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헌터사-195화 (195/200)

# 195

마왕 대전 -1-

어두운 세상.

차갑다.

스산한 공기가 꾸덕꾸덕 감돌고 있었다.

전면에는 우주수. 하늘이 아니라 우주에 닿을 듯한 거목이 있어 각성자들을 내려다본다.

뒤라고 다를까. 거대한 악마가 흉악한 옥좌에 앉아 있었다. 눈에서 빛나는 청광에 영혼이 비명을 질렀다.

수호석의 보호가 아니었다면 다들 이미 두 마왕의 존재감에 짓눌려 정신줄을 놓았겠지.

"마왕과 우주수……"

전의를 불태우는 사람도 있었다.

중무장한 하은이. 묘령의 미녀로 성장한 녀석이 둘을 번갈아 보며 주먹을 꾹 쥔다.

[후흐흐.]

[으흐흐흑.]

사방에서 들리는 울음소리.

박제들이 내지르는 울음이었다. 생전의 모습 그대로 굳은 놈들의 형상은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주위를 가득 채운 놈들 때문에, 각성자들은 움직이기조차 힘들었다.

위이잉……

어디선가 울리는, 모터 돌아가는 소리.

옥좌에 앉아 있던 마왕이 천천히 일어나고 있었다. 거검을 집어들며 우주수를 노려본다. 우주수가 장엄한 괴성을 내뱉었다.

"으앗!"

"조심해!"

8성이면 반신의 경지라고 하나 9성과는 이리도 큰 차이가 있었다. 단지 듣기만 한 것으로 청각 중추에 충격이 오고, 평형감각이 깨져 어지러워지는데 기실 이것은 공격도 뭣도 아니었다.

[드디어 대면하는구나. 진실한 본신이어!]

이렇게 몇 마디 한 것이 각성자들에게는 웅장한 외침처럼 들린 것이다.

파멸신도 고요한 울음을 토했다.

[감히 내 영역을 공격하다니, 각오는 됐겠지?]

이 또한 각성자들에게는 재앙. 무형의 음파가 중첩되며 그들을 폭격했다. 아래쪽에서는 방어 결계를 친다, 혼력 방어를 시행한다, 등등 난리가 났다.

크게 발을 내딛는 파멸신.

꾸웅!

대지가 출렁인다. 쩍쩍 금이 가고 콘크리트 조각이 솟구쳤다. 흙먼지가 날리는 통에 쿨룩쿨룩 기침이 터지지만 파멸신과 우주수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이들에게는 발밑에서 벌어진 개미들의 소동에 불과했으니까.

"이것이 9성 신격……"

전율하는 각성자들.

비로소 자신들이 목표로 했던 자가 얼마나 강력한 자인지 알게 된 까닭이다.

그 사이, 최초의 공격이 이루어졌다.

거검을 크게 횡으로 긋는 파멸신.

세계가 파멸한다.

대기가, 공간이 주욱 찢어지고 있었다. 찢어진 자리를 통해 언뜻 공허가 엿보인다. 무시무시한 폭풍이 휘몰아치며 지상의 고층 건물을 모조리 무너뜨렸다.

붕괴하는 건물. 비처럼 내리는 콘크리트 조각. 달아오르는 열 폭풍과 도시에 숨어 있던 작은 동물들의 비명.

우주수도 나뭇가지를 대어 막는다. 나뭇가지가 방패처럼 변형된다. 워낙에 두툼하긴 했으나, 타격 직전 거검에서 선명한 푸른 불꽃이 뿜어졌다.

[크학!]

날카로운 비명.

가공할 음파가 작은 세계를 덮쳤다. 조금 전 풍압과는 상대도 안 되는 압력이다. 그나마 형태를 보존했던 건물들이 모조리 터져 나갔다. 서울시는 그간의 영화를 잃고 완전히 폐허가 되어 버렸다.

[이놈, 이노옴!]

우주수가 노호하며 전신에서 가시를 뿌린다. 곰팡이도 뿌려댄다. 자욱한 녹색 안개와 가시가 파멸신의 전신을 두드렸다.

