를 둘러보다가, 저 멀리 떠 있는 우주수를 발견하고는 본능적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인천으로 가세요! 인천으로!"
이제 곧 한반도는 전쟁터가 된다. 우주수와 파멸신이 맞붙기 시작하면 서울시는 가루가 된다고 봐도 좋았다. 그러니 사람들을 배로 실어 나르는 게 나을 것이다.
실제로 김애경의 지시를 받아 전 세계의 각성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중이었다. 성혼과 외계 기술이 합쳐진 신형 공중 부양 선박들이 비행기 뺨치는 속도로 날아왔다. 일단 항구에만 들어오면 단거리 순간 이동을 통해 싣고 빠르게 이탈하겠지.
치유 계열과 정신 계열 각성자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여러 각성자들이 그들을 호위했다. 지금은 시민 대피부터 우선시해야 했으니.
'시간이 없다.'
김현은 우주수가 또렷해지는 속도를 보며 생각했다.
완전히 연결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고작 6시간 남짓. 그 안에 1천만 명을 대피시키기란 굉장히 어려웠다.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자.'
차원에 대한 김현의 지식은 지난 11년 간 더욱 깊이 쌓였다. 그걸 활용한다면 시간을 최대한 늦츨 수 있겠지.
당장 필요한 물건을 요청했다. 고양시 거점을 통해 온갖 보물이 쏟아져나온다. 그걸 가지고 신촌으로 날아간다.
찌이잉.
우주수가 김현을 주목했다. 머리가 아프고, 평형 기관이 침습 받아 세계가 빙글빙글 돌았다.
하지만 이것쯤이야.
김현은 우주수의 정신 공격을 파멸신에게 일부 전가했다. 파멸신이 분노하여 길게 고함을 지른다. 더욱 빠르게 접근하려는 것을 겨우 타일렀다.
[그만 둬. 너도 서울 시민들을 죽이고 싶은 건 아니잖아?]
쿠으으음.
재차 포효가 울리며, 파멸신의 접근 속도가 확연히 느려졌다.
보물들을 띄우고 정신을 집중하는 김현.
흐릿한 아지랑이가 겹겹이 피어오른다. 유리창 쪼개지듯 공간에 금이 그어졌다. 허공에서 뭔가 빛을 반사하더니, 우주수의 환영이 눈에 띄게 옅어진다.
[잔재주를!]
우주수가 분노하여 염파를 쏘아 보내지만 소용없다. 김현은 임시 차원의 벽을 성공적으로 설치했다.
[이 까짓 거!]
거대한 나뭇가지가 허공을 후려친다. 그 바람에 차원의 벽 일부가 깨졌다. 깨진 쪽으로만 우주수의 환영이 조금 전과 비슷하게 짙어졌다.
[으흐흐, 부질 없는 저항이다!]
의기양양한 웃음이 김현의 뇌를 때렸다.
무시.
김현은 무심한 얼굴로 다시 손을 휘저었다. 또 보물들이 허공에 떠오르며 깨져서 차원의 벽을 형성한다.
방망이 깎는 노인이 그럴까?
지금의 김현은 무념무상으로 차원의 벽만 연달아 쌓고 있었다. 그것만이 살 길이라는 듯 고요하면서 단호한 움직임이다. 우주수가 방심한 사이, 차원의 벽이 두 겹이나 새로이 생겨났다.
[깨부숴주마!]
우주수는 부수고, 김현은 만들고.
지금은 어쨌든 김현이 더 능숙했다. 쌓아온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 사이 각성자들이 분주히 움직여 시민들을 구했다.
"이쪽으로 오세요!"
"빨리 빨리!"
"Hurry up!"
인류가 쌓아온 전력이 총 출동했다.
각성자들만이 아니라 공중 항공모함, 대규모 수송선, 단거리 순간이동 장치나 보호막 발생 장치 등등, 그 모든 것들이.
이런 장비들은 9성 신격 앞에서는 무의미하긴 하지만 이럴 때는 효과가 좋았다. 저절로 김현의 입가에 웃음이 깃들었다.
[노옴!]
우주수가 안 되겠는지 나뭇가지 하나를 휘익 휘둘렀다.
저 멀리, 수원 즈음에서 차원의 벽이 되게 찢어졌다. 그리고 거대한 차원문이 열려 괴물들이 쏟아져 나온다.
김현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짙어졌다.
"수원, 요격 시작하세요."
신생 거목계의 치명적인 단점.
고위 외계종이 없다는 것. 4성과 5성 괴물들을 아무리 많이 투여해 봐야 7성 각성자 하나만 출동해도 모조리 도륙이 난다.
아니나 다를까. 멀리 느껴지던 존재감이 희미하게 줄어든다. 예비 전력으로 돌려놨던 6성 각성자들이 대규모 폭격을 퍼부운 까닭이다.
김현은 우주수에게 낮게 속삭였다.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지구에 쳐들어 온 거냐?"
[훗.]
우주수는 짧은 비웃음만 날렸다.
저절로 경각심을 갖게 된다. 어차피 결론은 파멸신과 우주수의 결전에서 날 테니. 지금 태도를 보면 우주수는 파멸신을 이길 자신이 있는 것 같다.
김현과 우주수의 쳇바퀴 돌아가는 전투가 이어졌다. 그러자 메리가 다가와 손을 거들었다.
"저도 도울게요!"
"저도!"
"합세합시다!"
인공 차원의 벽 구축은 이제 김현의 전유물이 아니다. 많은 각성자들이 끼어들었다. 김현처럼 효율적이진 못해도 상당한 도움이 되고 있었다.
[벌레 같은 것들……]
우주수가 이를 갈며 나뭇가지를 더욱 강하게 휘두른다.
역시 9성 신격은 9성 신격다웠다. 차원의 벽을 부수는 힘이 더욱 강해진다. 속도도 빨라졌다. 처음에는 김현 혼자서도 차원의 벽이 파괴되는 것보다 더 빨리 차원의 벽을 설치했는데, 이젠 수십 명의 각성자가 합류했음에도 우주수가 거의 따라오고 있었다.
심지어 줄기 전체를 기대고 소화시키기까지 시작한다. 폭식 속성의 신격이라 속도가 엄청나게 빨랐다.
'이대로는 안 돼.'
그렇다면 역습을 통해 활로를 찾아야겠지.
쿠오오오!
파멸신의 포효가 바로 지척에서 울렸다.
"으윽."
메리가 코피를 흘리며 주저앉았다. 7성 각성자인 메리로서는 파멸신의 존재감을 견디기 어려웠던 것이다.
김현은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7성 각성자들은 후퇴하세요! 8성만 남아서 차원의 벽 만듭니다!"
"하지만 사령관님!"
"걱정마시고, 얼른! 마왕은 우릴 신경쓰지 않아요!"
그 외침을 증거하듯 파멸신이 거검을 휘두른다.
푸르게 타오르는 거검.
그것이 대기를 불태우며 내리꽂혔다. 까마득히 높은 곳에 위치한 우주수의 끝머리를 제대로 갈라버린 것이다.
[크어어!]
고통에 찬 신음.
이 순간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번쩍!
한 줄기 번개가 전 세계 하늘을 종횡으로 휘저은 것이다.
그와 함께 투명한 막 같은 게 언뜻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번개는 바로 그 막 위를 흐른 거였다.
정확히 말하면 차원의 경계를.
아주 짧은 시간 마주한 거목계와 파멸의 신좌.
이때, 파멸의 신좌에 박제되어 있던 존재들이 몸을 일으켰다.
악마, 기계, 곤충……
[으흐흐흐!]
[얼마 만에 맛보는 자유냐!]
[세계여, 기다려라!]
지구에서 보기에는 짧은 번쩍임이었으나 차원이 겹쳐진 거목계와 파멸의 신좌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무수히 많은 병력이 거목계로 건너갔다. 제멋대로 사방을 불사르고 분탕질을 치기 시작한다. 어떤 곤충은 거목의 껍질을 베고 그 안의 속살을 파먹었다.
[빌어먹을 것들이!]
우주수가 몸을 길게 진동시켰다. 그 바람에 대부분의 병력이 가루가 되어 버린다. 우주수가 그걸 빨아들여 포식했으나, 안타깝게도 완전한 죽음을 선사할 수는 없었다.
파멸의 신좌에 존재가 묶인 까닭에 강제로 되살아난 것. 놈들은 비탄에 잠겨 슬피 울면서도 파멸신의 명령에 따라 또 거목계로 달려갔다.
[귀찮은 것들!]
그렇게 우주수가 신좌의 군대와 드잡이질 벌이는 사이, 김현은 인공위성의 시야를 빌려 한반도의 상황을 확인했다.
벌써 절반 이상 대피했다. 지금도 각성자들이 분주하게 오가며 사람들을 대피시키는 중이다. 아직은 시간이 더 필요했다.
[중국과 일본도 해안가 사람들은 대피하라고 하세요. 한반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어어, 잠깐만. 설마 우리나라가 없어지는 거야?]
[그럴지도 모르지.]
신격 둘이 맞붙는데 멀쩡하면 그게 더 이상하다. 김애경이 내쉬는 한숨 소리가 바로 귀 옆으로 다가왔다.
대한민국은 물론 북한의 모든 사람이 다 대피했을 때, 우주수가 크게 나뭇가지를 휘둘렀다.
와장창!
마지막 차원의 벽이 깨지는 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우주수가 으스스한 속삭임을 보내온다.
[후후, 이제 다 끝났다.]
천만에 말씀.
이제부터 시작이다.
"충격에 대비하시고, 수호석 발동하세요!"
현재 이 자리에 남은 것은 8성 각성자 39명과 7성 각성자 315명. 인류의 모든 힘을 쥐어짰다고 보면 되겠다.
팟! 팟!
곳곳에서 빛이 터졌다.
공들여 제작한 수호석을 발동하는 것. 영롱한 빛이 각성자들을 감쌌다. 이제 9성 신격들이 발하는 정신파에서 어느 정도는 자유로워질 것이다. 받는 피해는 경감시켜주는 것도 덤.
완전히 녹색으로 변한 세계.
제 모습을 드러낸 우주수가 우뚝 서 있다. 줄기에서 사람 눈이 무수히 떠오르더니 각성자들을 단번에 훑는다.
[재롱은 끝났느냐? 그럼 끝내주마.]
우주수의 표면이 달아오른다.
녹색으로, 더 녹색으로.
거기서 느껴지는 막대한 힘에 머리가 아찔해진다. 각성자들이 동요하여 방어막을 치려는 걸 손을 들어 제지했다.
"우주수, 너 하나 잊어버린 게 있는 것 같은데?"
[뭘 말이냐?]
"네 머리 위를 봐."
파멸신.
그것이 지척에 있었다.
우주수는 코웃음을 치고는 방어막을 더욱 강하게 전개했다. 인간 각성자들을 처리할 짧은 시간 정도는 막아내겠다는 듯이.
불가능했다.
파멸신의 뒤에서 파멸의 신좌가 그 끔찍한 세계를 여과 없이 공개했으니까.
악어 입 벌리듯 크게 확대되는 파멸의 신좌.
우주수를 집어삼켰다.
354명의 각성자와 서울시도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