효과는 없었다. 파멸신이 갑옷처럼 두른 푸른 불꽃에 다 불타버렸으니까. 덩치는 파멸신이 작을지 몰라도 전투에는 더 특화된 것처럼 보였다.

[먹어주마!]

크게 도약하여 거검을 휘두른다.

거검이 일순 빛을 뿌렸다. 빛나는 칼날이 세계 끝까지 길어졌다. 그 상태에서, 거검이 우주수를 일도양단했다.

일순 둘로 갈라져 버린 우주수.

[크으……]

옅은 신음과 함께 우주수가 수복된다.

쪼개진 것은 어디까지나 잠깐. 그래도 피해가 있을 터였다. 파멸신의 눈이 흉악하게 빛났다.

[크흐흐.]

기괴한 웃음을 터뜨리며 우주수를 난자한다.

어마어마한 열이 대기를 들끓게 했다. 거대한 나무 파편이 마구 떨어진다. 체액이 뿌려져 지상을 뒤덮었다. 거기서 풍기는 고약한 냄새가 파멸신의 흉성을 자극했다.

[죽어라!]

우주수의 육신은 파멸신에게도 좋은 먹잇감.

파멸신은 이성을 유지하지 못했다. 거검을 우주수에 꽂아 넣고는 마음껏 포식하기 시작했다. 우주수가 파멸신에게 흡수당하며 어릿한 신음을 토한다.

아래쪽의 각성자들은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잘 몰랐다. 규모가 커도 너무 컸다.

그나마 윤곽을 그리는 것은 김현 하나.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본체인 파멸신이 지나치게 흥분한 까닭에 분신인 김현까지 영향을 미치는 듯했다.

'뭔가 이상해.'

겨우 냉정함을 유지하며 생각했다.

우주수와 파멸신은 동격이다. 우주수가 이리 쉽게 당한다는 것이 이상했다. 우주수가 뿌려대는 체액에서 풍기는 달짝지근하면서 시큼한 냄새도 수상했고.

치이익!

체액은 강한 산성이었다. 체액을 덮어쓴 건물 잔해가 그대로 녹아내렸다. 각성자들만 사전에 방어막이다, 혼력 방어다, 쓴 상태였기 때문에 온전했고.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예요!"

하은이가 악을 썼다.

인도의 한 각성자가 이를 악물고 성혼을 발현한다. 푸른 빛 줄기 같은 게 쭈욱 하늘 위로 쏘아졌다. 금세 두 마왕의 접전에 휘말려 사라지고 말았으나, 어느 정도 윤곽은 파악한 것 같았다.

"마왕이 이기기 직전입니다!"

"뭐라고요?"

"마왕이 우주수를 잡아먹고 있어요!"

"이런!"

하은이는 물론 다른 이들의 얼굴이 급해졌다.

에일리가 두 주먹에서 물을 일으키며 김현을 돌아본다.

"사령관! 우주수를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마왕이 더 강해지면 우리에겐 승산이 없어요!"

각성자들이 어떻게든 둘의 평형을 맞춰줘야 한다. 그래야 이길 수 있다.

다들 그렇게 생각했다.

김애경도 리아도 김현을 보고 있었다. 벌써 극대파멸력을 일으키는 중이다. 사브리나도 완전 전투 상태로 변했고, 모두 최대한의 힘을 끌어냈다.

하지만 김현만은 바로 공격하자고 할 수가 없었다.

"기다리세요."

"네?"

"사령관님! 급합니다!"

"대기하세요. 명령입니다. 우주수, 그리 쉽게 당할 놈이 아니에요."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김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우주수가 산산조각나면서 체액이 이 작은 세계 전체를 덮쳤다.

산성, 극산성이다. 단지 화학적으로만 그렇지 않고 개념적으로도 그렇다는 게 문제였다.

폭식.

그 힘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뜻.

부글부글.

체액에 닿은 모든 것이 녹기 시작했다. 지구의 콘크리트 건물이나 나무, 동물 시체만이 아닌 파멸의 신좌 역시 마찬가지였다.

박제가 녹는다. 악마가 소화된다. 기계가 분해된다. 곤충의 DNA가 빨려 들어간다.

[으히힉.]

[우흐흐흐.]

[키긱.]

비탄과 절망이 더욱 넘쳐 흐른다.

이들 또한 어떻게 보면 피해자이며 희생자. 신격들의 다툼에 영혼과 육체는 물론 자아까지 제멋대로 휘둘리며 고문 받는 신세였다.

"이런!"

김현도 이제야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했다.

우주수는 자신의 본체를 미끼로 내걸었다. 파멸신이 자신을 뜯어먹도록 방치했다.

대신 파멸의 신좌를 노렸다.

그것이 정답.

생각해 보니 김현의 본체는 파멸신이 아니다. 파멸신은 신좌의 중추에 불과하다. 진짜 본체는 이 세계, 즉 파멸의 신좌였다. 파멸신이 강해지더라도 파멸의 신좌를 멸신의 거목이 포식한다면 파멸신 또한 멸신의 거목에게 떨어지게 된다.

"빌어먹을."

모르긴 몰라도 지구와 겹쳐졌던 거목계가 지금쯤은 신좌의 외부를 완전히 감쌌을 것이다. 우주수는 소화액이 되어 내부에서 소화하고, 거목계는 외부에서 파멸의 신좌를 소화시키는 것.

김현은 정신 계열 각성자의 도움을 받아 원정대의 정신을 하나로 묶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실을 설명했다.

말로 하면 몇 분은 걸리지만 정신을 직접 연결했으니 0.01초면 충분.

모두 경악하여 눈을 부릅뜬다.

[저게 소화액이라고요?]

[어쩐지……]

[젠장, 그럼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한바탕 혼란과 충격이 원정대의 정신을 휩쓸었다.

김현은 불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둠과 혹한만 있던 이곳에 둘이 격돌하면서 불과 먼지가 생겼다. 투시 계열 각성자들도 꿰뚫어 볼 수는 없지만 김현만큼은 파멸신의 눈을 통해, 박제들의 눈을 통해 얼추 상황을 더듬을 수 있었다.

파멸신은 이성을 잃었다. 우주수를 포식하느라 정신이 없다. 우주수는 비명을 지르면서도 체액을 골고루 뿌리는 데 집중했다. 체액에 의해 세계가 실시간으로 녹고 있다.

'파멸신을 깨워야 해.'

원정대가 할 수 있는 것은 얼마 없다. 결국은 파멸신이 정신을 차려야 한다.

"누나, 테일러 협회장님, 톨가 협회장님."

"말해."

"네?"

"말씀하십시오."

셋 다 8성 각성자이면서 극대파멸력을 다루는 이들.

김현은 손가락을 높이 들어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제가 신호하면 멸망포 쏴서 날려주시기 바랍니다. 정확히 맞춰야 합니다."

"좋아."

"알겠습니다."

"그러지요."

8성 각성자의 극대파멸력을 담은 멸망포다. 멸망포라면 원거리에서도 파멸신에게 유효한 피해를 입힐 수 있었다.

사람으로 치면 바늘로 살짝 찌른 정도에 불과하긴 해도.

김현은 굳이 세 각성자를 자기 주위에 세웠다. 정확히 삼각형. 그리고 그 중심에 들어가서 섰다.

"누나부터 쏴."

"알았어."

김애경이 두 손을 들었다. 손을 겹치는 것과 동시에 투명한 광채가 뿜어진다. 빛은 폭주하듯 타오르다가 기이하게도 일그러졌다. 그러다가 찰흙 빚듯 한 형상을 완성했다.

한 명의 사람. 즉, 똑같이 흉내 낸 모양.

원 역사에서는 등장하지 않았던 공격이다. 이젠 멸망포라고 부르기도 뭐하다. 투명하게 빛나는 김애경이 두 주먹을 쥐고 하늘로 뛰어들었다.

쭈앙!

기이한 음색이 투명한 김애경이 그리는 궤적을 따라 울렸다.

저 하늘 위에서 섬광이 몇 차례 번쩍였다. 다른 이들은 몰랐지만, 김현은 김애경의 공격이 제대로 먹혔다는 것을 깨달았다.

파멸신의 뒤통수를 찌르고 들어간 것.

거기서 멈춘 것이 아니라 안에서 주먹을 마구 내뻗었다. 그때마다 멸망포가 사방으로 터져 나간다. 과거 일직선으로 날아가기만 하던 멸망포를, 김애경 또한 새롭게 가다듬었다고 보면 되겠다.

"다음, 테일러 협회장님."

"마지막, 톨가 협회장님."

김현이 호명할 때마다 대기하던 각성자들이 공격을 날렸다.

멸망포를 넘어, 저마다의 궁극기라고 불러야 할 기술.

투명한 섬광이 파멸신의 뒤통수에 무수히 작렬했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벌레냐는 듯 무시하던 파멸신이지만, 피해가 누적되자 서서히 분노하기 시작했다.

[크아아아!]

짐승과도 같은 괴성이 터진다.

음파 자체에 힘을 담은 외침. 각성자들이 얼굴을 찌푸렸다. 속이 울렁거려 토할 것만 같았다.

동시에 파멸신이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몸은 그대로 두고 머리만.

사람이 아니어서 가능한, 실로 기괴한 장면이었지만 이것을 목격한 이는 김현밖에 없었다. 다른 이들은 너무 멀어서, 혹은 흙구름이 세계를 뒤덮어서 엄습해 오는 정체 모를 공포감에 몸만 떨고 있었다.

파멸신이 원정대를 내려다본다.

분노에 차 거칠게 일렁이는 푸른 안광이 공간을 꿰뚫었다.

원정대의 몸이 경직된다.

세상이 어두운 파도에 점령된 가운데, 산과 같은 거대한 눈동자가 하늘 높이 떠올랐기 때문에.

"어어……"

"으으으."

대가 약한 몇몇 각성자가 앓는 소리를 냈다. 몇 명은 아예 게거품을 물으며 기절해 버렸다.

그러다 파멸신이 원정대의 중심에 있는 자를 주시했다.

하잘 것 없는 공격으로 자신을 도발한 이들 가운데에 있는 자.

낯에 익다.

평범한 후드티와 청바지, 그리고 기계 의수가 눈에 들어왔다.

[너……]

[그래, 나다.]

덤덤히 응답하는 김현.

거칠게 일렁이던 파멸신의 눈이 드디어 평정을 되찾았다. 그러자 비로소 주변 상황이 눈에 들어온다.

세계 전체에 뿌려진 걸쭉하고 진한 녹색의 체액.

그것이 세계를 녹이고 있었다. 다름 아닌 자신의 뿌리이자 모든 것인 파멸의 신좌, 전체를.

[이놈이!]

파멸신은 우주수를 멀리 던져 버렸다. 정신 차리고 보니 쥐고 있던 우주수는 빈 껍데기에 불과했다. 정수라고 부를 것은 이미 파멸의 신좌 전체에 뿌려진 다음이었다.

[어리석인 본신이어.]

조롱 섞인 부름.

[늦구나, 늦었어. 지금부터 시작이다.]

쿠르르륵.

끈적끈적한 체액이 일제히 일어난다. 춤추며 격랑이 되어 사방을 휩쓸기 시작했다.

이것 하나만이었다면 우주수가 그리 자신하지 않았을 것이다.

까드득, 까드득.

세계 전체가 삐걱대며 울기 시작했다. 어금니로 호두껍질을 깨무는 듯한 소리. 다름이 아니라 외부의 거목계가 축소되어 파멸의 신좌를 소화하기 시작하면서 울리는 소음이었다.

이런 식으로 세계가 세계를 잡아먹을 수도 있다니!

김현은 초조함에 파멸신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보았다.

파멸신의 입가, 익숙한 웃음이 맺혀 있음을.

비웃음.

김현 자신이 의기양양 해하는 적들을 상대로 흔히 지어 보이던, 그 싸늘하고도 차가운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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